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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귀비 전
이노우애 야스시 지음, 김유동 옮김 / 시와진실 / 2011년 5월
평점 :
양귀비(楊貴妃.719~756)의 본명은 옥환(玉環)으로, 현종의 열여덟 번째 아들인 수왕(壽王) 이모(李瑁)의 비(妃)였다. 736년 현종은 사랑하던 무 혜비(武惠妃)를 잃고 실의의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아리따운 후궁이 3천 명이나 있었지만 누구 하나 현종의 마음을 끄는 여인이 없었다. 이럴 즈음 현종의 귀를 솔깃하게 하는 것이 있었으니, 자신의 아들인 이모의 부인이 절세 미녀라는 소문이었다. 이 여인이 바로 양귀비였다. 풍만하고 미색이 뛰어난 데다 가무에도 능한 그녀는 과연 현종의 눈에 들 만했다. 문제는 그녀가 자기 아들, 그것도 자신이 그토록 사랑한 무 혜비가 낳은 아들의 비라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사랑에 눈이 먼 56세의 황제에게는 결코 문제가 될 수 없었다.
현종은 양귀비를 후궁으로 삼기 위하여 중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곁에 두었으며, 아들 이모에게는 위씨(韋氏)라는 여인을 비로 삼게 하여 위무했다. 그리고 5년 뒤인 천보(天寶)4년(745년) 61세의 현종은 27세의 옥환을 귀비(貴妃)로 정식 책봉했다. 현종은 오직 양귀비에게만 정신이 팔려 정치에 대해 흥미를 잃고 말았다. 현종은 모든 정무를 간신 이임보(李林甫. ?~752)에게 맡기고, 양귀비와의 유흥에 즐거운 하루하루를 보냈다. 이임보는 음험하고 교활하며 악랄한 자였지만, 아주 너그럽고 선량한 체하며 입에 꿀을 바른 것처럼 감미롭게 말하여 사람들은 그를 좋은 사람으로 여겼다. 그러나 실제로 그는 줄곧 다른 사람들을 음해했으며, 특히 자기에게 잘못한 사람이나 자기 밑으로 들어오지 않는 사람, 자기 보다 재능이 뛰어난 사람을 비방하고 참소(讒訴)하여 멀리 귀양 보내거나 죽이기까지 했다. 그리하여 당시 사람들은 이임보를 “입으로 내뱉은 말은 꿀 같지만, 뱃속에는 칼을 품고 있는 사람”이라고 했다. 외면(外面)으로는 친절한 듯하나, 내심으로는 해칠 생각을 품음을 비유한 '구밀복검(口蜜腹劍)'이란 성어가 여기에서 생겨났다.
궁중의 법도 상 귀비의 지위는 황후 다음이었지만, 양귀비는 사실상 황후 이상의 권세를 떨쳤다. 그리고 그녀의 일족들도 차례차례 고관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양귀비는 원래 고아 출신으로 양씨 가문에 양녀로 들어간 것이었는데, 현종은 양귀비의 환심을 사기 위해 양씨 가문을 특별히 배려했다. 양귀비의 세 언니를 한국부인(韓國夫人), 진국부인(秦國夫人), 괵국부인(虢國夫人)에 봉하고, 그들도 몹시 총애했다. 그녀들은 자유롭게 황궁을 출입했으며, 그들 면전에서는 어느 누구도 마음대로 앉지 못했다. 양귀비의 육촌 오빠 양소(楊釗.?~756)는 품행이 좋지 않았는데도 현종의 신임을 얻어 국충(國忠)이라는 이름까지 하사 받았으며, 승승장구해서 요직이란 요직은 다 거쳤다. 이로써 양씨 집안 세력은 만조백관을 압도했으며, 신분상승을 노리는 사람들은 앞 다투어 양씨 집안에 뇌물을 바치고 아첨을 일삼았으니,양씨네 문 앞이 마치 시장판처럼 북적댔다.
한편 남방 출신인 양귀비는 과일 중에서 특히 여지(荔枝)를 좋아했다. 여지는 잔가시처럼 꺼칠꺼칠한 진홍색 껍질에 아기 주먹만 한 반투명 과육(果肉)이 제법 맛있는 과일인데, 사천산(四川産)의 맛이 특히 뛰어났다. 덜 익은 여지는 제 맛이 안 나고, 익은 것은 쉽게 상하기 때문에 멀리 사천에서 장안까지 제 맛 나는 여지를 수송하기 위해 역마(驛馬)는 쉬지 않고 달려야 했다.
현종은 대외적으로 병사들을 혹사시키면서까지 무공(武功)을 지나치게 중시했고, 변방의 장수를 총애했다. 또한 국비를 소모하면서까지 권위를 과시하려 했는데, 이는 야심만만한 무신, 장군들의 세력을 키우는 결과를 가져왔다. 현종은 정사를 이임보와 양국충에게 위임하고, 상소의 심사, 비평은 환관 고력사(高力士. 684~762)가 결재토록 하는 등 자신은 정무를 등한히 하고 오로지 후궁에서 향연을 즐기며 사치와 방탕을 일삼았다.
이렇게 되자, 개원(開元)24년(736)부터 천보(天寶) 연간에 걸쳐 조정에서는 간신들이 제멋대로 정사를 농락했고, 현종은 양귀비에게 정신이 팔려 당 왕조는 쇠퇴 일로를 치닫고 있었다. 농촌에서는 균전제(均田制)가 무너져 국가의 세입원이 위협받았고, 이에 따라 조정의 재정은 점점 궁핍하게 되엇다. 군사체제의 토대가 되었던 부병제(府兵制)도 무너져 군의 사기와 전투력이 현저히 약화되었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변경에서 군대를 지휘하던 절도사(節度使)들은 강력한 군사력을 장악해 당 왕조를 위협할 만한 세력으로 성장했다.
마침내 천보 14년(755) 안녹산(安祿山.705~757)이 양국충을 토벌한다는 이유를 들어 반란을 일으켰다. 현종은 양귀비가 총애하는 안녹산을 친자식처럼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모반을 일으키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안녹산의 반란을 보고받은 현종은 처음에는 믿으려 하지 않았지만, 잇달아 들어오는 보고에 수긍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황한 현종이 수도 장안을 수비할 병력을 찾았으나, 이미 전투를 할 만한 군사가 전무했다. 한편 아무런 제지를 받지 않은 안녹산군은 진격을 계속해 파죽지세로 낙양을 함락했다.
다급해진 현종은 양귀비와 그 자매, 황족, 측근 신하들을 데리고 피란길에 올랐다. 무장한 천 명의 병사가 이들을 호위해 서남쪽 촉(蜀) 땅으로 향했다. 다음날 장안에서 백여 리 떨어진 마외역(馬嵬驛)에 도착했는데, 굶주림과 피로에 지친 병사들의 불만이 폭발하고 말았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이 재상 양국충 때문이라고 생각한 병사들은 양국충의 목을 베고 현종의 앞길을 막았다. 그리고 소리 높여 현종에게 양귀비를 죽여야 한다고 외쳐댔다. 병사들의 분노가 하늘을 찌르자 현종도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현종은 눈물을 삼키며 양귀비에게 목을 매라고 명했다. 이렇게 해서 양귀비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되었다.
당나라의 태평성대는 두 번 있었다. 한번은 태종의 ‘정관의 치(貞觀之治)’이고, 또 한 번은 현종의 ‘개원의 치(開元之治)‘이다. 개원의 치는 현종이 즉위한 후 현명한 재상들을 써서 내치에 힘쓰고, 변경에 절도사를 설치하여 국위를 펴서, 학예가 발달하고 국력이 부강하고 천하가 태평했던 시절이다. 그러던 현종이 50대가 되자 정무에 싫증을 내기 시작하면서 불행을 자초했으니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