漢詩 99篇 - 우리가 죽기 전에 꼭 읽어야 할
오성수 지음 / 김&정 / 2007년 6월
평점 :
절판


               春望詞 (춘망사 : 봄을 기다리는 노래)

 

                             설도(薛濤. 중당시인. 768~832)

 

風花日將老 (풍화일장로)  꽃잎은 하염없이 바람에 지고

佳期猶渺渺 (가기유묘묘)  만날 날은 아득타 기약이 없네.

不結同心人 (불결동심인)  무어라 맘과 맘은 맺지 못하고

空結同心草 (공결동심초)  한갓되이 풀잎만 맺으랴는고.

 

 *우리가 흔히 부르는 ‘동심초’라는 노래의 제목과 가사는 시인 김억(金億)이 이 시를 우리말로 옮긴 것임.

 

<해 설>

설도는 당대의 유명한 기생이다. 사람들은 이 시나, 지은이는 몰라도, <동심초(同心草)>라는 가곡과 가사는 잘 안다. 시쳇말로 ‘오리지널’은 몰라도 ‘짝퉁’은 아는 셈이다.

 

우리는 흔히 기생(妓生)하면 무조건 요즘의 술집 여자로 생각한다. 그러나 예전의 기생들은 단순히 술시중을 들거나 몸을 파는 헤픈 여자들이 아니었다. 또 이렇게 얘기하면 요즘 술집 여자들이 들고일어날지도 모르겠다. 하기야 예전의 기생들 가운데서도 수준이 떨어지는 기생도 있고, 요즘 술집 여자들 가운데서도 그럴듯한 문화·예술 얘기를 나눌 수 있는 여자들도 있을 것이니, 시공을 초월해서 다 사람 나름인 셈이다.

 

각설하고, 설도 얘기로 돌아가자. 당대(唐代) 기생의 경우 명기(名妓)가 되려면 가무음곡(歌舞音曲)은 물론 시를 짓는 소양도 갖춰야 했다. 지위와 교양이 있는 남자들은 말 그대로 재색(才色)을 겸비한 명기들과 품위 있는 대화를 나누고, 서로 시를 지어 화답하는 데에서 지적인 만족감과 문화적 우월감을 느끼는 것이 보통이었다. 이런 조건을 가진 당대 기생 시인들 가운데서도 설도는 특히 뛰어난 존재였다. 그녀는 아버지가 세상을 뜬 후 생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기생이 되었다고 한다.

 

설도의 시적 재능이 꽃을 피워 성도의 명기로 알려진 것은 정원(貞元) 연간(785~805) 초기에 위고(韋皐)가 서천 절도사로 부임한 뒤부터였다. 이때 설도는 스무 살이 될까 말까 한 나이였고, 위고는 이미 마흔 줄에 들어서 있었다. 위고는 설도의 재능을 높이 평가하여 격려와 성원을 아끼지 않았다. 후원자 위고의 강력한 뒷받침으로 기생 시인 설도의 명성은 성도 일대만이 아니라 곧 수도 장안에까지 알려졌다. 이것은 결코 허명(虛名)이 아니어서, 시인으로서 설도의 성장은 눈부실 정도였다. 그녀의 장기는 4행시인 ‘절구(絶句)’였다. 그녀는 이 단시(短詩)로 뛰어난 감각과 자신만의 독특한 시 세계를 보여 주었다.

 

설도를 가장 잘 이해해준 위고는 21년 동안이나 서천 절도사를 지내다가 성도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 무렵 사십대에 접어들어 확고부동한 명성을 얻고 있던 설도는 한동안 성도 교외의 명승지인 완화계(浣花溪)에 은거하면서 창작활동을 계속했다. 그러는 한편 수질이 좋은 물을 사용하여 단시 쓰기에 안성맞춤인 소형 편지지를 만들어 냈다. 그녀는 직접 만든 붉은 종이에 자신의 시를 적어 여러 연인에 주었다. ‘설도전((薛濤箋)’이라 불린 이 종이는 멀리까지 이름을 떨쳤으며, 주문이 쇄도하여 설도의 생활은 많이 윤택해졌다.

 

설도는 아주 영리한 여인이었다. 절대로 사사로운 감정에 빠지는 일 없이 자신을 억제했고, 그 결과 평온한 만년을 맞을 수 있었다. 물론 시종일관 냉정함을 유지할 수는 없는 노릇이어서, 후원자 위고가 죽은 뒤에 그 당시 유명한 시인이자 무려 열한 살이나 연하인 원진(元稹.779~831)과 의기투합한 적도 있었으나 사랑을 완성하지는 못했다. 그 밖에도 당대의 유명한 문인, 관료, 처사 등 뭇 남성들이 설도의 연인이었으며, 그들과 교류는 <전당시(全唐詩)>안에 수록된 여러 시인의 작품에서 발견할 수 있다. 설도가 알고 지낸 문인은 백거이, 유우석, 왕건, 장적 등이다. 관료나 장수들도 20여 명이 넘는다. 하지만 설도는 자제력을 발휘해서 기생으로서의 품위를 지키며, 만년에는 기적(妓籍)에서 나와 여도사(女道士)로 여생을 마쳤다고 전해진다.

 

설도에 얽힌 일화 하나가 있다. 위고는 그녀를 ‘여교서(女校書)’라 칭하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그 뒤 설도와 교분이 있던 무원형이 재상이 되자, 그녀의 문학적 재능을 높이 사서 설도에게 교서랑(校書郞) 벼슬을 주자고 상주할 정도였다. 그 건의는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그 이후부터 사람들은 설도를 여교서라 불렀다. 후대 사람들이 기생들을 ‘교서’라 부르게 된 것도 설도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옛날 사람들이 부러울 때가 바로 이런 경우이다. 설도나 황진이가 있을 때 태어났더라면, 그녀들과 술 한 잔 나누면서 시를 읊고, 인생을 이야기하고, 풍류를 즐겼을텐데 하는 허황된 꿈 때문이다. 하기야 필자 같은 소인들은 기생 있는 술집 근처에는 얼씬도 못하고, 주막에서 나이든 주모에게 구박이나 받으며 막걸리 몇 사발 걸치다가 집으로 갈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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