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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끗한 매미처럼 향기로운 귤처럼 - 이덕무 선집 ㅣ 돌베개 우리고전 100선 9
이덕무 지음, 강국주 편역 / 돌베개 / 2008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이덕무가 박제가에게 보낸 편지 가운데 한 편이다. 아홉 살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평생을 지기(知己)로 지냈던 두 사람의 우정이 여과 없이 드러나 있다. 이 글에서 이덕무(李德懋, 1741~1793)는 박제가(朴齊家. 1750~1805)에게 선비의 참된 뜻을 잃지 말 것을 간절히 당부하는 한편, 박제가와 같은 벗을 만날 수 있게 된 것을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다. 문예미가 넘쳐나는 편지로 오래도록 기억될 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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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저녁에 그대가 문밖에 나서자 섭섭함을 이기지 못하였는데, 그때 마침 하늘을 올려다보았더니 검은 구름이 모여들어 어느새 후드득후드득 빗방울이 듣더이다. 그래서 곧장 동자(童子)를 시켜 그대 뒤를 쫓아 만류해 보려 하였지요. 동자가 철교(鐵橋)까지 나가 봤다고 하는데 그대를 만나지 못한 채 돌아왔소. 이에 내 오랫동안 홀로 안타까워하였습니다.
나는 재주도 없고 제대로 할 줄 아는 것도 없이 ‘아이처럼 어리석고 처녀처럼 조용한 사람(嬰妻)’으로 세상 물정에 어둡고 쓸데없이 뜻만 큰 오활한 선비에 불과하거늘, 우연히 그대를 만나 예전부터 알았던 듯 친밀하게 될 줄이야 어찌 알았겠소? 인연이라면 참으로 뜻밖의 인연이외다. 그런데 그대가 먼저 나같이 가난한 사람의 집을 찾아 주고 또 이처럼 정성 어린 편지를 보내 주었구려.
그대가 보낸 편지에는 5백여 글자마다 그대의 진심이 드러나 있으니, 나같이 재주 없고 변변찮은 이가 어떻게 그대의 편지를 받을 수 있을지 알지 못하겠소이다. 처음에는 깜짝 놀라 부끄러워하였고, 중간에는 찬탄하며 칭찬하였고, 종장에는 기뻐하며 더할 수 없이 즐거워하면서, 이처럼 훌륭한 사람을 얻게 된 것을 참으로 고맙게 생각했다오.
그대는 아직 나이 어린 청년이건만 성인(成人)처럼 엄전해 그 정신은 강건하고 심지는 굳으며 말 역시 명료하구려. 억지로 문장을 꾸미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질박함을 따르는 사람으로, 저 옛날 기걸(奇傑)한 군자의 풍도가 있었기에, 내 그대를 두고 “일찍이 없었던 미증유의 일이도다!” 라고 감탄하곤 했지요. 그러니 내가 그대를 후생(後生) 가운데 빼어난 인물로 추앙하는 건 당연한 일이외다. 그런데 이런 그대가 변변찮은 나 같은 사람을 이처럼 추어주니 감격스러운 마음을 이길 수 없사외다. 아마도 그대가 진실한 마음 하나로 오래도록 벗을 사귀려 하기 때문이 아닌가 하오. 요즘 사람들이 할 수 없는 일을 그대 홀로 실천하고자 하니, 내 어찌 진심으로 화답하지 않을 수 있겠소.
내 일찍이 “말은 금쪽같이 아끼고 자취는 옥(玉)처럼 갈무리하라. 그 빛남을 흉중에 간직하니 오래되면 밖으로 나타나 빛날 터이다.”라는 잠(箴)을 지어 스스로 경계한 바 있고, 또 “지조(志操) 없이 마냥 속세에 어울리면 그 자취가 비루해지고, 궁벽한 것을 캐고 괴이한 일만 행하면 그 뜻이 오만하게 된다. 비루해지면 남에게 아첨하게 되고, 오만하면 자신을 해치게 된다.”라고도 말한 적이 있소이다. 게다가 옛사람도 “특별히 남과 달리할 필요는 없지만, 그렇다고 구차하게 남에게 부합할 필요도 없다.”라고 말했으니, 내 이를 읽으며 ‘참으로 시원한 말이구나.’라며 속으로 쾌재를 부르면서 여러 친지들에게 써 준 적이 있다오.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지요?
아아! 사특한 기운이 날로 강해지고 부박하고 방탕한 습속에 물들어 올바른 길을 회복할 줄 모르니 이를 어찌해야 좋단 말이오. 순박하고 진실하며 밝고도 지혜로워 옛사람과 짝할 사람은 오직 그대 같은 사람이니 그대는 부디 힘써 주시오. 내 비록 나이는 그대보다 많지만 “덕망도 나보다 높고 재주도 나보다 낫다.”라는 그대의 말만큼은 감당할 수 없구려. 해가 길어졌으니 언제 한번 한가한 날을 틈타 가벼운 옷차림으로 나는 듯이 찾아주지 않겠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