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남한산성
김훈 지음 / 학고재 / 2007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병자호란' 그 치욕의 역사를 이제와서 따져본들 지난 일을 되돌릴 수는 없다. 하지만 사백년이 되어가는 오랜 일을 상고하는 이유는 단 하나, 에드워드 카는 '역사는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이다.'라고 정의 했듯이 지난 잘못에서 오늘에 배울점을 찾고,같은 실수를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해서이다. 병자호란은 21세기 지금의 지정학적 상황과 유사한 점이 많다. 미국이 북한의 핵무기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 한반도에 '사드'배치를 종용하고, 중국은 경제적 패권을 거머쥐기 위해서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에 가입할 것을 권유하고 있는 것처럼...
7년 동안 임진왜란의 혹독한 전란을 겪고 전쟁의 참상을 몸소 체험한 북인정권의 광해군은 국제정세를 잘 이용하여 전쟁의 화를 모면한 반면 전후 불과 30년도 안 된 병자호란 당시 조선의 집권층은 대외정세에 너무도 어두웠고, 대의명분에 따른 성리학적 사관에 갇혀 화를 스스로 자초하였다. 광해군의 실리외교는 20세기 들어 재조명을 받으며 새롭게 평가되고 있지만 인조의 '친명배금정책'의 천명은 두고두고 아쉬움이 남는다.
인간관계나 국제관계에 있어 '의리'는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명분이요 신념이기는 하다. 하지만 나라가 누란지세의 위기에 처해 있는 상황에서 굳이 적국을 자극할 필요가 있었는지는 의문이다. 문치주의 나라에서 붓의 힘에 의지해 허장성세를 과하게 부린 게 아닐까 싶다. 자주국방이 안되는 상황에서수많은 백성의 목숨 보전과 우리 강토의 수호를 깊이 생각했더라면 그렇듯 전쟁을 불러들이는 어리석은 결단을 내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우물안의 개구리처럼 국제정세를 전혀 알지 못한 우매함이나 욱일승천의 기세로 나날이 커가는 청군의 국력을 무시하고 구태에 얽매여 오랑캐라 얏본 자만심, 설마하는 집권층의 안이한 생각때문에 병자호란이 유발되었다는 판단은 나의 지나친 억측일까? 수백 년 왕조체제를 유지해 온 조선의 특수한 정치상황으로 볼 때 충분히 가능했던 일일것이다.
정묘호란(1627)을 겪고 후금의 1차 경고가 있었음에도 인조는 병자호란의 치욕을 반복했다.
백성을 전쟁 위기에 빠뜨려 죽게 한 죄는 '만참(萬斬 : 만번을 벰)을 하고도 모자란다.'는 어느 소설가의 말처럼 선조,인조 임금은 수많은 백성의 목숨을 왜군과 청군의 칼날에 바친 죄, 죽어서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위기일수록 현명한 임금이 등극하여 나라를 바로잡아야 하는데,조선은 그렇지 못했고 왕조체제의 폐해를 고스란히 드러내고 말았다.
병자호란은 비록 짧은 기간이지만 사전에 치밀한 계획 아래 감행된 것 같다. 1636년 12월 중순 압록강이 꽁꽁 언 틈을 타 말을 타고 강을 건넌 것을 보면 그들은 강이 얼기를 기다려 주도면밀하게 전쟁을 준비했음을 알 수 있다. 속전 속결, 명나라가 멸망하지 않은 상황에서 조선에서 대군이 오랜시일 전쟁에 몰입할 수 없었기에 47일의 단기전으로 청은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던 것이다. 청태종(홍타이지)의 전략도 조선의 복속보다는 배후를 사전에 차단하려는 포석으로 전쟁을 일으켰을 것이다.겉으로는 인조의 친명배금정책과 조선에서 도망친 몰락양반의 헛된 고자질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겠지만, 이면에는 쓰러져 가는 명나라와 일전을 앞 둔 상황에서 후방의 지원을 끊고 중국 대륙을 차지하려는 거대한 야망에서 비롯되었다고 사료된다.
병자호란 당시 조선은 청의 급습에 허둥지둥 어찌할 바를 몰랐다. 청은 조선 팔도를 손바닥 보듯이 훤하게 보면서 곳곳에 군사를 보내 왕의 피난처를 사전에 차단했다. 몽고와의 전쟁에서 수십 년을 지켜냈던 강화도로 피난하려 했으나 청은 미리 알고 봉쇄했다. 남한산성은 인조의 마지막 피난처였던 것이다. 하얀 눈이 펑펑 내리는 엄동설한에 몽진을 떠나는 인조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이때쯤 자신의 판단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뉘우치고 깨달았을까? 살을 에는 듯한 추위에 눈 속에서 호종공신이나 군사들의 고충 또한 얼마나 컸을지 짐작이 간다.
남한산성에 들어와 임시궁궐에 거쳐하면서 수많은 백성들을 독려하여 청과의 일전을 벼르지만, 청은 쉽게 전쟁을 하려 않고 포위와 아사 작전으로 조선의 항복을 받아내려 한다. 급하게 떠난 피난이라 남한산성에는 충분한 군량미와 무기, 취사도구 등 모든 것이 부족했다. 시일이 지날수록 식량이 줄어들고 땔감이 부족해 큰 고통으로 다가왔다. 청은 사상자가 많이 나는 정면공격을 피하고 성을 포위하는 봉쇄작전을 구사했다. 결국 주전파와 주화파의 대립과 사분오열 속에 먹을 것이 바닥나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목불인견의 상황에 직면했다. 인조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주화파 최명길의의 의견을 좇아 항복을 결정한다.
삼전도 치욕은 조선 왕실의 치욕이 아니라 조선 백성의 치욕이요, 시련의 시작이었다. 조선의 왕세자를 비롯하여 전쟁을 주장했던 주전파 대신이 잡혀가고, 수많은 처자들이 끌려가 청군의 성노예가 되고 환향녀가 되어 가문을 더렵혔다는 죄로 스스로 목숨을 끊는 불상사가 비일비재했다. 이게 모두 누구의 탓인가? 위정자를 잘못 만난 백성의 불운이요, 방비를 제대로 하지 못한 집권층의 부패 탓이다. 아무런 죄없이 죽어간 원혼들은 누구를 탓하고 원망해야 할까? 참으로 가슴아픈 일이다.
한반도는 지정학적 위치에 자리잡고 있어 지금도 여전히 전쟁의 위험은 현재진행형이다.
38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강대국의 틈바구니 속에서 우리의 살아갈 길을 모색해야 한다.
세계 최강국인 미국과, 자웅을 겨루는 중국, 여전히 넓은 영토와 무기를 갖춘 러시아, 제국주의의 꿈을 버리지 못하고 호시탐탐 독도를 넘보는 일본, 핵무기로 언제든 한방을 터뜨리겠다는 북한, 병자호란의 시기와 견주어도 여전히 오늘의 위기가 가벼워 보이지는 않는다.이런 중차대한 시점에 우리는 대한민국의 국토수호와 경제발전에 도움이 되는 현명한 실리외교에 온힘을 쏟아야 한다. 한번의 선택이 나라를 살릴 수도 기울게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무쪼록 국정을 이끌어가는 위정자의 현명한 선택을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