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드슬럿 - 젠더의 언어학 Philos Feminism 3
어맨다 몬텔 지음, 이민경 옮김 / arte(아르테)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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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를 모욕하고 싶다면 걸레라고 불러라. 남자를 모욕하고 싶다면 여자라고 불러라 (p.34)


말에는 많은 의미가 숨어있다. 같은 문화를 공유하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말 속에는 사회가 대상을 보는 인식이 짙게 묻어있고 혐오와 편견이라고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것들도 있고, 알고는 있어도 반대로 쓸 단어 자체가 없는 경우도 있다. 보통은 여성을 향한 성적 모욕이 대다수인데 예를 들면, ‘창녀’와 대응되는 남성형 단어는 없다. ‘창남’이라고 하면 된다지만 표준국어대사전 기준 미등록 단어이다. ‘걸레’라는 말은 어떤가. 여성을 향한 저속한 모욕이나 이 단어가 남성을 향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단어의 차별성에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들은 이런 단어들을 전복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유모차를 유아차로, 자궁(子宫)을 포궁(胞宮)으로 바꾸어 아직은 어색하더라도 그런 단어가 자연스러워지는 날이 올 수 있도록 의식해서 사용하고 있다.


■남성들은 집단의 언어를 비교할 때 여전히 보이지 않는 표준이 되는 경우가 많다. (p.21)



언어학, 그 중 여성들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함의한 것들이 사회와 개개인의 인식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탐구하는 이 책은 노골적인 단어를 당당히 꺼내 독자의 뇌리 속에  파괴적으로 파고든다. 캣콜링, 맨스플레인, 보컬 프라이[vocal fry. 킴 카다시안, 케이티 페리 같은 여성들처럼 일상생활에서 말 할 때 목소리를 낮춰 말하는 것] 등 여성을 남자들이 함부로 정의하고, 깎아내리는 단어들은 공기처럼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을 살짝 생경한 느낌으로 다시보게 만들었다.

캣콜링 파트를 가장 공감하면서 읽었다. 얼마 전 해외여행을 갔다가 길거리에서 모르는 남자가 코리안?하며 하트를 그리고 윙크를 하는 것이 너무나 불쾌했던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여성에 대한 단순 칭찬 따위가 아닌, 길거리에서 그런 식으로 외설적인 행동을 해도 그냥 지나가리라는 확신이 담긴 남성 권력이었으니까. 당시의 기분을 문장으로 정의할 수 없어 꼬인 실타래처럼 뭉쳤던 것들이 6장을 읽으며 슬슬 풀리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마 인마.


저자는 낙관적이고 더 좋은 방향으로 나아갈 거라고 생각한다. 연구 결과가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태도를 가지고 있어야 더 좋아질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많은 연구데이터를 가지고 있는 저자도 이런 태도를 유지하려 하는데, 나는 그에 비해 단편적인 뉴스만을 보고 일찍 포기하고 비관적으로 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조금이라도 유명한 사람들이 SNS에 유아차, 포궁이라는 단어만 써도 사상검증을 받는 세태에, 맑눈광이나 여자들의 기싸움이 조롱거리이자 유머코드가 되어 버린 사회에 너무 빨리 질린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변화의 첫 걸음은 인식부터인데 그런 점에서 한국 사회는 불안하더라도 앞으로 나아갈 걸음걸음을 떼고 있는 것 같다. 단어 하나에 사상검증을 하겠다고 달려든다는 것은 자신들이 점유한 단어가 전복될까 하는 두려움과 위기감이 숨어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다만 좋은 내용인것 과는 별개로 같은 작가의 『컬티시』 때도 느꼈듯, 너무나 영미권의 이야기라 약간 우리 사회와는 거리가 있는 느낌이 있다. 슬럿이나 컵케이크 같은 게 어떤 은어인지 모르겠어서 따로 검색했고, 불필요한 정보들을 너무 많이 봤다. 단어 자체가 영어이다 보니, 의미는 분명 모욕적이지만 실제로 좀 비교적 캐주얼하게 체감되는 느낌도 없잖아 있었고, 사례를 볼 때 그렇게 공감되지는 않았음. 내포된 여혐은 물론 비슷하지만, 구체적으로 형상된 방향이 다르다보니 그냥 다른 나라의 이야기를 보는 느낌도 들었다. 이런 비슷한 책이 한국 저자의 손에서 쓰여진다면 어떨까 궁금해졌다.



■언어는 세상을 움직이고자 하는 여성들에게 힘을 주는 자원이 될 수 있다. (p.153)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지원받아 읽은 뒤 솔직하게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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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실물이 돌아왔습니다
김혜정 지음 / 오리지널스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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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무리 좋아하는 영화나 드라마, 책도 같은 것을 두 번은 보지 않는다. 그런데 같은 삶을 두 번 살게 되다니. (p.95)



솔직히 아예 안 읽는 종류의 책이고 표지만 봐도 서점가에 넘쳐나는 힐링류 +1 같은 느낌이라 쉽게 손이 가지 않았다. '밀리의 서재 종합 베스트 1위' 아니었으면 진짜 제목에 관심도 안 줬을 거다. 특정 장소로 다수의 사람들이 찾아오면 고민을 들어주고 문제를 해결해주는 플롯의 이야기가 아닐까 생각했어서. (라고 말하지만 사실 나는 달러구트도, 휴남동 서점도 읽지 않았음. 베셀이야?! 글케 좋아? 하고 사두고 묵은지행)


이 책은 다양한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라 '혜원' 개인의 특정 시점들을 톺아가며, 미래의 내가 과거의 내게 내미는 위로의 이야기였다.

어릴 적 잃어버린 '토토로 필통', 중학생 때 잃어버린 '다이어리' 등 분실물을 찾을 때마다 혜원은 그 시절로 (잠시) 타임 워프를 한다.

그 때는 세상 끝날것 같이 두려웠던 일이 지나고 보니 별 것 아니라는 것. 너무 힘들고 괴로워서 이 곳이 어두운 동굴이라 생각했지만 후에 보니 그저 터널이었으며 끝은 분명 온다는 이야기를 읽다보니 생각보다 큰 위로가 되었다.


가장 마음에 들었던 이야기는 혜원의 고등학생 때였다. 앞에서 혜원은 계속 본인의 과거로 돌아갔는데 그때만 본인이 아니라 같은 학교 사서 선생님의 시점으로 돌아간다. 왕따란 보통 본인 스스로가 잘못한 게 아니기에 나의 행동을 수정하기 보다는 좋은 어른의 시선으로 보듬어주는 방향으로 이야기를 전개한 것이 굉장히 영리하다고 생각했다. '내가 잘못했겠지.', '내가 어두워서 그래. 어떻게 해야 애들이 나와 다시 친하게 지내줄까?' 가 아니라 너의 잘못이 아니므로 움츠러들 필요 없다는 것을 알려주는 좋은 이야기.


■ "그때 나한테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어. 그러니까 다 나를 미워하는 거지. 그러다 보니까 나도 나를 미워했던 것 같아. 그런데 지나서 생각해보니까 아니더라고. 내가 잘못한 게 아니었어. 그냥 걔네들이 나빴던 거야. 미안해, 혜원아." (p.208)


■ 나중에도 계속 미움받는 사람으로 남을까 봐 벌벌 떨던 나. 그냥 이대로 지구가 멸망해서 모든 게 다 끝나버리길 간절히 바랐던 나. 그 아이를 나는 다시 만났다. 나는 어떻게든 나를 도울 것이다. (p.186)



처음 읽는 힐링 소설류지만 이래서 읽는구나 하고 깨닫게 해줘서 좋았음. 가볍고, 적당히 공감 되고, 쉽게 읽히면서 머릿속이 한 번 환기되는 느낌이라 꽤 즐겁게 읽었다. 책태기가 오거나 컨디션이 안좋아서 글이 잘 안읽히는 날 이런 책 읽으면 좋을 것 같다.



+박상영 소설가가 "폭발적인 가독성"을 지녔다고 추천사를 쓰셨는데 공감한다. 진짜 막힘 없이 술술 넘어감.


++과거로 돌아간 혜원이 자꾸 현재로 돌아오려 발버둥 치는 걸 보면서 머리를 쥐어 뜯었음. 너 임마...너 인생 리셋의 기회를 이렇게 날릴거야?!

웹소를 잘 안봐서 플롯이 비슷한지는 모르겠지만 이게 말로만 듣던 회귀물 아닌가? 영애가 아니라서 아닌가..?


+++조금 허술하다 싶은 부분도 있긴 있음. 분실물에 내 현재 폰번호가 쓰여있는게 아닌데 어떻게 전화했는지.... 미래의 내 핸드폰 이야기, 지안 언니는 대체 무엇인지...그냥 혜원이 60만원 갖고 도망간 좋은 사람인가요.... 이런거 하나씩 다 따지면 판타지 못 읽는 법이라 그냥 흘려보냈는데 다 덮고 보니 여전히 물음표가 따라온다.



*밀리의 서재에서 도서를 지원받아 읽은 뒤 솔직하게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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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로에서 시작하는 자본론 Philos 시리즈 27
사이토 고헤이 지음, 정성진 옮김 / arte(아르테)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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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살면서 나는 이 체제에 대해 좀처럼 의심해본 적이 없다. 의심은 커녕 너무나 자연스러워 별다른 이해도 하지 않은 채로 몸을 맡기며 살아갔다. 당연한 사회의 룰이니까.


자본주의가 돈을 벌기 위해 해체한 수많은 공동체들과 연대, 착취로 인해 빼앗긴 개개인의 여가 시간은 물론, 더 나아가 자연을 상품화하여 판매하고 (봉이 김선달을 이제 누가 사기꾼이라고 부를 수 있나; 이 정도면 시대를 앞서간 스타트업 CEO지…🤷) 사람들이 이를 당연하게 여길 수 있도록 눈을 교묘하게 가린 행태들을 보며 한정된 자원 속에서 자본주의는 빠르게 지구의 수명을 단축시키며 자본가들의 배를 불리는 치킨 게임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누가 되었든 끝까지 자원을 소비하고 효율적으로 노동자들의 눈을 가려 그들의 노동력으로 많은 잉여가치를 남기는 게임.

돈이 돈을 부르고 모든 가치가 돈으로 환산되는 현 상황 그 끝에는 무엇이 남을까. 사실 지금도 가시적으로 보인다. 파괴되어 가는 지구 환경, 소수 몇 퍼센트의 인간만이 독점하는 거대한 자본과 자신이 노예 상태임을 깨닫지도 못한채 자유롭다는 자본주의의 말에 속아 ‘부wealth’ [화폐로 측정할 수는 없지만, 한 사람 한 사람이 풍요롭게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이 풍부한 상태] 를 잃어가는 수많은 사람들.


이 구조를 눈치채지 못했던 것은 사회주의에 대한 이해 부족에서도 기인했다는 점이 나를 소름 돋게 했다. 어릴 때 사회주의를 국유라는 소유 형태로 간단하게 정의했고 너무 자연스럽게 북한을 떠올렸으며 필연적으로 독재와 연결했다. 게다가 마르크스는 유물론자. 이 정도의 기초 교육만 받았던 기억이 난다.

어떠한 의도를 가진 교육이라기 보다는 선생님들도 잘 몰라서, 러시아와 중국은 소련의 몰락을 본인들의 반면교사 삼아 아직도 활발하게 연구가 진행됨과 비교하여 자본주의 국가들은 사회주의에 대한 연구가 부족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전쟁 이후의 세계』, 한겨레출판)

저자가 프롤로그에서 말하듯 우리에게는 ‘이 사회의 불합리를 그려낼 수 있는 빨간 잉크가 없기 때문’에.


팬데믹 그리고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전쟁 이후 전 세계의 탈세계화적 움직임은 더욱 더 가속화되고 있고, 미래를 그리기 힘들 정도의 어려운 경제 속에서 공동체의 가치는 땅으로 떨어졌으며 개인만이 중요하다 여겨지는 세태가 지속되고 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다시 한 번 모두가 함께 사는 세상, 공동체의 재결합과 연대를 강조하는 마르크스의 사상을 재조명하여 경제적 사상을 넘어 개인과 공동체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게 된 책이었다. 개인이란 크던 작던 타인의 선의나 연대에 기대어야만 생존할 수 있는 존재임을 『자본론』과 모두의 생존을 목표로 치열하게 연구한 마르크스를 통해 다시금 상기할 수 있었다.


지나치게 칠해진 파란 잉크로 인해 오히려 검게 변해버린 세계를 정확히 바라보기 위해서는 의도적으로 무시하고 버렸던 빨간 잉크를 다시 들어 자국을 남길 필요가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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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블루칼라 여자 - 힘 좀 쓰는 언니들의 남초 직군 생존기
박정연 지음, 황지현 사진 / 한겨레출판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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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는 여기에 있고, 여자는 어디에나 있다. 당신이 상상할 수 없는 곳에, 또는 당신이 상상한 모든 곳에. 편견에 안주하지 않은 늙은 여자들 덕분에 어린 여자들은 제 삶의 선택지를 또 한 칸 늘린다.
(장일호 기자 추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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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에 인간극장에서 커다란 화물차를 운전하는 여성을 조명한 적이 있다. 지금도 이른바 '거친' 현장에서 근무하는 여성이 매우 드문데 그때는 더더욱 드물어서 방송은 당당한 그 분에게 '여장부'라는 말을 붙여주며 화물차 기사와 가족을 돌보는 엄마의 모습을 넘나드는 모습을 보여주었었다. 그 때는 몰랐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놀라운 한 걸음이긴 했지만) 그 분을 전문 기술을 가진 직업인이 아니라 여성으로 더욱 크게 인식했던 것 같다. 여자가 저렇게 큰 차를 운전해? 여자가 저렇게 힘든 일을 하다니. 여자가···.


목차부터 나는 나의 편견과 좁은 견문을 인식했다. 알음알음 목수나 화물 운전 등의 직종에서 근무하는 여성의 이야기를 들어온 터라 나로서는 그 이상의 일을 상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더욱이 부끄러운 일이지만, 내가 미디어에서 보았던 '블루칼라 여성'은 젊은 분들이 많아 그런 분들이 많을 줄 알았다. 세상은 정말 내 생각보다 훨씬 넓었다. 화물 노동자부터 해서 플랜트 용접 노동자, 먹매김 노동자, 주택 수리 기사, 래미콘 운전 노동자, 철도차량정비원 등 직업명만 들어도 생소하고 낯선데다 경력도 긴 분이 많았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는데 현장에서 일하시는 분들은 얼마나 많은 선입견과 차별을 마주했을까. 한 명의 직업인이자 직장 동료로 인식되기 보다는 '여자'로 바라보며 남성들의 잠재적 아내이자 분위기 메이커로의 역할을 기대하는 현장의 분위기. 이 책에 나오는 여성들은 10명으로 그 직장이 각각 다름데도 그들을 바라보는 남성 동료들의 시선이 놀라우리만큼 유사하여 읽는 내내 입 안에 씁쓸함이 맴돌았다. 그렇기에 이 분들이 하는 이야기도 비슷했다. '나를 동료로 바라봐주었으면 한다'. 또렷하고 강한 눈빛으로 자신의 위치를 묵묵하게 지켜온 분들은 지금은 이전보다 나아졌다 말하지만 아마 사회가 나아가야 할 길은 한참 멀었을 것이다.


한동안 '멋진 언니'라는 말이 유행처럼 돌았다. 나는 이 '멋진 언니'라는 말이 이상했었다. 자신의 위치에서 일을 하고 있을 뿐인데, 누군가는 멋진 언니이고 누군가는 아니란 건가. 그냥 묵묵히 일하고 있는 사람을 멋지다 뭐다 이렇게 봐도 되는걸까. 사무직 언니들은 멋있다고 잘 언급되지 않지만 공구를 들고 커다란 자재를 운반하는 언니들은 멋있는 건가하고. 그러나 이 책을 읽으면서 이건 진짜 '멋진 언니'라고만 생각이 들었다. 그들이 여성임에도 남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해서가 아니라, 여성들이 가지 않은 길을 먼저 나아가 뒤에 올 다른 여성을 위해 목소리를 높여주고 편견 가장 앞에서 싸워주며 우리가 일할 수 있는 입지를 점차 넓혀준다는 점이. 그들의 걸음은 다른 여성들에게 용기가 된다.
여성은 어디에나 있으며 어디에서든 살아남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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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는 오래 산다 - 30년 문학전문기자 생애 첫 비평에세이
최재봉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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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서평이란 무엇일까. 책을 읽고 기록을 남기는 것은 좋아하지만 내가 좋은 글을 쓰고 있다는 생각은 딱히 들지 않는다. 글을 쓰다가 나의 문장에 확신이 사라질때, 선명했던 감상이 흐려질때면 다른 사람이 쓴 비평을 찾아 읽는다. 보통은 공감하거나 감탄을 하면서 읽어내려가지만 어떤 글은 막힌 둑이 터지듯 생각을 확장시켜주는 것들이 있다. 이런 글들이 바로 그런 글이 아닐까.

34년 7개월. 내 나이보다 긴 세월을 한 곳에서 근무한 사람의 글. 한국 문학에 몸을 푹 담그고 숱한 사건들을 피부로 겪었으면서 그 격동의 문학사에서 한 발 물러나 제 3자의 시선으로 바라본 궤적은 흔히 접할 수 있는 기록이 아니었다.

「난쏘공」의 조세희, 박완서, 황석영 등 익숙하지만 쉽게 언급하기 힘든 국내 (거물급) 작가들에 대한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거대한 한국 문학계까지 나무와 숲을 번갈아가며 조명하는 글은 참으로 솔직하기까지 하다. 기자의 글이어서 그럴까. 국내 표절 사건으로 본 '문학권력'부터 출판사에 대한 솔직한 이야기, 단편이 넘쳐나는 한국 문학계의 구조적 문제 등은 저자가 한 자리에서 오래 버티고 섰었기에 쓸 수 있는 글일 것이다. (물론 기자를 넘어 이런 글을 써서 이름을 걸고 공개하는 용기도 놀랍고 이 책을 출판한 한겨레출판도 대단함...)

「이야기는 오래 산다」. 이 말은 소설같은 문학에만 통용되는 말이 아니다. 저자의 서평 역시 그 문학들 만큼이나, 혹은 그 이상 오래 살 것이고 고목같은 삶에서 나온 밀도 있는 글에 진득히 붙어있는 인문학적 통찰은 어느 시대에 읽더라도 분명한 가치를 전달할 것이다.
나의 지극히 사적이고 가벼운 기록들도 어쩌면 나보다 오래 살 것이다. 보통 책을 말하는 책을 읽으면 그 책을 읽어야겠다는 감상에서 끝난 적이 많았는데, 이 글은 그걸 넘어 어떠한 기록을 남기고 싶어진다. 저자의 꾸준함과 성실함을 모방하고 싶게 만드는 책이었다.

+ 아 이거 읽고 황석영 작가의 「손님」 읽고 싶어서 검색해봤다가 표지 보고 소스라치게 놀라서 뒤로 돌아옴... 믿기지가 않아서 장르를 다시 봄. 호러 소설이었나..

++ 사실 「난쏘공」의 문학적 가치는 알지만 마음 잡고 소설을 읽어본 적이 없다. 워낙 교과서에서도 자주 접했고 수능 대비용으로 뜯어 분석한 것을 먼저 봐서 그런가 이미 읽은 책같다

+++ 「밤이 선생이다」를 읽고 한 눈에 반해 황현산 평론가의 책을 모았는데 작고하신 분의 글이라 다 읽어버리는 게 아까워서 책장에 고이 잠들어만 있다. 읽어야하는데 아깝다구요🥲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읽은 뒤 솔직하게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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