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의 기분 - 한문학자가 빚어낸 한 글자 마음사전
최다정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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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에 대한 교육과 필요성이 현저히 떨어지는 시대다. 솔직히 말하자.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명과 자기 이름 석 자가 싹 다 한자임에도 영어로는 쓸 줄 알지만, 한자로는 쓰지 못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자기 이름을 한자로 쓸 줄 아는 것이 상식의 문제인가?' 라는 질문에도 의견이 분분한 것이 현실이다. 개인적으로 한자를 굉장히 좋아해서 그런 점이 슬펐던 찰나에 반가운 책을 만났다. ( 솔직히 산문인지, 뭔지도 모르고 '한자'라는 단어에 꽂혀서 한자? 냉큼 읽어, 바로 그냥 펼쳐주지 라는 마음으로 시작했음. )


사나운 기세의 더위는 '폭暴'이란 글자가 수식해 폭염暴炎이라 한다. 매서워 보이는 이 글자는 원래 햇볕에 말린다는 뜻으로, '햇볕[日] 으로 나가[出] 두 손[廾]을 모아 담은 [米]을 말리다'라는 순한 이야기에서 비롯해 만들어졌다. / p.152

산문 자체도 읽기 좋지만, 역시 다른 책과 가장 차별화 된 특징 중 하나는 한자 하나를 앞세워 그 뜻을 풀고, 글자의 형태와 기원을 따라가며 저자의 생각을 덧붙인다. 그렇게 완성된 글은 그야말로 한자를 매개로 한 ‘마음사전’이다. 한자를 이리저리 가지고 놀듯 풀어내며, 어렵고 복잡한 글자들을 감각의 영역으로 끌어온다.

발췌한 글만 보아도 딱딱한 정의에서 벗어나 그를 해체해보고 조금 더 말랑하게 한자를 이리저리 가지고 놀고 있다는 특징이 드러난다. 어려운 한자라도 하나씩 나누어 들여다보면 생각보다 복잡하지 않다는 것, 복잡하게 얽힌 세상이나 마음도 이렇게 한 겹씩 풀어보면 그 근원이 조금 더 단순하게 보인다는 것을 저자는 이 책으로 증명한다.


주디스 루이스 허먼은 '어떤 고통은 그 실재성을 의심받기 때문에 그 고통에 이름을 붙이고 형상을 부여해서 공적 공간에 존재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한다. 고통도 그냥 '아프다'로 끝내는 것이 아니라 그 결을 세세히 나눠서 이름을 부여해야 한다는 말인데, 이 책은 바로 그 작업을 한자를 통해 수행한다. 사람의 기분, 혹은 저자의 일기에 한자를 빌려 결을 나누고, 분류하여 말한다. 그렇게 이름을 얻은 감정은 이전보다는 덜 막막해진다. 즉, 나 스스로를 파악하여 조금 더 너그러워지는 작업과도 같다.


한자를 단순 지식의 영역이 아니라 감정의 영역으로 끌어오는 책. 딱딱하고 어려운, 단지 누군가에겐 복잡한 그림일 뿐인 글자들은 어쩌면 사람의 마음을 닮아 있고, 우리는 그 글자를 따라가며 가장 사적이고 내밀한 나의 기분을 조금 더 정직하게 바라볼 수 있게 된다.



+ 아 그냥 산문 말고 마법천자문 읽는 느낌으로 읽어도 됨. 이해가 아주 쏙쏙 되어버림. 한자 공부 어렵지 않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만을 제공받아 읽은 뒤 솔직하게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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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눈물에는 온기가 있다 - 인권의 길, 박래군의 45년
박래군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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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될 일은 언제건 되더라고.” 이소선 어머니의 이 말을 낙담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싶다. / p.144


사실 이런 책을 읽고 울지 않기란 어렵다. 뉴스를 보듯 한 발 떨어진 자리에서 사건을 마주하는 것이 아니라, 피해자의 시선에 붙잡힌 채 그 아픔을 통과하게 된다. ‘참사’라는 말도, ‘비극’이라는 단어도 부조리가 만들어낸 개인의 고통 앞에서는 지나치게 가볍다. 그 부조리가 국가와 사회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개인에게 국가는 더 이상 보호자가 아니라 거대한 기만을 연출하는 존재로 남는다.



이 책의 저자는 한국의 인권운동가 박래군이다. 1980년대 군부독재 시절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45년 간의 시간이 담겨 있다. '질 줄 알면서도' 싸우는 마음이, 그림자 속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경청하여 어떻게든 드러내고자 하는 의지가 한 권의 책으로 묶여있다.


아무래도 현재 시점과 가장 밀접한 사건이 마음을 크게 요동치게 하는데 그게 4장의 용산 참사와 5장의 세월호 참사이다. 5장은 정말 내가 함부로 감상을 남기기조차 조심스러울 정도로 마음이 아프고 화가 난다..진짜 화가 나. 정제된 말로 글을 쓰기가 어려울 정도로. 우리는 '잊지 않겠다'고 하지만 5•18 유가족이 세월호 유가족을, 세월호 유가족이 이태원 유가족과 연대하는 걸 보면 진짜 기억하는게 맞을까? 국가가 진실을 앞장서서 묻는 무책임의 구조는 왜 여전히도 견고할까.

4장도 장난 없기는 마찬가지다. 나는 용산 참사를 '서울 한복판에서, 온라인으로 현장이 생중계되는 상황에서 벌어진 국가 권력에 의한 학살'(300)이라는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구조하러 들어갔다면 충분히 구했을 생명이 진압이 목적이었기에 사라져버렸다. 특히 국가에 의해 사람이 6명이나 살해된 그 자리에 현재 고급 주상복합 아파트인 '용산 센트럴파크'가 들어왔다는 부분이 너무나 한국스러워서 말 잃음. '여전히 철거민은 쫓겨나고 그 자리에 고층 빌딩이 들어선다'(312)

(아 솔직히 4~5장은 그냥 눈물파티임 덮고 펴고 훌쩍거리기를 반복했음)



저자는 ‘나의 뒷배는 죽은 자들이다’라는 말로 이 책을 마친다. 마치 한강 작가의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처럼, 죽은 자들을 뒷배로 산 자들을 위해, 그리고 앞으로 살아갈 자들을 위해 쓰인 기록이다. 그 기록은 울음과 침묵이 겹쳐진 여백 속에서조차 사람의 온기를 잃지 않으며, 기억해야 할 이유를 끝까지 남긴다.



* 출판사로부터 도서만을 제공받아 읽은 뒤 솔직하게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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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와 현대 미술 잇기 - 경성에서 서울까지, 시간을 건너는 미술 여행
우진영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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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생명은 유한하고 세상은 빠르게 변하지만, 사람들은 영원을 꿈꾸며 작품을 남긴다. ‘지금’의 ‘나’를 오래도록 붙잡아 두기 위해서.

《근대와 현대 미술 잇기》는 바로 그 욕망이 어떻게 시간을 건너 예술로 살아남는지를, 그리고 그 과정에서 무엇을 남기는 지를 가장 인간적인 방식으로, 느릿한 걸음으로 증명하는 책이다.


추천사 중 '단지 미술사를 배우는 일만이 아니다. 삶과 예술의 본질을 함께 사유하는 여정이다. 그림을 읽어내는 기쁨, 시대를 잇는 감동'이라는 부분이 있는데, 특히 시대를 잇는 감동 쪽에 조금 더 초점이 맞춰져 다른 미술사 책과는 또 다른 독특한 매력을 품고 있다.


예를 들면 [어떤 여성의 초상]이라는 파트가 있다. 이 책은 나혜석과 이재헌을 연결해 단순 '여성'이 아니라 사회가 바라보는 '여성'을 보여준다. 1900년대의 신여성과, 현대의 온갖 세속적인 욕망에 갇힌 아이돌이 교차된다. 내게는 치트키처럼 꽂히는 키워드라 자세히 읽을 수 밖에 없었는데 솔직히 나혜석의 작품만큼 강렬하고 자극적으로 와닿는 작품은 아닌지라 처음에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다 이게 현대의 작품임을 떠올리자, 어쩐지 비교적 슴슴함이 이해가 되더라... 왜냐면 이건 지금의 이야기라, 이 작품 속의 여자 아이돌들이 실존하고 있으니까. 문제 의식을 일깨우겠다고 어린 여자 아이돌을 자극적이고 강렬하게 반영해버리면 새로운 가해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근대의 예술가가 삶을 살아내며 남긴 흔적은 특정 시점에만 머무르지 않고, 현대의 예술가가 품은 불안과 욕망, 연대의 감정과 겹쳐지며 시간선을 횡으로 꿰뚫는다. 그렇게 미술은 시간을 잇고, 인간을 이해하는 단서를 던지며, 인간이 왜 여전히 예술을 필요로 하는지 그저 보여줌으로서 증명할 뿐이다. 그런 예술의 필요성을 이 책은 조용히 설득한다.


+박서보 작품 뭔가 너무 마음이 감 <허의 공간> 내 스타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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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라가의 밤
조수경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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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이유를 찾으려고 하지 말자. 결말을 알 수 없는 게 살아 있는 이들의 삶이라면, 결말은 알고 있되 그 이유를 알 수 없는 게 스스로 떠난 이들의 삶이니까. 결코 다 알 수 없지……. 죽음의 원인에서 내 탓을 찾지도 말고. 죽음으로 그의 삶을 미화하거나 왜곡하지도 말고. 있는 그대로 기억하면서, 그렇게, 그렇게. / p. 82


솔직히 말하면, 설정은 어렵지 않다. 

가족의 자살로 혼자 남겨진 형우가 엄마와 동생의 10주기에 절벽에서 몸을 던지는데, 당도한 곳은 저승이 아니라 아름다운 해변 '말라가'. 그곳에서 형우는 9살, 19살, 29살의 형우를 차례로 만나고 과거를 되짚어보며 죽음에 대해 천착하는 이야기.


진짜진짜 솔직히 울지 않기는 어려운 이야기이고, 언제 읽어도 무뎌지지 않는 슬픔이 송곳처럼 마음을 꿰뚫는 소설이라 중간중간에 덮어가며 조금씩 읽었다. 


자살사별자인 등장인물들이 모여서 프리다이빙을 배우는 부분이 바로 이 책이 독자에게 전달하는 메시지를 관통한다. 상실감이 깊으면, 아픔이 짙어지면 우리는 숨을 제대로 쉴 수 없게 된다. 으레 그럴 때는 옆에서 심호흡을 요구한다. 뱉어도 고통, 들이마셔도 아픔이기에 숨을 쉴 수 없는 것인데도. 그때 프리다이빙은 오히려 숨을 참는 것을 가르친다. 그냥 숨을 참고 아픔에 매몰되라는 일이 아니라, 일단은 참고 견딜 수 있는 바닥까지 가 본 뒤에 옆에 있는 사람의 손을 잡고 다시 올라오는 일. 혼자가 아니라, 나와 같은 다른 사람의 손을 잡고. 즉, 개인들의 아픔을 치유하는 방식으로 타자와의 연대를 제안한다. 


『말라가의 밤』은 슬픔을 강제로 해결하려 들지 않는다. 다만 그 바닥까지 내려가 본 사람들이 어떻게 서로의 손을 붙잡고 올라올 수 있는지를 차분히 따라간다. 내 옆의 남은 손을 돌아보게 하고 나 역시 손 내밀 수 있게끔 만드는 이야기. 상실 이후의 삶을 어떻게 지속할 것인지에 대해 독특한 관점에서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소설이다.



+ 솔직히 수영을 잘 못하고, 관심도 별로 없었기에 수영으로 삶의 방향을 찾는 이야기를 보며 담담히 그렇구먼...하고 말았는데, 이걸 읽고 어쩐지 알 것 같았다. 수영 자체가 아니라 필요한 건 호흡하는 방법이라는 걸. '잠시 숨을 참더라도, 결국엔 수면으로 상승해 회복 호흡'(351) 을 해야 슬픔이 가득한 삶일지라도 지속해나갈 수 있으므로.


++ 근데 진짜 슬픔. 아 이거 진심 슬픔 보장 이야기이긴 함... 근데 좋음. 그냥 일반 클리셰 범벅 뻔한 신파 이런거 아니고 갓섬을 자극해버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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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양장 특별판)
박민규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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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랑은 오해다. / p.16

겨울에 재즈를 틀고 술 마시면서 보세요. 게다가 눈까지 온다? 완벽.

딱 그 깔임

커피, 차 다 마시면서 읽어봤는데 술이 딱입니다. 맥주 이런 거 말고 위스키, 진토닉 이쪽으로. 제발....



솔직히 말하면 좋은 쪽으로는 순수고 나쁜 쪽으로 말하자면 비현실. 자기연민은 지나치고, 예전 소설임을 감안하더라도 설정은 약간 진부하다. 그래도 읽는 내내 마음이 먹먹하니 슬퍼지고, 특유의 분위기가 묵직하게 사람을 눌러온다. 그러니까, 단순한 로맨스 소설, 인터넷에 연재된 소설로 가벼이 보기에는 너무나 아쉬운 책이라는 말.

간단히 말하면 잘생긴 남자 x 상당히, 놀라울 정도로 못생긴 여자. 최근에야 여성 주인공도 못생겼다는 특징을 가지는 이야기들이 드문드문 나오지만, 이 이야기가 연재될 당시에는 훨씬 드물었기 때문에 확실히 당시에는 독특한 매력이 있었을거라 생각한다.


누군가의 외모를 폄하하는 순간, 그 자신도 더 힘든 세상을 살아야 한다. 그렇게 예쁜가? 그렇게 예뻐질 자신이... 있는 걸까? / p.326


'못생김' 이라는 특징을 가진 인물을 사용하여 진정한 사랑에 대해 말하고, 불완전하고 사회가 내 걸은 특정 기준에 도달하지 못한 이들의 감정을 조명한다. 즉 이 책은 외모지상주의에 정면으로 도전하면서, 작가의 말 중 '우리의 손에 들린 유일한 열쇠는 「사랑」입니다'(436)라는 주장의 근거이자 그리하여 한낱 인스턴트처럼 전락한 사랑의 가치를 다시 한 번 들여다보게 된다. 사랑의 힘이란 여전히, 이렇게나 강력한 여운을 남길 수 있는 거였다.



+ 특이하게도 엔딩이 두 갈래이다. 결국 선택하는 것은 독자에게 달려있으나 주가 되는 인물 세 명이 온전히 행복할 수 있는 선택지는 없기에 가슴이 그냥 찢어져버림. 여운이 진하게 남는 이유가 단순히 망한 사랑이라서가 아니라... 하 그냥 울면서 눈 내리는 겨울, 혹은 낙엽 지는 늦가을 쯤에는 꼭 읽어달라고 파닥거릴게요.


++ 저 안 믿어도 박정민은 믿을 수 있자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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