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살인, 본격 미스터리로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가타오카 쇼 지음, 김예진 옮김 / 리드비 / 2026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실제 발생한 살인 사건을 인위적으로 가공해서 '미스터리 소설' 속 사건처럼 연출해 나간다면 어떨까?

탐정 지망생이자 추리 작가 '아가사'의 오타쿠인 부우는 이 집안의 메이드로 취직하고, 우연히 이 집안의 장남이 위의 연출을 이용해 여동생 살해를 모의 중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부우는 이 살인을 막고자 '머더 미스터리' 연출 기획자를 찾아내버리고, 계획된 살인을 막고자 위장 살인 작전을 하기로 한다. 그러나 사람을 죽이지 않으려 시작한 일은 결국 실제 살인 사건으로 이어지고 만다.


왜 이 작품이 '본격 미스터리'를 표방하는지는 알 것 같다. 《명탐정 코난》에서 익숙하게 보아온 기이한 저택, 밀실 트릭, 외부인의 접근이 차단된 장소에서 벌어지는 살인, 그리고 다수의 용의자. 본격 미스터리의 정석이라 할 만한 클로즈드 서클의 요소가 충실하게 갖춰져 있다. 여기에 부우와 머더 미스터리 기획자 야마이누의 티키타카가 더해져, 작품은 지나치게 무겁거나 어두워지지 않고 비교적 가볍고 경쾌한 분위기를 유지한다.

살인 사건을 미스터리극의 한 장면처럼 재연출한다는 설정 자체도 퍽 신선하다. 영화감독으로도 활동하는 작가의 이력 덕분일까, 도면을 활용한 서술과 빠른 전개는 사건의 구조를 시각적으로 이해하도록 돕고, 페이지를 수월하게 넘기게 한다. 이 책이 가진 부인할 수 없는 장점이다. 미스터리물에서 기대할 법한 복잡한 인간관계와 복수의 서사 역시 빠뜨리지 않는다. 확실히 가지고 가야하는 것들은 가지고 그 위에 독특한 콤비를 얹어 여타 작품과는 다른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그러나 할 말은 해야겠다. 소설 속 캐릭터가 독특한 개성을 갖는 것은 분명 매력적인 서사를 위해 꼭 필요한 요소이다. 독자가 400 페이지에 달하는 긴 분량을 함께 견디며 읽어나가려면 서사도 서사지만 '주인공이나 특정 캐릭터를 계속 보고 싶게 만드는 매력' 이 책의 중요한 흡인력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는 부우라는 인물이 오히려 이야기의 몰입을 반복적으로 방해한다.


부우라는 캐릭터는 호불호가 갈릴 수 밖에 없는 캐릭터다. 개인적으로는 2000년대 일본 드라마에서나 볼 법한, 민폐를 끼치면서도 스스로 멈추지를 못하는 푼수 같은 오타쿠의 전형으로 보인다. 문제는 그 결점이 귀엽거나 사랑스럽게 다가오지 않는다는 데 있다. 엉뚱하고 과장되며 오지랖까지 넓은 행동이 인물의 매력으로 이어지기는커녕, 다음의 행동을 읽어 나가는데 스트레스를 주는 요소가 된다. 미스터리의 핵심적인 재미를 전달해야 할 캐릭터가 오히려 그 재미를 가로막는 것이다. 독특하고 코믹한 인물로 이야기에 활력을 불어넣으려는 의도는 이해하지만, 과도하게 튀는 행동과 설득력 부족은 결국 작품 전반의 호감도를 떨어뜨릴 수 있다.


그럼에도 캐릭터라는 장벽을 뚫고 끝까지 읽게 만드는 힘은 단연 사건 설정의 기발함에 있다. 살인 사건을 '미스터리 연출'로 바꾼다는 설정은 분명 독특한 재미를 준다. 도면과 트릭이 맞아떨어지는 쾌감, 만화같은 상상력과 다소 라이트한 유머가 섞인 경쾌함, 어딘가 허술하면서도 우스꽝스러운 콤비가 주는 개성. 다만 이 책은 정통파 미스터리의 치밀한 추리 과정만을 기대하기보다는, 독특한 상상력과 코믹한 캐릭터성이 결합된 이야기에 방점을 찍고 접근하는 편이 더 잘 맞을지도 모르겠다.


+ 읽는 독자층이 어떤 사람들이냐에 따라 호불호가 좀 나뉠 듯한 책인데, 비교적 라이트하고 미스터리를 잘 접하지 않았던 사람들이 미스터리물의 매력에 빠질 수 있게끔 안내해주는 느낌으로는 좋아보인다. 정말 갖추어야 할 것들이 어지간한건 다 있는 푸짐한 밥상이라서.




***출판사로부터 도서만을 지원받아 읽은 뒤 솔직하게 작성되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서울 밖 감정
성해나 외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내게 서울은 다른 무엇보다 교보문고가 있는 도시였다"


서울과 지방을 둘 다 살아본 경험이 있기에 이 문장은 선명하게 다가왔다. 서울에는 여러 교보문고 지점이 있지만, 이전에 살았던 곳에는 교보문고가 아예 없었다. 누군가에게는 일상적인 풍경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쉽게 누릴 수 없는 경험이 된다는 것. 서울과 서울 밖의 차이는 그렇게 구체적인 장소 하나에서도 드러난다.


그러나 책이 다루는 건 서울 밖의 단순 지리적 풍경이 아니라 '감정' 이다. 교통이나 문화 인프라의 차이에 머물지 않는다. 서울은 더 많은 기회와 자원이 모인 도시인 동시에 그곳에 사는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무언가를 이루라고, "너도 어서!"라고 재촉하는 도시이기도 하다. 임선우 작가는 수록된 산문 「너도 어서!」 에서 이렇게 말한다.


p.108 | 아무렇지 않게 일상을 살아가면서도 때때로 마음이 조급해지는 이유는 어쩌면 한국 사회가 말하는 성공적인 삶의 지표가 지나치게 일률적이기 때문 아닐까.


성인이 되기 전부터 '인서울' 진학이 중요한 목표가 되고, 성인이 된 후에도 서울에 속해 있다는 사실 자체가 다음 단계로 성공적으로 나아갔다는 증표처럼 여겨지는 현실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서울은 어느새 단순히 장소를 넘어, 내가 얼마나 잘 살아가고 있는지를 증명해야 하는 기준이 되어 버린 것이다.


물론 서울이 모든 사람에게 같은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니다. 작가는 '서울이 사람들을 끊임없이 채근하며 트랙으로 떠미는 것은 비극이지만, 하고 싶은 일이 명확한 사람들에게 그곳은 분명 에너지를 준다'(116)고 말한다. 나는 이 양면적인 시선이 좋았다. 서울은 사람을 조급하게 만들지만, 동시에 무언가를 시작하게 하는 동력이 되기도 한다.


나 역시 서울에서 살 때 하나의 트랙 위에서 빠르게 달리는 기분이었다. 나에 대한 걸 충분히 생각하기도 전에 누군가가 달리고 있으니 나도 달려야 할 것 같았다. 반면 지방에서는 그런 압박감을 상대적으로 덜 느꼈다. 마음 편하게 일상을 보낼 수 있었지만, 그 편안함 속에서 불안이 고개를 들기도 했다. 이렇게 살아도 괜찮은 걸까. 서울에 있는 친구들이 특별한 성취를 거두어서가 아니었다. 계속 시도하고 경험을 쌓아 간다는 사실이 부러웠다. 설령 시도한 일이 실패로 끝나더라도 그 과정에서 무언가를 경험하고 배울 수 있을 테니까. 계속해서 도전하는 삶의 모습을 나는 부러워했다.


지방이라고 기회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다만 나는 스스로 적극적으로 나아가기보다는, 주변 사람들이 달리는 모습을 보며 뒤처지지 않기 위해 함께 달리는 쪽에 가까웠다. 누군가가 만들어 놓은 흐름 속에서는 그럭저럭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지만, 그 흐름에서 벗어나면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멈춰 서곤 했다.

지방에서의 생활은 내가 그런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했다. 그곳에서의 시간이 편안하고 좋았다는 마음과, 그 시간 동안 더 많은 것을 시도해 보지 못했다는 아쉬움은 동시에 존재한다. 그렇다고 그 때를 아무것도 하지 않은 시간이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그때의 나는 나름대로 일상을 살아갔고, 그 시간을 통해 내가 어떤 환경에서 움직이고 어떤 상황에서 주저하는 사람인지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으니까.


서울과 지방을 모두 경험한 뒤에도 어느 한쪽이 더 나은 삶의 터전이라고 쉽게 말할 수는 없다. 서울의 조급함은 때로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가능성을 향해 나아가게 하고, 지방의 편안함은 내가 타인의 속도에 휩쓸리지 않고 살아갈 수 있도록 해 준다. 중요한 건 어느 곳에 사느냐가 아니라 그곳에서 내가 무엇을 얻고 무엇을 놓치는지 알아차리는 일이다.


-

서울에서는 뒤처지지 않기 위해 달렸고, 지방에서는 멈춰 선 자신을 바라보며 불안해했다. 두 공간에서 경험한 감정은 달랐지만, 기저에는 내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답을 내리지 못한 채 타인의 속도를 기준 삼았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서울 밖 감정』은 어느 곳이 더 나은지를 판정하는 대신,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무엇을 욕망하고 어떤 마음으로 하루를 견디는지 들여다본다. 그리고 그 시선은 자연스럽게 내 안으로 향한다.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이는 삶은 어떤 모습일까. 이 책을 덮고 난 뒤에도 그 질문은 여전히 남아 있다. 어쩌면 내가 서울과 지방을 오가며 찾아야 했던 것은 더 나은 장소가 아니라, 나만의 속도로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만을 제공받아 읽은 뒤 솔직하게 작성되엇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환상사회 - 이상적 이미지를 넘어 자기-세계를 만드는 15가지 방법
정지우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우리는 언제부터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게 되었을까. 스마트폰을 켜면 멋있는 사람들의 정돈된 일상과 성공의 기록들이 쉼 없이 교체된다.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삶을 실시간으로 관람하고, 비교하고, 욕망하는 시대. 남들의 화려한 순간이 편집된 필름을 지켜보는 동안, 아무런 문제 없이 흘러가던 나의 오늘 하루는 문득 부족하고 뒤처진 것처럼 느껴져 마음이 조급해진다.


질투와 이미지가 우리의 욕망을 건드리고 시장을 움직이는 현상, 현실의 나보다 인터넷 속 이상적 이미지를 더 가까이 두고 살아가는 현대인의 초상이란 그리 낯선 모습은 아니다. 『환상사회』는 현실보다 SNS 속의 이상적인 '이미지'를 더 가까이 두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호모 판타즈마(Homo Phantasma)’라 이름 붙이고, 우리가 어쩌다 이토록 초조해지고 자신을 잃어버리는지를 논리적으로 해부해나간다.


이전에는 가까운 주변 사람들을 통해서나 짐작하던 삶의 가능성을 이제는 손가락 움직임만으로도 확인이 가능하다. 그만큼 시야의 폭과 함께 선택지는 넓어졌지만, 동시에 자신이 진짜로 무엇을 원하는지 판단하기는 더 어려워졌다. 내가 갈망하는 것은 진짜 그 삶일까, 아니면 그것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미지'일까? 누군가의 성취는 나 역시 이루어 두어야 할 과정처럼 보이고, 다른 이의 취향은 미처 내가 발견하지 못한 '나다움'처럼 느껴진다. 그렇게 여러 사람의 삶을 참고하는 사이, '나다움'은 점차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남다움'으로 바뀌어간다. 환상사회의 무서움은 바로 여기에 있다. 누군가 강제로 정해준 기준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선택했다고 믿게 만들면서 우리를 '이미지의 노예'로 만드는 것.


저자는 이러한 현상을 개인의 의지 부족으로 치부해버리지 않는다. 예쁘게 편집된 이미지들이 무한히 공급되는 알고리즘 환경에서 인간이 완전히 자유롭기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산속으로 들어가라는 것도 현실적인 방안이 될 수는 없다. 이때 2부의 내용이 필요하다. 환상사회를 외면하거나 완전히 극복할 수 있다는 식의 텅 빈 격려를 읊는 대신, 환상을 깨달으면서도 현실에 단단히 두 발을 붙이고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15가지의 구체적 매뉴얼을 제시한다.


세상에는 닮고 싶은 삶이 많고,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조언도 넘쳐난다. 갓생을 사는 법과 예쁘고 단정한 일상 브이로그가 넘쳐나는 시대, 남들의 완벽한 편집본을 따라잡기 위해 애쓰는 동안 내 마음의 구멍을 갉아먹으며 크기를 키워가고 있다면 그 삶은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일까. 완벽이란 세상에 존재하지 않으며, 이 정도면 삶의 목표를 달성했다고 여길만한 도착점도 살아가는 내내 영영 오지 않을 것이다.

이런 시대에야 말로 타인의 기준을 무작정 거부하는 것도, 세상에서 도망쳐 스스로를 격리하는 것도 아닌, 그 안에서 자신만의 판단과 선택을 지켜내는 방법이 필요하다. 더 나은 나를 증명하고 타인의 이미지를 욕망하느라 에너지를 소진해버린 이들이 더 이상 환상과 이미지가 그려낸 허황된 카탈로그만을 뒤적이며 살지 않도록.


+ 개인적으로는 2부보다 1부가 훨씬 재밌었고, 1부만으로도 이 책에 가치를 크게 두고 있다. 1부에 공감하며 줄 죽죽 긋지 않는 사람 거의 없을거라고 확신함.


++ 독서노트 진짜 꽉낌. 특히 '우리 시대 온라인에서의 관계가 유령의 관계라면, AI와 맺는 관계는 오히려 유사 인간관계에 가깝다.'라는 말이 진짜 오래 남았다. 화면 맞은편에 사람 있다는 거 알지만 솔직히 관념적인 개념일 뿐이고 점점 살갗으로는 희미하게 느껴지기 시작한다. 오히려 AI에게 시시콜콜한 일이나 고민들을 더욱 편하게 상담하며 인간들과 했던 상호작용을 하고 있으니까.


p.110 | 우리는 마치 좀비들이 가득한 포스트 아포칼립스에서 혼자 살아남은 존재처럼, AI라는 동굴 속으로 들어가 AI에게 위로받는다. AI는 그 유명한 '아첨 현상'을 견지하면서 우리가 더욱 자기 자신에게만 매몰되도록 만든다. 우리는 AI가 주는 위로 안에서 자기 고립에 갇히게 된다. AI와의 대화는 일종의 끝없는 '자기 대화'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만을 지원받아 읽은 뒤 솔직하게 작성되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에케 호모 - 제16회 혼불문학상 수상작
오수완 지음 / 다산책방 / 2026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자극적인 도파민이나 피비린내 나는 복수극이 주를 이루는 여느 포스트 아포칼립스 서사와 달리, 제16회 혼불문학상 수상작 『에케 호모』는 불친절할 정도로 여백을 두고 잔잔하게 두 사람의 여정을 따라간다. 인류의 99%가 사라진 세계, 살아남은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거대한 문명의 재건일까, 아니면 단 한 사람을 향한 다정함일까.


소설 전체를 관통하며 반복되는 문장이 있다. "너희들은 변하지 않아." 인류의 99%가 사라지는 대재앙인 '강림'을 겪었음에도, 살아남은 인간들은 변하지 않는다. 누군가는 프라임을 신으로 숭배하여 종교를 만들고, 누군가는 번식과 재건에 집착하며, 또 누군가는 멸망한 세상의 법과 질서가 사라진 틈을 타 가장 약한 여성과 아이를 향해 추악한 폭력을 휘두른다.

인간의 욕망과 야만성은 종말 앞에서도 개과천선하지 않는다. 노먼의 말처럼 "아흔아홉 명이 우물을 깨끗하게 써도 한 명이 거기에 독을 풀면 이제 그 물은 아무도 마실 수 없게 되"(79)는 법이다. 개별적인 다수의 선의와 무관하게 존재 자체로 시스템을 오염시키는 독극물 같은 사람은 반드시 있기 마련인지라 여전히 절망적인 비극이 되풀이 된다.


성서에서 예수를 향한 조롱의 말이자, 니체가 인간에 관해 질문한 책의 제목인 '에케 호모(이 사람을 보라)'. 하지만 서브를 지키는 보호자의 이름은 아이러니하게도 '노먼(No Man)'이다. 독자는 이 사람을 보라는 제목 하에서 노먼의 행동과 그들의 여정을 계속 따라가게 된다. 노먼은 황폐해진 세상에서 서브에게 생명에 대한 윤리나 생존하는 방법들을 가르치고, 단지 흑백에서 컬러로 바뀌는 순간의 아름다움을 어린 서브에게 보여주기 위해 여정을 떠난다. 법도 윤리도 무너진 세계에서 서브의 손을 잡고 엑스포로 향하는 노먼의 등은 다정과 책임감이라는 사랑의 형태를 띄고 있어, 독자에게 "인간으로 산다는 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곱씹게 만든다.


그리고 이 무너진 세계의 끝에서, 서브는 무용한 물건에 불과해보이는 책을 모으기 시작한다. 빵 한 조각, 기계 부품 하나가 생사를 가르는 폐허 속에서, 당장의 생존이 중요한 포스트 아포칼립스에서 종이 뭉치인 책은 가장 무용한 물건이다. 이 역시 어쩌면 사랑일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추악함으로 오염된 인류일지라도 그들이 한때 남겨놓았던 가장 아름다운 감정과 문명의 흔적을 잊지 않으려는 또 다른 형태의 사랑으로 읽혔다.


그러므로 이 책은 두 가지의 사랑을 말하고 있을 지도 모르겠다. 사람이 사람에게 건네는 사랑과 사람이 인류라는 종의 흔적을 기억하기 위해 모으는 거대한 사랑. 추악함과 폭력으로 가득했던 오염된 우물 속에서도 인류의 이야기를 수집하는 행위. 그것은 문명 재건이라는 거창하고 오만한 껍데기를 벗겨내고서야 드러나는 사랑의 본질이자, 인간이 인간으로서 마지막까지 지켜내야하는 유산이 아닐까.



+ 아니 더 쓰고 싶은데 솔직히 너무 스포일러라 쓸 수가 없고 근데 이 스포일러를 알아야 이 책이 심장에 콱 박혀버리는데 아주 진짜 환장하겠다 이거예요. 스포 발사해버리고 글 무한정 확장해버리고 싶음


++ 성폭행 장면에 대해서는 뭐... 다른 책처럼 이게 포르노나 욕구 배설의 느낌이 나지는 않고 건조하게 쓰레기같은 인간을 표현했다고 생각해서...그러나 심사평처럼 왜 위원들이 긴 토론을 했을지는 알 것 같음. 어쨌든 서브는 어린 여자아이의 모습을 하고 있으니까. 그냥 읽는 내내 저 새끼를 죽여줘 프라에몽🔪 이런 생각만 함


+++ 내가 읽은 그 어떤 아포칼립스 책과는 궤가 달라서 너무너무너무 좋았음 진짜 독특한 책이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만을 지원받아 읽은 뒤 솔직하게 작성되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세트] 나의 첫 번째 액션 1~2 세트 - 전2권 ㅣ 나의 첫 번째 액션
주성철 외 지음, 한국영화감독조합 외 기획 / 한겨레출판 / 2026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우리는 매일 매끄럽게 편집된 남들의 A컷을 소비하며, 혹은 볼 만한 B컷을 소비하면서 살아간다. SNS에는 성공의 정점만을 잘라낸 하이라이트 영상이 넘쳐나고, 그 화려함과 나의 일상을 비교하다 보면 문득 거대한 무력감이 밀려온다. 전 세계의 찬사를 받는 영화계의 거장들 역시 처음부터 완벽한 프레임 안에서 삶을 시작한게 아님을 알면서도.


『나의 첫 번째 액션』은 바로 그 화려한 레드 카펫 뒤편, 먼지만 날리던 거장들의 초창기 ‘B컷 필름’을 보여주는 책이다. 사실 B컷으로도 편집될 만한 솔직한 이야기도 많았다. 12년 전 절판되었던 『데뷔의 순간』을 개정증보해 31명이나 되는 감독의 스타트 라인을 담아낸 이 인터뷰집은, 포장된 교훈이나 웅장한 성공 신화를 가감 없이 걷어낸다. 대신 그 자리에는 긴장해서 슬레이트에 새끼손가락이 끼이던 봉준호, 47세까지 아내의 가게 문을 여닫으며 글을 쓰던 강윤성, 그리고 남의 영화를 보며 "저 배우들 데리고 몇십억 퍼부은 게 저따위야? 그 돈의 10분의 1만 나한테 줘도, 어우 젠장" 이라며 찌질한 험담으로 밤을 지새우던 박찬욱의 날것 그대로의 고백이 놓여 있다.


저런 인물의 비하인드 컷이 가져오는 매력은 선량하고 아름다운 노력만을 연출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박찬욱 감독의 고백처럼, 때로는 잘나가는 이들을 향한 시기와 질투, "내가 저 사람보다 못할 게 없다"라는 착각이 앞이 보이지 않는 미완의 시간을 견디게 하는 강력한 동력이 되기도 한다. 지금의 결과를 알고 있는 입장에서는 그 모든 일이 하나의 과정처럼 보이지만, 당시의 그들에게는 어디로 이어질지 알 수 없는 현재였을 것이다.




그렇기에 이 책이 남기고 있는 건 '성공한 사람들도 힘든 시절이 있었다' 따위의 뻔한 위로가 아니다. 핵심은 그들 역시 자신이 보내는 시간이 훗날 무엇으로 남을지 알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아무것도 되지 않은 채 암전된 듯한 시간이 언젠가 자신의 시작으로 기억될지, 끝내 아무런 결실도 맺지 못한 채 공백으로 남을지, 당시에는 누구도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어쩌면 우리가 지금 보내고 있는 시간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매일의 불안과 선택이 훗날 어떤 장면으로 기억될지는 현재의 우리에게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잘하고 있는지 확신할 수 없고, 지금까지의 시간이 쓸모없었던 것은 아닌지 불안해진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 나면 적어도 한 가지는 다르게 바라보게 된다. 아직 결과가 나오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지금의 시간을 실패한 장면이라고 단정할 필요는 없다는 것.


정해진 답도, 객관적인 시험도 없는 판. 무수한 변수 사이에서 내 의지만으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을 때, 이들이 선택한 건 거창한 사명감이 아니었다. 그저 스스로를 향한 치기 어린 믿음 혹은 당장 내일의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현실을 어떻게든 밀어붙이는 무모함이었다.

결국 31명의 감독이 복기하는 첫 번째 액션은 영화인들만의 특수한 일화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무언가가 되기 직전, 아무것도 아닌 상태로 공중에 떠 있는 기분을 느끼는 모든 이들이 거쳐야 하는 통과의례에 관한 기록이다. 첫 컷부터 OK 사인을 받는 감독은 없다. 수많은 NG와 엎어지는 프로젝트, 제대로 된 자리가 없다는 불안감 속에서도 그들은 기어이 다음 장면을 향해 카메라를 돌린다. 이 치졸함과 무모함을 보고 있자면 지금 내 인생의 화면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너무 빨리 편집 버튼을 누르지는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미완의 시간을 견디고 있는 모든 이들이 현재 찍고 있는 이 장면이 무엇으로 남을지는 한참 뒤에야 알게 될 테니까.



**하니포터 자격으로 출판사로부터 도서만을 제공받아 읽은 뒤 솔직하게 작성되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