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바디스 걸
버지니아 로버츠 주프레 지음, 김나연 옮김 / 은행나무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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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400 | "내 인생을 살고 싶었어. 그 기억들로부터 멀리 달아나고 싶었어. 하지만 그거 알아? 기억은 지워지지 않아. 게다가 엡스타인은 아무런 대가도 치르지 않고 빠져나갔어. 나는 지금 너무 화가 나.


얼마 전 '엡스타인 파일'이라는 존재를 알게 되었다. 도널드 트럼프와 빌 클린턴 등 미국의 권력자들을 비롯해 빌 게이츠, 영국의 앤드루 왕자 등의 남성들이 그의 아동 성범죄와 얽힌 가해자와 동조자로 지목된 사건들.


『노바디스 걸』은 제프리 엡스타인 사건의 피해자로 알려진 버지니아 주프레의 회고록이다. 하지만 이 책은 엡스타인을 만난 순간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훨씬 이전의 시간, 마땅히 보호받아야 했던 어린 시절이 어떻게 조금씩 무너져 갔는지를 보여주는 데서 출발한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한 소녀가 얼마나 쉽게 위험에 노출될 수 있는지, 그리고 누군가(특히 여성)의 취약함이 어떻게 또 다른 폭력의 통로가 되는지를 마주하게 된다.


그래서 이 책을 읽는 경험은 단순한 분노로 끝나지 않는다. 사건 자체의 잔혹함도 분명하지만, 더 오래 마음에 남는 것은 폭력이 가능해지는 환경과 침묵이다. 누군가는 알고 있었고, 누군가는 돈을 받고 모른 척했다. 그 사이에서 피해자는 끊임없이 자신의 경험을 증명해야 하는 위치에 놓인다. 왜 어떤 고통은 당사자가 끝까지 증명해야 하는가. 성폭력 피해자에게 흔히 씌워지는 '창녀' 프레임, 그리고 범죄자와 합의한 피해자에게 요구되는 '결백함' 같은 것들. 그러니까, 왜 돈을 받았냐, 굳게 필사적으로 싸워야 하는 것 아니냐는 제 3자의 폭력들이 읽는 사람의 숨을 막히게 만든다.


이 회고록은 또한 ‘생존’이라는 말이 얼마나 복잡한 의미를 품고 있는지도 보여준다. 우리는 종종 살아남은 사람에게 강하다고 말하지만, 그 말 속에는 그들이 견뎌야 했던 시간의 모양이 충분히 담기지 않는 것 같다. 피해자가 자신의 이야기를 세상에 꺼내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했고, 그 과정에는 수많은 실제적인 위협과 두려움이 뒤따랐다. 그럼에도 그녀가 끝내 말을 멈추지 않았다는 사실은 이 책에서 가장 강하게 남는 부분이다. 한 사람의 증언이 또 다른 목소리를 불러내고, 그 목소리들이 모여 결국 거대한 사건의 진실을 드러내고 세상을 바꾸기 때문이다.


p.559 | 단 한 사람이 때로는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가능성이 있다면, 기어이 부딪쳐 봐야 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녀의 삶을 읽고 나면 이 문장의 무게가 더욱 귀하게 느껴진다. 우리는 종종 개인의 힘은 너무 미약하다며 한 사람의 발버둥을 쉽게 무시하곤 한다. 거대한 권력과 구조 앞에서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은 없다고 단정해 버리기도 한다. 하지만 지금 나는 그 질문을 다시 하고 있다. 과연 정말 그럴까.


솔직히 말하면 이 600쪽이 넘는 두꺼운 책을 하루 만에 읽어 내려갔다. 그렇다고 해서 쉽게 읽힌 책은 아니었다. 몇 번이나 책을 덮어야 했고, 읽는 동안 세상이 견딜 수 없이 잔인하게 느껴졌다. 그럼에도 끝까지 읽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 이야기는 이미 지나간 과거가 아니라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피해자들이 감당해 온 시간을 생각하면, 내가 괴롭다는 이유로 책을 덮고 시선을 돌리는 일은 쉽게 할 수 없었다.


버지니아는 자신의 이야기가 누군가에게 들리기를, 그 목소리가 세상을 조금이라도 바꾸기를 바랐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의 딸들이 더 안전한 세상에서 살아가기를 원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한 사람으로서, 그리고 한 여성으로서 그 이야기를 끝까지 외면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p.636 | 엡스타인은 사라졌지만, 그가 마음 놓고 괴물이 될 수 있었던 토양은 여전히 비옥하다. (···) 소녀의 가치를 오직 남성의 시선에 맞추어 재단하고, 남성들에게는 어린 소녀가 가장 탐스러운 존재이며, 엡스타인이 지껄였듯 '어릴수록 더 좋다'라고 부추기는 저열한 문화는 여전하다. 이런 뒤틀린 문화가 모든 남성을 잠재적 범죄자로 만든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이러한 사회 분위기 탓에 포식자가 그 추악한 얼굴을 드러내도 많은 이들이 고개를 돌려 외면한다는 것은 확실하다.


+난 진짜 저런 ㅆ새끼들이랑 지구 같이 쓰고 싶지 않은데

++ 버지니아가 로비(책 내내 그녀의 가장 큰 지지자로 나온 그녀의 남편)의 가정폭력으로 인해 회고록 출간을 앞두고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는 것까지 진짜 비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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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삶을 위해 죽음을 묻다 - 《파이돈》에서 《팡세》까지, 삶과 죽음을 읽는 철학 수업
최대환 지음 / 어크로스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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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대개 삶에 대해 이야기할 때 시작에 집중한다. 무엇을 하고 싶은지, 어디로 가고 싶은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같은 질문들이다. 그러나 삶이 시작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언젠가 반드시 맞이하게 될 끝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된다.


『좋은 삶을 위해 죽음을 묻다』는 바로 그 지점에서 출발하는 책이다. 살아가는 동안 우리가 자주 여러 이유로 인해 미뤄 두었던 질문을 조심스럽게 꺼내 보이며, 인간이 오래전부터 그 질문을 어떻게 붙잡아 왔는지 보여준다. 철학자들은 저마다 다른 시대에 살았지만 비슷한 문제 앞에서 멈춰 섰다. 죽음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사실이 인간의 삶을 어떻게 바꾸는지에 대해.


철학자들은 저마다 다른 시대에 살았지만 비슷한 문제 앞에서 멈춰 섰다. 죽음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사실이 인간의 삶을 어떻게 바꾸는지에 대해. 그들의 고민은 결국 인간의 삶으로 되돌아온다. 죽음은 단순히 삶의 끝을 의미하는 사건이 아니라, 살아 있는 동안 무엇을 선택하고 어떤 태도로 시간을 보내야 하는지를 묻게 만드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읽는 동안 특히 마음에 오래 남았던 부분이 있다. 몽테뉴가 말한, “어떻게 죽을 것인가”라는 질문은 결국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에 속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 말이 내게는 죽음을 따로 떼어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방식 안에서 함께 이해해야 한다는 뜻으로 다가왔다. 이 문장을 떠올리고 나니 책에서 이어지는 철학자들의 이야기가 조금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들이 죽음에 대해 이야기했던 이유 역시 결국 삶을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였기 때문일테니. 그렇기에 우리는 그 죽음에 대한 질문을 미루거나 외면하기도 하지만,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다.


책을 덮은 뒤에도 죽음이라는 주제는 분명한 답으로 정리되지 않는다. 다만 그것이 이전보다 훨씬 가까운 질문처럼 남는다. 우리가 가진 시간이 결국 유한하다는 사실을 떠올리는 순간, 지금의 하루를 무심히 흘려보내기에는 어딘가 아깝게 느껴진다. 그렇게 우리는 죽음이라는 질문 앞에 서 있는 인간의 모습을 한동안 바라보게 된다.



+ 제목에서 오는 느낌에서 나는 이게 그냥 신부님의 에세이, 죽음에 대해 생각해보는 그 정도의 글인줄 알았다. 진짜 이렇게까지 본격적으로 철학 이야기일줄은 몰랐다는 이야기... 상상이상의 책이라 진짜 뇌에 힘 깍 주고 읽었다 이거예요....

개인적으로 죽음에 대해서 이만큼이나 생각해본 적이 없다. 내가 죽고 나서 어떻게 기억해주었으면 좋겠다던가, 그런 건 진짜 전혀. 지금 이 순간에도 딱히 떠오르는 건 없지만, 그래도 가족들이 너무 오래 슬퍼하진 않았으면 좋겠다. 근데 내가 지금 죽으면 필경 좋지 않은 사유일테니 힘들겠지... 무병장수해야겠다.


++ 이 책과 함께 오는 질문이 있는데 이 중 '지금 내 주변에서 누가 떠나면 가장 허망할 것 같은지', 이건 생각할 것도 없다. 나는 우리 엄마 동결건조시켜단이기 때문에. ;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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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이는 모두 날아오른다
요아힘 마이어호프 지음, 박종대 옮김 / 사계절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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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478 | 점점 더 그런 느낌이 든다. 과거란 사실 미래보다 훨씬 더 불확실하고 확정되지 않은 곳이 아닐까 하고


『죽은 이는 모두 날아오른다』. 죽은 사람이 날아오른다니, 꽤 거창하고도 한번에 이해할 수 없는 말이다. 정신병원이 집이었던 소년의 일기장을 보는 듯한 자전적 소설이라는 줄거리를 들으면 더더욱.


요아힘의 유년기는 자연스레 병동과 환자들 사이에서 흘러간다. 보통 정신병원이라고 하면 긴장부터 하게 되지만, 요아힘에게 그곳은 자신의 전부인 집이다. 병원을 지나 학교에 가고, 환자들과 마주치며 하루를 보내고, 밤에는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들으며 잠든다.

오히려 더 이해하기 어려운 쪽은 바깥세상이다.

어른들은 웃으면서 타인에게 상처를 주고, 옳다고 말하는 것과 실제 행동이 종종 다르다. 그에 비해 병원에 있는 사람들은 엉뚱하고 예측불가능 하지만 적어도 자기 방식대로 솔직하게 살아간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건, 이 이야기가 끊임없이 ‘이해’라는 문제를 건드린다는 점이다. 사람은 서로를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가까워질 수 없는 것도 아니다. 어떤 순간에는 이해보다 단순한 공감이, 혹은 공유하는 시간이 더 큰 역할을 하기도 한다.


쉽고 재밌는 소설은 아니다. (근데 독일 소설 치고는 쉽고 재밌다고 생각함) 정신병원을 배경으로 하는 것치고 사람들의 통상 인식처럼 극적이고 놀라운 사건의 연속도 아니고, 이야기의 흐름도 꽤 느긋하다. 그러나 타인의 앨범을 천천히 넘겨보듯, 드라마를 한 편씩 보는 것처럼 페이지를 넘기다보면 마지막에 다시 앞으로 돌아가게 된다. 기묘한 여운과 그리움이 남아서.

아마 그 이유는 결국 이 책 자체가 특별한 타인의 삶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공통으로 갖고 있는 기억과 닮아 있기 때문일 지도 모른다. 어린 시절의 순간, 이해하지 못했던 가족들, 시간이 지나서야 조금씩 풀려가고 바라볼 수 있게 되는 마음들까지.


즉, 이 '죽은 이는 모두 날아오른다'는 말은 어쩌면 말 그대로의 의미가 아니라, 이미 지나간 시간과 떠나버린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일지도 모른다. 기억이란, 실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어디선가 조용히 내 발 근처에서 떠다니고 있었을 뿐이라고, 약간의 틈이 생기면 언제든 날아올라 단순한 과거를 다른 의미로 다시 돌아오게 만드는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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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괴물이 사는 마음 - 과학으로 헤쳐 나가는 죄악의 세계
가이 레슈차이너 지음, 이한음 옮김 / 흐름출판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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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종종 마음속 감정을 통제하지 못할 때 스스로를 탓한다. 나태한 나를, 과식하고 절제하지 못한 순간들을 후회하고 비난한다. "내 의지 꼬라지..." 입에 붙이고 살면서 침대에 늘어져서 시간을 보낸 적... 나밖에 없지는 않을텐데..?

하지만 어쩌면 그 감정들은 실패의 증거가 아니라, 인간이라는 종이 살아남기 위해 간직해 오고, 환경에 맞춰 변형되어 온 생존의 흔적일지도 모른다. 『일곱 괴물이 사는 마음』은 없애야 할 괴물을 찾아 손가락질을 하는 책이 아니라, 왜 그 괴물들이 우리 안에 존재하는지를 과학적 근거를 슬쩍 얹어줌으로서 이해하게 만드는 책이다.


P. 343 / 모두가 자기 행동의 수동적인 방관자라면, 책임은 어떻게 될까? 궁극적으로 우리는 자신이 제한적으로만 통제할 수 있는 것, 또는 전혀 통제할 수 없는 것에 책임을 질 수 있을까? 특정한 경로를 선택할 자유, 즉 분노나 탐식, 색욕, 질투, 나태, 탐욕, 교만에 빠질지 여부를 선택할 자유가 없다면, 이런 생각이나 행동이 정말로 개인의 도덕 가치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자유 의지란 무엇일까?

『일곱 괴물이 사는 마음』은 종교와 도덕이 오랫동안 죄로 분류해 온 감정들 (분노, 탐식, 색욕, 질투, 나태, 탐욕, 교만) 을 전혀 다른 각도에서 바라본다. 신경과 전문의인 저자는 실제 환자들의 임상 사례를 통해, 우리가 성격이나 인격의 결함이라 여겼던 행동들이 때로는 뇌 회로의 변화, 신경계의 이상, 혹은 진화 과정에서 남겨진 기능일 수 있다고 설명한다.


저자가 소개하는 사례의 사람들은 어느 날 갑자기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다. 뇌 손상 이후 분노를 통제하지 못해 갑작스럽게 공격성을 띄는 사람들, 질병 때문에 식욕이 멈추지 않거나, 충동과 욕망이 과도하게 증폭되기도 한다. 그 변화는 충격적이지만 동시에 낯설지 않다. 왜냐하면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우리 역시 비슷한 감정의 파도 속을 매일 지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다행인 점은 이 책이 모든 건 뇌 탓이라고 말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행동의 원인을 이해하는 일과 책임을 면제하는 일은 전혀 다르다는 사실을 가져가고 있다. 그렇기에 저자는 인간을 좀 더 복잡한 존재로 보자고 제안한다. 자유 의지가 있는 것 같다고 느끼는 마음과 자신이 쓴 책의 내용 사이에 모순이 있음을 인정한다. 도덕적 판단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부분이 분명 존재하며, 과학이 비추지 못하는 틈 사이의 영역이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가 고뇌하는 과정에서 덩달아 읽는 사람도 같이 과학적 설명과 인간의 책임 사이의 애매한 경계를 계속 고민하게 된다. 만약 감정이 뇌의 작용이라면 우리의 책임 범위는 어디까지일까? 자유의지는 정말 존재하는 걸까? 읽다 보면 어느새 철학적인 고민까지 고구마 줄기를 뽑으면 줄줄 따라오는 고구마처럼 이어진다.



사실, 책이 가볍다고는 할 수 없다. 다루는 내용이 신경과학과 의학 사례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보니 어쩔 수가 없다. 특히 뇌 구조나 기능에 대한 설명이 등장할 때는 잠깐 집중력이 필요하기도 하다. 그렇다고 해서 어렵게 느껴질 정도는 아니다. 전문 용어를 길게 늘어놓기보다는 다양한 사례와 함께 설명이 이어지기 때문에, 천천히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개념이 자연스럽게 이해된다. 약간의 난이도는 있지만, 호기심이 있다면 충분히 읽어볼 만한 균형을 갖춘 교양서에 가깝다.

특히 내 의지를 매일 밤 후회하면서 나의 마음을 줘팬 사람들이나 나의 선택을 스스로도 이해하기 어려웠던 사람들이라면, 나는 왜 이런 인간이지...라는 의문을 가져본 사람이라면 꽤 흥미롭게 빠져들 수 있을 것 같다.



+ 개인적으로 흐름출판의 이런 책들을 좋아함 『1밀리미터의 싸움』(페터 바이코츠, 2026) 이나 『악마와 함께 춤을』 (크리스타 K. 토마슨) 같은 것들. 특히 『1밀리미터의 싸움』 이거 진짜 재밌는데....


++ 읽다보면 <인사이드 아웃>을 떠올리지 않기가 어렵다. 나를 위해 화내고 분노하고 슬퍼하는 모든 감정들, 나를 위해 작동하듯 타인의 버럭이와 슬픔이 역시 그들을 위해 일하고 있을 것이다. 나 역시 뇌의 작동에 의해 특정 행동을 하고 있다면, 그들 역시 자신의 의지와는 관련 없이 뇌의 작동으로 부정적인 면모를 보이고 있을 지도 모른다. 나에게는 용서를, 타인에게는 이해의 한 발자국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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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을 수 있을 만큼의 진실
김유나 지음 / 창비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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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96 | 하지만 태은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이렇게 사는 삶’에 대해 생각했다. 마음 편히, 우리 둘이 재밌는 거. 태은이 골백번을 넘게 상상하다 끝내 경계하고 도리질 쳤던 거.

『믿을 수 있을 만큼의 진실』 은 사람을 위로하기보다, 우리가 이미 견디고 있는 삶의 감각을 정확하게 건드린다. 이 단편집의 인물들은 삶을 바꾸려 하지 않는다. 정확히는, 바꾸고 싶지만 바꿀 수 없는 그런 자리에서 오래 버티고 있는 사람들이다. 대신 각자의 자리에서 조금씩 비틀리고, 때로 도망치고, 다시 돌아온다. 은행을 턴 「부부 생활」의 인물들 조차 그 돈을 통해 삶을 극적으로 바꾸지 않는다.


인물들은 나약해서가 아니라, 애초에 떠남이라는 선택이 쉽게 허락되지 않는 세계 속에 놓여 있다. 가족도, 노동도, 삶의 조건도 단번에 끊어낼 수 없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소설집의 인물들은 탈출 대신 지속을 선택한다. 혹은 선택할 수밖에 없다.


개인적으로는 「너 하는 그 일」이 좋았는데, 묘하게 느껴지는 서늘함이 인상적이었다. 지난한 수험 생활을 하는 태은과 폭력을 저지르는 남자의 옆을 떠나지 못하는 엄마. 둘은 각자의 위치에서 노력하고 견뎌낸다. 특히 태은은 애매한 상황에 놓여 있다. 시험의 가채점 결과도 애매, 삶도 애매, 그러므로 미래도 애매. 상승은 커녕 추락조차 확정되지 않은 불안정한 상태.

노력하면 벗어날 수 있는가? 희망을 가지면 현실은 바뀔 수 있는가?

나는 이 단편에서 희망이 삶을 바꾸지 못하는 순간을, 노력이라는 서사의 차가움을 읽었다. 그들이 물류센터에서 일하고 탈출하는 그 순간까지. 그 탈출은 해방 같으면서도 승리의 서사가 아니다. 멈출 방법이 없어서 계속 사는 사람들, 도망치면서도 또 다시 버티는 사람들.


『믿을 수 있을 만큼의 진실』을 읽다보면 무엇이 특별히 해결된 것도, 뚜렷한 희망을 발견한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인물들의 표정들이 오래 남는다. 그들은 삶을 바꾸지 못했고, 관계를 정리하지도 못했으며, 현실을 크게 극복하지도 못했다. 그럼에도 각자의 자리에서 하루를 계속 살아간다. 이 소설집이 남기는 여운은 바로 그 지속의 감각에서 비롯된다.

삶이 쉽게 나아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그 안에서 자기 자신을 완전히 외면하지 않는 순간들. 더 나은 삶을 약속하지 않으면서도, 조금 덜 거짓된 하루를 살아내는 일이란.



+ 코로나 팬데믹으로 생계에 직격탄을 맞자 은행털이를 시도하는 학원원장 구영수와 요양보호사 오진희 커플 이야기인 「부부생활」도 재밌는데, 아 이거 그냥 보니 앤 클라이드 아닌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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