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딜과 신자유주의 - 새로운 정치 질서는 어떻게 탄생하는가 Philos 시리즈 28
게리 거스틀 지음, 홍기빈 옮김 / arte(아르테)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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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은 너무나도 경제학 전문 도서 같지만 이는 미국 정치사에 대한 이야기이며, 그것을 이해하기에 이만큼 적합한 책을 여지껏 보지 못했다. 타국에 사는 제 3자인 나는 왜 저 대통령이 당선이 되었는지, 왜 그들이 그렇게 무리한 정책을 밀어붙이는지 이해 할 수 없는 일들이 많다. 저 이유들이 경제 정치 질서로 납득이 된다. 노동자, 기업인, 흑인, 백인 등 투표권자들은 자신의 이해 관계에 맞는 방향으로 지지자를 정한다. 그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 정치인들은 정책으로 호소하고 이는 보통 '먹고 사는 일'과 직결된 정책 방향에 무게가 쏠린다. 이 책은 그 미국인들의 마음을 세계 정세와 경제 상황, 인종 차별 등 다양한 주제와 묶어 미국 정치의 흐름을 설명하기 때문에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에게도 그들의 선택을 납득시킨다. (물론, 선택에 공감이 된다는 것은 아니지만.)

 


 

 

흐름은 상단 그림이 전부이다. 미국 건국 당시부터 읊는 것이 아니라 뉴딜질서가 어떤 상황에서 부상하였는지 부터 시작하여 뉴딜을 몰락시킨 신자유주의의 상승 그리고 다시 해체. 그 뒤, 현 시점인 트럼프, 바이든 정부까지가 이 책의 내용이다. 먼 나라 타국의 이야기이지만 미국 정치의 흐름은 세계에 영향을 미친다. 미국에게 도움도 안되는 베트남전쟁, '악의 축'으로 지정된 이란·이라크·북한, 리먼 브라더스의 도산으로 시작한 주식 시장의 붕괴 등 세계사를 휩쓴 굵직한 사건들은 분명 미국에 그 뿌리를 두고 있으나 한국에도 그 영향을 담은 바람이 분다. 

 


■ 루스벨트와 뉴딜주의자들은 중앙집권 국가의 힘을 비약적으로 증대시켜 풀어냈으며, 이는 전쟁 때가 아닌 평화 시에는 거의 불가능할 정도의 수준이었다. (p.44)

 

 

도로, 교량, 공항, 댐, 학교, 도서관을 많이 만들어 미국의 경제 인프라를 개편하면서 500만 명에게 일자리를 만들어 준 정책이 뉴딜 정책이다. 물론 도덕적 관점이 독특하다. 공공선이 개인의 권리보다 우선되며 이 공공선이란 개인 성취의 기회를 향상시키는 것이 되어야 하는데 이런 자유를 사람들이 향유하기 위해서는 시장은 물론 사생활에도 정부의 개입이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뉴딜 정책은 사람들의 공산주의에 대한 공포와 맞물려 지지를 확보하고 자리를 견고히 잡아간다.

  

  

신자유주의를 부상시킨 레이건의 정책은 나오는 족족 충격적이었지만, 그 중 제일을 뽑자면 파업을 이유로 노동자들을 해고했다는 것과 방송 매체의 공평성을 공적으로 규제하던 정책에서 언론을 '해방'시켰다는 점이다. '방송공평성법'의 사장, 언론 공평성 원칙의 철폐. 그러므로 언론은 객관성과 균형을 위해 노력할 필요가 없어졌다는 것인데, 이게 신자유주의자들이 그렇게 부르짖는 자유인가. 언론 매체가 너무나도 집권당과 기득층의 스피커로 떨어질 위험만 높아지는 것으로 보여 정말 그 사람들이 말하는 자유가 만인의 자유인지 의심이 들었다.

 


■ 이와 마찬가지로 레이건이 파업을 이유로 노동자 전체를 해고한 것은 대통령이 파업을 분쇄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한 것에 맞먹는 행동이었다. 이는 대통령과 여당이 이제 노동자들의 힘을 송두리째 날려 버리기로 작정했다는 의사를 담은 통첩이었다. (p.216)

 

 

정말 즐겁게 읽었다. 이 책은 흥미롭지만 어려웠던 정보들이 읽기 쉽게 쓰여져 있다는 큰 장점을 가지고 있다. 가장 큰 이 책의 무기는 미국인들의 선택에 대해 제 3자도 납득이 가게끔 설명하고 있다는 것으로, 저자가 얼마나 예리하게 정치, 경제, 사회를 꿰뚫어보고 있는지를 알려준다. 단순 정보의 나열이 아닌 서사의 흐름으로 들여다보는 미국 정치사는 어느 누가 접하더라도 분명 어렵지 않을 것이다. 현재 미국에서는 다시 트럼프가 조명되고 있다. 심지어 얼마전에는 그가 교도소에서 대통령 취임이 가능할 것이라는 기사도 읽었다. 어느 누가 되었든 미국의 정치는 세계에 발자국을 남기며 한국에는 큰 영향을 미친다. 타국민의 눈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트럼프의 재등장으로 다시 긴장감이 도는 이 시점에 읽기 적절한 책이라 생각한다.

 

 

 오랫동안 트럼프의 법률 자문을 맡았던 마이클 코언의 회상에 따르면 2008년과 2009년 사이 동안 트럼프는 "누가 보더라도 명석한 두뇌를 가진 잘생긴 젊은 흑인 남성이 [백악관을] 차지하는 것을 보면서 글자 그대로 미쳐 날뛰었다". (p.446)



+ 이상하게 레이건의 정책을 보면서 나는 가까운 곳의 누군가를 떠올렸다. 이상해…백인의 얼굴에서 동양인이 보여….나는 용산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것이야… 

 

 

 

*북서퍼 2기 자격으로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읽은 뒤 솔직하게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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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MBTI를 확인했습니다 - 너와 나의 건강한 관계를 위한 MBTI 소통법
박소진.김익수 지음 / 원앤원북스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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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이라는 것도 건강하게 적절히 표출하는 것을 배울 필요도 있습니다. 그리고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전략은 일시적이고 피상적이라서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습니다. (p.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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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액형이 뭐예요?" "O형이요." "성격이 둥그시겠네요." "엥" 보다는

"MBTI가 뭐예요?" "INFP요." 쪽이 더 과학적인 느낌도 들고 신빙성 있지 않나.

특히 MBTI는 타인에게 여러 질문을 하지 않고, 그 사람의 사적인 면을 건드리지 않는 선에서 대강의 성향을 파악할 수 있다는 점이 가장 큰 장점이라고 생각한다. 나랑 안 맞는 면을 봤을 때, 그걸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고 부드럽게 성향 차이로 받아들이게 될 수 있다는 것도 나쁘지 않고.



요즘은 회사 서류에도 MBTI를 쓰라고 하고 면접에서도 물어본다는데, 이건 좀 과하다 싶긴 하다. [회사에 맞는 인재상으로 MBTI 바꾸기] [대기업에 맞춘 전략적 MBTI] 같은 원데이 클래스도 나올 것 같음. 아. I세요? 취업시장에서는 역시 내향형은 선호하지 않죠. 이번 기회에 3개월 수강하시면 파워 E로 바꿔드릴 수 있는데 어떠세요?



인터넷 서점에 'MBTI'라는 키워드를 입력하면 벌써 시중에 100권도 넘는 서적이 풀려있다. 물론 한 권도 읽어본 적이 없다. 나에게는 이 책 하나로도 충분하겠다 싶기도 하고.

저자 두 명의 대화 형식으로 진행되는데 약력에서 오는 설득력과 더불어 심리 검사에 대한 적당한 설명, 유형별 분류는 나처럼 MBTI에 대한 책을 읽지 않았거나 완전히 모르는 사람이 보고 끝내기에 적당하다.

심지어 쉬이 돌아다니는 정보 이상으로 구체적이고 더욱 세분화된 분석, 직업이나 스트레스 관리, 의사소통 방법들도 나오니 성격 유형별 분류를 하는 자기계발서로서 제 기능에 충실하므로, 나를 다시 보고자 하거나 인사 관리 등 특정 목적을 가지고 읽는다면 충분히 만족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나는 다양한 MBTI에 대한 설명보다 드라마 이야기를 해 주는 것이 더 재밌었다. 설명이 유형별로 다양해도 어차피 나와 가족, 친구들의 MBTI 외에는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오히려 드라마 <더 글로리>의 문동은은 계획형인 J, 그 뒷받침을 해주는 현남은 인식형인 P일거다 등 인물들의 성향으로 추리해가는 장이 훨씬 흥미로웠으므로 바람이 있다면 언젠가 각잡고 영화, 드라마에서 보이는 인물의 MBTI에 대해 저자들이 유머러스하게 이야기해주는 책을 만날 수 있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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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의식은 자신을 많이 의식하는 것이고 자신감은 부족하기 때문에 불안이 높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p.63)


▪︎사고형(T)은 스트레스 내용이나 원인에 관심을 두는 반면에, 감정형(F)은 스트레스로 인한 사람의 갈등, 인화의 유지 등 관련 사람을 염두에 두고 갈등을 바라 본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p.270)


▪︎MBTI 성격 유형이 일하는데 있어서 필요한 역량을 설명하기에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직관형이라 해서 감각이 하나도 없는, 내향형이라 해서 외향적인 일을 하나도 못하는 것도 아니고요. (p.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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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 소이 이야기
송미경 지음 / 읻다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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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제리미니베리보다 제리베리미니가 낫다고 생각했다. 그건 지금도 그렇다. 혹은 베리제리미니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그건 뭐 아무래도 괜찮았다. 이미 우린 누구도 그 긴 이름의 순서를 바꾸거나 혼동하지 않았다. 그리고 우리에겐 메리 소이라는 지긋지긋한 기다림이 끝난 것, 그래서 그 이름을 입에 올리지 않게 된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p. 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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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어릴 적에 잃어버린, 빨간 코트에 흰색 베레모를 쓴 동생 메리 소이. 사라진 동생을 기다리는 엄마의 사연은 딸기맛 웨하스에 얽힌 추억과 함께 제과 회사인 ‘미미제과’의 마케팅으로 널리 알려지면서, 미미제과는 과자 상자에 소이를 찾는 광고를 싣고 심지어 은수의 집을 웨하스 집으로 바꿔놓는다. 사례금을 노리고 여러 메리 소이들이 집으로 찾아오게 되는 와중에 그 메리 소이들 사이에서도 가장 눈에 띄고 가장 메리 소이 같지 않으면서 메리 소이 같은 ‘제니미니베리’가 찾아온다.



동화의 껍데기를 뒤집어 쓴 현실같다. 마치 은수가 살고 있는 딸기맛 웨하스 집 처럼. ‘메리 소이’, ‘제니미니베리’ 같이 동화같은 껍데기 속에는 부동산 사기를 당하거나 별 다른 꿈이 없이 살거나 매 끼니 배달 음식을 시켜먹는, 다소 쓸쓸하기도 한 사람들이 사는 현실이 담겨있다. 과자집 밖에서 바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인형을 끌어안고 현실을 외면하면서 살아간다 보일 수도 있을 인물들.

화자인 은수는 주변 인물들을 관찰하는 관찰자 그 이상 이하도 아니다. 친구를 만나고 삼촌을 만나고 가족들이 있는 평범한 사람이면서 만나본 적도 없는 이모를 기다리는 것이 삶의 일부분이 된 사람. 성장물도 아닌 이 소설의 주인공은 그저 바라보기만 하고, 결국 원더타운을 떠나는 것 역시 의지가 아니라 삶에 등 떠밀려 동화를 잃는 어른처럼 그렇게 떠나게 된다.


책을 읽으면 살면서 생각해오던 것들을 밍밍한 기분으로 돌아보게 된다. 물 흐르듯 그냥저냥 사는 은수를 보며, 일정한 수입이 없는 과자집의 사람들을 보며, 어떤 ‘메리 소이’가 와도 크게 묻지 않고 곁을 선뜻 내어주는 엄마를 보면서. 하나하나 따져가지 않고 흐르듯 사는 삶에 대해 생각한다. 그냥 그런 사람도 있을 수 있는 거 아닐까. 악착같이 현실에 매달리지 않아도, 평생을 기다리던 사람을 만나지 못하더라도, 진짜는 아니더라도 진실로 받아들이는 그런. 과자집 사람들의 사라짐까지 환상 같았던 이야기였다.



+책 만듦새에 대해 말을 안 할 수가 없는데, 따뜻한 색감부터 오돌토돌한 질감까지 너무 예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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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존재는 생각만으로도 그저 슬퍼진다. (p. 115)


▪︎마음의 무게는 기억을 조작한다. 우리가 함께한 시간에 곱하기를 하는 것이다. 나와 내 동생의 시간이 모두 통편집된 것은 우리가 함께한 시간 중에 의미 있는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p. 155)


▪︎4년을 사귀는 동안 함께 사는 생명체에 대해 한 번도 말하지 않은 것은 끔찍한 일일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또한 어떤 이유로 무언가를 숨겨야 했다면, 누군가를 보호하거나 매우 수치스럽거나 말하기 힘들어서 그랬다면 그게 무엇이든 이해할 수 있지만, 그냥 무관심해서거나 거기에 아무 이유도 없었다면 매우 위험한 일이라고, 언젠가 자신도 누군가에게 말해지지 않는 집 안의 턴테이블이나 윙 체어 같은 존재로 전락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고도 덧붙였다. (p. 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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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반대편에 들판이 있다면 - 문보영 아이오와 일기
문보영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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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판의 뜻은 무엇인가? 사람이 걷게 만든 길은 아니지만 걸어도 괜찮은 길. 사람이 걷도록 만든 길보다는 이런 야생의 길에서 사슴을 만날 확률이 높을 테지만 노엘은 오늘도 사슴을 만나지 못했다. 졸린 눈으로 눈을 비비며 사슴을 만나러 갔다가 풀숲에서 나타난 것이 사람이어서 실망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그런 길. 하루를 시작하는 대부분의 이들은 들판의 반대 방향으로 걸어 다운타운으로 간다. 삶의 반의어는 들판이구나. 그럼 들판을 걸어야지. (p.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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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장쯤 읽었나. 강한 예감이 들었다. 내가 이 책을 사랑하게 되리라는.


아이오와 글쓰기 프로그램 (30여 개국의 작가들이 3개월간 한 호텔에 묵으며 여러 문학 행사에 참여하는 작가 레지던시 프로그램) 에 모인 다양한 사람들. 코믹한 작가의 시선으로 본 사랑스러운 사람들과 조금은 비일상적이고 엉뚱한 일화들은 한 편의 시트콤을 보는 듯 했다. 어쩜 저렇게 독특하고 사랑스러울 수가 있을까. 나는 짧은 글들에서 다운타운으로 가는 길을 상상했고, 그 반대편의 너른 들판을 상상했고, 중간에 있을 조금은 낡았지만 분명 따뜻할 호텔을 떠올렸다. 매일매일 좋아하는 것들에게 죽는 귀여운 오릿, “How are you?”가 열 받는다며 복수하겠다는 루시, 새벽 5시에 사슴을 찾으러 들판으로 향하는 노엘, ‘전망 없는 작가들의 모임no view writers’ party’과 날마다 종이컵을 관찰하는 야스히로, 코토미와 에바 그리고 문보영 시인 삼총사. 에세이를 읽으며 상상의 나래를 펼치기 쉽지 않은데 이 일기는 어쩐지 소설처럼 읽게 되었다. 마치 성장 소설 같은 그런 일기. 첫 장의 작가와 마지막 장의 작가가 확실히 다르다. 지구 반대편에서 다국의 언어를 접하고 생각을 들으며 성장한다는 무겁고 어쩐지 거창한 느낌보다는 친구들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시간을 좋아하던 초반에서 그들의 대화를 이해하고 싶어지는 사람으로 변한 것. ‘미세하게 사는 것을 그만두고(244)’ 싶어진 사람이 되었으니까.


“자신이 사는 곳을 사랑하기란 너무 어렵지 않은가요?” 이 질문에 나는 뭐라고 말할 수 있을까. 내가 사랑하는 여행지는 망설임 없이 말할 수 있는데. ‘우리 동네 ㅁㅁ동을 사랑합니다’ 라고 말하는 모습을 상상하자니…음, 거짓말 같다. 분명 살고 있는 터전이 주는 익숙함과 편안함은 있지만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나. 애초에 사랑해서 산다는 느낌보다는 어쩌다 보니 살게 된건데. 여러 곳을 다녀보고 부유하다보면 답을 찾게 될 날이 올까.


이 글들이 일기의 부스러기라고 했지만 그 부스러기를 줍는 내내 웃었고 공감했고 여유를 찾을 수 있었다. 작은 조각에서 전해져 오는 아이오와를 나 역시 사랑하게 될 것 같다.


+ 작가님 진짜 재밌는 사람… 주섬주섬 시집과 다른 산문집을 보관함에 담았다.

 

 

▪︎내부에서 더 진한 내부로 뛰어드는 것도 일종의 탈출인 셈이다. (p.40)


▪︎나의 시를 설명하는 데 반드시 한국을 소개하는 과정을 거쳐야 하는 것은 아닌데, 그건 내가 한국 문화의 영향을 받지 않아서가 아니라 반대로 한국을 외부인의 시각에서 바라볼 기회가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영향 관계가 내적으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p.43)


▪︎‘불만을 품을 수 있다고?’ 그건 내가 커먼룸에 대해 자세히 생각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나라는 인간 자체가 대체로 본인이 무엇을 바랄 수 있는지, 그리고 어디까지 원해도 되는지 잘 모르기 때문일 것이다. (p.97)


▪︎저는 진심이라는 것은 우리 내면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진심이 내면에 있어서 그것을 글로 집어내는 것이 아니라, 널브러진 문장들에서 진심을 사후적으로 찾아내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p.112)


▪︎긴 시를 다 읽어낸 뒤 우리에게 남은 것은 그 시와 부대낀 시간인지도 모른다. 학창 시절, 딱히 영혼의 교감이 없던 친구도 단지 그 시간을 함께 보냈다는 사실만으로 공유하게 되는 애틋함이 있는데 긴 시 역시 그런 감각을 공유한다. 시를 읽는 동안 상처에 고름이 차오르고 딱지가 진다. 그리고 딱지가 똑 떼어진다. 마지막 문장은 종종 그런 쾌감을 준다. (p.189)


▪︎일기를 다시 읽는 건 좋은 신호다. 적어도 당신이 당신의 삶을 버리고 싶어 하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p.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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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의 절반 읻다 시인선 15
프리드리히 횔덜린 지음, 박술 옮김 / 읻다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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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을 읽었다. 경이로운 찬가가 가득했고 자연을 노래하고, 가끔 너무나 독일인스러운 시를 쓴다는 감상을 태연히 하며 옮긴이 해제를 보는데 ‘오늘날까지도 횔덜린을 집요하게 따라다니는 것은 ‘미쳐버린 시인’이라는 수식어다.(p.327)’을 읽고 너무 놀랐기 때문이다. 심지어 수록 시의 절반 이상이 심한 광기에 빠진 이후에 쓰여졌다니. 다시 앞 장으로 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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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광인의 글을 예술 작품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가 하는 미학적 문제를 놓고 가장 큰 논란과 관심의 대상이 된 것 역시 이 시기의 작품들이다. 휠덜린은 전성기에 이미 정형시의 리듬과 구조와 고전적 상징 세계를 완벽하게 장악했던 만큼, 그러한 정형성이 차례로 해체되고, 파편화되며, 심연을 향해 과감히 기울어지고, 끝내 침묵과 교묘하게 섞여드는 언어로 화하는 과정은 유럽 현대시의 발전을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가 된다. (p.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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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보더라도 그의 글이 그저 광인의 것이라 생각되지 않는 이유는 내내 신을 노래하고 자연을 풍성하게 그려내고 있는 황금빛 시이기 때문이다. 마치 신의 계시와도 같은 시들에서는 비난보다는 찬미가, 절망보다는 희망이, 어둠보다는 빛이 느껴졌으므로. 배경을 알고 읽으니 자연스레 흐르는 계절에 따라 다채로운 옷을 입는 자연을 좁은 방의 창 밖으로 바라보는 사람의 뒷통수가 보이는 듯 했다. 불멸의 자연과 필멸의 인간을 보면서 나는 이상하게도 내 마음의 시간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허무할 수도 있지만 그래서 소중한 시간을 나를 갉아먹는 생각으로 보내고 있지 않나 하고.

 

다만 단어 하나하나를 따져보자면 쉽지 않은 시인 것은 틀림이 없다. 나도 뒤에 주석을 여러번 오가며 읽었는데, 그리스 신화라던가 여러 배경 지식을 알고 있다면 좀 더 수월히 이해 할 수 있었을 것 같다. 나는 중간부터 조오금 귀찮았던 탓에 시는 감성과 필이지 하면서 그냥 흐르듯 읽었지만… 신기하게도 이걸 읽었는데 「그리스 로마 신화」를 읽고 싶어짐. 비단 이 시집만 그런 것이 아니라 안 읽으면 유럽 운문들을 읽기 어려운 것 같아… 이젠 이것도 하나의 바이블인듯.





근심과 분노를 이기는 불멸의 기쁨이,

황금의 날이, 실은 매일의 끝에 있음을.


「디오티마를 잃은 메논의 비가」

 


좋지 않구나,

필멸의 생각들로

영혼을 버리는 것은. 허나

말을 나눔은 좋구나, 가슴에 

담아둔 것을 말하는 일, 사랑의

날들에 대해, 예전에 있었던

일들에 대해, 많이 듣는 일도 좋구나.


「추억」


 

미약한 것에도

크나큰 시작이 찾아올 수 있나니.


「그리스」


 

평야의 잎사귀들이 멀리 스러지면,

흰색은 골짜기로 떨어지네,

그럼에도 한낮은 높은 햇빛으로 반짝이고,

도시의 성문으로 축제의 빛은 쏟아지네.


이는 자연의 고요이니, 들판의 침묵은

사람의 정신과 같네, 드높이 드러나는

분별들, 이는 자연이 높은 상像으로

드러나기 위함이네, 봄의 부드러움 없이.


「겨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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