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반대편에 들판이 있다면 - 문보영 아이오와 일기
문보영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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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판의 뜻은 무엇인가? 사람이 걷게 만든 길은 아니지만 걸어도 괜찮은 길. 사람이 걷도록 만든 길보다는 이런 야생의 길에서 사슴을 만날 확률이 높을 테지만 노엘은 오늘도 사슴을 만나지 못했다. 졸린 눈으로 눈을 비비며 사슴을 만나러 갔다가 풀숲에서 나타난 것이 사람이어서 실망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그런 길. 하루를 시작하는 대부분의 이들은 들판의 반대 방향으로 걸어 다운타운으로 간다. 삶의 반의어는 들판이구나. 그럼 들판을 걸어야지. (p.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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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장쯤 읽었나. 강한 예감이 들었다. 내가 이 책을 사랑하게 되리라는.


아이오와 글쓰기 프로그램 (30여 개국의 작가들이 3개월간 한 호텔에 묵으며 여러 문학 행사에 참여하는 작가 레지던시 프로그램) 에 모인 다양한 사람들. 코믹한 작가의 시선으로 본 사랑스러운 사람들과 조금은 비일상적이고 엉뚱한 일화들은 한 편의 시트콤을 보는 듯 했다. 어쩜 저렇게 독특하고 사랑스러울 수가 있을까. 나는 짧은 글들에서 다운타운으로 가는 길을 상상했고, 그 반대편의 너른 들판을 상상했고, 중간에 있을 조금은 낡았지만 분명 따뜻할 호텔을 떠올렸다. 매일매일 좋아하는 것들에게 죽는 귀여운 오릿, “How are you?”가 열 받는다며 복수하겠다는 루시, 새벽 5시에 사슴을 찾으러 들판으로 향하는 노엘, ‘전망 없는 작가들의 모임no view writers’ party’과 날마다 종이컵을 관찰하는 야스히로, 코토미와 에바 그리고 문보영 시인 삼총사. 에세이를 읽으며 상상의 나래를 펼치기 쉽지 않은데 이 일기는 어쩐지 소설처럼 읽게 되었다. 마치 성장 소설 같은 그런 일기. 첫 장의 작가와 마지막 장의 작가가 확실히 다르다. 지구 반대편에서 다국의 언어를 접하고 생각을 들으며 성장한다는 무겁고 어쩐지 거창한 느낌보다는 친구들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시간을 좋아하던 초반에서 그들의 대화를 이해하고 싶어지는 사람으로 변한 것. ‘미세하게 사는 것을 그만두고(244)’ 싶어진 사람이 되었으니까.


“자신이 사는 곳을 사랑하기란 너무 어렵지 않은가요?” 이 질문에 나는 뭐라고 말할 수 있을까. 내가 사랑하는 여행지는 망설임 없이 말할 수 있는데. ‘우리 동네 ㅁㅁ동을 사랑합니다’ 라고 말하는 모습을 상상하자니…음, 거짓말 같다. 분명 살고 있는 터전이 주는 익숙함과 편안함은 있지만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나. 애초에 사랑해서 산다는 느낌보다는 어쩌다 보니 살게 된건데. 여러 곳을 다녀보고 부유하다보면 답을 찾게 될 날이 올까.


이 글들이 일기의 부스러기라고 했지만 그 부스러기를 줍는 내내 웃었고 공감했고 여유를 찾을 수 있었다. 작은 조각에서 전해져 오는 아이오와를 나 역시 사랑하게 될 것 같다.


+ 작가님 진짜 재밌는 사람… 주섬주섬 시집과 다른 산문집을 보관함에 담았다.

 

 

▪︎내부에서 더 진한 내부로 뛰어드는 것도 일종의 탈출인 셈이다. (p.40)


▪︎나의 시를 설명하는 데 반드시 한국을 소개하는 과정을 거쳐야 하는 것은 아닌데, 그건 내가 한국 문화의 영향을 받지 않아서가 아니라 반대로 한국을 외부인의 시각에서 바라볼 기회가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영향 관계가 내적으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p.43)


▪︎‘불만을 품을 수 있다고?’ 그건 내가 커먼룸에 대해 자세히 생각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나라는 인간 자체가 대체로 본인이 무엇을 바랄 수 있는지, 그리고 어디까지 원해도 되는지 잘 모르기 때문일 것이다. (p.97)


▪︎저는 진심이라는 것은 우리 내면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진심이 내면에 있어서 그것을 글로 집어내는 것이 아니라, 널브러진 문장들에서 진심을 사후적으로 찾아내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p.112)


▪︎긴 시를 다 읽어낸 뒤 우리에게 남은 것은 그 시와 부대낀 시간인지도 모른다. 학창 시절, 딱히 영혼의 교감이 없던 친구도 단지 그 시간을 함께 보냈다는 사실만으로 공유하게 되는 애틋함이 있는데 긴 시 역시 그런 감각을 공유한다. 시를 읽는 동안 상처에 고름이 차오르고 딱지가 진다. 그리고 딱지가 똑 떼어진다. 마지막 문장은 종종 그런 쾌감을 준다. (p.189)


▪︎일기를 다시 읽는 건 좋은 신호다. 적어도 당신이 당신의 삶을 버리고 싶어 하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p.237)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지원받아 읽은 뒤 솔직하게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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