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꽃속의 나라
박규원 지음 / 작가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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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불꽃 속의 나라>는 1930년대의 상하이의 생활 면면과 주인공들의 감정을 고스란히 볼 수 있게 묘사해 놓은 소설이다. 처음에는 장편인 줄 알아 조금은 부담스러웠는데 다행히 짤막한 단편으로 구성되어 있어 쉽게 감정이입을 할 수 있었다. 아마 이렇게 단편으로 구성되었기에 더 내 심금을 울리고, 여운을 주고, 안타까움을 전해준 것 같다.

 

그런데 이 소설의 머릿말을 보면서 놀라운 사실 하나를 알았다. 우리 배우 중에서 중국에서 '영화황제'라고 불릴 정도로 성공한 배우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작가 박규원씨의 외할아버지이신 김염은 우리나라 사람이지만 중국에서 배우로 성공한 삶을 살았고, 김염의 아버지 김필순은 최초 양의사이자 독립운동가이셨다고 했다. 현재 한국과 중국과의 관계가 좋지 않기 때문인지 김염이란 영화배우가 있었다는 사실이 한국에 전해지지도 않았고, 더구나 남아있는 기록이 없어 독립운동가인 김필순이란 사람이 있었는 줄도 몰랐던 우리를 위해 작가 박규원씨는 묻혀버린 김필순과 김염의 발자취를 찾기 위해서 중국을 수십번 왕복하면서 <상하이 올드 데이스>를 펴냈고 그 책으로 2003년 '올해의 논픽션상' 대상을 수상했단다. 아니다. 아마 그녀는 우리를 위해, 후손에게 남기기 위해 그랬을 수도 있겠지만 자신이 사랑하는 할아버지의 삶을 같이 느껴보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아직 <상하이 올드 데이스>라는 책을 보지는 못했지만 <불꽃 속의 나라>란 소설책만 가지고도 충분히 박규원 작가의 역량을 가늠할 수 있을 것 같다. 그 많은 단편 속 주인공과 같이 울고 웃고 하다보니 그 시대의 많은 어려움, 사랑의 안타까움 등이 내 가슴을 먹먹하게 했다. 일일이 그 많은 단편에 녹아들다 보니까 많은 감정이 한꺼번에 섞여버려서 지금 내가 무슨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종잡을 수가 없을 정도였다. 시간이 조금 흐른 지금 내 가슴에 남아있는 것은 아련한 그리움이랄까. 상하이란 도시는 구경해본 적도 없고 앞으로 살면서 구경하고 싶다는 생각을 가져본 적이 없는 나에게, 갑자기 1930년의 상하이에 대한 향수를 가지게끔 작가가 묘사해놓은 풍경 속으로 풍덩 빠져 버렸다. 

 

이 소설의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잘나고 대단한 사람은 아니다. 기생이거나 가진 것 없는 유대인이거나 어디서 굴러먹다가 온 지도 모르는 요리사, 산에서 아버지랑 단둘이 살다가 고아가 된 어린 소년, 젊은 시절 상하이에서 유학했던 것을 잊지 못하는 어느 노시인, 혁명을 피해 망명온 러시아인 가족, 영국에서 양장점을 하다가 모험하러 온 젊은 여자, 춤을 좋아하는 젊은 대학생, 기녀를 좋아하는 인력거꾼, 비서, 어떤 군부의 첩의 딸, 배우 김염을 사모하는 여성 팬, 공장에서 일하는 어린 남매 등 정말 각양 각색의 이야기들이 나를 맞이해주었다. 어떤 이야기에는 한숨을 쉬고, 어떤 이야기에는 미소를 짓고, 어떤 이야기에는 안타까워 하는 등 여러 인생 이야기가 모여있었다.

 

많은 이야기가 있지만 나는 그 중에 하나의 사랑이야기가 인상깊었다. 그것은 <<요리사의 첫사랑>>으로 아흔일곱의 어느 노요리사가 회상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그가 열 두살에 집을 뛰쳐나와 몇 년째 식당에서 허드렛일을 하고 있을 때 시장에서 본 어린 소녀에게 첫눈에 마음을 빼앗긴 뒤로 그는 그녀가 식당 앞을 지날 때마다 그 모습을 눈에 새기며 그녀를 위해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보다 높은 신분이고 그가 일하는 식당에는 한 번도 밥을 먹으러 들어오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그가 스물넷 되던 해 그녀의 아버지가 일하던 공장이 불바다가 된 사건이 일어나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나 그녀는 여전히 꿋꿋하게 살았다. 그후 5년 후 중일전쟁이 일어나 사람들이 다 피난을 가려 했을 때 식당주인이 헐값에 식당을 그에게 넘기고 가자 이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고 그녀에게 청혼을 하러 갔다. 그러나 무슨일인지 그녀의 어머니만 맞이해주시고 그녀는 어떤 말도 없다가 중국을 떠날 시간이 오자 그녀는 편지 한 장만 남기고 자살을 해버리고 만다. 그가 몇 년이나 가슴에 모셔둔 사랑인지 그녀는 몰랐겠지만 그래도 그렇게 처절하게 목숨까지 버릴 수가 있을까. 아무리 신분도 다르고 나이 차도 꽤 난다고 하지만 말이다. 그녀가 아무런 힌트를 주지 않고 죽어버렸기에 무슨 연유로 그런 행동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참으로 안타까웠다. 이제 아흔일곱이 되어 살 날이 얼마남지 이때에 그는 이제 죽어서 가면 그녀가 내민 손을 잡아줄런지 그것만을 생각하고 있다. 죽은 자는 말이 없지만 산 자는 얼마나 오랜 기간을 궁금해하면서, 가슴 속에 이제 잿더미가 되어버린 사랑을 간직하면서 살아야 할런지. 읽으면서 자살해버린 그녀가 한없이 야속했다. 죽기 전에 속시원히 이유라도 말해줄 것이지.

 

이렇게 속속들이 그 시대의 상하이의 모습을 나에게 가져다주는 작가의 필력에 혀를 내두르게 된다. 정말 짧은 단편인데도 단편 하나를 읽고 나면 다른 생각은 못할 정도로 그것에만 빠지게 되는 것이 가슴 하나에 그런 감정 하나 가득차버렸다. 이대로 한 단편에 빠져들어가 버리니까 다른 단편을 읽는데 한참을 걸려버렸다. 그렇지만 그 가슴 먹먹한 사랑의 안타까움이 정말 그 시대의 상하이를 그립게 해주었다. 아. 상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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