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전반적으로 삶이 짐승 같아진다는 점이다. 강자가 약자에 대해, 부자가 가난한 자에 대해, 남성이 여성에 대해 무자비한 투쟁을 하고 있다. 이는 물론 사회의 부조리가 발현된 것이고, 남성 ㅡ사냥꾼 모델과 남성과 자연 사이의 약탈적이고 지배적인 관계에 기초한 남성 개념이 발현된 것이다. 그리고 이 개념은, 우리가 본 것처럼, 자본주의와 함께 등장했다. -356
몇 년 만에 직장이란 곳에 나가려니 필요한 것들이 많았다. 일단 면접을 보려면 적당한 옷차림이 필요했고 어느 정도 자기관리가 되고 있다는 느낌을 주기 위한 화장과 단정한 헤어스타일을 갖추어야 했다. 직장에 다니지 않을 때에는 외출 시 선크림 정도만 발라주고 동네를 벗어날 경우에는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 눈 화장을 살짝 하곤 했다. 안 그러면 눈이 너무 순둥순둥 해 보여 어딜 가든 나를 대하는 태도가 다르다고 느꼈다. 이건 이전에도 한두 번 언급했었던 내용이니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아마 40대 이후의 여성들은 많이들 이 부분에 공감할 것이다. 첫 월급을 타고 엄마에게 35만 원을 드렸다. 남편의 힘을 빌리지 않고 내가 노력해 번 돈으로 엄마에게 용돈을 드리고 싶었다. 일하게 된 목적 중 이게 큰 부분을 차지했다. 경제적 독립. 남편은 괜히 직장 다니느라 스트레스받지 말고 하고 싶은 공부 하고 읽고 싶은 책 읽으며 살라고. 돈은 자기가 더 벌면 된다고 늘 말한다. 고맙고 든든한 말이다. 하지만 동시에 나를 나약한 인간으로 만드는 말이었다. 그래서 일을 하게 된 건데...
직장에 다니고 내 힘으로 돈을 번다고 단번에 강인한 인간이 되진 않았다. 필요한 것들이 늘어났고 일하느라 받는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하는 소비도 추가되었다. 화장품 종류는 왜 이렇게 많고 필요한 옷 가지는 왜 끝도 없는 건가. 덕분에 늘어난 카드값은 계속해서 일을 하는 인간으로 묶여 살라고 나를 점점 더 큰 목소리로 다그치고 있었다. 그러던 중에 이 책을 읽었다. 자본주의는 계급사회를 굳건하게 유지시키고 있다. 식민지는 형식적으로만 자취를 감추었을 뿐이다. 세상은 갈수록 발전하는 것 같으면서도 빈부격차는 줄어들지 않고 오히려 커지고 있다. 이 동력은 대체 어디서 나오는 걸까? 마리아 미즈는 말한다. 자본축적과 가부장제의 긴밀한 관계에 대해서. 남성 사냥꾼의 신화가 어떻게 이 착취 구도를 유지하고 있는지를. 노예제도 없이 다수를 침묵시키고 공모하게 하는 방식에 대해서 말이다.
세계 경제의 양극화를 추진하는 동력, 즉 자본의 축적과정은 '이거면 충분해'라고 결코 말하는 법이 없는 세계관에 기초해 있다. 이는 그 본질상 무한한 성장, 생산력과 상품과 자본의 무한한 팽창을 추구한다. 이런 끝없는 성장 모델의 결과는 '과개발'현상이다. 즉 암세포의 성장처럼, 착취당하는 이들에게만이 아니라 이런 착취의 명백한 수혜자들에게도 발전할수록 파괴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과개발과 저개발'은 따라서 본질적으로 착취적인 세계질서의 양 극단이며, 지구적 차원의 자본축적 혹은 세계 시장을 통해 구분되면서 동시에 연결되어 있다. -마리아 미즈
'여성주의 책 읽기'를 이어오면서 여성에 대한 착취가 이 세계를 구성하는 다양한 착취 요소들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고 개별적인 문제처럼 보이는 요소들이 패턴이 있다고 느꼈다. 인종차별, 육식, 약자 혐오, 전쟁, 여성 혐오, 경제적 식민지배, 신자유주의의 탐욕, 물질주의 등 어느 것 하나 단독으로 기능하지 않았다. 여성주의의 흐름이 갈수록 그 영역을 확장해 가는 것은 그런 면에서 필연적이라고 생각했다. 마리아 미즈는 그 연관성들을 날카롭게 파고든다.
만약 중세 시대 마녀사냥이 실패로 돌아갔다면 어땠을까? 하지만 결과는 성공적이었고 수많은 여성들이 목숨을 잃었다. 당시 마녀사냥이 성공적이었고 제대로 연구되지 않은 탓에 지금은 보다 은밀한 방식으로 유지되고 있다. 물론 국가마다 얼마만큼 노골적인지, 비가시화되는지 그 양상에는 차이가 있다. 인도에서는 '결혼 지참금' 때문에 여성들이 살해당하고 자살로 위장되고 있다. 유럽의 남성들이 동남아로 성매매 관광을 가고 저개발 국가에서 자급하던 생산물이 과개발국가에서 과잉소비되고 있다. 세계 곳곳은 자원을 차지하기 위해 전쟁을 일삼고 그 과정에서 무기 업계는 은밀하게 돈을 쓸어 담고 있다. 이 모든 것들이 원시적 남성 사냥꾼 모델을 기반으로 한 자본축적 패러다임에 기초해 있다.
사냥꾼의 주 도구들은 생명을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해치는 것이다. (중략) 무기를 통해 이루어지는 대상-관계는 기본적으로 약탈적이며 착취적이다. 사냥꾼은 생명을 전유하지만, 생명을 생산하지는 못한다.(중략) 무기를 통해 중개되는 자연에 대한 애상-관계는 협력이 아니라 지배관계를 이루고 있다. 이런 지배관계는 남성이 세운 모든 생산관계의 일부가 되어 왔다. 사실 이것이 그들 생산성의 주된 패러다임이 되었다. 자연에 대한 지배와 통제가 없다면, 남성은 자신을 생산적인 존재로 인식하지 못할 것이다. '자연물의 전유'는 재산관계를 수립한다는 의미에서 전유의 한 측면을 이루는 하나의 과정이 되었다. '자연물의 전유'는 인관화가 아니라 자연에 대한 착취라는 의미에서 전유의 한 측면이 된 것이다.p.154
소비의 양극화는 뚜렷해지고 있다. 어떤 소비자들은 높은 물가 상승 때문에 조금이라도 아끼려고 마트 폐점 시간이 임박했을 때 세일하는 상품을 사러 가거나 저렴한 빅 사이즈 아메리카노를 선택한다. 반면에 수십만 원짜리 망고 빙수가 호텔 레스토랑에서 인기 메뉴로 떠올랐다. 항공사는 코로나 시기의 불황을 메꾸려고 갖은 애를 쓰고 있다. 프리미엄 좌석은 그 와중에 더 넓어지고 있고 고급화를 추구하고 있다. 이제 화장실이 딸린 좌석도 있다고 한다. 상대적으로 일반 좌석은 좁아지고 있다. 뉴스에 종종 오르는 항공기 내 다툼은 단순히 해외여행 인구가 늘어난 탓 만은 아닌 것 같다. 또한 저가 생산물은 어딘가에서 그 대가를 치르고 있는 노동자들의 말도 안되는 희생을 바탕으로 한다. 여기서 벗어날 방법은, 탈출할 방법은 소비자 해방운동뿐이다.
비행기 좌석의 양극화
https://youtu.be/VV2OA7Z_RDU?list=PLrNiQRPfA1HFm_h-J8DkS74R9r26JhLm2
몇 백씩 주고도 설국열차 뒷좌석...
토지가 없고 가난한 집안의 여성은 우유를 생산하면서도 자신은 거의 우유를 마시지 못했다. (...) 수백 가지의 치즈, 요구르트, 우유제품, 크림 등을 선택할 수 있는 영국, 네덜란드, 독일, 혹은 프랑스 가정주부가 아바마와 같은 여성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 일반적인 서구 소비자-가정주부는 '우유홍수작전'이전에는 인도의 마을에서 생산된 우유가 그 마을에서도 소비되었다는 것을 거의 알지 못했다. 이제 인도산 우유가 도시로 수출된다. 서구의 소비자-가정주부는 아바마에 대한 착취가 유럽 공공시장에서 바다처럼 널려 있는 우유와 신처럼 쌓여 있는 버터와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할 것이다. -285
소비 노동의 가장 큰 특징은 비참한 자발성이다. 최근에 국내로 태무, 알리 등 배송 업계가 들어왔다. 이로 인해 국내로 쏟아져 들어오는 택배 물품들을 포장하는 중국 노동자들의 모습을 담은 영상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가끔은 이런 현실이 무섭기도 하다. 그러나 나도 인간이기에 대부분의 시간은 그저 소비 노동자로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사드의 소설을 봐도 자본주의와 가학성은 상관관계를 보인다. 소설 속에서 가학적인 변태들은 모두 권력을 쥐고 있다. 정치인, 성직자, 상인. 이들은 자신들의 권력의 상징인 자본을 가지고 다수의 육체를 탐하고 고문한다. 어쩌면 사드의 소설보다 자본주의 현실이 더 끔찍한 것 같다. 우리는 돈을 받고 착취 당하는 게 아니라 돈을 주고 스스로 착취 당하는 데다 그 사실을 모르니까. 부유한 국가들일수록 그럴듯한 이미지들로 착취당하는 현실을 자기 선택이라 착각한다.
책 후반부에 마리아 미즈는 자급하는 것등 여러 대안을 제시한다. 우리 동네에 쓰레기를 모으는 노부부가 살았는데 노년에 이렇듯 물건을 버리지 못하는 분들이 있다. 지자체에서 봉사자들을 동원해 쌓인 물건을 분류하고 버려주는데 핵심은 본인이 참여하는 것이라고 한다. 불필요한 물건들이 주 공간을 다 차지해 정작 사람이 생활하기 힘들 정도까지 이르렀는데 이걸 타인이 다 정리해 줘봐야 소용없다는 거다. 얼마 후면 본래대로 돌아간다고. 다시 쌓고 쌓는 삶으로. 그래서 쓰레기가 된 짐들을 치울 때 본인이 참여해야 하는데 마리아 미즈가 말한 자급의 의미도 같은 맥락이라고 느꼈다. 현실은 소비자와 생산자가 너무 동떨어져 있다. 그래서 소비자는 생산물이 만들어지는 과정에 대한 도덕적 책임의식을 가지지 않아도 되는 위치에 있다. 만일 소비자가 보다 능동적으로 생산에 참여할 수 있다면 가사 노동에, 돌봄 노동에 남성들이 더 참여한다면 거기서 변화가 시작될 것이란 이야기. 다만 현실적으로 이게 가능한지는 솔직히 회의적이다. 이게 가능하려면 지구는 더 망가지고 '더 이상 이렇게 살 수는 없다' 는 다수의 자각이 필요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