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지성의 실패에 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19호실로 가다. 도리스 레싱




우리 조부모님때만해도 자식을 줄줄이 낳는 집이 드물지 않았다. 요즘도 자녀를 여럿 둔 가정들이 있지만 내 주변에는 많으면 둘, 혹은 결혼하지 않고 함께 사는 커플들, 나를 포함해 자녀없이 사는 부부들이 있다. 이웃의 글을 읽다가 생각한다. 결혼하거나 혹은 결혼해서 아이를 갖게 되면 그렇지 않은 친구들과는 거리가 생기는 경우가 허다하다. 아이 연령대로 묶이고 아이가 없거나 하나 있거나 아이 둘 있는 엄마와 아이 셋 있는 엄마 아이 넷 있는 엄마가 차이를 실감한다. 아무래도 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에 다니며 새로운 사람들을 알아가는 것처럼 관계는 공감할 수 있는 조건을 기준으로 다시 형성되기를 반복하기 때문이다. 조건이 다른 경우 인연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그걸 가능하게 할 수 있는 또 다른 조건이 필수적이다. 이를테면 마음이 잘 통하는 것,기질적으로 같다는 것 말이다.




좋은 대화는 지성과 정신의 단순하지만 신비로운 어울림에 달려 있는데, 그 어울림은 노력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우연히 탄생하는 것이다. 그것은 공통의 관심사나 계급적 이해관계, 혹은 공동으로 세운 이상의 문제가 아니라 기질의 문제다. 기질이란 항의하는 투로 "그게 무슨 뜻이야?"라고 묻는 대신 본능적으로 이해한다는 듯 "네 말이 무슨 뜻인지 정확히 알겠어" 하고 대답하게 하는 무언가다. 기질이 같은 사람과 함께 있으면 자유롭고 솔직한 대화의 흐름이 거의 끊기지 않는다. 반면 기질이 다르면 언제나 누군가는 눈치를 보게 된다. 기질을 공유한다는 것은 한 벌의 톱니바퀴가 작동하는 방식과 비슷하다. 발상은 복잡하지 않아도 톱니바퀴의 맞물림은 완벽해야 한다. 거의 정확한 정도로는 안 되고, 완벽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톱니바퀴는 돌아가지 않는다.  ㅡ아무도 지켜보지 않지만 모두가 공연을 한다. 비비언 고닉




어디선가 -여성주의 책 중 하나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읽은 바로는 여성들이 흑인단체들, 노동자단체들과 달리 연대하기 힘든 이유는 피억압자들과 개개인별로 엮여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 대목에 무릎을 쳤다. 여성들은 나뭇꾼의 아이를 낳은 뒤 본래 있던 곳으로 더욱 돌아가기 힘들어진다. 여성들은 사회 문화적 가치 기준에 따라 행동했므로 이 선택을 스스로 했다고 믿기 때문에 여기 책임의식을 가진다. 그렇게 가부장적 제도에 참여하고 공동체의 일원이 된다. '초월'의 영역에 있는 남자와 분리된 '내재적' 여성은 그 분류에 순응하기가 쉬워진다. 저항은 내,외부의 반발을 동시다발적으로 불러오기 때문에 큰 용기와 자기확신(이를 테면 제3의 눈과 같은)이 필요하다. 도덕적, 사회적 지탄을 받는것을 넘어서야 하므로 이성적인 선택이 아니라고 여겨진다. 이 제도를 삶에 받아들이는 한, 개개인이 각자의 삶에서 가족제도에 끈끈하게 엮이는 것이다. 



악마들은 여기에 없었다. 영원히 사라져버렸다. 그녀가 그들에게서 자유를 살 생각이니까. 그녀는 벌써 비옥한 열매를 맺을 어두운 꿈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그 꿈이 혈관 속을 도는 피처럼 그녀의 내면을 어루만지는 것 같았다.-19호실로 가다. 도리스 레싱




이런 암울한 조건에서 여성들의 연대를 가능하게 한 흐름이 발생했다. 페미니즘 제1물결. 남성의 방식인 지성은 실패했지만 

여성의 방식이 남아있었다. 기존의 지성은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모두가 참여하는 공통의 장 안에서 특정인들만을 기준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뒤이은 발자취에 비하면 여러모로 미미했고 모순도 많았지만 그 안에서 여성들은 연대의 가능성과 여성의 관점을 체계화하기 시작한다. 나는 이 때에 비로소 페미니즘이 기질을 넘어서는, 결혼이라는 가족제도에 엮인 여성들을 연대하게 하는 공통의 관심사로, 가능성으로 떠올랐다고 생각한다. 이제 어떤 조건에서도 여성들이 질문할 수 있는 '장소'가 마련되었다. 지저분한 호텔 19호실만이 유일하게 숨 쉴 수 있는 공간이었던 수전에게 어쩌면 대안을 제시해줬을지 모를, 보다 구체적인 자기 해석과 방향찾기를 위해 본격적인 질문을 할 여성들의 '공간'이 열렸다.





          






"그 이야기는 나 자신뿐만 아니라 우리 시대 많은 여성의 마음속에 숨겨져 있는 장소에서 흘러나온 것이다."-도리스 레싱.'19호실로 가다' 서문



인간의 해방과 자유는 추구하는 '그날'까지 달성될 수 없는 과정의 정치다. 「여성성의 신화」는 지구상 모든 여성이 교육, 법, 고용,경제적 지위등 공적 영역에서 평등을 얻는 '그날'까지 유효하다. 그러나 동시에 '그날'은 오지 않아야 한다. 민주주의는 끝없는 전진이기 때문이다. -여성성의 신화. 정희진의 해제



울프는 개인적 공간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가부장적 언어를 공격하는 전략적 스타일을 중시한다. 반면 보부아르는 여성이 남성의 타자됨을 거부해야한다고 강조한다. (...) 둘 다 본질적인 여성성을 믿지는 않는 듯하다. 그러나 그들 텍스트의 어떤 부분에서는 본질적인 여성성이 있다고 제안하는 듯한 부분도 있다. 이들 텍스트가 페미니즘 1물결을 대표하는 훌륭한 사례가 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모순 때문이다. 이들의 모순이야말로 그들을 페미니즘 1물결을 넘어서게 한다.  -페미니즘 이론과 비평.수잔 왓킨스 









틈새자랑. 친구가 책 좋아하는 나에게 보낸 선물. 보기완 달리 단단해서 안에 마시던 머그잔도 넣어둘 수 있다. 

책 읽다가 갑자기 다른 거 할때 펼쳐 두었던 그대로 엎어두던 나를 어찌 알았는지?







요렇게! 순식간에 동나버렸던 알라딘 굿즈.토끼 머그잔도 틈새자랑 중







올해는 매일 쉬지않고 원서 읽기를!!! 부르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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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23-01-11 16:3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뒤이은 발자취에 비하면 여러모로 미미했고 모순도 많았지만 그 안에서 여성들은 연대의 가능성과 여성의 관점을 체계화하기 시작한다.

저도 미미님의 이런 판단에 찬성합니다. 수많은 단점이 있지만 그 시작점이라는 점에서 그 시대의 운동 역시 제대로 평가받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아름다운 사진이 우르르 이어지지만 ㅋㅋㅋㅋㅋㅋ 어머나, 페란테!! 어쩌란 말입니까, 미미님! 페란테!!!!!! (하트뿅뿅)

청아 2023-01-11 17:17   좋아요 3 | URL
<페미니즘 이론과 비평>1장에서 수전 왓킨스가 모순이 오히려 다음단계로의 가능성을 열어줬다고 언급한 대목과 오늘 단발머리님의 글 읽고 썼어요! 제3의 눈도 어제? 댓글에 쓰셨던거 생각나서요ㅋㅋㅋㅋㅋㅋ(쓰고 보니 우째 단발머리님 스토킹하는 거 같은?😅

그 시작점이 있었기에 페미니즘이 지금에 이르렀고 우리가 여기서 함께 책을 읽고 이야기 나누며 글을 쓰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옷 역시 단발머리님은 페란테의 글을 바로 알아보시는군요!!(하트 두둥실)

scott 2023-01-11 19: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맞습니다 시도 조차 않하면 아무것도 변하지 않고 나이만 먹어버리는😄
미미님은 2023년 1일 1원서 일독 응원합니다 😍

청아 2023-01-11 20:01   좋아요 1 | URL
좋아하는 것들은 많은데 의지가 약하여 나이만 먹어치운 인생ㅎㅎ 실천하려면 습관 만드는 방법밖에 없다고 생각해서 조금씩 매일 읽고 있어요. 큰 욕심없고 공부하다 책이 너덜너덜해지는걸 사는동안 좀 보고 싶습니다 응원감사해요 스콧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