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6년 이래 일본 정부는 시마바라 내란에 포르투갈인이 관계되어 있음을 의심하고 통상을 완전히 단절시켰을 뿐만 아니라, 마카오에서 일본 근해에 이르는 해상에서는 신교도 국가인 영국과 네덜란드의 군함이 출몰하여 우리 상선에 포격을 가하고 있는 실정이었습니다. - P22

이노우에라는 이름을 저희가 들은 것은 이때가 처음입니다. 발리나노 신부님은 이에 덧붙여서, 그 사람에 비하면 전에 나가사키 부교로서 많은 가톨릭 신도들을 학살한 다케나카 같은 사람은 단순히 흉포하고 무지한 인간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일본에 상륙한 뒤 혹시 만날지도 모를 이 일본인의 이름을 기억하기 위해 저희는 익숙지 않은 발음으로 그의 이름을 입속에서 되풀이했습니다. - P24

출발은 드디어 5일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각자의 마음 외에는 일본에 가지고 갈 짐이 전혀 없기 때문에 저희는 마음 정리에만 몰두하고 있습니다. 마르타의 일은 더 이상 쓰고 싶지 않습니다. 가련하고 불쌍한 그였지만, 저희의 동료를 위해 하나님은 결국 병의 회복‘ 이라는 기쁨은 내려 주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루시는 일은 모두 선한 일. 그가 머지않아 이루어야 할 그 사명을, 하나님은 은밀히 준비하고 계실 것입니다. - P36

모키치나 이치소우도 그렇고 저 노인도 그렇고, 거의 인형처럼 표정이 없는 얼굴을 하고 있다는 것은 이미 쓴 대로입니다만, 그 이유를 이제야 확연히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기쁨은 물론 슬픔조차도 얼굴에 드러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오랜 비밀 생활이 이 신도들의 얼굴을가면처럼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그것은 참으로 가슴 아프고 슬픈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와 같은 고난을 신도들에게 주시는지저로서는 이해할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 P53

그리스도는 아름다운 것이나 선한 것을 위해 죽은 것이 아닙니다. 아름다운 것이나 선한 것을 위해 죽는 일은쉽지만, 비참한 것이나 부패한 것들을 위해 죽는 일은 어렵다는 것을 저는 그날 분명히 깨달았습니다. - P60

일본인 농민들은 무엇에 굶주려 있었던가? 소나 말처럼 일에 혹사당하고 소나 말처럼죽어 가지 않으면 안 되는 이 사람들은 그 족쇄를 버릴 수 있는 새로운 한 길을 저희의 가르침에서 처음으로 발견한 것입니다. 불교의 중들은 그들을 소처럼 취급하는 자들의 편이었습니다. 그래서그들은 오랫동안 자신들의 삶이 다만 체념하기 위해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 P68

‘그런데 나는 왜 이처럼 그분의 얼굴을 떠올리는 것일까.‘ 아마 그분의 얼굴 모습이 성경 어디에도 쓰여 있지 않기 때문이겠지요. 성경에 쓰여 있지 않기 때문에 저는 그분의 얼굴을 제 상상력에 맡겨어린 시절부터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그 얼굴을 마치 연인의 얼굴 모습을 미화하듯이 가슴속에 간직했던 것입니다. 신학생 시절수도원에 있을 때, 저는 잠들 수 없는 밤이면 언제나 그 아름다운얼굴을 마음속에 떠올렸습니다.  - P69

우선 당신은 이곳 농민들이 포르투갈의 변두리 지방에서 볼 수있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가난하고 비참하다는 사실을아셔야 합니다. 부유한 농민이라 할지라도 일본 상류 계급이 먹는쌀을 1년에 두 번 입에 넣을 수 있을 뿐입니다. 대개 토란과 무 같은야채 따위를 주로 먹으며 음료는 물을 따뜻하게 끓여서 마십니다.
때로는 풀과 나무의 뿌리를 캐 먹는 일도 있습니다.  - P75

"하나님은 무엇 때문에 이런 고통을 주시는지요?"그러고 나서 그는 원망스러운 눈빛을 제게 보내며 말했습니다.
"신부님, 저희들은 나쁜 일이라고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요."
듣고 흘려 버리면 아무것도 아닌 겁쟁이의 이 한탄이 어째서 예리한 바늘이 되어 제 가슴을 아프게 찌르는 것인지요? 하나님은 무엇때문에 이들 비참한 농민들에게, 이 일본인들에게 박해와 고문이라는 시련을 주시는지요? - P86

십자가 모양으로 만든 두 개의 나무가 파도가 밀리는 물가에 세워졌습니다. 거기에 이치소우와 모키치가 묶이는 것입니다. 밤이되어 조수가 밀려오면 두 사람의 몸은 목까지 바다에 잠기게 되겠지요. 그러고 나서 두 사람은 바로 죽지 않고 이틀이나 사흘이 지나, 육체도 마음도 극도로 지쳐 버렸을 때 결국 숨이 끊기게 되겠지요. 그러한 오랜 시간의 고통을 도모기 부락민이나 다른 농민들에게 실컷 보임으로써 그들이 두 번 다시 가톨릭교에 접근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관리들이 노리는 바입니다. 모키치와 이치소우가 나 - P90

신음소리는 때때로 도중에 끊겼습니다. 모키치는 어제와는 달리,
이제는 자신을 격려하기 위해 노래를 부를 기력조차 없었던 것입니다. 그 소리는 도중에 끊겼고, 한 시간쯤 지나면 다시 바람에 흘러이쪽 부락민들에게 전해졌습니다. 짐승이 우는 듯한 그 소리를 들을 때마다 농민들은 온몸을 떨면서 울었습니다. 오후가 되어 또다시 조수가 조금씩 밀려들자 바다는 그 검고 차디찬 빛을 더해 가고나무기둥은 그 속에 차츰 가라앉아 가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얗게 거품을 머금은 파도가 때때로 나무기둥을 넘어 해변까지 부딪쳐밀려오고, 한 마리 새가 바다에 거의 닿을 듯이 살짝 스치며 멀리날아갔습니다. 이것으로 모두 끝났습니다. - P92

저는 오랫동안성인전(聖人傳)에 쓰인 그런 순교를, 이를테면 그 사람들의 영혼이하늘나라에 돌아갈 때 공중에는 영광의 빛이 가득하고 천사가 나팔을 부는 그런 빛나고 화려한 순교를 지나치게 꿈꿔 왔습니다. 하지만 지금 당신에게 이렇게 보고하고 있는 일본 신도의 순교는 그와같은 혁혁한 것이 아니라 이렇게 비참하고 이렇게 쓰라린 것이었습니다. 아아, 바다에는 비가 쉴 새 없이 계속 내립니다. 그리고 바다는 그들을 죽인 다음 더욱 무서우리만치 굳게 침묵을 지키고 있습니다. - P93

발리냐노 신부가 악마로 부르고 선교사들을 계속해서 배교하도록 한 이노우에를 그는 오늘까지 창백하고 음험한 얼굴을 지닌 남자로 생각해 왔다. 그러나 눈앞에는 사물에 대한 이해심이 넓을 것 같은 온화한 인물이앉아 있다. - P173

매력이 있는 것, 아름다운 것에 마음이 끌리는 것은 누구나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런 것은 진정한 의미의 사랑이 아니다. 색 바랜 누더기처럼 되어 버린 인간과 인생을 버리지 않는 것이 사랑이다. 신부는 그것을 알고 있었지만 아직 기치지로를 용서할 수는 없었다. 또다시 그리스도의 얼굴이 자신에게 다가왔을 때, 그분이 그맑고 다정한 눈으로 조용히 이쪽을 바라보았을 때, 신부는 오늘의자신을 부끄럽게 생각했다. - P181

연민은 결코 행위가 아니었다. 사랑도 아니었다. 연민은 정욕과 마찬가지로 일종의 본능에 지나지 않았다. 그 정도는 신학교의 딱딱한 의자에서 이미 훨씬 전부터 배웠지만, 그것은 책 속의 지식으로만 머물러 있을뿐이었다. - P212

달이 차츰 둥그런 보름달이 되어 갔다. 옥사 뒤에 있는 잡목림에서 산비둘기와 올빼미가 서로 어울려 매일 밤 같은 소리로 울었다.
그 잡목림 위에 걸린 보름달이 기분 나쁠 정도로 붉은색을 띠고 검은 구름 사이로 들어갔다 나왔다 하면서 숨바꼭질을 했다.  - P213

입가에 미소를 지우지 않겠다고 신부는 단단히 결심했다. 나귀에태워져 자기는 지금 나가사키의 거리를 걷는다. 나귀에 태워져 그분도 예루살렘 거리에 들어섰다. 치욕과 모멸을 견디는 얼굴이 인간의 표정 중에서 가장 고귀하다는 것을 그에게 가르쳐 준 사람은바로 그분이다. 자신도 최후까지 이 표정을 지니고 싶다. 오로지 이얼굴이 이방인 가운데서의 그리스도교인의 얼굴일 것이라고 신부는 생각했다. - P244

인간이 성경 속에 쓰인 신비를 모두 이해할 수는없다. 다만 신부는 알고 싶었을 뿐이다. 그냥 모두 다 완전히 알고싶었을 뿐이다. "오늘 밤 너는 반드시 배교할 것이다"라고 통역은자신 있게 말했다. 마치 베드로를 향해 그분이 말한 것처럼, "오늘밤 닭이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새벽은 아직 멀고닭이 울 시각은 아니다. - P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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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2-05-25 11:0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벌써 다 읽으셨네요. 역시원조 독서 기계~!!

미미 2022-05-25 11:36   좋아요 2 | URL
ㅋㅋㅋ지금 리뷰 쓰고 있어요^^*

mini74 2022-05-25 11:2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 분 종교관련해서 깊은 성찰과 물음을 주는 글 참 잘 쓰시는거같아요. 깊은 강도 그렇고 침묵도 그렇고. 실제론 짓궂은 장난 잘치는 유쾌한 분이시라던데 ㅎㅎ

미미 2022-05-25 11:39   좋아요 1 | URL
어머 그래요? 의외네요!
왜이제야 읽었나 싶어요. 깊은강도 봐야겠네요!! 선물도 하려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