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너와 같은 무리를 한 번도 미워해본 적이 없노라.부정을 일삼는 모든 정령 중에서도너 같은 익살꾼은 내게 조금도 짐스럽지 않구나.
인간의 활동이란 쉽사리 느슨해지고언제나 휴식하기를 좋아하니 내 기꺼이 그를 자극하여 악마의 역할을 해낼 동반자를 그에게 붙여주겠노라.

괴테, <파우스트>

리노 어머니의 이름은 라파엘라 체룰로다. 하지만 나만 빼고 모두들 그녀를 ‘리나‘ 라고 불렀다. 나는 그녀를 ‘라파엘라‘라고도 ‘리나‘
라고도 부르지 않았다. 지난 60년 동안 내게 그녀는 ‘릴라‘ 였다. 만약 내가 그녀를 갑작스레 리나나 라파엘라라고 부른다면 그녀는 우리의 우정이 끝났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 P17

살아온 세월이 길지 않을 때에는 혼란스러운 감정의 바탕에 있는혼란의 실체를 이해할 수 없다. 이해해야 할 필요조차 느끼지 못할것이다. 어른들은 어제, 그게, 길어봤자 한 주 전의 과거를 바탕으로현재를 살아가며 내일을 기다린다. 그들은 그 이상의 것에는 관심이없다. 아이들은 어제의 의미, 엊그제의 의미를 알지 못한다. 내일의의미도 알지 못한다. 아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현재이고 지금이다.
여기가 길이고, 우리 집 현관이고, 이 사람이 엄마이고, 아빠이고, 지금은 낮이거나 밤인 것이다.
- P29

릴라가 내 인생에 등장한 것은 초등학교 1학년 때였다. 나는 처음에 릴라에게 아주 강한 인상을 받았다. 릴라가 아주 못된 아이였기때문이다. 사실 우리 반 아이들에게는 모두 약간씩은 못된 구석이있었다.
아이들의 못된 면은 담임인 올리비에로 선생님이 없을 때만 나타나는 데 비해 릴라는 언제나 못된 아이였다. 언젠가 한 번은 그녀가압지를 갈가리 찢어 조각들을 잉크병에 집어넣은 적이 있었다. 그러고서 펜으로 그것들을 건져내서 잉크가 흠뻑 묻어 있는 조각을 여기저기 던지기 시작했다. 나는 두 번이나 종잇조각에 맞았다. 한 번은머리에, 한 번은 내 새하얀 블라우스 깃에.
- P32

우리는 그런 시대에 살고 있었다. 우리가 살아온 세상은 후두염,
파상풍, 출혈성 티푸스, 가스, 전쟁, 절단기, 돌담, 노동, 폭격, 폭탄,
결핵에서 화농까지 목숨을 앗아가는 단어들로 가득 찬 그런 세상이었다. 아주 일상적인 일들도 죽음의 요인이 될 수 있었다. 땀을 많이흘린 다음 두 손목에 물을 살짝 적시지 않고 급하게 차가운 수돗물을 들이켜다 죽기도 했다. 갑자기 온몸에 붉은 반점이 돋아나서 축기도 했고 기침하다 숨이 막혀 죽기도 했다. 검붉은 색으로 잘 익은체리를 먹다 씨가 목에 걸려 죽는 일도 있었고 미제 껌을 씹다 무심코 삼켜 죽기도 했다.
- P34

사내아이들의 돌팔매질이 시작되면 여자아이들은 모두 도망치기에 바빴지만 릴라는 달랐다. 그녀는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계속 걸어가다가 이따금 멈춰서기까지 했다. 릴라는 날아오는 돌의 궤적을자세히 관찰하고 침착한 태도로 피했는데 지금 다시 생각해봐도 우아함이 느꺼지는 몸놀림이었다.
- P35

선생님 옆에 앉는다는 것은 엄청난 혜택이었다. 올리비에로 선생님은 자기 옆에 의자를 가져다놓고 학급에서 가장 뛰어난 아이를 불러다 앉히곤 했다. 학기 초에 나는 거의 항상 선생님 옆에 앉았다. 선생님은 칭찬을 아끼지 않고 언제나 나를 격려해주셨고 곱슬한 내 금발머리에 찬탄을 금치 못했다. 그런 선생님 때문에라도 나는 모든것을 잘하고싶었다.
- P51

릴라는 착해 보이는 구석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아이였다. 릴라는너무나 뛰어나서 우리 같은 평범한 아이들은 아무리 애를 써도 그녀의 경쟁 상대가 될 수 없었다. 선생님들도 릴라에 비하면 어린 시절자신들이 멍청했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릴라의 완벽한 지성은 날카롭고 도발적이고 치명적이었다.
- P55

릴라는 어떤 문제에 대해 놀랄 만큼 뛰어난 대답을 내놓기 전에커다랗고 반짝이는 두 눈을 가늘게 뜨곤 했는데 이때 그녀의 눈빛에는 어린아이답지 않다기보다 초인적인 그 무엇인가가 있었다.
- P56

겉모습은 연약해보였지만 릴라 앞에서는 그 어떤 금지사항도 의미가 없었다. 그녀는 결과에 승복하지 않고 한계를 넘을 줄 아는 아이였다. 모든 사람은 그녀 앞에서 결국 고집을 꺾었고 릴라를 못마땅하게 생각하면서도 그녀에 대해 경탄했다.
- P79

돈 아킬레가 준 돈으로는 『작은 아씨들을 샀다. 릴라는 이미 작은 아씨들』을 읽었지만 너무나 마음에 들었기 때문에 그 책을 사기
로 했다. 우리가 4학년 때, 올리비에로 선생님은 성적이 가장 좋은학생들에게 읽을 만한 소설들을 빌려주셨다. 그때 릴라가 받은 책이바로 『작은 아씨들이었다. 선생님은 릴라에게 그 책을 빌려주면서말했다.
"이 책은 어른들을 위한 책이지만 너는 읽을 수 있을 게다."
내게는 『사랑의 학교』란 책을 주셨는데 나를 위해 그 책을 고른이유 따윈 설명해주지 않으셨다. 릴라는 『작은 아씨들』과 『사랑의학교를 단숨에 읽어버렸다. 그러고는 『작은 아씨들이 비교할 수없이 더 좋다고 했다. 나는 정해진 기간에 『사랑의 학교도 겨우겨우읽은 터라 『작은 아씨들은 읽어보지 못했다. 나는 더디게 책을 읽는편이었고 지금까지도 그렇다. 선생님께 책을 돌려주면서 릴라는 이제 『작은 아씨들을 읽을 수 없다는 사실과 그 책을 아직 읽지 못한나와 책에 대한 대화를 나눌 수 없다는 사실을 아쉬워했다.
- P84

리노는 몹시 신경질적인 소년이었는데 바로 그 무렵 자신의 임금문제로 아버지를 상대로 투쟁하기 시작했다. 리노는 새벽 6시에 일어나 구둣방으로 출근해서 저녁 8시까지 일하니 자신에게도 합당한임금을 달라고 주장했다. 이런 리노의 주장에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모두 경악을 금치 못했다. 몸뚱이를 눕힐 침대가 있고 삼시 세끼걱정할 필요가 없는데 대체 왜 돈이 필요하단 말인가. 그의 의무는가족을 돕는 것이지 가난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리노는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도 아버지와 똑같이 힘들게 일하는데 돈한 푼 받지 못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 P85

 나폴리에서 절망이란희망을 잃어버린 상태를 뜻하거나 땡전 한 푼 남지 않은 상태를 뜻한다. 뚱뚱한 몸집에 푸른 눈, 넓은 이마와 인상적으로 배가 튀어나온 주점 주인 실비오 솔라라는 카운터 뒤 구석에 짙은 색 몽둥이를구비해놓고 있었다. 그는 술값을 내지 않거나 빌린 돈을 정해진 기한 내에 갚지 않거나 그와 비슷한 계약을 했는데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몽둥이로 내리쳤다.
- P105

릴라는 사람이나 사물을 구성하는 윤곽의 경계가 해체되는 순간이 있다고 했다. 1959년의 시작을 축하하기 위해 옥상에 모인 그날 밤, 릴라는 생전 처음 경계의 해체를 강렬하게 체험한다. 그때만 해도 그 느낌이 무엇인지정확히 규정짓지 못했기에 혼자서만 간직했다가 오랜 세월이 지난1980년 11월 어느 날 밤에 이르러서야, 옥상에서 경험했던 현상에대해 내게 상세히 설명해주었다. 세월이 흘러 결혼도 하고 자식도둔 36세의 여자가 되어서도 때때로 비슷한 경험을 한다고 고백했는데 그때 처음으로 경계의 해체라는 표현을 썼다.
- P113

나는 릴라에게 강한 인상을 남기고 싶은 마음에, 그리고 남자아이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할지언정 나는 카르멜라와는 다르다는 것을알리고 싶은 마음에 갑자기 표준어로 대답했다.
"내 감정에 확신이 서지 않아서야."
이것은 『꿈』에서 읽었던 문장인데 릴라는 내가 그런 표현을 사용한 것에 대해서 놀라는 것 같았다. 우리는 그 옛날 초등학교 때 서로겨루던 것처럼 경쟁하듯 만화나 책에 나올 법한 언어로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카르멜라는 듣기만 할 뿐 감히 이야기에 끼어들지 못했다. 릴라와 함께 훌륭하게 구성된 문장들을 주고받으며 내 마음과머리가 모두 깨어난 듯한 느낌을 받았다. 중학교에 들어간 다음부터는 학급 친구들이나 선생님과 한 번도 그런 식으로 대화를 나눈 적이 없었는데 그런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것은 정말 멋진 일이다 - P132

우리는 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그때 나이가 기껏해야 열두살이었다. 하지만 이따금 지나가는 트럭 뒤로 일어나는 먼지와 파리사이로 타는 듯이 뜨겁게 달아오른 길을 따라 걷는 우리의 모습은실망스럽기 짝이 없었던 지난날의 삶을 되돌아보면서 서로의 몸에의지하며 걸어가는 두 노인네 같았다.
- P136

릴라는 뜬금없이 하지만 우리가 나눴던 모든 대화가 결국은 이 말을 하기 위해서였다는 듯이 이렇게 물었다.
"우린 아직 친구지?"
"그럼."
"그럼 내 부탁 좀 들어줄래?"
99릴라와 다시 가까워진 그날 아침, 나는 릴라의 부탁이라면 무엇이든 들어줬을 것이다. 집에서 도망칠 수도 있고, 동네를 떠나 농장에서 잘 수도 있고, 나무 뿌리로 연명할 수도 있었다. 수챗구멍을 지나하수구로 내려갈 수도 있고, 비가 오거나 날씨가 추워지더라도 집에되돌아가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런데 정작 그녀가 내게 부탁한 건별일이 아니었고 그래서 그 순간에는 약간 실망했다. 릴라는 하루에한 번씩, 한 시간이라도 괜찮으니 라틴어 책을 가지고 저녁 시간 전에 공원에서 만나자고 했다.
"성가시게 굴지 않을게."
- P137

얼마 지나지않아 나는 릴라의 라틴어 실력이 나보다 낫다는 놀라운 사실을 알게되었다. 그녀는 어미변화와 동사변화를 완벽하게 알고 있었다. 나는조심스럽게 어찌된 영문인지 물었다. 그녀는 시간 낭비하기 싫다는듯, 특유의 정 떨어지는 태도로 내가 중학교에 진학했을 때 그녀도페라로 선생님의 도서관에 가서 라틴어 문법책을 빌려왔다고 했다.
릴라에게 그 도서관은 큰 자산이었다. 수다를 떨다가 내게 자랑스럽게 대여증을 네 개 보여줬는데 하나는 자신의 이름으로, 하나는 리노의 이름으로, 하나는 아버지 이름으로, 나머지 하나는 어머니 이름으로 발급되어 있었다. 대여중 하나에 책을 한 권씩 빌려서 한꺼번에 책 네 권을 빌렸던 것이다. 릴라는 책을 모조리 읽어치운 다음일요일마다 책을 반납하고 새로운 책 네 권을 다시 빌렸다.
- P141

 둘 다 윤기가 흐르는 검은 머리에 하얀 이가 드러나는 멋진 미소를 가진 잘생긴 청년들이었다. 둘 중에 굳이 마음에 드는 사람을 고르자면 나는 마르첼로 쪽이었다. 그의 외모는 문고판 일리아드에 나오는 핵토르를 생각나게 했다. 그들은 줄곧 나를 쫓아왔다.  - P144

 나는 그들의 차에 내가 탄 것을 아버지가 알게 될까봐 싫다고 했다. 우리 아버지는 다정하고 착한 사람이었고 나를 아주 좋아했지만 내가 솔라라 형제의 차에 탄 사실을 알면 나를 죽도록 때렸을 것이다. 내 동생 페페와 잔니는 아직 어렸지만 지금이 아니라 먼 훗날이라도 언젠가는 솔라라 형제를 죽여야 한다는 의무감에 시달려야 했을 것이다. 그렇게 해야한다는 법은 없었지만 당시에는 이것이 순리였다. 솔라라 형제도 이런 법칙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강요하지 않고 친절하게 차에 타라고권했던 것이다.
- P144

친구들의 반응은 별로였다. 그들에게는 사랑과 연애 이야기만이중요할 뿐이었다. 카르멜라에게 전교 1등을 했다고 하자 그녀는 이내 알폰소가 지나가면서 어떤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았는지에 대해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질리올라는 라틴어와 수학에서 낙제했기 때문에 몹시 씁쓸해했다. 지노가 매일 자기를 쫓아다니지만 자기는 마르첼로에게 반했기 때문에 지노를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사실 마르첼로도 자기를 좋아하는 것 같다는 이야기로 점수를 만회하려 했다.
릴라마저도 특별히 기뻐하는 것 같지 않았다. 내가 과목의 점수를하나하나 열거하자 그녀 특유의 심술궂은 목소리로 웃으며 물었다.
"그런데 10점은 못 받았네?"
- P153

나는 어머니를 도와 집 안 청소를 하고 음식도 만들었다. 동생들의 뒤치다꺼리를 하고 막내인 엘리사를 돌보기 시작했다. 틈이 나도 나가지 않고 집구석에 틀어박혀 도서관에서 빌린 델레다, 피란델로, 체호프, 고골, 톨스토이, 도스토옙스키 같은 작가들의 소설을 읽었다. 이따금 아버지의 구둣방에서 일하고 있을 릴라를 찾아가 특히마음에 들었던 인물들이나 너무 좋아서 통째로 외워버린 문장에 대해서 대화를 나누고 싶은 욕망이 강하게 일기도 했지만 이내 그런생각을 떨쳐버렸다. 말해봤자 기분만 상할 것 같았다.  - P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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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1-12-13 23:5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미미님 이번주 안에 이 시리즈 전부 완독 하신다에 한 표 🖐검 ^^

청아 2021-12-14 00:30   좋아요 2 | URL
한 권 가지고 있어서 이번주 시리즈전부는 힘들겠지만 느낌이 좋아요!!ㅎㅎ😊

새파랑 2021-12-14 12:0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나폴리 4부작 중 이 책 말고 다른 책들은 완전 벽돌책이더라구요 ㅋ 전 이번달에 모두 완독한다에 한표 ^^

청아 2021-12-14 12:41   좋아요 1 | URL
아앗ㅋㅋ다른책들은 호불호가 갈린다고해서 아직 고민중이예요ㅋ😆
1권은 분명 쵝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