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십대의 키가 크고 건장하고 단단한 몸매에 곱슬머리, V자형으로덥수룩한 수염을 길게 기른, 파멸에 빠진 그리스도, 술독에 빠진 그리스도, 겁탈자, 노상강도 같은 남자가 들어왔다. 그는 클루아에서 아침부터 마신 터라 이미 얼근히 취했고, 진흙투성이 바지에 얼룩진 더러운작업복을 입고 챙 달린 모자는 뒤로 돌려 쓰고 있었다. 눅눅한 검은색싸구려 시가를 피우는 그에게서는 지독한 냄새가 났다. 하지만 촉촉하고 아름다운 두 눈 깊은 곳에서는 빈정거려도 그리 악랄해 보이지 않는 솔직하고 사람 좋은 건달의 모습이 보였다.
- P28

그는 계속되는 언쟁에 말이 끊기는 와중에도 그래야만 하는 이유를설명했다. 그러나 북받치는 마음에 목이 메어 한없는 슬픔, 설명할 수없는 울분은 말하지 못했다.  - P32

그의 땅 사랑은 목숨을 내놓게 만드는 여인을향한 사랑과 같았고, 그녀를 위해서라면 살인도 마다않을 그런 사랑이었다. 아내도 자식도 그 누구도 아닌, 인간이 결코 아닌 그것은 바로땅이었다! 그런데 이제 늙어서, 그의 아버지가 힘에 부쳐 마지못해 그에게 넘겨주었듯이, 이 연인을 자식들에게 넘겨주어야 했다.
- P32

아버지는 매번 삭감될 때마다숫자들을 고집하며 완강히 버텼지만, 번번이 양보할 수밖에 없었다. 겉으로는 냉정하게 고집을 부리고 있지만, 자신의 분신으로 자신의 살을먹고 자신의 피를 빨아먹으며 지금껏 살아온 이 욕심 많은 아들이 화를 내자, 그는 속에서부터 분노가 끓어올랐다. 그는 자신도 그렇게 제아버지를 먹어치웠다는 것을 잊고 있었다. 그는 양손을 부들부들 떨기시작하더니 마침내 폭발했다.
- P40

장은 계속 읽었다. 이제 왕, 주교, 영주라는 삼중의 재판권에 대해, 의무적으로 경작해야 하는 밭에서 땀흘리는 가련한 사람들을 사방에서난폭하게 잡아당기는 재판권에 대해 읽을 참이었다. 관습법이 있고, 성문법이 있고, 그 위에 절대왕정, 가장 강한 자의 논리가 있었다. 보장받을 데도 호소할 데도 없이, 칼의 전능함만이 있었다. 그다음 시대에도공정성이 요구될 때면 불리한 증거들은 매수되었고, 정의는 돈에 팔렸다. 군대에서 신병을 뽑을 때 목숨에 붙는 세금은 더 악질적이었다.  - P98

마지막으로 사냥권, 비둘기장과 토끼장에 대한 권리가 나왔다. 이권리는 지금은 사라졌지만 농부들의 가슴에 증오의 불씨를 남겨놓았다. 사냥은 대대로 농부들의 화병거리였는데, 영주가 어디서나 사냥할수 있도록 허락한 봉건제의 옛 특권으로, 감히 영주의 구역에서 사냥을한 자유농민은 사형에 처할 수 있었다. 자유로운 짐승, 자유로운 새가단 한 사람의 즐거움을 위해 드넓은 하늘 우리에 갇힌 셈이었다. 사냥감이 큰 피해를 주어도 관할구역에 속하는 밭이라면 자작농은 참새 한마리도 잡을 수 없었다.
- P99

농부의 고난은 사실상 계속되고 있었다. 농부는 모든 것, 즉 사람들,
수많은 요인들, 그 자신에게서 고통받았다. 봉건제 아래서 귀족들이 먹잇감을 찾을 때마다 농부는 내몰리고, 추격당하고, 전리품으로 끌려갔다. 영주들이 서로 사사로이 전쟁을 벌일 때마다 농부는 살해당하지 않으면 파멸로 끝났다. 초가집은 불타고 밭은 쑥대밭이 되었다. 그다음에는 우리네 논밭을 유린한 도리깨 중에서도 최악인 대군대가 왔고, 돈에 매수된 용병 패거리들이 때로는 프랑스의 아군으로 때로는 프랑스의 적군으로 쳐들어왔고, 전화에 휩쓸린 자리에는 헐벗은 땅만 남았다.
- P100

허기의 고통, 모든 물가의 갑작스러운 폭등, 말로 다 할 수 없는 비참함 속에서 사람들은 짐승처럼도랑에 난 풀들을 뜯어먹곤 했다. 그리고 전쟁이 끝나거나 빈곤이 조금가시고 나면 필연적으로 전염병이 돌아 칼과 굶주림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을 죽였다. 죽음의 신, 페스트는 무지와 불결로 인해 끝없이 되살아나는 혼란이었다. 지난날에는 죽음의 신이 슬프고 창백한 농촌 사람들에게 낫을 휘두르면서 지배했다.
- P101

바스티유를 탈환한다음 농부들이 성들을 불태우는 동안, 8월 4일 밤은 인간의 자유와 시민평등권을 인정하면서 수백 년에 걸쳐 쟁취해낸 것을 합법화했다. "농부들은 하룻밤 만에, 귀족 칭호만으로 그들의 땀을 마시고 그들이 밤새워 지킨 열매를 삼켜왔던 영주들과 동등해졌다. 농노의 신분, 귀족의모든 특권, 성당과 영주의 재판권은 폐지되었고, 예전 권리에 대한 값치르기, 공평한 세금, 모든 시민에게 민과 군의 모든 일자리 내주기, 그렇게 계속 열거되었다. 그들의 삶을 괴롭혀왔던 해악이 하나씩 사라지는 듯했다. 농부들이 새로이 맞이한 황금시대에 대한 환희의 노래였다.
어떤 페이지에서는 농부들이야말로 세상의 왕이요 양육자라고 치켜세웠다. 농부만이 중요했으며 성스러운 쟁기 앞에 모두가 무릎을 꿇어야했다. 그뒤 93년의 공포정치는 신랄하게 비난받았고, 책자는 혁명의 아들인 나폴레옹이 "방종이라는 선례에 빠지지 않고 농촌을 행복하게 만들었다"며 과도한 찬사를 늘어놓았다.
- P103

그는 분할하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그리고 여전히 다른 일들로도 혼란스러웠다. 그의 둔한 머릿속에서는 다른 것들이, 즉분노, 자존심, 약속을 들어버리고 싶은 몽니, 속을 것 같은 두려움에 원하면서도 원치 않는 수컷의 극단적인 욕망이 혼란스레 뒤엉켜 싸웠다.
갑자기 그는 결정을 내렸다.
"난 자러 갈래요, 아듀!"
- P109

힘든 작업이 아직 시작되지 않아 하루 식사는 네 번뿐이었다. 아침 일곱시에는 우유에적신 빵, 정오에는 토스트, 네시에는 빵과 치즈, 여덟시에는 수프와 돼지비계였다. 모두 널따란 부엌에서 양쪽에 긴 의자가 놓여 있는 긴 식탁에 앉아 먹었다. 발전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커다란 아궁이 한쪽을차지한 주물 화덕뿐이었다. 안쪽으로 가마의 시커먼 입이 보였다.  - P130

아무 땅에나 파종을 하고 우연히 싹이 나오면 괜찮았지만, 그렇지 않으면 하늘에 대고 욕설을 퍼부었다. 마침내 배움을 통해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경작을 할 날이, 소출이 배로 늘어날 날이 언젠가 오겠지만, 그때까지 무식하고 고집 세고한 푼도 투자하지 않는 농부는 땅을 죽이고 말 것이다. 예전에 프랑스의 곡창지대였던 보스 지역, 이제 밀밖에 없는 메마른 보스평야는 사람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온갖 희생을 마다하지 않았건만 어리석은 이들에게 지쳐서 서서히 진이 빠져 죽어갔다.
- P187

생쥐스트의 농장주 집안인 코카르네 맏딸 결혼식에서처럼결혼식 케이크, 크림 두 가지, 당과류와 프티푸르네 접시를 내놓을예정이었다. 집에서는 고기 수프, 순대, 튀긴 닭 네 마리, 백포도주로 조리한 토끼 네 마리, 구운 소고기와 송아지를 준비할 생각이었다. 이는십오 인분 정도의 음식인데, 정확한 손님 수는 아직 알 수 없었다.  - P234

"글쎄요! 각자 자신이 모시는 신을 위해 복음을 전하겠지요!…… 내가 당신들에게 빵을 비싸게 팔지 않는다면, 바로 프랑스의 농촌이 파산을 겪게 됩니다. 그리고 내가 빵을 비싸게 판다면, 야반도주하게 되는것은 공장들일 테고요. 당신들의 임금이 올라가면, 생산된 물건값이 올라가겠지요. 내 도구들, 내 옷, 내가 필요로 하는 수많은 물건들이 말입니다… 아! 그렇게 돈을 쓰면, 우리가 파산하겠군요!"
- P464

그 말의 파급효과는 대단해서 델롬, 푸앙, 클루, 베퀴 모두 입이 떡벌어지고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르쾨는 신문을 떨어뜨렸다. 우르드캥은 나가다가 다시 들어왔다. 뷔토는 프랑수아즈를 잊어버리고 탁자 한 모퉁이를 차지하고 앉았다. - P469

(집달리)아무런 대답이 없어 그는 더 세게 두드려야 했고, 감히 이름을 부른 다음 소유권 포기를 위한 최고장때문에 왔다고 설명했다. 그러자 곳간 창문이 열리더니, 똑같은 한마디가 큰 소리로 터져나왔다.
"염병하네!"
그리고 가득찬 요강을 쏟아부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젖은 비피는최고장을 도로 가져가야 했다. 로뉴 사람들은 한번 더 배꼽을 잡았다.
- P495

마을 사람들은 그가 미친 척하는 것인지, 정말로 미쳤는지 알 수 없었다. 그 정도로 그의 분노는 광기로 비쳤다. 그는 선 채로 마차를 빠르게 몰며, 길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대꾸도 않고, 달리는 말에 주의하라고 외치지도않고 거리를 지나다녔다. 밤에도 어떤 때는 이쪽에서, 또 어떤 때는 저쪽에서 마차를 타고 달려오는 그를 만나기도 했는데, 어디를 다녀오는지 알 수 없지만 악마를 만나고 오는 것이 분명했다.  - P496

푸앙은 수프에서 불안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는 홀로 수십 리 떨어져 있는 사람처럼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는 듯했다. 마치 자기는 먹으러온 거라고, 거기엔 그의 위장만 있지 심장은 없다고 말하려는 듯했다.
- P535

그때까지만 해도 푸앙은 걸을 수 있었다. 여전히 땅에 관심이 있어걷는 것이 위안이 되었다. 옛 연인들을 잊지 못하고 집요한 열정에 사로잡힌 사람처럼, 그는 늘 예전의 자기 밭들을 보러 올라갔다. 그는 길을 따라, 상처 입은 노인네의 발걸음으로 천천히 배회했다. 아무 밭이나 그 주변에 멈춰 서서 지팡이에 기댄 채 몇 시간씩 가만히 서 있다.
가 다른 밭으로 몸을 이끌고 가서는 다시 그곳에서 꼼짝하지 않고, 늘어 말라버린 나무처럼 자신을 잊은 채 서 있곤 했다. 그의 공허한 두 눈에는 밀도 귀리도 호밀도 분명히 구분되지 않았다. 모든 것이 뿌옇게보였다. 그것은 과거로부터 올라오는 혼란스러운 기억들이었다.  - P541

정오의 뜨거운 햇볕 아래에서도 그는 몸을 움직이는 순간부터 얼어붙고 벌벌 떨었다. 의지와 권위가 죽은 다음에는 마지막으로 노쇠가 오고, 버려진 채 고통스러워하는 늙은 짐승이 되고, 그게 바로 인간으로 살았던 것에 대한 비참한 결과였다. 그런데 그는 아무 불평도 하지 않았다. 할일 다 한 후 쓸모없이 귀리만 축내는 말이 도살당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아무 쓸모 없는 노인네는 돈만 축내니까. 그 자신도 아버지의 종말을 원했었다. 이번에는그의 자식들이 그의 종말을 원한다 해도, 그는 놀라지도 슬프지도 않을것이다. 본래 그런 법이다.
- P543

별들과 태양의 거대한 역학 속에서 우리의 불행은 그 무게가얼마나 될까? 하느님은 우리를 개의치 않는다! 우리는 매일매일 무시무시하게 싸워야만 빵을 얻는다. 그런데 우리가 태어난 모체이며 우리가 되돌아갈 그곳, 죄를 저지를 만큼 우리가 사랑하는 땅, 우리가 악행을 저지르고 파렴치하게 굴어도 알 수 없는 목적을 위해 끊임없이 생명을 다시 만들어내는 땅, 그 땅만은 영원히 살아남는다.
- P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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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1-12-02 00: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곧 리뷰가 올라오겠군요~!! 페이지가 엄청나네요 😅

미미 2021-12-02 00:14   좋아요 1 | URL
늦게 들어와서 리뷰는 못썼어요 새파랑님과 함께 읽으려고 했는데 다른 책 읽고 계셔서 타이밍 놓침요😅 굿밤되세요!

새파랑 2021-12-02 00:18   좋아요 1 | URL
밑줄 읽어보니 제르미날의 농촌버전(?) 느낌이 들어요 ^^
ㅋ 기대가 됩니다. 푹 주무세요~!!

페크pek0501 2021-12-02 13: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펄벅의 대지, 인 줄 알았어요. 에밀 졸라군요. 어쩐지 6백 쪽이 넘어서 이상했어요.
뿌듯한 독서로 느껴지실 듯합니다. 두꺼운 책이니...
완독하셨다면 리뷰만 쓰시면 되는 건가요?

미미 2021-12-02 13:55   좋아요 0 | URL
네ㅋㅋㅋ펄벅의 대지도 읽어야되는데 말입니다. 어제 못써서 지금 쓰고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