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 학생은 소설을 읽고 도시 학생은 희곡을 읽는다‘라는 속설이 있다. 속설이니만큼 거기에다 무슨 의의를 붙여 본다든가, 척도로 삼으려 한다는 것은 지극히 위험스러운 생각이긴 하겠지만 희곡 문학의 일면을 적절히 묘사한 재미있는 표현이라고 하겠다.

희곡 작품에는 소설에서보다 비평의식(批評意識)이 강하고,
긴장미가 앞선다. 그것은 아마도 두세 시간 내외에 승부를가려야 하는 희곡 문학의 외적 조건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작가는 필요 없는 군더더기나 시간을 끄는 설명 같은 것을깨끗하게 추려 버릴 수 있어야 극작가가 될 수 있다.

그런 것들이, 희곡 문학을 전원(田園的)이기보다 도회지적으로 보이게 하는 것이 아닐까? 대개 소설 작품과 희곡작품을 동시에 쓰고 있는 작가의 작품들을 비교해 볼 때, 그런느낌이 강하게 든다. 사무엘 베케트나, 장 폴 사르트르, 막심 고리키 등등.….
- P5

미시시피 그 무서운 행동을 후회하진 않습니까?
아나스타샤 그런 일은 몇 번이든 되풀이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미시시피 (질려서) 정열의 심연을 보는 것 같군요
아나스타샤 (무관심하다는 듯) 이제는 저를 끌고 가실 수 있을 텐데요.
- P31

미시시피 
당신은 살인자요, 부인. 그리고 나는 검사입니다.
그렇지만 죄를 범하는 것이 죄를 보는 것보다는 훨씬참기 쉬워요, 죄를 짓는 자는 후회할 수도 있지만, 죄를본다는 것은 어쩔 수도 없는 죽을 노릇인 것입니다. 나는 현 직업에 25년간이나 종사해 오며 죄라는 것을 마주 보아와서, 이제는 파멸 직전이요. 나는 단 한 사람만 이라도 사랑할 수 있게 해주십사고 여러 밤을 기원도했지만 헛수고였소. 나는 이미 사랑할 수 없게 되었나보오. 어쩔 수 없는 노릇이지. 나는 다만 죽일 수 있을 뿐이오. - P36

생 클로드 나 역시 성공일세. 소련 시민이 됐어. 소련군 대령에다, 루마니아의 명예시민, 폴란드의 국회의원이며,게다가 또 공산당 정치국일세.
미시시피 여기는 어떻게 들어왔지?
생 클로드 창문으로.
- P50

생 클로드
자네가 다시 우리한테 어울리는 말을 찾아 쓰니반갑네. 우린 우리 핏줄을 잊지 마세. 우리가 나온 사회는 동전 다섯 묘도 안 되는 돈을 들여 우릴 만들었고,
우리가 세상에 나올 때 하수는 빨겠어. 쥐새끼들이 우리에게 인생이 뭐라는 것을 가르쳐 주었고, 개숫물로살을 씻었네. 그리고 우리는 우리들 몸 위를 기어다니는 이들로부터 시간의 흐름을 배웠지.
- P53

생 클로드 (거칠게)
 나에게는 그런 환상이 없었던 말인가? ?
 굶주림과 술과 범죄로 악취를 풍기는 이 세상을, 부자들의 노래와 착취당한 자들의 신음소리가 뒤범벅이 된 이 지옥을, 어떻게 좀 개혁해 볼 수 없을까 하는 환상이말이야. 그래 말해 보게. 내겐 피살된 어떤 펨프의 주머니에서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발견한 적도 없고, 언젠가는 세계혁명을 선언하기 위해 무섭고 강요된 생활을 지속해 본 적도 없단 말인가? 우리는 이 시대의 마지막으로 위대한 두 도덕가인 걸세. 둘 다 몸을 감추었어. 자네는 형리라는 가면 속으로, 나는 소련 스파이라는 탈 속으로.
- P55

세계는 전체로 봐서 완전히 비윤리적이 되었네. 하나는 장사에,
다른 편은 권력에 겁을 내고 있네. 혁명은 쌍방이 모두반대하는 걸세. 서방측에선 자유가, 공산측에선 정의가농락을 받고 있네. 서방에서는 기독교가, 공산측에서는공산주의가 익살극이 되어 버렸어. 올바른 혁명을 일으키기에는 지금의 세계 정세가 가장 이상적일세. 그런데이성은 공산측에 가담하도록 가르쳐 주네. 서방이 몰락하기 위해서는 러시아가 승리해야 하고, 러시아가 승리하는 그 순간에 공산주의의 이름으로 모두는 다시 소련에 반기를 드는 거라네.
- P57

생 클로드 
인간을 도울 수 있는 것은 인간뿐이네. 그런데자네는 다른 패짝을 골랐어. 신(神)이란 걸 말일세. 그 래서 자네는 지상을 포기해야만 했어. 자네가 신을 택했기 때문에 선(善)은 신에게만 있는 것이 되었고, 인간은 항상 나쁜 것이 되어 버렸네. 자네한테 있어선 말이야. 자넨 무얼 망설이는 거야? 인간이 신의 법을 실현시킬 수는 없어. 인간은 스스로 법을 창조해야 해. 우리는 둘 다 피를 보아 왔어. 자네는 350명이나 되는 죄인을 살해했고, 나는 내 희생자들을 세어 보지도 않았네.
우리의 행위는 살인이었어.  - P56

미시시피 
나는 신(神)을 불 속에 던질 순 없어. 신 자신이 이미 불이니까.
- P59

생 클로드 
자네는 나를 막을 수가 없고, 나는 자네를 변화시킬 수가 없군. (창을 열고) 잘 있게, 다시 자네 앞에서사라지네. 우리는 어두운 밤에나 서로 찾아 외쳐대는형제였나 보네. 기회는 한 번뿐이었는데 때가 좋지 않았어. 모든 것이 갖춰진 것이었잖나? 자네는 두뇌를,
나는 힘을, 자네는 공포를, 나는 인기를, 그리고 우리의출신 성분은 또 얼마나 좋았어? 정말로 세계사에 남을짝이 되었을 텐데.
- P60

위벨로에 
미시시피의 문패가 이상스럽다 하는 생각이 들긴들었어. 정원이니 집 입구, 현관의 피카소의 그림 등 전부가. 그렇지만 심한 근시안에, 바타비아에서 황열병을앓은 후로 생긴 환각 때문에 내가 착각했을 수도 있고,
내 오관을 더 이상 믿을 수 없다는 것을 나도 잘 알거L든. 열대병이란 열대병은 전부 앓아야만 했으니까. 콜레라 때문에 기억력은 흐려지고 말라리아를 앓고는 방향감각이 흐려졌어. 그런데 하녀가 나오는데 루크레치아였어. 더 이상 의심의 여지가 없었는데도, 5년 동안이면 물론 많은 것이 변할 수도 있겠지 했지. 하녀가 미시시피 집으로 자리를 옮길 수도 있는 일이니까. 그애도나를 못 알아보더군. 보르네오 남부에서 악질을 앓은후로 파란색 안경을 쓴 때문이었나봐. 두 번이나 내쫓겼지. 그래도 억지로 밀치고 들어와 버렸어. 이 방으로들어와선 인사말을 하고 몸을 굽히고서 가까이 다가가어떤 손에 입을 맞추었지. 그러고 보니 내가 당신 앞에서 있지 않아?
- P74

아나스타샤 제 생활도 역시 지옥이에요. 
위벨로에 당신 평생의 사업이 한 여자 때문에 완전히 허물어졌었나? 중요한 직위를 무의미하게 포기하고 보르네오내지(內地)로 도망갔다가 다시 무의미하게 돌아온 적이 있나? 당신은 콜레라에 걸려 봤고, 일사병을 앓아봤고, 말라리아를, 발진티푸스를, 이질을, 황열병을, 수면병, 만성 간장염을 앓아 본 적이 있나?
- P78

장관 

그와는 반대로 나는 방금 수상이 되었습니다. 외국에서들은 야단이나 난 듯이 숨을 죽이고 있네요. 트뤠그데리는 조심스럽게 신문을 읽고, 비신스키는 손만 비비고 있으며, 주식 값은 하락하고, 소문은 흉흉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이런 때야말로 권력을 손에 넣기 안성맞춤의 때인 것입니다.
- P89

미시시피 나는 아내를 믿어요. 법률을 믿듯이,
위벨로에 이 바보 같은 양반에게 내가 지금 잔인한 짓을 하는구나. 흙으로 빚은 거인, 이런 사람한테 진실을 말하다니. 여자를 자기 작품 때문에 사랑하다니! 당신은 인간이 이룩해 놓은 일이 거짓이란 것을 모르오? 당신의사랑은 너무 무력하고, 당신의 법률은 너무 맹목적이란.
말이오. 보시오, 나는 이 여자가 정직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불행하기 때문에 사랑해, 되찾은 양으로서가 아니라, 길을 잃은 양으로서 사랑한단 말이오.
- P98

미시시피 그 여자는 나의 전 세계였네. 내 결혼은 무서운실험이었네. 나는 세계를 얻으려고 싸웠고, 승리했네.
사람은 죽으면서까지 거짓말은 못하는 법이야.

생 클로드 그 여자가 거짓말을 할 수 있었다면, 그 여자 앞에서 모자를 벗어야겠군. 그러면 그 여자는 성녀(聖女)라고 할 수 있을 테니.
- P124

미시시피 그러나 나는 이제 지쳤어, 몸이 떨리네. 가스등불밑에서 나는 성경을, 자네는 《자본론》을 읽던 우리의젊은 시절의 추위가 다시 느껴지네.
- P125

미시시피 (다시 일어나며) 그렇게 우리들, 형리이며 동시에제물인 우리는 우리 자신이 해놓은 일로 인해 파멸되었던 것입니다.

장관 (오른쪽 창문에 나타난다) 그러나 나는, 오직 권력만을추구하는 나는, 세계를 껴안습니다.
- P127

<로물루스 대제>

아킬레스 (고개를 저으며) 로마 같은 대기업이 완전히 무너진다는 것은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오..
- P134

로물루스 거기 대해선 우리 좀더 구체적으로 얘길 나눔세,
케사르 루프, 여하튼 우선 그대를 기사로 봉하고 보겠네. 아킬레스, 검을 가져오너라.

케사르 루프 폐하, 고맙습니다만 본인은 살 수 있는 작위란모두 다 샀습니다. 그리고 미리 잘라 말씀드리겠는데,
로마제국을 사는 것은 포기했습니다. 로마제국 같은 부실기업을 무턱대고 인수해서 재건한다는 것은 세계적인대상사에게도 좀 비싸게 먹힐 겁니다.  - P161

로물루스 우리가 국가를 위해서 수백 년간을 희생해 왔으니 이젠 국가가 우리를 위해서 희생할 차례야!
- P164

스푸리우스 티투스 맘마

제가 타고 오던 말이 일곱 마리나 죽었고 저는 화살을 세 개나 맞았습니다. 그래 가지고 여기 도착했건만 사람들은 폐하를 알현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폐하, 여기에 폐하의 마지막 사령관 오레스테스의 보고서가 있습니다. 적에게 잡히기 바로 직전에 제게 넘겨 준것입니다.
- P166

로물루스 너 떨고 있구나.
아킬레스 그렇습니다. 폐하.
로물루스 웬일이냐?
아킬레스 전황에 대해서 말씀드리면 폐하께선 좋아하지 않으시겠지요?
로물루스 그건 엄금하지 않았느냐? 전황에 대해선 난 이발사하고만 이야길 나눌 뿐이다. 그래도, 그것에 대해 뭘좀 이해하는 놈은 그놈뿐이거든.
아킬레스 카푸아가 함락되었습니다.
로물루스 그렇다고 그게 포도주를 엎지를 이유는 안 돼.
아킬레스 용서하십시오. (허리를 굽힌다) - P198

로물루스 
그건 나도 인정한다. 달리 도리가 없어, 돈으로구해지거나 멸망하거나지, 즉 파국적인 자본주의 아니면 자본주의적인 파국주의냐, 이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거란 말이다. 하지만 네가 케사르 루프하고 결혼할 순 없다. 넌 에밀리안을 사랑하고 있잖으냐?
- P200

로물루스 
안 되지. 보다 인간을 사랑해야 한다. 자기 조국 에 대해선 무엇보다도 회의적이어야 하는 거야. 조국이라는 것보다 더 쉽게 살인자가 되는 건 없으니까.
- P201

아킬레스 저희들은 제국에 봉직하느라고 60년간을 쓰라린가난 속에서 살아왔습니다. 

피라무스 어떤 마부라도 황제의 시종보다는 많은 보수를 받았습니다. 언젠가 한 번은 말씀드려야 했던 일입니다.폐하.

로물루스 그건 인정한다. 하지만 이것도 알아 둬야 한다.마부가 황제보다 더 많은 보수를 받았다는 사실을.
- P221

로물루스
나는 로마의 과거가 소름 끼치게 무섭기 때문에 로마를사형에 처했소. 한데 당신은 게르마니아의 장래가 무섭기 때문에 사형에 처하려는 거요. 그런 과거의 일이나장래의 일에 대해선 우리가 아무런 힘도 없기 때문이겠죠. 우리는 오직 우리가 생각지도 않던 현재, 그래서 암초에 걸려 있는 현재에나 손을 써 볼 수 있는 것인가 봅니다. - P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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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1-08-17 16: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뒤렌마트면 희곡 이네요? ㅋ 들어가보니 1975년 발행된 책이라니 🙄

미미 2021-08-17 16:12   좋아요 1 | URL
엄청 오래되었네요ㅎㅎ 작품 배경도 과거지만 위대한 작가들이 그렇듯 시대를 초월한 질문과 답이 들어있어요!😳

Falstaff 2021-08-17 16: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우... 이 책을. 반가워서 깜짝 놀랐습니다. ㅎㅎㅎ

미미 2021-08-17 17:26   좋아요 1 | URL
역시 폴스타프님👍 너무 재밌었는데 충분히 설명할 수가 없어 답답할 따름입니다. 최근 읽은 어떤 작품보다 좋았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