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스는 하늘과 땅 사이 무함마드의 관처럼 이 범주들 사이를부유하는 학문이요 예술이며, 대립하는 모든 것들을 유일하게 연결해주는 것이 아니던가?
즉 태곳적인 것이면서도 영원히 새로운 것이요, 그 구도가 메커니즘적이면서도 판타지를 통해서만 작동하며, 기하학적으로 일정 공간에 제한되어 있으면서도 그 조합에서는 무제한적이고 항상 자기 발전적이나 번식력이 없다.
무(無)로 이끄는 생각, 무에이르는 수학, 작품 없는 예술, 실체 없는 건축, 그럼에도 명백하게 그존재 자체가 어떤 책이나 작품보다 영속적이며, 모든 민족과 모든 시대에 속하는 유일한 게임이면서도, 지루함을 죽이고 감각들을 예리하게 하며 영혼에 긴장감을 주기 위해 신이 이 땅에 가져온 게임이라는것을 아무도 모른다.
이 게임에서 어디가 시작이고 어디가 끝인가? (아 너무 멋진 표현이다.) - P20
매코너는 깜짝 놀라 체스 말에서 손을 떼고 우리 못지않게 의아해하며 그 남자를 응시했다. 그 남자는 생각지도 못한 천사처럼 우리를도와주러 하늘에서 내려온 것이다.
아홉 수를 두고 난 뒤의 메이트를미리 계산할 수 있는 자라면 최고 수준의 전문가임에 틀림없었다. 어쩌면 같은 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여행 중인 챔피언 타이틀 경쟁자일지도 몰랐다.
그의 갑작스러운 등장과 개입, 그것도 이 위기의 순간에개입한 데는 뭔가 초자연적이라 부를 만한 신비한 면이 있었다. 매코너가 먼저 말을 걸었다. "당신이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는 흥분해서 속삭였다.
"당장앞으로 가지 말고 우선 피하세요! 무엇보다도 g8에서 h7로 이어지는위험한 라인에서 킹을 피신시키세요. 그러면 아마도 그는 다른 쪽으로 공격할 겁니다. 그러면 당신은 c8에서 4로 룩을 옮겨 막아내는 겁니다.
이렇게 하려면 그는 두 수를 두고 폰을 하나 희생하고, 그러면서 우세를 점하게 되지요. 그러면 자유로운 폰끼리 서로 마주하고 서있게 됩니다. 제대로 방어만 잘한다면 당신은 무승부로 끝낼 수 있습니다. 그 이상은 여기서 건질 수 없습니다." - P32
이렇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상황이 사 개월간 지속되었습니다. 이제 사 개월이란 말이 쉽게 나옵니다. 하나의 철자가 아닌데도 말입니다! 그 말이 쉽게 발음됩니다.
사 개월 - 삼 음절이나 되는 말이지요!
그땐 십오 분 뒤에 입술이 열려 얼른 하나의 음처럼 발음했었지요. 사개월!
하지만 무공간적인 곳에서 무시간적인 때에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아무도 묘사할 수도 헤아릴 수도, 다른 사람에게는 물론 저자신에게까지도 명확하게 가시화할 수 없습니다. - P50
그러고 나서 신문이 시작되었습니다. 신문을 받을 때 전보다 더 긴장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대답을 하는 내내 진술하는 데가아니라, 그 책을 눈에 띄지 않게 꼭 붙드는 데 온 힘을 쏟았기 때문입니다.
다행히 신문은 짧게 끝났습니다. 전 그 책을 무사히 제 방으로가져갔습니다. 너무 자세한 이야기로 당신을 잡아두고 싶지는 않습니다만, 걸어가는 도중에 책이 바지에서 미끄러지는 바람에 위험했습니다.
전 심한 기침 발작이 일어난 것처럼 허리를 굽히고 다시 허리띠밑으로 책을 무사히 밀어 넣었습니다. 그때 그 일초가 어떻게 흘렀는기! 그리고 전 다시 저의 지옥으로 되돌아가서 마침내 혼자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더는 혼자가 아니었어요! - P55
체스 게임은 놀랄 만한장점을 가지고 있어요. 아무리 긴장해서 두뇌활동을 해도 아주 제한된 좁은 영역에 정신적 에너지를 쏟아서 뇌가 무력해지지 않는다는겁니다.
오히려 뇌에 노련함과 긴장감을 더해주지요. 처음에는 단순히 거장들의 경기를 기계적으로 따라 하기만 했는데, 차차 예술적으로 이해하면서 재미를 알아가기 시작했습니다.
섬세한 기술들, 공격과 방어시의 전략들을 이해했지요. 미리 생각하기, 연결시키기, 받아치기의 기술도 간파했고, 챔피언들의 개별적 특성도 금세 알아보게되었습니다.
마치 시를 몇 줄만 읽고도 어떤 시인인지 확신할 수 있듯이 말입니다. 단순히 시간을 때우려고 시작했던 일이 즐거움이 되었답니다.
알레킨, 라스키, 보골류보프, 타르타코버 같은 위대한 체스전략가들이 좋은 친구가 되어 저의 고독한 세계에 등장했습니다.
무한한 기분전환으로 무언의 호텔 감방은 매일매일 활기가 넘쳤고, 흔들리던 저의 사고력은 규칙적인 연습으로 안정을 되찾았지요. - P59
머리가맑아지고 지속적인 두뇌훈련으로 심지어 새롭게 갈고 닦은 것처럼 느껴졌답니다. 제가 더 명확하게, 더 집중적으로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는 것은 무엇보다도 신문을 받을 때 확인되었습니다.
저도 모르는 사이에 체스보드 앞에서 거짓위협이나 감춰진 책략에 맞서 방어하는 데능숙해진 겁니다. 이때부터 신문을 받을 때 더는 허점을 보이지 않았고, 심지어 게슈타포들이 차츰 저를 어느 정도 존경심을 가지고 바라보기 시작했다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하나같이 견디지 못하고 무너지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에 어쩌면 은연중에, 대체 어떤 신비한 원천에서 저 혼자 끄떡없는 저항의 힘을 길어내고 있는가 자문했을지도 모릅니다. - P60
체스보드 위에서 말들을 미는 동작이 제가 사유의 공간에서 상상하며 두던것과 동일하다는 데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건 어쩌면 천문학자가 종이 위에서 복잡한 방법으로 새로운 혹성에 도달하고 나서, 실제로 그 혹성을 하늘에 떠 있는 하얗고 분명한 물질적인 별로 바라볼때 느끼는 놀라움과 비슷할 것입니다.
마치 자석에 달라붙은 듯 보드를 뚫어져라 쳐다보았고, 거기에서 제가 상상했던 나이트, 룩, 킹, 퀸,폰 등의 도형들이 나무로 만들어져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시합의 판세를 전체적으로 내다보기 위해 저는 무의식적으로 추상적인 숫자의세계를 움직이는 체스 말의 세계로 바꿔놓아야만 했습니다. - P72
그래서 그때 예의도 잊은 채 당신들의 시합에 끼어드는 난감한상황을 자초하게 된 겁니다. 당신 친구가 한 수를 잘못 둔 것이 마음에 비수처럼 꽂혔고, 난간 너머로 몸이 넘어가는 아이를 미처 생각할겨를도 없이 붙잡는 것처럼 순전히 본능적으로 그를 막으려 한 것입니다. - P72
이와 달리 B박사는 완전히 느슨하고 자연스럽게 움직였다. 진정한 딜레탕트! 이 말이 지닌 가장 아름다운 의미인 유희, 즉 게임에서 오직 유희적인 기쁨만을 느끼는 딜레탕트로서 그는 몸을 아주 편안하게 했다. 첫번째 쉬는 시간에는 우리와 수다를 떨고 가볍게 담배에 불을 붙이기도 하다가, 자기 차례가 되면 체스보드를 아주 잠깐 쳐다볼 뿐이었다. 그는 매번 상대의수를 미리 예상하기라도 한 것처럼 보였다. - P75
마지막으로 책들이 왔어요. 그렇게 많고 좋은 책들은도저히 상상할 수도 없을 정도였습니다. 문 앞에 그것들이 층층이 쌓여 있었고, 하인이 물건들을 받아 하나하나 세심하게 먼지를 털어냈습니다.
저는 점점 더 늘어나는 책 더미 근처를 호기심에 가득 차 조심스레 서성였지요. 하인은 저를 쫓아내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용기를 불어넣어주지도 않았어요. 그래서 그 많은 책들의 부드러운 가죽을 무척이나 만져보고 싶었어도 어느 책에도 손 댈 용기가 나지 않았습니다.
전 그저 옆에서 제목만 부끄러이 바라보았어요. 그 가운데는프랑스어 책, 영어 책도 있었고 제가 이해할 수 없는 언어로 쓰인 책들도 많았습니다. 생각 같아선 몇 시간이고 책들을 모조리 둘러볼 수있을 것 같았는데, 하필 그때 어머니가 저를 불러들였습니다. - P96
당신은 제 삶을 완전히 바꿔놓았습니다. 그전까지는 학교에 별 관심 없는 평범한 학생이었는데, 갑자기 최고가 되었지요. 수많은 책들을 깊은 밤까지 읽어댔습니다. 당신이 책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머니가 놀랄 정도로 갑자기 고집스럽게 피아노를연습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신이 음악을 좋아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지요. 오직 당신 마음에 들려고, 단정하게 보이려고 씻고 옷들을 바느길하고 손질했답니다. - P102
마침내 어느 날 저녁, 당신이 저를 알아보았습니다. 전 이미 저 멀리서 당신이 오는 것을 보았고, 당신을 피하지 않으리라 마음을 굳게다졌지요. 우연히도 짐을 부리려는 차 때문에 길이 좁아져 당신은 어쩔 수 없이 저를 스치듯 지나가야 했습니다.
은연중에 당신의 무심한눈길이 저를 스쳤고, 곧이어 당신의 눈길과 제 눈빛이 부딪치자마자당신은 여성을 바라보는 그 눈빛으로, 부드럽게 감싸 안는 듯하면서동시에 벗기는 듯한 눈빛으로, 포옹하는 듯하면서 이미 포박하는 듯한 눈빛으로 변했지요.
어린 시절 저를 여자로, 사랑하는 여자로 처음깨어나게 해주었던 그 눈빛으로 말입니다. - P115
우스꽝스러운 저의 행동과 헛된 생각으로 인해 선량한 그 사람이 영원히 씻지 못할 상처를 받았고, 제 삶을 두 동강 내버렸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다시 한 번 당신의 입술을 느끼고 부드럽게 다가오는 당신의 목소리를 듣고 싶은 조바심에 비한다면제게 우정이 뭐고 실존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만큼 전 당신을 사랑했습니다. - P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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