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2년 후반이나 1933년 초반에는 7대 중대 정책이 소련령 우크라이나에만, 또는주로 소련령 우크라이나에 적용되었다. 각각의 정책은 온건한 행정적조치처럼 보였고, 당시에는 그런 조치로 제시되었지만, 모든 조치는살인을 필수로 했다.

1. 1932년 11월 18일, 우크라이나 농민들은 이전에는 곡물 징발 목표량을 달성하면 얻을 수 있었던 곡물 선지급분을 반납해야 했다. 이는 농민이 풍작을 거둘 수 있었던 극히 일부 지역에서도 얼마 안 되는 잉여 곡물을 빼앗겨야 한다는 뜻이었다. ...중략...우크라이나 공산당 지도부는 종곡을 보호하려 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 P91

2. 이틀 뒤인 1932년 11월 20일에는 ‘고기 벌금이 도입되었다. 곡물 할당량을 달성하지 못한 농민은 이제 특별 세금을 고기로 내야 했다. 아직 가축을 소유하고 있던 농민은 국가에 가축을 넘겨줘야 했다. (결국 쌀도 가축도 다 가져감) - P91

5.1932년 12월 21일, 스탈린은 (카가노비치를 통해) 소련령 우크라이나의 연간 곡물 징발 할당량을 1933년 1월까지 달성해야 한다고단언했다. 11월 27일 소비에트 정치국은 우크라이나에 소련 전체 징수량의 3분의 1을 할당했다. 
- P93

이미 굶주리고 있는 인구로부터 곡물을 징수하려면 최악의 결과를 감안해야 했다. 징발을 3개월연기하기만 하면 소비에트 경제에는 아무런 악영향을 주지 않으면서, 300만 명의 목숨을 구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스탈린과 카가노비치는 정확히 그 반대의 길을 고집했다. 국가는 계획 달성을 위해,
카가노비치의 표현을 따르면, "맹렬하게 싸워야 했다. - P94

6. 1933년 초반 몇 주 동안 우크라이나에서 굶주림이 맹위를 떨칠때, 스탈린은 농민이 도망치지 못하도록 공화국의 국경을 봉쇄했고,
농민이 구걸하지 못하도록 도시를 폐쇄했다. 

1933년 1월 14일 소비에트 시민은 도시에서 합법적으로 거주하려면 국내용 여권을 휴대해야했다. 농민들은 그런 여권을 받지 못했다. 1933년 1월 22일 발리츠키는 모스크바에 우크라이나 농민들이 공화국을 탈출하고 있다고 경고했고, 스탈린과 몰로토프는 국가 경찰에게 농민의 탈출을 막으라고지시했다. 

이튿날 농민에 대한 장거리 기차표 판매가 금지되었다. 스탈린이 내세운 이유는 농민 난민이 실제로는 빵을 구걸하는 게 아니라, 집단농장에 대한 불신을 조장하려는 폴란드와 다른 자본주의 국가의 살아 있는 선전 기관 역할을 해 "반혁명 음모에 가담한다는 것이었다.  - P94

20년 후, 정치철학자인 한나 아렌트는 이러한 우크라이나 기근이야말로 모든 것이 모든 것으로부터 소외되는, ‘원자화된 현대사회 형성 과정의 중요한 포인트였다고 주장했다. - P97

굶주림은 반란 대신 도덕의 부재, 범죄, 무관심, 광기, 무기력, 그리고 종국에는 죽음을 불러왔다.  - P97

극소수의 외부인은 가장 끔찍했던 이 시기를 목격하고 기록할 수있었다. 기자였던 개러스 존스는 자비로 모스크바까지 이동했고, 우크라이나 여행 금지령을 위반한 채 1933년 3월 7일 하리코프로 가는 기차를 했다. 

그리고 임의로 선택한 작은 역에서 내려 식량을 가득 채운 배낭을 메고 교외 지역을 도보로 여행했다. 그는 "엄청난 규모의 기근을 목격했다.  - P97

당시 여덟 살이던 유리 리센코의 학교에서는 한 여학생이 마치 잠자듯 쓰러졌다. 어른들이 달려왔지만 유리는 친구가가망이 없으며, "이미 죽었고, 어른들이 어제와 그제, 그리고 매일같이 사람들을 묻었던 묘지에 친구를 묻으리란 사실을 알고 있었다.

다른 학교의 남학생들은 연못에서 낚시를 하다 반 친구의 잘린 머리를 낚았다. 온 가족이 사망한 아이였다. 가족들이 아이를 잡아먹은걸까? 아니면 부모님이 죽은 뒤 다른 사람들의 식인 행위에 희생된걸까? 누가 알겠는가. 하지만 이런 의문은 1933년, 우크라이나 아이들에게는 흔해빠진 것이었다.
- P101

굶주림을 눈앞에 두고, 많은 가족이 산산조각 났다. 부모는 자식을나몰라라 했고, 자식들은 서로 먹을거리를 놓고 싸웠다. 

국가 경찰 기구인 OGPU의 기록에서 부정할 수 없도록 드러났다시피, 소련령 우크라이나에서는 "가족이 그 가장 약한 식구를 잡아먹었다. 보통 어린애들이었다". 어쨌든 자기 자식을 죽이고 먹은 부모는 셀 수 없을 정도였다. 

어떤 어머니는 자신과 딸의 식사를 위해 자기 아들을 잡아서요리했다. 친척들에 의해 목숨을 건진 여섯 살짜리 소녀는 자기를 죽이려고 칼을 갈고 있는 모습이 마지막으로 본 아빠의 모습이었다
- P102

살아남으려면 육체뿐 아니라 정신도 버텨내야 했다. 1933년 6월,
한 여의사가 친구에게 보낸 편지는 그녀가 아직 식인종이 되지는 않았다고, 하지만 "이 편지를 네가 볼 때쯤이면 어떨지 모르겠어"라고밝히고 있었다. 

착한 사람부터 먼저 죽어갔다. 남의 것을 훔치거나,몸을 파는 일을 끝내 하지 않은 사람들 말이다. 시체 뜯어먹기를 못내 거부한 사람들도 죽어야 했다. 식인을 하지 않음으로써, 부모들은자식들이 보는 가운데 죽어갔다. 

1933년의 우크라이나에는 고아가넘쳐났고, 때로는 사람들이 그들을 거두었다. 그러나 먹을거리가 없는 판에는 낯선 이들이 그런 아이들에게 해줄 게 별로 없었다. 사방에 거적때기나 담요를 덮어쓴 소년 소녀들이 널브러져 있었고, 그들은 자기 배설물을 먹으며 죽음을 가다리고 있었다.
- P103

인육을 사고파는 블랙마켓이 열렸다. 인육은 심지어 공식 경제로도 편입되었다. 경찰은 인육 판매자를 사찰했고, 국가 기구는 사람을 죽여서 고기를 잘라 파는 장사치들을 밀착 감시하고 있었다. - P105

하리코프의 어느 젊은 공산당원은 육류 배급 할당치를 채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육으로만 가능합니다‘라고 상부에 보고했다. 오두막 굴뚝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는 인육과 관련해서 뭔가가 벌어지고 있다는 의심을 사기에 충분한 근거였다. 대개 그것은 희생자를 굽고 있거나, 한가족이 그 구성원 하나를 잡아서 뜯어 먹고 있는 경우였기에. 

경찰은연기를 보고 쳐들어가 체포했다. 1932년에서 1933년까지 우크라이나에서 최소한 2505명이 식인 행위 혐의로 처벌받았다. 실제 그 행위자수는 훨씬 더 많았지만 말이다.
- P105

1937년도 소련 인구조사는 예상치보다 800만 명이 밑도는 결과를냈다. 인구 감소분의 대부분은 우크라이나, 카자흐스탄과 대러시아에서의 기근 사망으로 발생했고, 또한 그 때문에 신생아 수가 급감한탓이었다. 스탈린은 이 결과를 공표하지 못하게 하고, 조사 책임자들을 처형했다. - P108

우크라이나의 대표적인 작가와 정치운동가는 모두 자살했다. 한사람은 1933년 5월에, 다른 사람은 같은 해 7월에, 소련 국가는 우크라이나 공화국에 얼마간이라도 자치권을 지켜주려는 시도를 분쇄했으며, 그런 주장을 편 사람들과 그들의 가족까지 말살해버렸다."
- P109

대규모 기아와 사망에 대한 기본 사실들은 어쩌다가 유럽과 미국의 매스컴에서 다뤄지기는 했지만, 결코 적나라하게 보도된 적은 없었다. 

스탈린이 우크라이나인들을 의도적으로 굶겨 죽였다고 보도한경우는 거의 없다고 할 수 있었다. 심지어 아돌프 히틀러조차 스탈린보다는 마르크스주의 체제를 비난하는 편이었다. 

도대체 기근 사태라는 게 있는지 여부도 논란거리였다. 개러스 존스는 소수의 신문에기근 사태를 폭로했다. 자기 이름을 내걸고 영어로 그런 주장을 쓰는사람은 오로지 그뿐이었던 듯하다.  - P112

비록 언론인들은 외교관에 비해 아는 게 적었지만, 수백만 명이 굶주려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은 대부분 알고 있었다. 

『뉴욕타임스」의영향력 있는 모스크바 통신원이던 월터 듀런티는 존스의 정확한 보도를 깎아내리려고 갖은 수를 다 썼다. 1932년에 퓰리처상을 받은 듀런티는 존스가 소련 기아 사태에 대해 전한 내용을 "어이없는 괴담"
이라고 일축했다. 

듀런티는 "실제로 기아 따위는 없고, 다만 "영양 부족 때문에 전염병이 번져서 사망자가 많이 나오는 것"이라면서 소련쪽 주장과 비슷한 왜곡된 주장을 했다. 

이런 왜곡 보도는 조지 오웰의 1984년을 연상케 한다. 실제로 조지 오웰 자신이 1933년, 우크라이나 기근을 두고 검은 진실을 말잔치로 하얗게 칠해버리는 대표적인 예‘라고 밝혔다. 

듀런티도 알고 있었다. 수백만 명이 굶어 죽어가고 있음을. 그러나 그는 그 기아가 더 큰 목표를 위한 과정이라는 입장을 자신의 글에서 고집했다. 

"달걀을 깨지 않고 오믈렛을 만들 수는 없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 P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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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1-04-05 15: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엄청난 밑줄이네요^^ 미미님의 다양한 독서범위란~!

청아 2021-04-05 16:05   좋아요 1 | URL
모르는게 워낙 많아서요.😅ㅋㅋㅋ러시아는 문학도 역사도 다 흥미롭네요!

새파랑 2021-04-05 16:12   좋아요 1 | URL
러시아 너무 좋은나라 같아요. 추운거 빼면 ㅎㅎ 이책도 읽어보겠습니다^^

청아 2021-04-05 16:21   좋아요 1 | URL
역사 공부가 많이 되실거예요.😄 러시아 꼭 가보고 싶네요!!

scott 2021-04-05 19:2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우 이럴수가 사실이였군요 사람이 사람을 ㅠ.ㅠ 아유슈비츠 수용소 인근 마을 주민들도 이런 증언을 했었는데 ㅠ.ㅠ 러시아인들의 곡식 창고 였다는 우크라이나에 이런 비극이 ,,,,

청아 2021-04-05 19:48   좋아요 1 | URL
네! 아무래도 여러번 혹시나 했던 일인데 사실이었던걸로 나와요.ㅠㅇㅠ 며느리도 잡아먹고, 당시 사람 머리가 막 여기저기...굶주림은 이런면에서 더 비참한듯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