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시집


거미

거미가 허공을 짚고 내려온다.
걸으면 걷는 대로 길이 된다.
허나 헛발질 다음에야 길을 열어주는
공중의 길, 아슬아슬하게 늘려간다.

한 사내가 가느다란 줄을 타고 내려간 뒤
그 사내는 다른 사람에 의해 끌려 올라와야 했다.
목격자에 의하면 사내는
거미줄에 걸린 끼니처럼 옥탑 밑에 떠 있었다.
곤충의 마지막 날갯짓이 그물에 걸려 멈춰 있듯
사내의 맨 나중 생이 공중에 늘어져 있었다.

그 사내의 눈은 양조장 사택을 겨누고 있었는데
금방이라도 당겨질 기세였다.
유서의 첫 문장을 차지했던 주인공은
사흘 만에 유령거미같이 모습을 드러냈다.
양조장 뜰에 남편을 묻겠다던 그 사내의 아내는
일주일이 넘어서야 장례를 치렀고

어디론가 떠났다 하는데 소문만 무성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아이들은
그 사내의 집을 거미집이라 불렀다

거미는 스스로 제 목에 줄을 감지 않는다 - P9


댓글(4) 먼댓글(0) 좋아요(3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행복한책읽기 2021-03-23 21: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이 분 시집 대출했군요. 저는 이분이 낸 아홉살 시리즈 있어요. 아들이랑 볼라구요. 시집은 볼생각을 못했네요. ㅋ 일단 찜했음요^^

청아 2021-03-23 21:48   좋아요 0 | URL
사춘기 시리즈랑 있네요!
이 시만 봐도 뭔가 추리소설같아서 전부터 찜해두었다가 이제야 빌렸어요. 책읽기 님처럼 시적 감각을 얻으려면 항상 곁에 두어야죠!ㅋㅋ♡

scott 2021-03-23 22: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시어속에 그남자 그상황 처절함이 느껴질 정도로 묘사가 뛰어나네요 곁에 두고 두고 읽기에 넘 슬플것 같은데 ㅜ.ㅜ거미를 제가 실제로 우연히 키워봤는데 (한곳에서만 2-3년동안 삼) 거미 제스스로 줄을 목에 감지 않고 정확하게 목표물을 향해 조준!

청아 2021-03-23 22:14   좋아요 1 | URL
와 거미를 키워보셨다니👍
이런저런 경험도 풍부하심♡ 다른 시들도 훑어보니 이런 느낌이어서 더 좋아요~단어만의 함축미를 넘어선 서사를 담은 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