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물과 무생물 사이
후쿠오카 신이치 지음, 김소연 옮김 / 은행나무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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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렸을 때 보았던 TV 만화영화 중에 오랜 시간동안 내 기억 속에 담겨 있다가 문득문득 떠오르곤 하는 장면이 있다. 제목은 기억나지 않는데, 주인공인 어린 소년이 세상의 모든 사물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어 식사 시간에 물고기나 육고기를 먹지 못한다. 같이 이야기 나누던 상대를 먹어치울 순 없는 일 아닌가? 할 수 없이 채소와 곡류만으로 식사를 마치는데, 문제는 채소들의 반란이 시작된 것이다. 소고기, 닭고기, 생선처럼 우리도 살아있는 것인데 왜 먹느냐는 것이다. TV를 본 그 순간에야 별 생각 없이 보아 넘겼는데, 이게 시간이 가면 갈수록 불쑥불쑥 생각나는 것이다. 나 역시 민감한 시기인 초등학교 5학년 때, 치킨을 사러 갔다가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닭 옆에서 태연하게 닭고기를 안주로 술을 마시는 어른들을 보고 너무 역겨운 생각이 들어 그때부터 지금까지 소, 닭, 돼지 등의 고기를 먹지 않는다. 내 사정이 이렇다보니 ‘살아있기는 매한가지인 생선이나 채소는 왜 먹는 건데?’하고 가끔은 나 스스로에게 딴지를 걸기도 한다. 정말 살아있다는 것이 무엇일까? 돌맹이도 쇳덩이도 흙더미도 물도 사랑하면 그 속에서 아름다움을 드러내 보인다고 하는데, 진정 생물과 무생물을 나눌 수 있는 기준이란 게 있을 수 있는지, 있다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생물과 무생물 사이」에는 분자생물학을 전공한 교수 후쿠오카 신이치의 ‘생명이란 무엇인가?’라는 문제에 대해 오늘날까지도 명쾌하게 가슴에 와 닿는 답을 찾지 못한 것에 대해 조금이라도 더 다가서고자 하는 마음이 담겨 있다. 20세기에 이룩한 놀라운 생명과학이 ‘생명’의 본질에 도달할 수 있었던 것은 DNA의 발견이었다. DNA의 이중나선에 새겨진 암호, 즉 유전자 정보가 새로운 세포의 탄생이나 분열, 자기복제 시스템의 근간이 됨이 밝혀지면서 유전자 조작이라는 놀라운 기술의 발전에 이를 수 있었다. 저자는 여기에서 DNA를 최초로 발견한 이도, 그 구조를 밝혀낸 이들도 의식하지 못한 DNA의 동적인 모습, 즉 모든 물리 현상에서 나타나는 엔트로피(난잡함) 증대의 법칙에서 벗어나 질서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이 ‘생명의 특질’이며 이러한 특질을 실현시키는 생명체 고유의 메카니즘이 존재함을 깨달은 과학자 루돌프 쇤하이머에 주목한다. 작가는 쇤하이머의 발견으로 생명을 ‘자기복제를 하는 존재’에서 ‘동적 평형 상태에 있는 흐름’으로 재정의 한다. 이는 끊임없이 파괴되는 질서 속에서 질서를 유지하는 것, 즉 흐름을 계속하면서 균형을 어떻게 확보하느냐는 질문을 낳는다. ‘그 답은 단백질의 형태가 몸소 보여주는 상보성에 있다. 생명은 그 내부에 얽히고설킨 형태의 상보성에 의해 지탱되며 그 상보성으로 인해 끊임없는 흐름 속에서 동적인 평형 상태를 유지한다.’ -154쪽

  서로 부족한 부분을 보완해주는 상보성은 생물계를 한마디로 요약해주는 듯한 느낌을 준다. 무릇 살아있는 것들은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면서 완전에 가까워지는 것 아닐까?

  작가의 맺음말에서 어린 시절 도마뱀 알이 부화되는 걸 참지 못해 작은 구멍을 내고 안을 들여다보았다가 돌이킬 수 없는 실수임을 깨달았던 일화가 나온다. 생명의 경이로움을 목격했지만, 이내 인위적으로 균형을 깨뜨렸을 때 외부 공기에 닿은 도마뱀 새끼가 썩어 버린 것을 본 작가의 경험이 내게도 큰 울림을 남긴다.

  나를 비롯해 아무런 깨달음도 없이 자연을 거스르며 사는 지금의 사람들에게 ‘생명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싶게 만드는「생물과 무생물 사이」를 읽고 나니, 균형을 깨뜨려야만 하는 인위적인 실험을 계속할 수밖에 없는 분자생물학자로서 저자의 딜레마가 느껴지지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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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의 책
클라이브 바커 지음, 정탄 옮김 / 끌림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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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으로 내가 살아갈 날들까지 모두 포함해서 다.시.는. 공포영화를 보지 않으리라 다짐했던 때가 있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직후 경험해보지 않은 것에 대한 동경으로 사촌동생과 대학로 부근의 극장에서 밤 12시부터 새벽 5시에 걸쳐 논스톱으로 상영해주는 ‘한여름의 더위를 날려주는 3편의 공포영화’를 봤었다. 그 당시 제대로 된 의미도 모르고 유행인양 떠들고 다녔던 ‘컬트영화’를 본다는 희한한 자부심에 한밤중엔 화장실도 제대로 못가는 ‘소심녀’가 일탈을 감행했던 것이다. 그 때 보았던 영화가 ‘록키호러 픽쳐쇼’와 코믹 버전의 ‘늑대인간’ 그리고 제목이 생각나지 않지만 우주공간이 배경이 된 작품이었다. 영화를 통해 ‘피’는 칼라로 표현해도, 흑백으로 표현해도 정말 섬뜩하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되었고, 영화를 보는 내내 기분 나쁜 울렁거림과 익숙하지 않은 것에 대한 거북한 느낌이 들어 다시는 이런 영화를 보지 않으리라는 다짐을 하기에 이르렀다.

  영화감독과 배우, 무대장치를 맡은 사람들이 작정하고 나서서 보는 이를 오싹하게 만들어주는 영화야 당연히 무서울 테지만, 설마하니 책은... 하는 생각이 거의 20여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또다시 다.시.는. 공포소설을 읽지 않으리라 다짐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제목부터 섬뜩한 클라이브 바커의「피의 책」은 10편의 중편소설을 엮어 놓은 책이다. 피의 책이니 미드나잇 미트 트레인이니 피그 블러드 블루스, 스케이프고트 등 제목만 보아도 심상치 않은 기운을 풍기는 이야기들은 들고 있기에도 무거운 책을 순간순간 집어던지고 싶게 만든다. 죽은 자들이 모여 복수를 하고 심야의 지하철에서는 엽기적인 살인사건이 일어난다. 3미터 가까운 거구를 한 야수 로헤드 헥스는 사람이든 동물이든 무자비하게 먹어치우거나 파괴하고 유령과 좀비도 클라이브 바커의 펜 끝에서 나름의 역할을 해낸다.

  설정된 것을 화면으로 보여주는 영화는 그 장면 너머를 상상하게 만들어주지 못한다. 감독이 의도하고 설정해놓은 꼭 그만큼만을 보고 의도된 만큼만 놀라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책은 그렇지 않다. 활자를 읽으면서 내 머릿속에서는 끔찍한 장면들 하나하나가 시간과 장소, 크기에 제한받지 않고 떠오르게 된다. 내 의지로 활자만 읽어야지, 내용만 들여다봐야지 하는 것은 통하지 않는다. 공포가 극에 달한 아이와 여자, 남자, 동물들의 얼굴이 떠올라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일임에도 두 눈을 꼭 감게 만드는 것이다. 심장도 오르라지는 것 같다. ‘도대체 왜 이렇게 끔찍한 책을 쓸까?’ 하는 생각과 ‘수요가 있으니 공급도 있겠지’라는 자문자답을 하며 독자로 하여금 극도의 공포심을 느끼게 하는 것이 작가의 의도였다면「피의 책」은 아주 성공적이라 할 수 있겠다.

  공포와 슬픔에 관한한 쓸데없이 비대한 상상력을 지니고 있는 나에게「피의 책」은 제목만으로도, 책 표지만으로도 구역질과 어지럼증을 유발한다. 그러나 공포소설의 매니아들에겐 엄청난 사랑을 받겠지? 한여름의 무더위를 날려줄 오싹함을 찾는 이들에게 꼭 맞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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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 마시멜로 이야기 (1, 2권 통합본) - 꿈을 찾아 떠나는 어린이를 위한 마시멜로 이야기
호아킴 데 포사다 지음, 주경희 엮음, 이동승 그림 / 한국경제신문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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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아침, 우리 집 식탁 풍경..

아빠 ; 밥이 너무 많네. 당신이 좀 더 먹어.
엄마 ; 안돼요. 지금 다이어트 중이야. 어제 저녁에 오징어 땅콩 과자 먹은 것도 후회되는데...

가온 ; 엄마, 그럼 오징어 땅콩 과자가 엄마한테는 ‘유혹의 마시멜로’야?
엄마 ; 뭐? 듣고 보니 그러네.

「꿈을 찾아 떠나는 마시멜로 이야기」를 아이와 함께 번갈아 가며 읽었는데, 마시멜로 법칙이 기억에 남았던지 한마디 하는 딸아이를 보며 동화책이라고 아이 에게만 읽히지 말고 함께 읽는 것이 얼마나 많은 교감을 나눌 수 있는지 다시 한 번 깨닫게 되는 순간이었다.

  평소 자신의 방도 제대로 정리할 줄 모르고 숙제도 안 할 만큼 공부는 뒷전이었지만, 교통사고로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를 그리워하면서도 더 큰 슬픔을 간직하고 살아가는 엄마를 위해 겉으로 내색하지 않는 속 깊은 열한 살 소년 에릭. 어느 날, 집을 손질하다 지붕에서 떨어져 다리를 다친 부자 할아버지 조나단의 개를 산책시켜 주는 일을 맡게 되면서 ‘마시멜로 법칙’에 대해 알게 된다. 할아버지와의 첫 만남에서 선물로 주신 마시멜로를 다음날까지 먹지 않으면 하나를 더 주겠다는 말에 먹고 싶은 것을 꾹 참고 약속대로 마시멜로 하나를 또 받게 된 에릭은 할아버지가 어렸을 때 참여했다는 ‘만족함 미루기’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된다.

  당장 눈앞에 보이는 유혹을 참고 견디면 더 큰 만족과 보상을 얻을 수 있다는 ‘마시멜로 법칙’을 알게 된 이후의 에릭은 달라졌다. 성적이 오른 것은 물론이고 친구관계도 원만해졌고, 미래에 대한 확고한 꿈이 생기게 되었던 것이다. 마시멜로 일기장을 기록하면서 마시멜로 유혹에서 참아야 할 것, 거짓말이나 시험을 싫어하는 마음을 없애는 방법, 내일의 성공을 위해 오늘 준비해야 할 것, 두려움을 피하지 말고 용감히 맞서는 방법 등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되자 에릭의 내면이 훌쩍 자라게 되었다.

  어른들 역시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행한 일일지라도 그 일을 이루는 과정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된다. 하지만 그 일이 시작된 때부터 지금까지를 돌아보며 잘못된 부분을 수정하고 다시금 일을 추진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또 당장 눈앞에 보이는 이익 때문에 애초에 계획했던 일을 뒤로 미루어 낭패를 보는 일도 숱하게 겪는다. 이러한 경험을 아이들에게 들려주며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고 좀 더 쉽게 원하는 일을 이룰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은 어른들의 몫이라고 생각한다.「꿈을 찾아 떠나는 마시멜로 이야기」는 아이가 행복한 꿈을 꾸며 확실한 목표를 정하고 어제보다 나은 오늘을 살기를 원하는 엄마들이 먼저 읽어보고 아이에게 권하면 좋은 행복한 동화이다.

 

 

책 속에서..

아프리카에서는 매일 아침 가젤이 잠에서 깬다. 가젤은 가장 빠른 사자보다 더 빨리 달리지 않으면 잡아먹힌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온 힘을 다해 달린다.

아프리카에서는 매일 아침 사자가 잠에서 깬다. 사자는 가젤을 앞지르지 못하면 굶어 죽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온 힘을 다해 달린다.

네가 사자이든 가젤이든 마찬가지다.

해가 떠오르면 달려야 한다. -78쪽

“언제나 틀렸다고 생각될 때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은 뒤돌아가는 것이 아니야. 늦어지는 것 같지만 사실은 바르게 가는 것이고, 바르게 가는 것이 곧 지름길이란다.” - 16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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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한 살 미소의 비밀 즐거운 동화 여행 14
한예찬 지음, 윤문영 그림 / 가문비(어린이가문비)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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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열한 살 미소의 비밀」을 읽어보고자 했던 것은 제목에서 풍기는 풋풋함 때문이었다. 내 ‘열한 살’ 시절은 거의 기억나는 게 없지만, 내 마음의 속도와 정반대로 빠르게 자라는 딸아이를 생각하며 요즘 아이들의 열한 살을 살짝 들여다보고 싶었던 것이다.

  내 예상과는 달리 주인공 미소를 통해 독자에게 들려주는 이야기의 주제는 ‘성’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총각 선생님조차 짝사랑 해보지 않은 나와 달리 요즘 아이들은 유치원에 다니면서부터 이성에 대한 호감을 자연스럽게 느끼고 표현한다. 왜 좋으냐고 물으면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대기가 일쑤여서 그냥 웃고 넘어가지만, 발육상태가 좋은 요즘 초등학생 아이들의 경우, 단순히 웃고 지나가기엔 너무 무서운 세상을 살고 있다.

  주인공 미소는 수학 학원에서 만난 남자친구 찬희를 좋아하게 된다. 찬희를 좋아하면서 미소의 가슴을 뛰게 만들고 관심 없어하던 수학공부를 열심히 할 수 있는 계기를 준 것은 참 좋은데, 문제는 알 수 없는 감정에 휩쓸려 스스로 납득할 수 없는 행동을 하고 싶게 만든다는 것이었다. 손도 잡아 보고 싶고 안아도 보고 싶은 야릇한 감정. 새롭게 알게 된 감정에 대해 여섯 살이나 차이 나는 사촌언니에게 ‘사춘기와 성’에 대해 상담을 받으며 사춘기에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것을 알고 안심하게 된다.

  미소와 같은 학교를 다니는 친구들과 학원 친구, 그리고 가족들에게 일어난 사건을 통해 ‘아기씨 데이트’에 따르는 책임과 기쁨, 동성애, 야한 동영상이 주는 폐해, 순진한 아이들을 상대로 벌이는 성범죄 등에 관한 이야기가 진행된다.

  발육과 함께 인지능력도 함께 발달한 요즘 아이들에게 정확한 성 지식을 전달해주며‘성’은 하느님의 선물이기도 하지만, 함부로 사용하면 불행의 씨앗이 된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미소와 엄마가 함께 텔레비전을 시청하면서 나누는 대화내용은 올 봄에 추적 60분에서 방영된 ‘스쿨존이 위험하다-아동 유인 범죄 예방 프로그램’을 보고 있는 듯하다. 텔레비전 방송 내용은 성범죄에 노출될 수 있는 여러 가지 실제 상황을 재연한 드라마를 통해 순진하고 힘없는 어린이를 노리는 범죄에서 피해자가 되지 않도록 경각심을 불러일으킨다.

  동화의 대상 연령은 주인공의 나이와 엇비슷하다던데, 직접 읽어보니 열한 살이 읽기엔 너무 앞서나가는 것이 아닐까 하는 우려가 생겼었다. 하지만 요즘 초등학생들 중에서도 집단으로 한 아이를 성폭행하는 사례가 있다고 하니 정말 권하고 싶지 않지만 꼭 필요한 지식이기에 읽힐 수밖에 없는 지금의 현실이 너무 가슴 아프다. 날이 갈수록 점점 진화되는 범죄현장 속에서 사랑하는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 어른들이 해야 할 일이 참 많다는 것을 느끼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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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상계 - 근대 상업도시 경성의 모던 풍경
박상하 지음 / 생각의나무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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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날이 저물어서 밥 짓는 연기가 집집에서 새어나오고, 그런 연기가 길거리에 서리어서 마치 인상파 화가들의 그림 모양으로 그 윤곽을 부드럽게 해 주었다. (중략) 우리 일행은 20만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저녁 준비를 하고 있는 조용한 거리를 내다보면서 창가에 오랫동안 앉아 있었다. 너무나 고요하고 아름다운 풍경이기 때문에, 더구나 서울이 터를 잡고 앉은, 둔지를 둘러싸고 있는 산봉우리 위로 둥근 달이 둥실 떠올라올 적에는 시간이 얼마나 빨리 지나가는지를 미처 깨닫지 못할 정도였다.

  위 글은 1870년경, 미국인들 눈에 비친 서울 거리의 아름다움을 글로 표현한 것이다. 노란 초가지붕들이 바다를 이루던 백여 년 전 서울의 모습은 간데없고 마천루가 즐비한 지금 서울의 모습은 우리가 보아도 더 이상 특별할 것도, 아름다울 것도 없다. 자의든 타의든 거부할 수 없는 변화의 파도는 서울의 풍경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바뀌게 만들었다. 「경성상계」는 백여 년 전, 서울의 풍경을 시작으로 해방과 6.25직후까지 우리나라 상계의 역사를 그려주고 있다.

  조선의 건국 이후 5백여 년 동안 도성 안에 자리한 유일한 상계 육의전은 일본의 강압으로 체결된 강화도조약 이후 부산과 원산, 제물포 등의 개항과 함께 물밀듯이 밀고 들어온 일본 상인들에게 상권을 내주게 된다. 명성황후 시해 후 본격적으로 식민 찬탈을 시작한 일본은 화폐 개혁을 단행해 그나마 근근이 명을 이어 온 조선 상계 육의전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만든다. 이러한 조선 상계의 시대적인 아픔과는 별도로 ‘쇠당나귀’ 자동차의 등장과 ‘번갯불 괴물’ 또는 ‘축지법 부리는 쇠바퀴’라 불리는 전차가 선보이고, 대박상품 고무신, 부유층의 신바람 나는 취미가 된 택시 드라이브, 기차 등의 등장으로 순진하기만 한 개화기적 사람들의 눈과 귀를 현혹시킨다. 새로운 시대로 향하는 갈망은 ‘유행’으로 나타나고 그 외에도 신문의 한 컷 만화의 등장과 영화 산업, 이룰 수 없는 사랑에 현해탄의 검은 바다에 연인과 함께 몸을 던진 윤심덕의 <사의 찬미>를 비롯한 조선의 소리가 레코드에 실려 팔리기도 한다.

  끔찍하기만 했던 일본의 식민 지배에서 벗어나 광복을 맞고 그 기쁨을 채 누리기도 전에 6.25 전쟁을 맞으며 또 다시 상계는 큰 변화를 맞게 된다. 일본인들이 버리고 간 기업을 거저줍다시피 불하받아 몸집을 키운 기업들은 전쟁마저도 기회로 삼아 거대 기업으로 성장하는 모습을 담담한 필체로 엮어낸 「경성상계」에서는 전쟁 이후 ‘정치적 유대’로 몸집을 불린 기업들이 박정희의 군사 쿠데타를 계기로 더 큰 도약을 준비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책의 말미에서 다시 50여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정치적 유대로 몸집을 불려온 기업들은 방만한 경영으로 인해 스스로 퇴락의 길을 걷거나 법의 심판을 받게 되었다. 살아가면서 돈이 주는 영향력은 인정하고 싶지 않더라도 부정할 수는 없다. 기업의 비리가 폭로 될 때마다 입막음하듯 수천억을 사회복지기금으로 내놓는 행태를 보면 참 쓸쓸하다. 책을 읽으면서 미래를 내다보는 혜안을 가지고 정당하게 부를 축적하면서 사회에 환원하는 멋진 기업인들이 많은 대한민국 상계의 조성을 꿈꾸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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