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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상계 - 근대 상업도시 경성의 모던 풍경
박상하 지음 / 생각의나무 / 2008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날이 저물어서 밥 짓는 연기가 집집에서 새어나오고, 그런 연기가 길거리에 서리어서 마치 인상파 화가들의 그림 모양으로 그 윤곽을 부드럽게 해 주었다. (중략) 우리 일행은 20만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저녁 준비를 하고 있는 조용한 거리를 내다보면서 창가에 오랫동안 앉아 있었다. 너무나 고요하고 아름다운 풍경이기 때문에, 더구나 서울이 터를 잡고 앉은, 둔지를 둘러싸고 있는 산봉우리 위로 둥근 달이 둥실 떠올라올 적에는 시간이 얼마나 빨리 지나가는지를 미처 깨닫지 못할 정도였다.
위 글은 1870년경, 미국인들 눈에 비친 서울 거리의 아름다움을 글로 표현한 것이다. 노란 초가지붕들이 바다를 이루던 백여 년 전 서울의 모습은 간데없고 마천루가 즐비한 지금 서울의 모습은 우리가 보아도 더 이상 특별할 것도, 아름다울 것도 없다. 자의든 타의든 거부할 수 없는 변화의 파도는 서울의 풍경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바뀌게 만들었다. 「경성상계」는 백여 년 전, 서울의 풍경을 시작으로 해방과 6.25직후까지 우리나라 상계의 역사를 그려주고 있다.
조선의 건국 이후 5백여 년 동안 도성 안에 자리한 유일한 상계 육의전은 일본의 강압으로 체결된 강화도조약 이후 부산과 원산, 제물포 등의 개항과 함께 물밀듯이 밀고 들어온 일본 상인들에게 상권을 내주게 된다. 명성황후 시해 후 본격적으로 식민 찬탈을 시작한 일본은 화폐 개혁을 단행해 그나마 근근이 명을 이어 온 조선 상계 육의전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만든다. 이러한 조선 상계의 시대적인 아픔과는 별도로 ‘쇠당나귀’ 자동차의 등장과 ‘번갯불 괴물’ 또는 ‘축지법 부리는 쇠바퀴’라 불리는 전차가 선보이고, 대박상품 고무신, 부유층의 신바람 나는 취미가 된 택시 드라이브, 기차 등의 등장으로 순진하기만 한 개화기적 사람들의 눈과 귀를 현혹시킨다. 새로운 시대로 향하는 갈망은 ‘유행’으로 나타나고 그 외에도 신문의 한 컷 만화의 등장과 영화 산업, 이룰 수 없는 사랑에 현해탄의 검은 바다에 연인과 함께 몸을 던진 윤심덕의 <사의 찬미>를 비롯한 조선의 소리가 레코드에 실려 팔리기도 한다.
끔찍하기만 했던 일본의 식민 지배에서 벗어나 광복을 맞고 그 기쁨을 채 누리기도 전에 6.25 전쟁을 맞으며 또 다시 상계는 큰 변화를 맞게 된다. 일본인들이 버리고 간 기업을 거저줍다시피 불하받아 몸집을 키운 기업들은 전쟁마저도 기회로 삼아 거대 기업으로 성장하는 모습을 담담한 필체로 엮어낸 「경성상계」에서는 전쟁 이후 ‘정치적 유대’로 몸집을 불린 기업들이 박정희의 군사 쿠데타를 계기로 더 큰 도약을 준비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책의 말미에서 다시 50여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정치적 유대로 몸집을 불려온 기업들은 방만한 경영으로 인해 스스로 퇴락의 길을 걷거나 법의 심판을 받게 되었다. 살아가면서 돈이 주는 영향력은 인정하고 싶지 않더라도 부정할 수는 없다. 기업의 비리가 폭로 될 때마다 입막음하듯 수천억을 사회복지기금으로 내놓는 행태를 보면 참 쓸쓸하다. 책을 읽으면서 미래를 내다보는 혜안을 가지고 정당하게 부를 축적하면서 사회에 환원하는 멋진 기업인들이 많은 대한민국 상계의 조성을 꿈꾸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