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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의 책
클라이브 바커 지음, 정탄 옮김 / 끌림 / 2008년 7월
평점 :
품절
앞으로 내가 살아갈 날들까지 모두 포함해서 다.시.는. 공포영화를 보지 않으리라 다짐했던 때가 있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직후 경험해보지 않은 것에 대한 동경으로 사촌동생과 대학로 부근의 극장에서 밤 12시부터 새벽 5시에 걸쳐 논스톱으로 상영해주는 ‘한여름의 더위를 날려주는 3편의 공포영화’를 봤었다. 그 당시 제대로 된 의미도 모르고 유행인양 떠들고 다녔던 ‘컬트영화’를 본다는 희한한 자부심에 한밤중엔 화장실도 제대로 못가는 ‘소심녀’가 일탈을 감행했던 것이다. 그 때 보았던 영화가 ‘록키호러 픽쳐쇼’와 코믹 버전의 ‘늑대인간’ 그리고 제목이 생각나지 않지만 우주공간이 배경이 된 작품이었다. 영화를 통해 ‘피’는 칼라로 표현해도, 흑백으로 표현해도 정말 섬뜩하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되었고, 영화를 보는 내내 기분 나쁜 울렁거림과 익숙하지 않은 것에 대한 거북한 느낌이 들어 다시는 이런 영화를 보지 않으리라는 다짐을 하기에 이르렀다.
영화감독과 배우, 무대장치를 맡은 사람들이 작정하고 나서서 보는 이를 오싹하게 만들어주는 영화야 당연히 무서울 테지만, 설마하니 책은... 하는 생각이 거의 20여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또다시 다.시.는. 공포소설을 읽지 않으리라 다짐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제목부터 섬뜩한 클라이브 바커의「피의 책」은 10편의 중편소설을 엮어 놓은 책이다. 피의 책이니 미드나잇 미트 트레인이니 피그 블러드 블루스, 스케이프고트 등 제목만 보아도 심상치 않은 기운을 풍기는 이야기들은 들고 있기에도 무거운 책을 순간순간 집어던지고 싶게 만든다. 죽은 자들이 모여 복수를 하고 심야의 지하철에서는 엽기적인 살인사건이 일어난다. 3미터 가까운 거구를 한 야수 로헤드 헥스는 사람이든 동물이든 무자비하게 먹어치우거나 파괴하고 유령과 좀비도 클라이브 바커의 펜 끝에서 나름의 역할을 해낸다.
설정된 것을 화면으로 보여주는 영화는 그 장면 너머를 상상하게 만들어주지 못한다. 감독이 의도하고 설정해놓은 꼭 그만큼만을 보고 의도된 만큼만 놀라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책은 그렇지 않다. 활자를 읽으면서 내 머릿속에서는 끔찍한 장면들 하나하나가 시간과 장소, 크기에 제한받지 않고 떠오르게 된다. 내 의지로 활자만 읽어야지, 내용만 들여다봐야지 하는 것은 통하지 않는다. 공포가 극에 달한 아이와 여자, 남자, 동물들의 얼굴이 떠올라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일임에도 두 눈을 꼭 감게 만드는 것이다. 심장도 오르라지는 것 같다. ‘도대체 왜 이렇게 끔찍한 책을 쓸까?’ 하는 생각과 ‘수요가 있으니 공급도 있겠지’라는 자문자답을 하며 독자로 하여금 극도의 공포심을 느끼게 하는 것이 작가의 의도였다면「피의 책」은 아주 성공적이라 할 수 있겠다.
공포와 슬픔에 관한한 쓸데없이 비대한 상상력을 지니고 있는 나에게「피의 책」은 제목만으로도, 책 표지만으로도 구역질과 어지럼증을 유발한다. 그러나 공포소설의 매니아들에겐 엄청난 사랑을 받겠지? 한여름의 무더위를 날려줄 오싹함을 찾는 이들에게 꼭 맞는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