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소한의 시민 - 뉴스에 진심인 사람들의 소셜 큐레이션 16
강남규 외 지음 / 디플롯 / 2024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책은 성별, 나이, 직업, 학력 등 모든 것이 다른 여섯 사람이 모여서 2년간 98번의 토론으로 응축해낸 16개의 키워드와 질문들이다. 그들은 토론의 즐거움이라는 모임명으로 매주 모여 정치 사회 현안에 대해 더 나은 의견을 발명하기 위해서였다. 여섯 필자들의 공통점은 조금 다른 의견을 각자의 스타일대로 밝히며 살아온 사람이다. 평소 사안마다 시민으로서 어떤 태도를 견지할 수 있을지, 다른 사람들과 어떤 관계를 맺으며 살아야 할지에 대해 필요한 질문을 던지며 살아왔다.

 

사적 복수는 드라마 <더 글로리>를 이야기한다. 방영 직후 전국에서 학교폭력 피해자들의 폭로가 쏟아져 나왔다고 한다. 원한을 가진 사람들은 복수의 이득이 전혀 예상되지 않는 상황에서도 복수를 꿈꾼다. 주인공은 공멸의 복수를 꿈꾸고 시청자들은 그 감정을 타당한 것으로 여긴다. 인간은 왜 이런 일에 집착하는 걸까? 세계의 주요 종교들이 수천 년간 복수를 금지하고 인내와 용서를 가르쳤지만 복수심은 그대로 남아 있다.

 

고지식하고 권위주의적인 사고방식을 지닌 연장자를 꼰대라고 부르는데 최근에는 젊은 꼰대도 등장했다. 연장자의 조언이나 지적을 낡은 것으로 규정하는 역꼰대가 등장한 것이다. 꼰대와 역꼰대가 함께 판치는 세상에는 사회가 존재할 수 없고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 끊임없이 누르려는 자와 치받는 자만 남을 뿐이다.(꼰대론)

 

시성비우리는 머릿속에서 매분 매초 시간 대비 성능을 따지며 산다. 시간을 뺏는 말하기가 아니라 시간을 되찾는 말하기가 필요하다. 시대의 속도를 맞출 수 없는 이들을 배제하지 말자고, 이동권조차 보장되지 않는 장애인과 집에서 누군가를 돌봐야만 하는 노동자의 시간에 사회가 시계를 맞춰야 한다고 말해야 한다.(도파민 중독사회)

 

장애 담론에서는 드라마 <우영우>를 좋아하는 마음이 전장연을 향한 이해로 이어질 수 있을까. 우리 사회에는 장애인을 주인공으로 하는 서사가 훨씬 더 많이 필요하다. 현실에서의 연대는 허구의 서사와 현실의 투쟁 사이에 놓인 간극을 관객 스스로가 능동적으로 좁혀갈 수 있는 최고의 선택이다.

 

강력범죄자의 신상 공개에 찬성의 목적은 범죄 예방이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범죄 예방 효과에 대해서는 증명된 사실이 없다고 말한다. 혐오 정치에서 한국 사회에 커다란 해악을 불러일으켰다. 반페미니즘 선동과 마찬가지로, 장애인 혐오 메시지를 내놓은 이후 전장연 시위에 참여한 이들을 위협하는 혐오적 언사와 행동이 노골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고 했다.(범죄자 신상공개)

 

매년 지구가 더워지는 기후위기를 막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기후위기) 사흘을 ’4이라는 의미로 잘못 알고 있던 많은 사람이 사흘 연휴라고 보도한 언론을 숫자도 제대로 못 세냐고 조롱하다가 본인들이 놀림거리가 됐다. 금일, 심심한 사과 등 소통에 어려운 말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쉬운 말도 고민할 수 있어야 하겠다.(문해력)

 

된장녀와 김치녀 등의 유행어에는 분수를 모르는 탐욕스러운 여자라는 의미가 공통적으로 담겨 있다. 세금은 내가 낸 돈으로 먹고사는공무원에게 갑질할 수 있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 양상과 성격은 조금씩 다르지만 이 현상들에는 공통된 정서가 깔려 있다. 무임승차에 대한 증오다. 달리 표현하면 지불한 자만 누릴 수 있다는 철칙이며, 지불한 만큼 누릴 수 있다는 황금률이다.(소비자주의)

 

토론의 즐거움 <왜 우파 정권들은 도서관을 싫어할까>에서는 현 정권을 비롯한 보수 우파의 출판계, 도서관 탄압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우린 아직 어른이 안 됐는데 홍세화는 없네는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시대의 어른이었던 홍세화를 추모하며 그의 유지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한국 사회의 핵심 문제를 이동해가면서 비판해온 삶의 궤적이 더 중요한 포인트가 아닐까 한다.

 

[최소한의 시민]은 지금 우리 사회의 가장 논쟁인 이슈들을 다채로운 다른 의견을 발명하고 나의 의견을 밝히며 토론으로 구성하였다. 모든 사람들이 사회를 바라보는 관점이 같을 수는 없지만 최소한의 시민은 자신과 또 다른 시민들과 대화하고 토론하며 새로운 배움으로 세계를 이해하는 존재라는 것을 인식하게 한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작성하였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수요일의 편지
모리사와 아키오 지음, 권남희 옮김 / 문예춘추사 / 2024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어느 날 미지의 사람이 쓴 수요일 편지를 읽는 기분은 어떨까? 이 책은 작가가 수요일 우체국을 모티브로 작은 우연이 인생을 새롭게 바꿔놓는 기적을 전해준다.

 

나오미는 가슴속에 생긴 마음의 독을 일기에 적는다. 시어머니의 심술, 남편의 둔감함, 아들들에 대한 불만을 쓴다. 경제력이 풍부한 친구 이오리가 쉽게 꿈을 이루고 우아하게 사는 모습에 반감이 들었고 질투를 느낀다. 이오리는 편지를 써서 수요일 우체국 앞으로 보내라고 권한다. 낯선 사람에게 편지가 오는 순간, 무척 설렌다고 했다.

 

수요일 편지는 수요일에 자기가 한 일, 생각 등을 편지에 써서 보내면 전국에서 온 수요일 편지를 섞어서 무작위로 배달해 준다고 한다. 나오미의 요즘 가슴속에는 부정적인 감정이 존재한다. 일상에는 쓸 것도 없고, 일기처럼 독을 쓰는 건 말도 안 되고 고등학교 때 꿈이던 빵가게 주인이 되었다는 공상의 편지를 쓴다. 점포가 세 군데로 늘었고 이동판매도 하면서 직원들도 항상 웃는 얼굴로 인사한다. 다정한 가족 덕분이라고 적었다


히로키는 일러스트레이터 친구에게 질투가 난다는 것, 그림 작가가 되는 꿈을 포기하고 앞으로 어떤 인생을 보낼지 고민하다 약혼자의 권유로 수요일의 편지를 쓰기로 한다수요일 우체국국원 겐지로는 쓰나미로 아내를 잃었다. 혼자 키우는 딸과의 친밀감을 회복하고자 나오미와 히로키의 편지를 복사해서 딸에게 전한다. 리호는 고등학교 졸업 후 도쿄로 가서 애니메이션 만드는 사람이 되고 싶다. 딸의 꿈을 응원해주고 싶어서 두 시간이 걸려 편지를 완성했다. 리호는 아빠의 편지를 읽고 어떤 마음이 들었을까?

 

겐지로는 꿈을 이룬 나오미 편지와 지금 꿈을 향해 걸어가려고 하는 히로키의 편지를 교환하면 어떨까 생각했다. 성공자인 나오미 씨는 꿈을 좇던 시절의 날들을 그립게 돌아볼 수 있을 테고, 도전자인 히로키는 한 걸음 더 나아갈 용기도 얻고 성공 철학까지 배울 수 있을테니까. 우체국에서 편지는 섞어서 무작위로 발송하는 것이 기본이고 편지 반출은 금지이지만 두 통의 편지만큼은 꼭, 하는 간절한 마음이 움직이게 했다.

 

꿈을 포기하고 일상을 푸념하고 일이 순조롭지 않은 것을 타인 탓으로 돌리고, 친구를 질투하는 자신을 싫어한다. 나오미는 히로키의 편지를 읽으며 이것은 내 얘기잖아. 책망 받는 기분이 들어서 가슴속이 꺼끌거렸다. 이 순간 편지지에서 가슴속으로 불어온 바람을 응원하는 바람으로 받아들이기로 마음먹는다.

 

히로키는 그림책 작가를 꿈꾸면서 회사를 그만두지 못하고 수요일 밤 술을 마시고 있었다. 1층 주민이 정원에 키우던 고양이 묘를 만들고 있는 모습을 보니 죽음과 생에 관해 생각했고, 죽을 때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를 생각한다는 편지였다.

 

이오리가 불편한 시부모님부터 기쁘게 해주라는 말이 기억났다. 그러나 남편 몸이 안 좋은 것을 나오미 탓으로 돌리는 시어머니를 시집온 이후, 처음으로 반항적인 태도를 보였다. 생각지도 못하게 남편까지 바꿔 버린 수요일의 편지는 나오미 부부의 인생 항로가 되었다.

 

당신과 당신 주변 사람들 미래가

최고로 반짝이는 것이기를.

언제나 웃는 얼굴로 지내기를.

당신이 당신답게 있기를.

나의 수요일을 읽어 주어서 감사합니다 _나오미의 편지 중에서

 

히로키는 나오미의 편지를 받은 덕분에 지금이 있다고 생각했다. 편지를 읽고 있으면 행간에서 행복한 온기가 배어나는 것 같아서 마음조차 따듯해진다. 편지에 떠도는 행복의 아우라는 마음을 움켜쥐고 세게 뒤흔들었다.

 

나오미가 지금까지 실천해 온 세 가지 법칙이야말로 인생의 나침반이 되었다.

자신에게 거짓말하지 않는다.

좋다고 생각하는 것은 주저 없이 한다.

남을 기쁘게 하면 자기도 기쁘다.

요타가 웃으면 내가 웃는다. 내가 웃으면 카키도 웃는다. 사람은 웃는 것만으로 즐거워진다. 그리고 웃는 얼굴과 웃는 얼굴에서 생겨난 즐거운 기분이 일상에서 파문처럼 번지고, 해피 배턴을 이어간다. 이렇게 수요일 우체국에서 보낸 편지처럼 낯선 누군가의 수요일이 낯선 누군가의 인생을 바꾸기도 한다.

 

이 책은 꿈을 이루고 싶지만, 용기를 내지 못하는 히로키와 직장과 시부모와의 관계로 쌓인 스트레스를 일기에 쏟아내며 하루를 보내는 나오미를 신기한 인연으로 시작된 편지가 유유상종은 정말로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지금 힘든 일이 있다면 편지를 써보자. 마음이 한결 후련해질 것같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작성하였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찌그러져도 동그라미입니다 - 김창완 에세이
김창완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24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책은 아저씨 김창완이 매일 아침 써 내려간 반짝이는 삶의 조각들, 23년 동안 전국 아침에 창을 열어준 글들이 모였다. 손으로 그린 47개의 동그라미 중 두어 개만 그럴듯한 것처럼, 회사생활도 47일 중 이틀이 동그라면 동그란 것이라고 위로한 편지는 SNS와 블로그에 오랫동안 화제가 되었고 산울림 막내 김창익을 잃은 상실감을 고백하며 건넨 편지도 눈물겹고 따스하다.

 

저자는 매일 동그라미를 그린다. 라디오 오프닝 멘트를 읽고 나면 원고 뒷면에 그리는데 제법 그럴듯한 원이 될 때도 있지만 대부분은 찌그러진 동그라미이다. 책을 펼치면 몇 장은 큐알코드가 있고 실제 저자의 음성으로 들어볼 수 있다.

 

닭 잡으러 가는 고양이 동영상에서 얼마나 살금살금 가는지 풀잎을 스치는 바람 소리도 들릴만큼 조심스럽게 다가가는 모습을 보고 봄이 꼭 닭 잡으러 오는 고양이처럼 다가온다. 입맛 없으면 밥맛으로 먹고, 밥맛 없으면 입맛으로 먹으라는 말이 있다. 먹는 것만 그런 게 아니라 꼭 살맛 나야 만 사는 것도 아니어서 살다 보면 그게 인생의 맛이다.

 

마음 시끄러울 땐 길 떠나는 게 답이예요. 가만히 있으면 마음이 너무 떠듭니다.p66

 

아이들은 다 천진하고 사랑스럽기만 하다는 데 동의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어른들이 다 지혜롭고 심지가 굳다고 여기지도 않는다. 흔들리는 어른의 모습도 자연스럽다고 생각한다. 준비된 어른이 되기보다는 늘 새로운 어른이길 바란다.

 

고기를 구우면서 기름 덩어리랑 고기 부스러기를 고양이 밥그릇에 내놓았다. 한참 후 까치 한 마리가 날아와 한 입 쪼아 먹고 날아가더니 친구를 불러 왔다. 먹을 게 조금 많으면 여러 마리가 와서 먹고 한 마리나 서너 마리가 독식하는 법이 없다. 새들도 나누며 사는구나 생각했다.

 

어른들이 사라졌다. 무슨 말일까? 운전해보면 알 수 있는데 양보하는 사람이 없거나 귀찮아서 아니면 지금 손에 들고 있는 휴대전화 통화를 하고 있기 때문이란다. 주말 아침, 친구 얼굴이 떠올라 라디오 오프닝 멘트를 써야지 하는데 참 힘들었다. 갑자기 세상을 떠난 죽마고우 발인이 어제였다. 방이 몇 개 있든지, 서랍이 여러 개 있든지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은 단칸방이라 그 선한 얼굴을 어디 숨길 데가 없다.

 

구내식당에서 밥을 먹는데 우거짓국이 얼큰하면서도 맛있었다. 얼갈이 껍질을 비닐 조각으로 오인해서 배식 아주머니께 가져다 드렸던 일이 있었다. 어찌나 미안하던지, 국 맛있게 먹고 갑니다 라디오 오프닝에서 말씀드릴게요 했더니 깔깔깔 웃으시더라.

 

진짜 마음 은행이 있어서 급할 때 빌려 쓰고 나누어 쓰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늘 좋은 사연 적어서 마음을 나눠주시는 분들에게 참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엊그제 써놨던 <아침창>오프닝 멘트를 지우면서 쓰는 거에 비해서 지우는 게 쉽다고 생각했다. 다시 쓰려고 하는데 지난봄 생방송을 하러 달려가던 길의 나무들, 강물, 자전거 타는 사람들, 봄꽃들이 다 생각나는 것이다. 지우는 게 쓰기보다 힘들구나 사랑도 그렇겠지요?

 

초저녁부터 잠이 쏟아져서 자다 한밤중에 눈이 떠졌는데 뜬금없이 <아침창>을 안하면 지금 무얼 하고 있을 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상상이 안 되고 그냥 멍해졌다고 한다. 나는 라디오 <아침창>을 한 번도 못들어봤지만 이 책은 그가 많은 세월 동안 하루하루 알차게 살아왔다는 것을 느낀다. 별다를 것 없는 일상이 매일 반복되지만 그 나름의 행복이 있다는 것을 일깨워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eBook] 부지런한 사랑 - 몸과 마음을 탐구하는 이슬아 글방
이슬아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슬아 소설 [가녀장의 시대]를 처음 읽어 보았다. 저자는 수년간 글쓰기 교사로 일해왔다. 처음 아파트 단지를 돌아다니며 전단을 붙이는 것으로 시작한 글쓰기 교사는 KTX를 타고 여수 글방을 열고, 어린 형제들을 위한 작은 글방, 망원동의 어른여자 글방, 청소년 글방 등에서 글쓰기를 가르치는 것으로 이어졌다.

 

열아홉 살 때 재능에 관해 자주 생각했다. 반복 없이는 결코 나아지지 않는다는 걸 아니까 기꺼이 괴로워하며 계속한다. 재능에 더 무심한 채로 글을 쓸 수 있게 될 때까지. 간접적인 영향을 준 목소리는 엄마 복희씨다. 엄마는 자신의 재능을 한껏 발휘하며 살아왔다고 느낀다. 음식을 뚝딱 만들기도 하고 부엌에서 노래를 자주 흥얼거린다.

 

처음 글쓰기 제자는 형제였는데 아홉 살 세윤의 마지막 글은 너는 꼭 내 글을 간직해줘였다. 그런 문장을 읽고 나니 책임감 같은 게 마음에 남았다고 했다. 학생들의 글에서 소년의 마음으로 쓴 소년의 글에서 벗어나려는 순간을 종종 본다. 거짓말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썼대도 좋은 거짓말에는 빛도 어둠도 풍부하게 담겨 있다. 그와 함께 지어낸 거짓말로 진실 쪽을 가리키고 싶었다.

 

서울에서 여수까지 출장 글쓰기 교사로 일했다. 출퇴근을 반복한지 4년째 되던 어느 날, 김온유가 원고지를 들고 왔다. 선생님의 옷이 너무 야하다고 적었다. 글에 유심히 기억해줘서 고마워라고 코멘트를 달아주었다. 매주 한 편의 글을 완성하며 몇 개의 계절을 통과하다보면 아이들은 어느 새 다른 인물에게 숨을 불어넣는다.

 

초등학교 선생님들은 일기를 꼭 쓰라고 했는데 은선생님은 거의 편지에 가까운 코멘트를 손수 적어주었다. 일기를 그렇게 열심히 봐준게 처음이었고 그날부터 일기인이 되었다. 10대 후반부터 20대 중반까지 어딘의 글방에서 글을 썼다. 글방 합평을 하는 시간은 최선을 다해도 글에서는 언제나 부족한 점이 발견되었다. 지금은 어떤 소속도 없이 혼자 글을 쓰지만 언제라도 등뒤에서 나를 꾸짖거나 응원할 그들이 나타날 것만 같다고 한다.

 

어른여자 글방은 성인 여자분들이 망원동 집으로 와서 수업을 한다. 녹슨 몸을 실감하지 않고도 배워볼 수 있는 게 글쓰기인 것 같다고 한다. 코로나 시대의 글방을 할 때는 한 번도 만나보지 않은 상태에서 영상으로 자신을 소개하고 수업방식을 공유했다. 매주 한 번씩 만나 근황을 나눈 후 각자 써온 글을 가지고 합평을 한다. 코로나19로 학교에 가지 못해 허송세월을 하고 있는 어린이들을 위해 헤엄 글방을 열었다.

 

어딘은 저자를 가장 오래 가르친 스승이다. 아주 많은 글을 쓰고 아주 많은 일을 하고 많은 제자를 사랑하며 살아왔다. 이 책을 탈고할 무렵 어딘으로부터 문자가 왔다. 집을 정리하다가 1995년 썼던 노트를 발견했다며 노트에 적힌 시 한 편을 보내주었다.

 

교사의 자리에 서서 아이들을 매혹한 것들을 탐구했다. 부지런한 사람이 부지런히 쓰고 사랑할 때 어떤 힘과 파장을 일으키는지, 사람의 문장이 어떻게 이 세상과 자신의 운명을 조금씩 바꾸어나가는지 저자는 생생하게 보여준다.

 

이 책은 아이들이 인용을 허락해준 덕분에 만들어졌다. 저자는 써야 할 이야기와 쓸 수 있는 체력과 다시 쓸 수 있는 끈기에 희망을 느꼈다. 글쓰기 교사로 일했던 글방들에서 그가 가르치고 또 배운 것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꾸준한 글쓰기가 지금의 작가로 만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랑과 법 - 생존을 위한 두 가지 요건에 관한 이야기
장혜영 지음 / 궁리 / 2024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책은 17년 동안 검사로 일한 저자가 경험하고 느끼고 생각한 것들을 변사, 책임, 사기, 학대, 합의, 중독, 시효라는 주제로 묶었다. 타인의 삶을 보면서 내 삶에 대해서 생각하고, 내 삶이 타인의 삶과 완전히 분리될 수 없음을 받아들였다고 했다.

 

사랑과 법은 사람이 사회 속에서 살아가기 위해 꼭 필요하다. 그러나 사람들의 삶에 구체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과는 별개로, 사랑과 법은 추상적인 개념이다. 각자 생각하는 사랑과 법의 모습은 모두 다르다. 자주 법이 개정되고 새로운 법이 제정되는 이유도 사랑과 법에 대해서는 저마다의 정의와 이상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처를 때려 상해를 입혀 구속된 피의자를 조사하면서 입장을 묻는데 제가 죽일 놈이지요라고 했다. ‘잘못한 건 처벌받고, 앞으로 안 그러면 되죠라고 말했다. 다음 날 피의자가 자살했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의 계획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의문에 답은 해소되지 않았다. 변사란 그 사망이 범죄에 기인하지 아니하였다고 단정할 수 없는 부자연사로서, 변사체는 그러한 사체를 의미한다. 변사 기록은 통상의 결재판과는 달리 빨간색 결재판에 끼워져 오는데, 시각적으로도 다른 업무에 우선하여 처리되어야 함을 환기시킨다. 저자는 검사로 일한 기간이 길어질수록 자살로 인한 변사 기록이 증가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알코올중독자에 종종 처와 자녀들을 때렸다던 남자의 죽음을 알려왔다. 사는 게 너무 힘들어서 아이들을 데리고 죽을 결심을 하자 아이가 난 아직 일곱 살밖에 안 됐는데 조금 더 살면 안 될까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듣고 못 죽겠더라고. 그래서 아이들하고 또 살았다. 아이들 중 한 명이 결혼을 앞두고 있었는데 그래도 아비라고 아이가 결혼하기 전 자신의 소식을 알려준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녀가 계속 살 수 있었던 것은 사랑의 존재 덕분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가끔 책임능력이 문제되거나 피의자 스스로 책임능력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건이 있었지만, 책임능력이 없다는 이유로 혐의없음 처분을 한 기억은 별로 없다. 책임능력의 필요성에 대해서 개인적인 확신을 갖지 못했지만, ‘책임은 검사에게 그 필요성을 부인할 수 없는 중요한 요건이다. 수사와 공소유지가 주된 업무인 검사에게는 공소사실에 대한 입증책임이 가장 중요하다.

 

누구나 속을 수 있기 때문에 속은 사람이 아니라 속인 사람을 비난해야 한다는 원칙은 착오가 한 단계에서 끝나는 경우는 비교적 지키기 쉽지만 속은 사람이 그 상태로 또 다른 사람을 속이게 될 경우, 착오가 해소되지 않은 상태로 다른 착오를 일으킨 경우, 원칙을 견지하기는 쉽지 않다고 한다. 피해자가 자신의 피해에 대해서는 피해자이면서 다른 사람의 피해에 대해서는 가해자가 되는 사건을 착오의 사슬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경우는 다단계 사건이나 유사수신 사건에 많이 존재한다.

 

검사였고, 아동학대를 주제로 박사학위까지 취득한 저자도 구체적인 사건에서 아동학대 여부를 판단하는 것은 쉽지 않다고 했다. 어려움을 느낀 경우 중 하나로, 아동학대 혐의를 받는 사람들 중 때린 건 맞지만 학대한 건 아니다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최근 아동학대 판결에서는 체벌이라는 용어는 거의 사용되지 않는데, 그동안 우리 사회에서 체벌이 부정적이라는 인식이 자리잡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입양한 딸을 성폭행한 사건은 여덟 살이던 때 처음 발생했는데 꼭 10년 전이었다. 첫 번째 범행은 공소시효가 완성되었을 상태였다. 해자가 성년이 될 때까지 공소시효가 정지될 수 있게 되어 당시 공소 시효로 인한 문제는 없었다. 피의자를 구속할지 여부에 관하여 고민했다. 시간이 피해자와 가해자에게 동일한 속도와 방향으로 흐르지 않는다는 사실이 불편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성년이 될 무렵 집을 나와서 피의자를 고소하고, 최대 10년 전의 피해사실을 구체적으로 진술할 수 있었던 것은, 피해자가 그 10년 동안 원했든 아니든 과거를 기억하는 데 상당한 시간을 사용했음을 의미한다.

 

이 책을 읽고 사랑의 책임능력은 범죄의 성립요건인 책임능력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 인상 깊었다. 피해자는 고통에서 회복하지 못하여 과거에 머물러 있는 반면에 가해자는 완전한 면책을 얻어 과거에 머물 필요가 없어지기도 한다니 유효기간을 정하지 않는 것은 어떨까 싶은 저자의 생각과 같은 생각을 해보았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작성하였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