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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스미초 이야기
아사다 지로 지음, 이선희 옮김 / 바움 / 2009년 9월
평점 :
품절
살면서 가장 아름다웠던 시절을 떠올려 보라고 하면, 많은 사람들이 스무 살 이전 꽃다운 기억을 떠올릴 것이다. 생각도 부족하고,철도 들지 않은 미숙한 때, 그래서 웬만한 잘못은 그냥 용서가 되던 시절, 하지만 본인은 스스로 어른이라고 자부하면서 객기를 부려볼 수 있는 시간들.
따뜻한 이야기꾼, 아사다 지로의 스무 살 무렵을 엿볼 수 있는 아름다운 소설이다. 연작소설처럼 이야기가 드문드문 나뉘어져 있지만, 결국 이야기는 하나로 이어진다. 최고의 게이샤였던 할머니와의 오붓한 추억, 고집쟁이 사진사 할아버지와의 푸근한 기억들, 아버지, 어머니, 비스무리한 친구들과의 특별한 시간들, 기억, 아픔, 기쁨, 뿌듯함, 풋사랑, 설레임, 미숙한 어른다움....
안개마을이라는 뜻을 가진 가스미초, 이노에게는 청춘의 소중한 순간들이 자리잡은 공간이다. 아름답지만, 비밀이 숨겨져 있는 낯선 곳이기도 한 그 곳, 그래서 베일이 하나씩 벗겨질 때마다 짧은 탄성이 나오고, 함께 기억을 공유하며 느낄 수 있는 친근함이 새록새록 자리잡는다. 전차와 오래된 마을이 지난 추억의 훈훈함을 의미한다면, 화려한 유흥가의 번쩍임은 현재 변하고 있는 세월의 흔적을 말해준다.
꽤나 모범생인 척 하면서 뒤로 해볼 것 다해보는 고3, 이노와 친구들의 탈선이 그리 걱정되지 않는다. 누구나 거쳐가야 할 터널을 웃으면서, 때로는 절망하면서 걷고 있는 그들의 모습이 오히려 든든한 마음을 불러온다. 그들의 삐뚫어진 에너지가 다시 태어나 멋진 시대를 또 만들어낼지도 모른다는 기대가 생긴다.
청춘의 기억은 오래된 영화의 스틸 사진과 비슷하다.
세상의 더러움을 뒤집어쓴 명장면은 과감하게 쓰레기통에 버리면서 열여덟 살 여름에 일어난 사건은 누구나 멋진 액자에 넣어서 소중히 간직하는 것이다. 하지만 기억은 스틸 사진처럼 변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 더러워진 만큼 교묘하게 각색되고 수정되며, 때로는 황당한 이야기로 다시 태어나기도 한다. 그래서 내 마음의 서랍 속에 숨겨놓은 이 신비한 체험도 과연 실제로 일어난 사건인지 아닌지 아 수 없다.... (124쪽)
아사다 지로의 문체는 잔잔하다. 편안하면서 진심이 담긴 문장이 마음을 잡아끈다. 가족과 친구들을 향한 따스한 마음씨가 느껴져서 푸근해진다. 서툰 사랑, 헛된 객기 마저도 그의 손을 통과하면 아름다운 추억으로 자리잡는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청춘의 빛이 그대로 글 속에 녹아있다. 비록 영원한 것은 없지만, 기억할 수 있기에 아름다운 나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