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시 1 - 석양에 빛나는 감
다카무라 가오루 지음, 장세연 옮김 / 손안의책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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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照枾. 늦가을 석양빛에 비춰진 잘 익은 감의 색깔. 원 제목만 봐서는 무슨 내용일지 조금 애매모호합니다. 1995년에 고려원에서 『석양에 빛나는 감』으로 출간된 후, 손안의 책에서 2010년에 『조시』라는 제목으로 재출간되었습니다. 물론, 손안의 책의 『조시』는 작가의 개고작인 2004년 문고판의 번역 작입니다. 다시 제목 ‘照枾’로 돌아가서, 책을 다 읽은 후에, 어렴풋이 제목의 의미를 알겠더군요. ‘照枾’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오사카의 석양입니다. 그리고 두통. 또한 뭔가가 사라질 것 같은 느낌. 노년을 바라보는 중년의 불안감도 살짝 느껴지고요. 전작 『마크스의 산』과는 그런 의미에서 많이 다릅니다. 시리즈의 연결성 면에서도 주인공인 고다 유이치로 경부보가 나온다는 것을 제외하면, 시리즈의 느낌도 별로 없고요.


  한 여름의 오후, 고다 경부보는 호스티스 살인사건을 해결하려 지하철을 타던 도중 한 여자가 전철 선로 위에 뛰어들어 자살하는 장면을 목격합니다. 그리고 도망치는 남자와 또 다른 여자. 또 다른 여자는 도망치는 남자의 아내인 사노 미호코. 이 사노 미호코를 보는 순간, 아니 뜨거운 여름의 열기와 두통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고다는 이제는 헤어진 아내를 떠올립니다. 그리고 숨어 있던 성적 욕망이 꿈틀거립니다. 그리고 그녀 주변을 계속 맴돕니다.


  그리고 여기 또 한 명의 남자. 바로 고다의 고향 친구, 노다 다쓰오. 17년 동안 열처리 공장의 용광로 속에서 일한 노동자. 용광로 속의 붉은 불꽃. 照枾, 석양에 빛나는 감의 색깔을 떠올립니다. 그리고 그 역시 두통에 시달리고, 사건 현장에서 도망친 사노 미호코와는 내연 관계입니다(물론 과거에 서로 사랑했던 사이이고, 현재는 각자 결혼을 했으며 가정도 있습니다. 그러나 부부관계가 좋지는 않습니다). 고다 경부모와 노다 다쓰오는 한 여성 사노 미호코를 두고 서로 질투와 시기를 느끼며, 때로는 증오의 감정까지 품게 됩니다.


  호스티스 살인사건과 지하철 자살사건. 이처럼 사건은 벌어지지만, 미스터리적인 측면에서의 해결은 없습니다. 두 남자의 한 여자를 두고 벌어지는 광기와 욕망만 있을 뿐, 추리나 트릭, 반전 등은 없습니다. 고로 추리소설을 기대하고 이 작품을 읽는다면 매우 실망할 확률이 높습니다. 집착, 광기, 욕망, 허탈감, 허무함 등의 감정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독자를 불안하게 만듭니다. 경찰과 대기업 공장의 노동자. 그들이 일탈을 할 이유는 없습니다. 이제는 안정적인 궤도에 올랐죠. 그럼에도 그들은 그 자신들이 가진 모든 것을 그냥 포기하려 합니다. 한 여자에 대한 이유 없는 집착으로 보기에는 서로에 대한 묘한 감정선이 신경이 쓰입니다.


  고다는 노다 다쓰오의 거울이며, 노다 다쓰오 역시 고다의 거울이죠. 서로에게서 서로를 보고, 그 서로에게(자기 자신에게) 질투와 증오라는 감정을 느낍니다. 결국, 그들은 무너질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난 것이겠죠. 한없이 추락하는 두 남자의 광기를 보노라면, 증오의 감정이 들다가도 서글퍼집니다. 전작 『마크스의 산』에 비해 미스터리적인 재미는 덜하지만, 인물들의 심리 묘사와 주변 풍경들에 대한 세세한 묘사는 매우 뛰어납니다(지루함의 원인이기도 하지만요). 무엇보다 부조리한 현실에 점점 먹혀들어가는 두 중년 남성들의 모습은 정말 소름끼치도록 리얼합니다. 과연 나는 제 정신으로 살아남을 수 있을까? 그런 불안감과 공포감이 아직까지도 마음 깊숙이 박혀, 계속 떠오르게 하네요. 무섭고 슬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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