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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에게 버림받은 밤 ㅣ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29
기리노 나쓰오 지음, 최고은 옮김 / 비채 / 2011년 5월
평점 :
절판
여자들에게 가장 불편한 내용을, 또한 여자로서 결코 매력적이지 않은 등장인물을 주인공으로 사건을 해결하는 《여탐정 무라노 미로 시리즈》. 최근 기리노 나쓰오가 미스터리의 장르적인 재미를 떠나 문학성을 내세우는 작품들을 주로 발표하고 있는데, 그런 시점에서 이번 작품은 무척 반가웠습니다. 『아웃』이나 『그로테스크』만큼의 작품의 깊이나 재미는 조금 덜했지만, 그래도 충분히 기리노 나쓰오 여사의 매력을 느끼기에는 충분했습니다. 여자들의 은밀한 곳, 감추고 싶은 부분을 적나라하게 까발려서 사회 문제화 시키는 그녀의 재능이 이번 작품에서도 잘 드러나 있습니다. 이번에는 AV여배우의 실종입니다.
AV여배우가 연기가 아닌 실제 강간인 듯한 성인비디오(레이프물)를 찍은 후 사라집니다. 인권을 생각하는 모임의 열혈 활동가의 의뢰로 여탐정 무라노 미로는 AV여배우의 실종의 배후를 추적하기 시작합니다. 흔히 예상할 수 있는 스토리는 AV여배우를 이용하여 실제 강간 동영상을 찍은 후 필요가 없어져서 관계자들(물론 야쿠자도 연관이 되어있겠죠)이 살해를 했다. 뭐 이 정도 수순이겠죠. 그런데 탐정 무라노 미로가 실종 사건을 파헤칠수록 뭔가 더 거대한 실체가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매춘과 야쿠자, 성인비디오를 넘어서 가정문제까지 얽혀들면서 사건은 점점 더 꼬여가기 시작합니다. 거기다가 남편의 자살로 뭔가 정신적인 충격을 받은 미로의 방황도 시작됩니다. 다시 사랑할 수 있을까? 나쁜 인간에게 육체적으로 계속 끌리는 자기 자신을 보면서 미로는 어떤 생각이 들까요? 이 작품은 AV여배우의 실종의 배후를 밝히는 동시에 여탐정 미로의 자아 찾기이기도 합니다. 물론 그 결말은 『다크』를 읽으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결말이 아닌 현재진행형이지만요.
미스터리 장르소설로서 장르적인 재미는 충분합니다. 그리고 다양한 사회 문제를 인간 내면의 악함으로 밝혀내는 방식의 즐거움도 여전하고요. 그러나 기리노 나쓰오의 사회파 미스터리의 걸작 『아웃』이나 『그로테스크』에 비해서는 재미나 작품성이 조금 덜하기는 합니다. 내용은 잔인하나 묵직함은 별로 없고, 결말의 뭔가 미지근함도 살짝 아쉬웠습니다. 그래도 오랜만에 만난 기리노 나쓰오의 사회파 미스터리소설이라 그 자체로도 무척 반가웠습니다. 무엇보다 매우 공감하기 힘든 주인공 여탐정 미로의 일탈과 방황, 고독함, 혼란스러움을 느낄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왜 작가는 이렇게 주인공을 불완전하게 그렸을까요? 무라노 미로 시리즈의 매력은 사실 내용이나 반전, 사회 문제의식의 파헤침 이런 것들이 아닌 순전히 미로라는 여탐정 자체이지 않을까 싶어요. 참 만나보고 싶은 주인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