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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무에의 제물 ㅣ 동서 미스터리 북스 160
나카이 히데오 지음, 허문순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9년 11월
평점 :
품절
허무(虛無)에의 제물(祭物, 희생물), 제목부터 마음에 듭니다(원제도 저런 의미를 담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번역 제목은 무척 소설의 내용과 잘 어울리는 것 같네요. 사실 처음에는 <허무에의 공물>로 알려졌었죠. 개인적으로는 <허무에의 제물>이라는 제목이 더 소설의 내용과 더 잘 어울리지 않나 싶네요. 물론 제물이나 공물이나 모두 소설의 내용과 연관은 있는데 어떤 한자를 쓰느냐에 따라 소설의 느낌이 많이 다릅니다). <허무에의 제물>은 일본 본격탐정소설 3대 기서이자 안티(반)미스터리로 유명한 작품입니다. ‘안티미스터리’ 용어의 정확한 의미는 잘 모르지만 소설을 다 읽고나니 기존 본격 추리소설의 규칙이나 공식을 깨는 본격 추리소설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사실 설명이 조금 애매한데, 기존 유명 본격 추리소설의 작가들의 밀실트릭을 깨는데서 출발한다고 할까요? 우선 녹스 10계와 반다인 20법칙은 피해야 합니다. 그리고 존 딕슨 카, 애거서 크리스티, 코난 도일, 가스통 르루 등 본격 추리소설계의 이름 있는 작가들의 트릭도 당연히 피해야 합니다.
안티미스터리라고 해서 밀실트릭이 없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밀실트릭이 아닌 밀실트릭을 (말장난일 수도 있는데, 이 작품을 읽으면 저의 이런 말장난이 조금은 이해가 되지 않을까 싶네요) 해체해야 합니다. 추리소설을 비판한다는 자체가 재미있잖아요? 그럼에도 독자는 머리를 싸매고 추리를 해야 합니다. 기존의 추리소설의 규칙이나 공식이 아닌 다른 그 무엇으로 사건을 추리하고 해결해야 하니 머리가 정말 아픕니다. 이 소설 읽는데 정말 머리가 아팠습니다. 추리소설을 비판하는 추리소설로 4개의 밀실살인을 자칭 잘난 명탐정들과 함께 해결을 해야 합니다. ‘히누마 집안 살인사건’이 바로 그 사건인데, 사건의 배경이나 실제 밀실에서 이루어지는 살인 사건 자체가 아트(예술)입니다. 정말 이런 복잡하고 치밀한 이야기 구성에 놀랍더군요(작가가 실제로 10년간 도야마루 사건을 취재/집필하여 완성했다고 하네요). 사람이 밀실에서 죽었는데도, 주변 인물들은 한가하게 추리게임을 펼칩니다(사실 살인범보다 이들이 더 미친 것 같아요). 안티미스터리에 4개의 밀실살인사건, 게다가 아이누 전설과 5색 부동명왕까지 암튼 별별 잡다한 내용들이 뒤죽박죽 뒤섞여서 독자를 아주 헷갈리게 그리고 힘들게 합니다. 논리적인 추리를 해야 하는 거야? 아니면 비논리적인 추리를 해야 하는 거야?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교묘히 넘나드는 명탐정들의 사건 추리는 독자를 더욱 더 미궁 속으로 빠뜨립니다.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한자, 암합(暗合). 암합보다는 우합(偶合, 우연히 맞음)이라는 한자가 좀더 이해하기 쉬울 듯. 그런데 암합의 잦은 등장은 요즘 추리소설에서는 조금 불공정한 트릭(?)으로 알고 있는데(작품 속에 명탐정들도 사실 인정하기는 합니다. 암합이 무엇인지 추리하는 것조차 이 작품에서는 힘듭니다), 뭐 그래도 나쁘지는 않습니다. 또한 수학 싫어하는 독자들을 기죽이기 위해 복잡한 수학공식도 대놓고 등장시킵니다(수학 공식의 의미를 나름대로 풀어보려고 했는데, 이해가 쉽지 않더군요).
한 마디로 느낌을 정리하자면 (좋은 의미에서의) “뭐 이런 작품이 다 있나?”였습니다. 추리소설 좋아하시는 분들은 꼭 보셔야 할 작품이지 않을까 싶어요. 추리소설의 공식과 규칙을 벗어난 안티미스터리, 참으로 매혹적인 세계입니다. 이런 작품의 시작이 누구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나카이 히데오가 그 시작이라면 이 작가는 정말 대단한 작가가 아닐까 싶어요. 이런 추리게임을 뒤집는 발상의 전환, 그 자체만으로도 이 작품은 높게 평가 받아야 할 작품이라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