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착의 사각 - 201호실의 여자 오리하라 이치 도착 시리즈 2
오리하라 이치 지음, 권일영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09년 11월
평점 :
절판


 

  오리하라 이치의 ‘도착(倒錯) 3부작’의 두 번째 작품입니다. ‘도착(倒錯)’이라는 한자의 뜻을 찾아보면 무척 재미있는데, 정말 소설의 제목과 내용이 잘 어울리는 작품이 아닐까 싶어요. 특히나 서술트릭을 구사하는 추리소설에는 말이죠. 사건의 전모가 밝혀지는 순간 자신이 생각했던 모든 것들이 뒤죽박죽 되어버리거든요. 도착 증상을 보이는 소설 속 캐릭터들도 이 작품의 본질(의미)을 더욱 더 혼란스럽게 하는데 일조하고 있고요. 암튼 기발한 착상과 재미있는 플롯, 그리고 서술트릭이 무척 잘 어우러진 작품이 아닐까 싶어요. 단 서술트릭 자체는 오래 전에 발표된 소설이라 그런지(1989년쯤에 발표가 되었더군요), 현 시점에서는 조금 식상해 보이기는 합니다. 정말 뒤통수를 후려치는 그런 반전의 아쉬움은 어쩔 수가 없는 것 같아요.

  관음증(성적 도착증)과 알코올 중독에 시달리는 추리소설 번역가가 주인공입니다. 노총각에 큰어머니 집에 얹혀사는 요즘 유행어로 말하자면 ‘루저’이죠. 집에서 추리소설을 번역하는 것이 그의 일이지만, 그보다는 건너편 연립주택 2층(201호)에 거주하는 여성의 행동을 훔쳐보는 것을 낙으로 삼는 그런 한심한 인간입니다(다락방에 8배율 쌍안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여자가 살고 있는 집에서는 사각지대라 아주 마음 편히 노골적으로 훔쳐볼 수가 있죠). 그 후 그는 망가지기 시작합니다. 몇 달 후 여자가 죽은 201호실에 또 다른 여자가 들어오면서 사건은 점점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합니다. 이야기는 번역가 남자의 수기, 201호실에 거주하는 여자의 수기, 그리고 알코올 중독자이자 좀도둑인 한 사내, 마지막으로 201호실 여자 어머니의 시점이 교차로 진행됩니다. 사실 서술트릭이라는 홍보문구에도 불구하고 그런 트릭을 추측할 만 한 거창한 사건(연쇄적인 범죄는 일어나지만 독자는 이미 범인을 알고 있습니다)은 일어나지 않습니다(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보인 것이겠죠). 직장 상사와 불륜에 빠진 여자와 훔쳐보기를 즐기는 한 남자의 그냥 평범한 하루하루의 일상이 수기형식으로 기록되었을 뿐, 정말 아무 것도 없습니다. 종장의 반전이 드러나기 전까지는 말이죠.

  사실 서술트릭을 제외하더라도 이 소설은 관음증에 빠진 알코올 중독자인 추리소설 번역가의 서서히 망가지는 모습을 (독자 역시) 훔쳐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재미있는 소설입니다. 누구에게나 관음증은 있으니까요. 번역가는 201호실의 여자를 훔쳐보고, 좀도둑은 201호실의 여자와 번역가의 생활을 관찰하고 훔쳐봅니다. 독자 역시 이들의 내밀한 비밀과 욕망을 훔쳐보고요. 서로가 서로를 훔쳐보면서 뭐 그냥 망가지는 소설입니다(라고 말하면 너무 이상한가요?). 일그러진 이야기라고 할까요? 뭔가가 이상합니다, 정체를 알기 전까지는, 그러나 정체를 알고 나서도 역시나 이상합니다. 결코 그들은 작가의 펜으로부터 절대 벗어날 수 없거든요. 부분이 아닌 전체를 눈여겨봐야 할 작품이 아닐까 싶어요. 서술트릭의 핵심은 결국 대부분 거짓말이라는 거잖아요. 알면서도 속는 것이 바로 서술트릭을 구사하는 추리소설이잖아요. 서술트릭 자체는 조금 약하지만, 이상심리에 초점을 두고 읽는다면 충분한 재미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네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