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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죽인 소녀 ㅣ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16
하라 료 지음, 권일영 옮김 / 비채 / 2009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중년의 사립탐정 사와자키가 천재 소녀 바이올리니스트 사야카의 유괴 사건 의뢰를 맡습니다. 아니 의뢰를 맡기보다는 범인들에게 이용을 당한다는 표현이 더 적절하겠네요. 전작 <그리고 밤은 되살아난다>에서 사와자키를 처음 알게 된 후 '이 아저씨는 알면 알수록 참 궁금해지는 것아.'라고 생각하던 차에 만나게 된 작품이라 무척 반가웠습니다. 알코올 중독 방랑자 아타나베나 신주쿠 경찰서의 경부 니시고리도 무척 반가웠고요. 사와자키와 아타나베, 사와자키와 니시고리의 관계는 무척 재미있는 것 같아요. 애정과 증오, 그 이상의 뭔가 친밀한 관계가 작품의 우울하고 고독한 분위기를 한층 더 살려주는 맛도 있는 것 같고요. 암튼 주변에서 쉽게 마주칠 수 있는 우울한, 그러나 결코 쉽게 좌절하지 않고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가는 아저씨들에 모습에 묘한 동질감이 느껴지는 작품이었습니다. 사와자키 사립탐정의 모습만 봐도, '이 아저씨는 도대체 삶의 낙이 뭘까?' 싶을 정도로 무미건조해 보입니다. 가족이나 친구도 없이, 사무실과 집, 술집 그리고 말썽이 잦은 자가용 블루버드에서 하루의 대부분을 보냅니다. 그럼에도 결코 형사들에게 지지 않습니다. 싸가지가 없을 정도로 놀리기도 하고, 대들기도 합니다. 살아가기 위한 자학으로 느껴질 정도로 시니컬합니다.
"인간이 하는 짓은 모두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편이 나을 겁니다. 모두 잘못이지만 적어도 용서받을 수 있는 선택을 하려는 노력은 해야겠죠."(p.458)
소녀 유괴 사건의 돈을 나르는 역할을 맡게 된 사와자키 탐정은 자신의 실수(?)로 유괴금을 전달도 하지 못한 채, 심지어 소녀를 죽음에 이르기까지 합니다. 죄책감은 아닌 씁쓸함. 사와자키는 유괴되어 죽은 소녀의 외삼촌(가이 마사요시, 음악대학 교수)으로부터 사건 의뢰를 맡습니다. 바로 가이의 아들들의 알리바이를 조사하는 것. 사실 플롯은 무척 단순합니다. 뭐 스토리를 따라가기보다는 작품에 흐르는 분위기를 느끼면서 즐기는 게 이 작품의 매력이죠. 소녀 유괴의 범인을 찾는 것, 단순 명쾌합니다. 범인은 무척 지능적입니다. 형사도 사와자키 탐정도 사건의 중심으로 쉽게 들어가지 못하고 계속 겉에서 맴돕니다. 경찰이나 사와자키나 점점 더 불안해집니다. 다가갈수록 미궁 속으로 빠지는 사건, 이번 작품은 하드보일드 탐정소설의 매력뿐만 아니라 유괴 사건의 범인을 잡아야하는 추리적인 재미도 상당한 편입니다. 드러나는 진실도 결코 마음 편하지는 않고요. 전작 <그리고 밤은 되살아난다>가 가독성에서 조금 떨어졌던 반면, 이번 작품은 가독성도 무척 좋더군요. 쉽게 잘 읽힙니다. 그리고 설정 자체도 미스터리 스릴러 좋아하시는 분들에게는 상당히 흥미를 유발시킬만한 설정이고요. 범인을 잡아야 하는 탐정이 사건을 수사할수록 점점 범인으로 몰립니다. 대부분의 조건들이 사와자키 범인설을 뒷받침하거든요(고전적인 설정이기는 하지만 작품의 출간 년도를 감안하면 이런 설정 나쁘지 않죠). 그리고 캐릭터의 행동들에 대한 소소한 설정(개인적으로 와타나베가 보내는 종이비행기가 무척 좋습니다)도 진한 여운을 남겨, 캐릭터들에 대한 무한한 애정이 사라지지 않고 계속 마음에 남는 것 같아요. 그래서 사와자키의 다음 활약도 역시나 기대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