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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체 모형의 밤
나카지마 라모 지음, 한희선 옮김 / 북스피어 / 2009년 2월
평점 :
품절
고독을 싫어하는 여자도 있구나. 혼자서 죽는 것도 참지 못하는, 그런 여자도 있구나.
(<싸늘해진 코> 중에서)
상상의 화려함에 비하면 실상은 어차피 퇴색한 현실일 뿐이다.
(<굶주린 귀> 중에서)
여자들은 십만 엔 내면 십만 엔만큼, 백만 엔을 내면 백만 엔만큼의 위안과 안심을 자기 마음속에 사들이는 것이다.
(<뼈 먹는 가락> 중에서)
당신들은 아빠 엄마가 아니야. 악마야. 악마가 두 사람에게 씌여 나한테 더러운 것을 먹이려고 했어. 더러운 시체를 먹이려고 했어.
(<다카코의 위주머니> 중에서)
오늘 밤 나는 무척 간단한 절개 수술을 하기로 했어. 직접 내 미간의 뼈를 절제할 거야. 마취는 하지 않고. 그에 의해서 나는 진정한 천사를 볼 수 있게 되겠지.
(<날개와 성기> 중에서)
사안(邪眼, 사악한 눈), 장님붕장어, 귀신, 유령, 시체, 인면(人面) 종기(큰 부스럼), 피라미드의 원리, 존 레넌의 미 발표곡, 거식증, 강령회, 무성(無性) 등 전혀 연관성 없는 소재들이 휘황찬란하게 펼쳐집니다. IQ 185의 천재 기인 작가답게 이야기는 정말 기괴하고 잔혹하며, 때로는 환상적이고 공포스럽습니다. 당황스럽게도 때로는 감동적이기도 합니다. 나카지마 라모의 《인체 모형의 밤》은 인체 기관들이 들려주는 기괴한 열두 가지의 이야기를 수록한 호러단편집입니다. 《인체 모형의 밤》은 ‘어떤 소설이다!’라고 정의하기 힘들 정도로 정말 다양한 분위기의 단편소설들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사실 장르를 정의하기는 조금 애매한데, 호러소설이 가장 어울리지 않을까 싶네요. 호러소설에서 논리를 따지면 재미없습니다. "귀신이 왜 있냐?", "저게 말이 되냐?", "원인은 뭐냐?", "왜 그런 현상이 생기는 거냐?" 별 의미가 없습니다. 그냥 기이하고 무서운 이야기입니다. 호러소설은 추리소설과는 다르게 원인(동기)과 결과가 중요하지 않고, 현재 눈에 보이는 현실이 중요합니다. 암튼 《인체 모형의 밤》에는 믿지 못할 이야기들이 정말 많습니다. 반면, 그 믿지 못할 이야기 이면에는 무시무시한 인간 내면의 어두운 심리가 숨겨져 있습니다(위의 <싸늘해진 코>나 <굶주린 귀>, <뼈 먹는 가락> 문장 참고). 죽어서까지 고독을 싫어하는 여자, 상상 속의 화려함과는 다른 비참한 현실, 그리고 낙태를 한 후 위안과 안심을 삼기 위해 거금을 들려 봉양하는 여자 등 비현실적인 상황임에도 인간들의 행동은 매우 현실적입니다. 가상게임을 하다가 순간 실제현실로 돌아오는 느낌이라고 할까요? 마음 편히 방심할 수가 없더군요.
이런 비현실적인 상황에서의 현실적인 이야기뿐만 아니라 더욱더 기괴한 이야기들이 많습니다. 단편 하나에 다양한 분위기들이 어우러져 독특한 분위기를 풍깁니다. <피라미드의 배꼽>은 길거리에서 흔히 마주칠 수 있는 도인 비슷한 남자가 피라미드의 원리에 대해서 장황하게 설명합니다. 결코 믿을 수 없는 사기죠. 그런데 듣다 보면 묘하게 끌립니다. 처음에는 비웃다가 나중에는 진지하게 듣고, 마지막에는 뒤통수를 때립니다. '결국 그런 거였어?' 헛웃음이 나오지만 반면 잔인함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다카코의 위주머니>는 홍콩 국민이 개고기를 먹는 뉴스를 본 후 고기를 거부하는 소녀가 나오는 이야기인데, 이 이야기도 처음에는 잔잔하게 시작되다 부모와 자식 간의 갈등으로 이어지고 마지막에는 황당하게 결말을 맺습니다. 이거 진지한 이야기였잖아? '결국 그런 거였어?' 또 속으로 되뇌게 됩니다. <날개와 성기>는 정통호러에 가까우나 마지막에 돌변하기 시작합니다. 그런 천사는 꿈에서도 보기 싫어요. <유방>은 가벼운 오컬트로 시작하다 진지하게 끝을 맺고(그래도 당신의 구라를 믿을 수 없습니다), <굶주린 귀>는 처음부터 끝까지 긴장감과 공포감으로 이야기를 이끌어갑니다(물론 벽을 통해 남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주인공의 특수한 능력 때문에 관음증적 쾌락도 함께 느끼면서 말이죠).
"온 바다에 녀석들이 멍울지어 너울거리는 모습은 낙원이 아니야. '지옥이야', '지옥'."(<세르피네의 피> 중에서) 가장 이상적인 낙원이라 생각했던 곳이 사실은 지옥이고, 남편을 그리워하는 여자는 정신이상자이며, 천사의 실제 모습은 그토록 혐오하던 자신의 모습이었죠. 결국 인간과 괴물(귀신, 유령), 낙원과 지옥, 현실과 환상, 공포와 쾌락은 별반 다르지 않다는 거죠. 두려움이 때로는 희망이 될 수도 있고요. 유(有)의 반대는 무(無)가 아닌 반(反)유인 것처럼. 목적택에 놀러가서 인체 모형의 가슴에 귀를 바싹 대어 보세요. 다른 세상이 열릴지도 모르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