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네크로폴리스 1 ㅣ 블랙펜 클럽 BLACK PEN CLUB 6
온다 리쿠 지음, 권영주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8월
평점 :
'산자와 죽은 자의 경계에서 미스터리한 연쇄살인사건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흥미진진한 모험담' 정도로 짧게 요약할 수 있는 <네크로폴리스>는 온다 리쿠 판타지의 집대성이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로 무척 스케일이 큽니다. 대체로 온다 리쿠의 소설이 판타지 성향이 짙기는 한데(대표적인 작품으로는 도코노 시리즈가 그렇죠), 이번 작품은 특히 다양한 (판타지) 용어들과 '어나더 힐'이라는 독특한 공간(나라), '히간', '갓치' 등의 독특한 문화들을 창조하고 변형시켜 기존 온다 리쿠의 판타지소설보다 좀 더 앞으로 나아간 느낌이 듭니다. 물론 온다 리쿠의 전매특허인 노스탤지어와 미스터리한 분위기도 살리면서 말이죠. 그러나 소설의 호흡은 무척 길고, 마지막에 밝혀지는 미스터리한 사건의 정체는 조금 싱거우며, 미스터리와 호러/판타지의 장르 혼합은 조금 어지럽기도 합니다. 도대체 무엇을 말하고 싶은 건지 (책장을 덮은 뒤에도) 모르겠더군요. 보통 온다 리쿠의 소설을 읽으면 아련한 그리움 등이 남는데, 이 소설은 '그래서?'라는 의문이 많이 남더군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그런 이상하고 신비스러운 나라 'V.파'(V와 파 사이의 '.'은 왜 넣는지 모르겠더군요. 나라 이름의 무슨 의미가 있나 곰곰이 생각을 해 봤는데 알 수가 없네요) 도쿄 대학원생 준이 친척의 초대로 방문하게 됩니다(무척 까다로운 나라라 방문이 쉽지 않습니다). 바로 '히간'이라는 축제를 경험하기 위해서 말이죠. 히간은 '손님'이라 불리는 죽은 자를 만날 수 있는 행사로 다른 나라에서는 미신이나 집단 최면 상태 등 부정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축제입니다(축제에 대한 설명은 이 정도만 하겠습니다. 축제 자체는 무척 흥미롭고 재미있습니다. 죽은 자가 되살아나거든요. 멀쩡한 모습으로 말이죠). 나름대로 시작은 좋습니다. '피투성이 잭'이라는 정체불명의 존재가 연쇄살인을 저지르거든요. 그러나 여기에서의 살인은 자살행위나 다름없습니다. 왜냐하면 죽은 자('손님')가 되살아나 돌아오니까요. 그리고 손님은 거짓말을 못하거든요. "누가 죽였어?" 묻는다면 바로 범인의 정체는 탄로 나게 되죠. 그러니 미치지 않은 이상 살인은 꿈에도 못 꾸는데, '피투성이 잭'이라는 연쇄살인범이 살인을 저지릅니다. 암튼 이야기의 큰 줄기는 연쇄살인범 '피투성이 잭'이라는 범인을 잡는 것입니다.
물론 '피투성이 잭'이라는 범인은 잡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 이상하고 신비한 나라에서는 더욱더 이상한 사건들이 벌어집니다. 히간에 처음 초대받은 대학원생 준이 정신을 차리지 못할 정도로 말이죠. 그리고 국민들이 무척 수다스럽습니다. 호기심도 많고, 정열적이며, 시끄럽습니다(개인적으로 이런 잡담 비스 무리한 수다는 재밌더군요). 그러니까 거주하는 주민이나 초대받은 손님이나 모두가 어딘가 모르게 수상합니다. 밀실살인, 시체의 증발, 라인맨이라는 선주민의 정체 등 미스터리한 사건들도 끊이지가 않고, '피투성이 잭'이라는 범인은 더더욱 미궁 속으로 빠져듭니다. 뭐 여기까지는 괜찮습니다. 판타지와 미스터리의 균형이 잘 맞는다고 할까요? 문제는 다음부터인데, 이야기의 스케일이 너무 커서인지 조금은 용두사미식 결말로 끝맺는 것 같더군요.
수수께끼는 모두 풀립니다. 그런데 개운하지가 않습니다. 시공간의 초월을 다루는 이야기의 장르는 SF죠? 엄청나게 많은 미스터리한 사건들을 SF소설식으로 풀어버리다니, 김이 빠지더군요. 심지어 소설 속 등장인물인 하나(준의 친척. 미스터리매니아)는 "그렇다면 너무 시시하잖아"라고까지 말을 합니다. 일부 미스터리한 사건(하나를 예로 들면 밀실트릭)은 시시하고, 일부 미스터리한 사건은 SF 장치가 해결합니다. 물론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니지만요. 산자와 죽은 자의 경계가 사라지고, 과거와 현재의 시간이 한 공간 속에 존재하면, 미스터리적인 재미는 떨어지는 거 아닌가요? 예를 들면, (소설의 내용이 그렇다는 것은 아니고 그냥 처음 받은 느낌이 이렇다는 것입니다) 과거의 살인범이 현재로 와서 죽이고 사라지면 완전범죄죠. 절대 범인을 잡을 수 없습니다. 암튼 이런 느낌이 무척 많이 들었습니다. SF와 미스터리, 판타지, 호러 등의 모든 장르적인 재미를 충족시키기는 힘든 것 같아요.
물론 용두사미식 결말을 조금 아쉽지만, 독특한 캐릭터와 그 캐릭터들이 부딪치면서 빚어내는 대화와 갈등은 소소한 재미를 줍니다. 그리고 온다 리쿠가 창조한 'V.파'라는 신비스러운 나라, 동양(일본)과 서양(영국)의 전통이 혼합된 독특한 문화, 그리고 'V.파'를 둘러싸고 있는 신비스럽고 모호한 분위기, 그리고 온다 리쿠식 세계관 등은 무척 좋았습니다. 그나저나 이번 작품은 온다 리쿠 여사가 조금 욕심을 낸 게 아닌가 싶네요. 매력적인 캐릭터가 많은 만큼 몇몇 캐릭터를 등장시킨 연작 형태의 단편소설이 나왔으면 하는 바람이네요(그런데 수다쟁이 여자 하나, 마리코, 린데는 <목요조곡>의 아줌마들이 생각나기도 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