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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의 여자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55
아베 코보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01년 11월
평점 :
학교 선생인 30대의 한 남자는 어느 날 휴가를 내고 일상으로부터 벗어나고자 주변 지인들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사구(모래 언덕)로 신기한 곤충(길앞잡이속의 좀길앞잡이. 네이버에서 검색을 해보니 딱정벌레목 길앞잡이과에 속하는 곤충이라네요. 한국과 일본에 주로 분포한다고 하네요. 나름 귀엽게 생겼네요)을 채집하러 떠납니다. 그러나 모래 구덩이 속에 집을 짓고 살아가는 동네 주민들에게 붙잡혀 모래 구덩이 속에 살고 있는 여자와 기이한 동거를 시작하게 됩니다. 실종 이유조차 모른 채 모래 구덩이에 파묻혀 지낸 남자는 7년 후 사망으로 처리됩니다. 사담으로 미지의 곳으로 여행을 갈 때는 꼭 누군가에게 말하고 가세요. 쥐도 새도 모르게 사망 처리됩니다(재미없는 농담이었습니다).
서로 상처를 핥아 주는 것도 좋겠지. 그러나 영원히 낫지 않을 상처를 영원히 핥고만 있는다면, 끝내는 혓바닥이 마모되어 버리지 않을까? (p.198)
일본 순수문학은 사실 무라카미 하루키나 무라카미 류를 제외하고는 거의 읽어 본 적이 없습니다. 오로지 미스터리소설만 읽어서 문학성이 뛰어난 작품은 거의 접해 보지를 않았습니다(물론 미스터리소설이 문학성이 전혀 없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국내에 소개된 일본 미스터리소설 중에는 문학성보다는 대중성이나 오락성에 치우친 소설이 많다는 이야기일 뿐). 사실 아름답고 멋진 표현들이 많더군요. 원서로 읽지 않아서 일본어만의 아름다움을 완벽하게 느낄 수는 없었지만, 정말 문장들이 아름답더군요. 역시 언어는 이런 맛이 있어야 언어이지 않나 싶어요(예술에 세계에서는요).
아베 코보의 <모래의 여자>는 초현실주의(환상의 세계. 모래 구덩이)이자 실존주의(인간의 존재) 소설입니다. 물론 초현실주의나 실존주의에 대해서는 고등학교 시절에 배운 얄팍한 지식 밖에는 없습니다. 그래도 소설을 읽는 순간 딱 이 단어들이 떠오르더군요. 그만큼 이 소설을 잘 설명하는 단어도 없지 않을까 싶네요. 우선 모래 구덩이에 대해서 말해보면(모래 구덩이에 사는 동네 주민들의 삶도 포함), 현실에서는 불가능하지 않을까 싶어요(물론 시대 배경이 50-60년대이고, 사구에 대한 지식이 별로 없어서 판단하기에는 조금 이르지만요). 10-20m 아래의 모래 구덩이에서 갇혀서(자의건 타의건)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조금 비현실적이더군요. 또한 그 부근에서 실종되는 사람들도 많을 텐데, 공권력의 힘이 미치지 못한다는 것도 그렇고. 과연 모래 구덩이 속에서 살아갈 수 있는지 그 자체도 무척 의심스럽고요. 인간의 존재와 생명, 본능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이런 극한적인 환상의 세계를 창조한 것이 아닐까 싶어요. 암튼 무척 매력적인 세계입니다. 모래 구덩이의 세계는 말이죠. 동네 주민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책으로 확인해 보세요. 소름이 돋고, 두렵기도 하면서 황홀합니다. 무척 기이하고 아름다운 세계였어요.
신기한 곤충을 채집하러 떠난 한 남자 교사는 모래 구덩이에 한 여자와 갇히게 됩니다. 신기한 곤충의 조건은 무엇일까요? 끈질긴 생명력과 환경 적응력입니다. 극한의 상황에서 살아남은 곤충은 그 가치를 인정받죠. 아이러니하게도 문명 세계(도시 사회)에서 살다 온 남자 주인공은 스스로가 신기한 곤충 신세가 되어버립니다. 동네 주민들에게 협박과 회유도 하고, 탈출도 시도하며, 여자를 인질 삼아 협상도 해보지만 소용이 없습니다. 하루 이틀, 1년 2년이 지나갑니다. 그 남자는 결국 살아남습니다(물론 이미 그는 국가로부터 사망 처리가 되지만요). 일상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던 한 남자는 결국 벗어나 신기한 곤충의 존재로 뒤바뀝니다. 한 인간의 내면과 행동이 극한 상황(모래 구덩이) 속에서 서서히 변화되는 과정은 무척 흥미롭습니다. 그리고 모래 밖 세계와 모래 안의 세계는 뭐가 다른 것일까요? 복종과 수용만을 강조하는 모래 세계. 그리고 모래 구덩이 속에 갇힌 남자가 가고 싶었던(또는 꿈꾸었던) 모래 밖 세계. 그리고 그곳에 사는 인간들의 삶의 존재 이유 또는 방식. 그의 절친한 동료 교사 뫼비우스(별명) 이름처럼 모래 안과 밖은 결국 한 공간이지 않나 싶네요. 결국 벗어나지도 못하는 곳을 벗어나겠다고 발버둥치는 인간들에게 이 얼마나 웃기는 삶의 모순입니까? 결국 계속 발버둥 치다 지쳐 스스로 타협하고, 아무렇지 않게 살아가겠죠. 인간이란 존재는 참 우스운 것 같습니다, 때로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