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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전설 세피아
슈카와 미나토 지음, 이규원 옮김 / 노블마인 / 2007년 8월
평점 :
절판
"인생도 이런 거라고 후지타는 생각했다. 같은 차량에 함께 탔다가 다른 전차로 갈아타고 추월하고 추월당하다가 마침내 떨어져 나간다. 선로가 만나는 일은 결코 없다. 그렇게 헤어진 사람이 많다. 어릴 적 동무, 같은 반 친구, 마음이 어긋나 헤어진 애인. 그들은 지금 다른 전차를 타고 먼 곳으로 가버렸다." (<월석> 중에서)
도시와 전설, 그리고 아련한 그리움. <새빨간 사랑>이 로맨틱한 공포를 다루었다면, 이번 작품집 《도시전설 세피아》는 두려우면서도 그리운 공포를 다루고 있습니다. 어린 시절 동네에 떠돌던 무서운 이야기들은 이제는 잊혀지고 기억에서 사라져 버리고, 떠나간 사람은 다시 돌아오지 않으며 죄책감과 불안에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아가죠. 그러나 그런 아련한 그리움 뒤에는 무섭고도 섬뜩한 공포가 도사리고 있기도 합니다. 스스로 전설이 되고자 살인을 하는 남자, 사랑하는 남자를 잊지 못해 복제품을 만들려는 여자, 죽은 친구를 자신의 욕심(이 아닐 수도 있지만 저는 욕심으로 보이더군요. 죽은 친구보다는 슬퍼하는 자신을 참지 못해서 하는 행동이 아닐까 싶어서요)으로 계속 살려내는 아이 등등 슬프지만 섬뜩하기도 합니다. 암튼 아련함과 섬뜩함이 공존하는 묘한 분위기의 공포소설이네요. 슬퍼해야 할지 무서워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만큼 독특한 매력이 있는 작품집 같아요.
<올빼미 사내>는 도시전설에 매혹된 어느 미친 사내가 스스로 전설을 만드는 과정을 편지 형식으로 써내려간 소설입니다. 어른뿐만 아니라 이제는 아이도 믿지 않는 도시에 떠다니는 전설들. 전설 속에 괴인을 만나면 (유명하니까) 사인을 받고 싶어 하는 아이들. 더 이상 전설 따위는 믿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 스스로 전설이 되고자 한 어느 올빼미 사내의 이야기인데, 인터넷이라는 가상공간에서 그 이미지가 스스로 만들어지는 과정이 저 개인적으로는 더 소름이 끼치더군요. 그러나 마지막의 반전은 기이하면서도 슬픕니다. 아니 안타깝다고 해야 할까요? <어제의 공원>은 타임리프를 다룬 SF 느낌이 나는 공포소설입니다. 친한 친구를 살리기 위해 어제의 토요일을 계속 겪습니다. 그러나 친구는 다른 사건으로 인해 계속 죽습니다. 결코 운명을 벗어나지 않는 다는 것, 그리고 그 운명을 거스를수록 사태는 더 악화된다는 것. 결코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어린 시절의 나는 친구의 죽음을 통해 배우게 됩니다. 아이는 어른이 되고, 죽음을 덤덤하게 받아들입니다. 인생살이가 다 그렇고 그런 거잖아요. 그래서 그런지 마지막 반전의 여운은 꽤 오래가네요.
<아이스맨>은 물에 사는 상상 속의 동물 '갓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아름다운 사랑일 수도 있고, 병적인 집착일 수도 있는 그런 사랑이야기. 어차피 사랑과 집착은 종이 한 장 차이잖아요? 그래서 그런지 이야기의 결말은 몹시 섬뜩하네요. 여담으로 이 소설의 결말은 어디에서 보거나 읽은 기억이 나네요. 정확한 작품의 제목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요. <사자연>은 젊은 나이에 자살한 화자 지망생을 사랑한 두 여자의 이야기입니다. 개인적으로 이번 작품집에서 가장 완성도가 높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미 죽은 남자를 서로 차지하려는 두 여자의 일그러진 집착과 욕망을 그린 소설인데, 결말이 가히 충격적이네요. 결말뿐만 아니라 이미 죽어버린 사랑하는 남자의 복제품을 만들려는 시노부의 행동은 과연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지?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애인의 시체를 땅에 묻거나 화장하지 않고 방에 그대로 둔 채 사랑을 울부짖는 그런 이야기도 있으니 역시나 사랑은 위대한 것일까요?
마지막으로 <월석>은 죄책감으로 인하여 죽은 어머니나 해고한 부하직원의 모습을 계속 보게 되는 어느 샐러리맨의 이야기입니다. 어쩔 수 없다는 이유로 어머니의 죽음을 지켜드리지 못하고, 어쩔 수 없다는 이유로 부하직원을 해고 한 후 역시나 어쩔 수 없다는 자기 위안으로 아무렇지 않게 살아가는 샐러리맨에게 전차 창밖으로 보이는 어머니와 부하직원의 모습은 스스로의 삶을 돌아볼 여유를 줍니다. 어린 시절, 만국박람회장의 미국관에 있는 '월석'을 선착순으로 줄을 서기 위해 달려가는 어머니의 모습은 4년 전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 지켜드리지 못한 주인공에게 너무나 가슴 아프고 슬픈 현실로 다가옵니다. 그래서 그런지 마지막 주인공의 행동은 참으로 마음이 행복해지더군요. 너무 바쁘게 뒤도 돌아보지 않고 빡빡하게 인생을 살 필요는 없지 않을까요? 너무나 당연함에도 너무나 쉽게 잊고 사는 것들, 한번쯤은 자신의 삶과 주변을 돌아보는 여유쯤은 가져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그날 어머니는 자신을 위해 그렇게 달렸는데 자신은 어머니를 위해 달린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늘 조만간, 조만간 생각하다가 갑작스럽게 부고를 받았다." (<월석>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