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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귀 1 - 죽음의 마을
오노 후유미 지음, 임희선 옮김 / 들녘 / 1999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소수의 신으로부터 버림을 받은 흡혈귀들이(소토바 마을 주민들은 이들을 '시귀'라고 부릅니다) 전나무 숲으로 둘러싸인 외부로부터 (조금은) 고립된 소토바 마을에 자신들의 이상적인 마을을 건설하고자 방문합니다. 초대 받지 못하면 방문할 수 없는 시귀들은 속임수를 써서 마을에 안정적으로 안착합니다. 이제부터 시귀들의 살아남기 위한 살육이 시작됩니다.
흡혈귀는 서양에서는 무척 친근한 존재요. 죽은 시체가 살아서 다시 움직인다는 내용은 좀비소설(이나 영화)에서 무척 많이 다루어지기도 하고요. 햇빛을 싫어하고, 피를 빨아 먹으며 생명을 유지하고, 말뚝을 받으면 죽는 등 동양(일본) 흡혈귀더군요. 그러나 이 소설은 흡혈귀와 인간의 단순한 대결을 다룬 이야기는 아닙니다. 외부인의 출입이 드문 자급자족 형태의 마을, 동네 주민들의 강한 결속력 등 인간 내면의 존재를 깊이 있게 들여다 볼 수 있는 조건이 우선 주어집니다. 그러니까 외부의 개입 없이 시귀와 인간이란 존재를 좀 더 자세하게 들여다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의 피를 빨아 먹고 살아가는 시귀는 없어져야 할 존재인가? 피를 먹지 않으면 죽는 시귀들은 어쩔 수 없이 인간을 죽이고 피를 빨아 마십니다. 인간도 먹고 살기 위해 짐승들을 죽여서 먹습니다. 그러나 식욕이라는 본능 이외에도 인간들은 인간들을 잔인하게 죽이죠(물론 명분 없는 전쟁이 실제로 벌어지고 있으니까요. 물론 그네들은 명분이 있다고 할지 몰라도요). 시귀들을 심판한 권한이 과연 인간들에게 있을까요? 소설 <시귀>의 '세이신'이라는 인간은 그런 의문에 회의감을 갖습니다. 인간이 시귀를 처단하는 것 역시 살인과 다르지 않다.
개인적으로 이 소설에서 무척 흥미로웠던 것은 '세이신'이라는 도련님(승려)이 자주 언급하는 절망과 질서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세이신이 쓰고 있는 소설 속에는 동생을 죽인 형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동생을 죽임으로써 살인자라는 죄를 뒤집어쓰고 낙원에서 쫒겨 납니다. 형은 왜 동생을 죽였을까요? 동생을 질투해서? 그렇지는 않습니다. 소설 속 살인자 형의 이야기는 소설 밖 세이신의 이야기이도 합니다. 형은(또는 세이신)은 절망을 해서 동생을 죽이고 자살 시도를 합니다. 신이 정한 질서에 편입되어 거짓으로 살아가는 그들은 절망을 합니다. 주변에서 바라보는 자기 자신. 주위 사람들의 기대. 그런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거짓 위선으로 살아가야 하는 숙명. 암튼 시귀와 인간들의 대결도 흥미로웠지만 저는 이 세이신의 철학이 마음에 들더군요. 절망과 질서에 대한 세이신의 생각에는 저 역시 무척 공감합니다.
그러니까 이 소설 <시귀>는 공포소설이기는 하지만 슬프면서 절망적인 소설이기도 합니다. 인간들의 강한 결속력과 유대감은 시귀가 인간들의 피를 빨아 먹는 행위에 비해 몇 배나 더 소름 돋고 끔찍합니다. 시귀를 두려워서 죽이고, 다음에는 즐거워서 죽이고, 다음에는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시키기 위해 인간들을 죽여 버립니다. 죄의식은 없습니다. 공동체의 강한 결속력은 이들을 더욱더 잔인한 살인귀로 변모시킵니다. 시귀보다 더 무서운 인간이란 존재. 그리고 피를 빨아 먹어야만 살아갈 수 있는 시귀, 시귀가 되고 싶어서 된 것도 아닌데, 인간들은 그들을 다른 존재로 규정짓고 두려움의 대상으로 보며, 없애야 할 존재로 인식하죠. 시귀들은 숨을 곳은 없습니다. 인간들은 자신들만의 규칙과 질서를 위협하는 존재를 가만두지 않거든요. 물론 이유도 있고 명분도 있죠. 그러나 과연 그 명분은 누구를 위한 명분일까 생각이 드네요. 자신들(공동체)만을 위한 명분을 명분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런식의 인간 사냥도 역사적으로 많았잖아요. 이 소설에서 두려움의 대상은 시귀가 아닌 바로 인간이 아닐까 싶네요. 그래서 마지막 인간들의 시귀 사냥은 홀로코스트를 연상시킵니다. 일본과 우리나라의 문화가 비슷한 부분이 많아서인지 모르겠지만 소토바 마을이 처한 상황들이 무척 공감이 가더군요. 그러나 무섭다기보다는 씁쓸함이 더 많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