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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목가 1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17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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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다는 것은 사람들을 오해하는 것이고, 오해하고 오해하고 또 오해하다가, 신중하게 다시 생각해본 뒤에 또 오해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서 우리는 우리가 살아 있다는 것을 안다. 우리가 틀렸다는 것을 알면서. (62쪽)

 

  아주 오랜만에, 새벽을 관통하면서 책을 읽었다. 자세를 요리조리 바꿔가면서, 점점 무거워지는 눈에게 '조금만 더' 버텨달라고 부탁하면서 결말까지 쉬지 못하고 읽었다. 필립 로스는 워낙 유명한 작가였지만, 나는 <미국의 목가>를 통해 그의 명성을 실제로 접했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스위드이다. 그는 유명한 운동선수였고 아쉬울 것이 없는 남자였다. 그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모두 유대인으로, 미국에서 장갑사업을 하면서 정착했다. 스위드 역시 운동을 그만두고 아버지의 바람대로 가죽을 무두질하고 장갑을 만드는 법을 배우며 훌륭한 사업가로 성장한다. 그의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아버지의 권위와 지침을 받아들이고, 아버지가 사랑한 것들을 사랑하면서 비슷한 생각을 갖고 같은 말을 쓰면서 완벽하게 아버지를 복제해낸다. 그의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그러나 그는 딱 한번 아버지의 뜻에 반하게 되는데, 미스 뉴저지 출신의 카톨릭교를 믿는 돈 드와이어와 결혼을 하게 된 것이 그것이다. 스위드와 돈 사이에서 태어난 딸 메리, 이 아이 때문에 사건은 아주 재미있게 전개된다. 지금껏 아버지의 가치와 신념을 전적으로 흡수해온 자녀들의 모습과 달리, 메리라는 아이는 아버지의 완벽하게 다듬어진 형상이길 거부한다. 그의 아버지가 노동자를 착취하는 더러운 자본가라고 비난하고, 전쟁에 반대하면서 '미국'이라는 나라를 부정한다. 그럼에도 스위드는 부드러운 집요함으로 아이를 이해하려고 시도하지만 메리는 우체국을 폭파하고 전쟁에 찬성하는 사람을 죽이는 폭파범이 된다.

 지금껏 '사는 게 왜 요 모양 요 꼴?'이라는 질문과 단 한번도 마주하지 않았던 한 남자의 일생이 뒤틀리기 시작하면서 이야기는 탄력을 받는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지자 그는 끝없이 자기검열을 하거나 자신의 품위를 지키기 위해 모든 수치를 떠안으면서 일상적인 생활을 유지한다. <위대한 게츠비>의 게츠비처럼, 스위드는 자신이 생각하는 자신의 모습에 취해서 메리를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는 결코 '이해'라는 단어의 가장자리에도 닿지 못한다. 사실 이 소설 속에서 타인을 '이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스위드가 자신의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책으로 쓰고 싶다고 연락한 고교 후배인 스킵도 그가 말하려는 것이 무엇인지 몰랐고, 스위드의 동생 제리는 메리를 '좆같은 아이'라고 부르며 데려와서 가두거나 괴물이라고 생각해버리고 신경을 꺼야 한다고 말한다. 스위드의 부인인 돈은 다른 남자와 불륜을 저지르고, 메리의 심리치료사였던 실라 역시 메리를 이해한 것 같지 않다.

 심지어 그들 모두는 타인의 속도 모르고 자신도 잘 몰랐다. "이게 나요! 이게 나요!"라고 외치고 있지만 "이건 내가 아니오!"라고 말하는 것이 더 어울릴 만한 모습으로 살고 있다. 이 소설은 여러 방향으로 읽힐 수 있겠지만(미국에 정착한 유대인에 대한 이야기이거나 전쟁과 미국에 반대하는 내용의 이야기) 나는 스위드의 감정과 행동에 집중해서 이야기를 읽어나갔다. 그 결과, 나는 필립 로스가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을 '이해'한다는 것이 얼마나 불가능하고 슬픈 일인지를 그려내려 했다고 짐작했다.

 일찍이 시작된 메리와의 사소한 의견대립에서 스위드가 얼마나 큰 인내심을 가지고 그녀와 대화를 하는지, 폭파 이후 실종된 메리를 찾기 위해 얼마나 애를 쓰는지, 마침내 만나게 된 딸에게 진실을 듣고 싶어서, 그녀를 이해해주고 싶어서 얼마나 애를 쓰는지를 읽다보면 그의 노력이 너무 처절해서 슬퍼진다. 그리고 결국에는 '이해'보다는 '오해'가 오히려 자연스러울 수 있음을 받아들이게 된다.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도 알기 힘든 인간이 타인의 마음을 읽고 그를 '이해'할 수 있다는 막연한 믿음 자체가 얼마나 위험한지 보여주는 소설 같다. 비록 그것이 내가 낳은 자식이라고 해도, 나를 낳아준 부모라고 해도 우리는 결코 '이해'에 닿을 수 없다고 비웃듯이 말하고 있는 필립 로스. 그의 냉소적이고 정확한 시각, 그리고 섬세한 묘사(장갑을 만들기 위해 가죽을 무두질하고 바느질하는 장면을 묘사한 부분은 정말 압권이다) 는 이 작가를 최고의 작가로 꼽는데 주저할 수 없게 한다. 전혀 목가적이지 않은 내용과 결말로 치닫는 소설의 마지막장을 덮으면서 비로소 이 반의적인 제목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표지사진도 참 센스 있다고 느꼈다. (미국의 한 대가족사진 같은데 윗부분이 불에 타고 있는 사진이다) 아주 오랜만에, 즐거운 독서경험이었다. 인간을 '이해'할 수 없다는 내용은 참 서글프지만. 그래도 이 서글픈 사실이 우리의 삶을 증명한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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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이 온다]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소년이 온다
한강 지음 / 창비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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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곧 바스러질 듯 여린 문체 속에도 강력한 힘을 품고 있던 한강의 소설은 줄곧 우리에게 어떤 확실한 위로를 줬다. 그녀의 소설 <채식주의자><바람이 분다, 가라> 는 어둡고 우울한 인간의 모습을 그려냈지만 그 속에서 삶에 대한 의지를 느낄 수 있었고, <희랍어 시간>에서는 말을 잃어가는 여자와 시력을 잃어가는 남자의 교감을 통해 읽는 이에게 따뜻함을 선사했다. 그런 그녀의 새로운 장편 <소년이 온다>는 이전과는 다소 다른 행보를 보이는 것 같다.

  이번 소설에서 80년 광주 이야기를 다룬 그녀는 독자들을 슬픔의 한가운데로 안내한다.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그녀는 우리를 슬픔의 한가운데로 우겨넣는 것만 같다. 많은 이들이 이 소설을 읽고 참았던 눈물을 터트렸다고 했다. 눈물은 슬픔의 한가운데에서 인간이 취할 수 있는 자동적이고 자연스러운 반응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소설을 읽으면서 울음을 참을 수 없다거나 눈물이 고이는 순간은 없었다. 오히려 온몸으로 슬픔을 거부하듯 중간 중간 책장을 덮고 다른 일을 하려 애썼다. 책장이 넘어갈수록 마음 한 구석부터 점차 무거워지는 느낌과 그 무거움을 배출하듯 내쉬었던 셀 수 없는 한숨 그리고 때로는 외면해버리고 싶어 고개를 돌렸다 다시 응시하게 되는 순간들, 이것이 내가 새롭게 알게 된 슬픔에 대한 또 다른 반응이다.

  사실 이 소설 속에서 정확하게 묘사된 슬픔은 잔인하다는 느낌마저 준다. 사실이 아니었길 바라고 싶을 만큼 적확하고 사실적인 문장들은 읽는 이의 시간을 서서히 과거로 향하게 한다. ‘지금-여기를 벗어나 시간의 더께에 묻혀버린 80년 광주, 그곳으로 조금씩 우리의 시선을 향하게 하고 마음을 쓰게 하는 그녀의 문장과 서술방식은 한 평론가의 말처럼 이 소설을 한강을 뛰어넘는 한강의 작품으로 만든다. 그녀의 문장은 정확하지만 여전히 섬세하고, 각 장마다 시점과 화자가 다른 서술 방식은 소설 말미에서 모든 인물들이 어우러지면서 독자들을 슬픔의 한가운데로 골인시킨다.

  구할 수 있는 모든 자료를 읽는다는 것을 원칙으로 세우고, 소설 속 인물들에게 욕이 되지 않도록 정확한 슬픔을 써내려가려 애쓴 작가의 시간은 얼마나 잔인했을지 짐작할 수 없을 정도다. 80년 광주 속으로 성큼 걸어 들어간 작가는 2013년 결혼식장에 가서 만난 사람들과 그 시간들이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철저하게 과거에 머무르면서 그들의 영혼과 교감을 이루려고 했던 작가의 노력에 박수를 보낸다.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을 글쓰기를 통해 돌파해나가고 싶다는 바람대로, 그녀의 소설을 읽는 독자들은 인간이 가진 다양한 스펙트럼에 대해, 격렬하게 상반되는 모순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다른 사람을 처참하게 학살하는 인간과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의 목숨마저 내놓는 인간이 같은 인간이라는 사실은 무섭고 신비하기까지 하다. 양립할 수 없는 인간의 두 측면을 극명하게 보여주었던 80년의 광주는 과거에만 머물러있지 않다. 지금 이 순간에도 유리와도 같은 인간의 존엄성에 금을 내고 박살내는 현장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고, 우리가 인간으로 존재하는 한 이 무섭고 신비한 사실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광주 이야기를 써내려간 작가처럼 우리 역시 집요하고도 정확하게 슬픔을 응시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인간이기 때문이 아닐까.

  인간에 대한 고민 뿐 아니라 살아남은 자들의 고통과 죽은 영혼들에 대해 최대한 정확하게 말하려는 그녀의 노력은 지금 우리 한국 사회에 꼭 필요한 위로인 것만 같다. 슬픔의 한가운데로 들어가서 그곳에 머무르는 일. 그것은 좀처럼 노력하지 않고는 타인의 작은 고통에도 공감할 수 없는 바쁜 한국사회에서, 또 한 번의 국가적 슬픔을 맞이한 우리들에게 꼭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된다. 나는 이 슬픔의 한가운데에 조금 더 머무를 것이다. 그리고 슬픔에서 멀어지는 것 같을 때, 다시 이 책을 펼칠 것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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끄라비
박형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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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뷰의 제목을 "사랑의 경계를 허무는 소설"이라고 했지만, 사실 잘 모르겠다. 그의 소설이 '사랑'의 경계를 허무는 것인지, 그의 사랑이 지금껏 '소설'이라 불리는 것의 경계를 허무는 것인지에 대해 나는 아직 확신할 수 없다. 분명한 것은 경계가 허물어지고 있고, 그것이 꽤 슬프고 반갑다는 것이다.

 박형서의 소설집 『끄라비』에는 자전소설 「어떤 고요」를 포함한 7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다. 내가 박형서 작가를 좋아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그의 자전소설 때문이다. 아마 이 작품을 읽어본다면 그에 대해 아무런 감정이 없었던 사람도 그의 다음 작품이 기대될 것이다. 지나치게 작가론적인 작품 해석은 경계해야 하겠지만 자기 자신을 의도적으로 지우려는 고도의 계산이 아닌 이상 글 속에 작가의 삶과 세계관이 드러날 수밖에 없다는 점을 감안할 때, 그의 삶은 한 편의 소설만큼 극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나는 그의 자전소설을 다시 읽은 후에, 이번 소설집의 대표작인 「끄라비」를 읽어보았다. 작품의 표지에 금박으로 이집트 분위기가 나는 그림들이 그려져 있어서 나는 끄라비가 이집트에 사는 사람의 이름일 거라고 기대하며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소설을 중반쯤 읽었을 때, 아닌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찾아보니 '끄라비'는 태국의 휴양지 이름이었다.

 내가 사람일 거라고 오해한 것이 무리가 아닌 것은, 지명이라는 이 '끄라비'가 주는 묘한 이름 같은 느낌 때문이기도 하지만 끄라비가 화자를 사랑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언젠가 끄라비를 혼자 여행했던 화자는 어머니가 등장하는 꿈을 꾼 후, 자신의 상실감, 결핍을 깨닫고 끄라비를 다시 방문한다. 다시 찾은 끄라비는 자신이 미화해놓은 기억보다 아름다웠고, 그가 ~하고 싶다고 말하는 순간 즉각 그 욕구가 충족되는 장소였다. 그곳에서 화자는 "끄라비가 나를 좋아하고 내 일정을 보살펴주며, 사소한 느낌에도 주의를 기울여주는 느낌"을 받는다.

 주인공이 떠나려고 하자, 비를 뿌리고 연인과 재방문했을 때는 모든 것을 엉망으로 만들어버리는(숙소에 모기떼가 들끓고 호텔 직원이 강도로 돌변하는 등) 끄라비는 확실히 사람 같다. 연인을 데리고 온 화자에 대한 집착과 질투를 폭우로 표현하는 끄라비 때문에 화자의 연인은 폭풍우에 쓸려갈 뻔했다. 그 상황에서 화자는 연인을 산 채로 데리고 돌아가는 것을 목표로 그녀의 손을 놓아주지 않는다. 후에 가까스로 공항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깔끔하게 이별한다. 남을 불행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하는 결혼 생활 후에 열대의 바다와 암녹색 환영들을 보게 된 화자는 자신도 모르게 끄라비를 다시 찾는다. "저 먼 인도차이나 반도에 자신의 마음과 공명하는 어떤 인간적인 의지가 도시의 형태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된 것이다.

 그가 끄라비의 사랑을 모른 체하는 그 사이에 이미 폐허가 되어버린 끄라비에서 화자는 석회암 언덕의 냄새를 맡으며 그곳의 풍경을 보고 만진다. 다시 비가 퍼붓고 오토바이 사고로 화자의 몸이 떠올랐다 다시 가라앉으면서 그는 '끄라비'를 이루는 한 부분으로 존재하다가 마침내 '끄라비'가 된다. 소설은 "그랬다. 나는 끄라비가 되었다."라는 문장으로 마무리된다. 그가 그를 사랑하는 대상이 되는 모습, 즉 경계를 허무는 모습은 육신이 서서히 부패하고 죽어가는 모습과 나란히 놓이게 되면서 기묘한 슬픔과 감동을 자아낸다.

 일반적으로는 소설의 배경이 되는 '장소'를 소설의 중심 인물로 내세운 것은 박형서만이 할 수 있는 시도일 것이다. 현실과 단절되지 않고 현실에 기반하여 가능한 멀리 달아나고 마구 뻗어나가는 그의 상상력은 역시나 이번 소설집에서도 돋보인다. 아직 모든 단편을 읽어보지 않아서 성급한 판단일 수도 있겠지만, 그는 확실히 독서를 즐겁게 해주는 몇 안 되는 작가다. 이상한 슬픔을 선사하는 '농담의 악마'이기도 하고.

(다른 작품들은 좋아하는 과자를 아껴먹는 심정으로 조금씩 읽어볼 생각이다. 또 할 말이 있으면 덧붙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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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리게 배우는 사람]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느리게 배우는 사람 창비세계문학 30
토머스 핀천 지음, 박인찬 옮김 / 창비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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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몇 년 전, 나는 토마스 핀천의 대표적인 장편소설 <제49호 품목의 경매>라는 책을 읽으려다 포기한 적이 있었다. 재미있다는 주변의 평가와 달리, 조금의 난해함과 복잡함을 견뎌낼 수 없었던 나는 그의 책을 책장 한쪽 귀퉁이에 밀어놓고 한동안 그를 잊고 있었다. 그러던 중, 핀천의 초기 단편이 수록된 <느리게 배우는 사람>이 출간되었다는 소식은 나에게 일종의 도전 같은 것을 불러일으켰다.

 한번 포기했던 전력이 있는 작가의 작품이어서 약간의 두려움이 있었지만, 우려했던 것과 달리 나는 그의 단편들을 모두 읽어냈다. 사실 그의 단편들을 읽기 이전에 나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제법 긴 분량을 차지하고 있는 작가의 서문이었다. 이십년 전에 쓴 자신의 작품을 다시 들여다보는 일이 엄청난 충격이었음을 고백하면서, 그래도 그 어린아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줄 수 있는 나이가 된 것처럼 행세하기로 했다는 작가의 말은 솔직함과 진정성이 묻어났다.

 이 소설집에 실린 5편의 단편들 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품은 <로우랜드>이다. 가장 좋아한다는 것은 아마 가장 많이 이해할 수 있었다는 의미일 것이다. 공과대학을 다니다 영문학으로 전과를 한 이력과 항공기 회사인 보잉사에서 근무를 한 경험 탓에 그의 작품 곳곳에는 과학과 인문학이 마구 넘나들고 있는데, 과학을 싫어하는 나로서는 과학적 요소가 많이 가미된 작품일수록 읽기가 힘들었다.

 <로우랜드>에는 플랜지와 씬디 부부가 등장한다. 플랜지는 변호사 사무실에 출근도 하지 않고 청소부인 친구 로코와 하루종일 포도주를 마시면서 보낸다. 씬디는 플랜지가 아마도 동물애호협회 회원일 거라면서 남편의 친구들을 죄다 동물에 비유하며 싫어한다. 마침 그때 피그 보딘(씬디와 결혼하기 전에 총각파티를 열어주겠다면서 몇 잔의 술을 마시게 하고 플랜지를 몇 주 동안 연락두절 상태로 만들었던 친구)이 등장하면서 씬디의 인내심은 폭발하고 만다. 모두 다 나가라는 말을 듣고 친구들과 함께 집을 나온 플랜지는 청소부인 로코의 친구가 있는 쓰레기 폐차장으로 간다.

 폐차장에서 매트리스를 주워서 잠을 자려던 플랜지는 어린 소녀가 부르는 소리에 밖으로 나가 그녀를 따라 어딘지 알 수 없는 곳에 당도하게 된다. 예전에 테러리스트들이 파 놓은 굴들을 통과해 그녀의 방으로 들어가는 모습은 꿈과 현실의 경계에서 묘한 느낌을 자아낸다. 그곳에서 어린 소녀는 점쟁이가 앵글로 남자가 자신이 남편이 될 거라고 했다면서, 아내가 있다고 말하는 프랜지에게 계속해서 자신과 살자고 한다. 바닷속 같고 자궁 속 같은 그 방에서 난감해하는 플랜지의 모습이 우스우면서도, 한 가정의 성실한 남편이 되길 거부하는 욕망이 드러난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외에도 <은밀한 통합>은 인종주의 문제를 다룬 작품이다. 동네 친구들과 흑인 알코올중독자를 도와주려고 하는 에피소드나 흑인이 이사오면 그들을 괴롭히는 부모님들을 보면서 드는 감정들에서 인종주의에 대한 작가의 비판적 인식이 드러나 있었다. intergration이라는 단어에는 흑인과 백인 아이들이 같은 학교를 다닌다는 뜻도 있어서, 제목과 이야기가 잘 연결된 작품이라고 느껴졌다.

 

 

 사실, 이번에도 핀천의 작품을 만족할만한 수준으로 읽어내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 할아버지 작가를 사랑해줘야겠다고 생각한 부분은 약력의 이 부분에서였다. 나는 그가 신비주의를 고수하고 자기 노출을 싫어하는 사람이라고 알고 있었다. 그래서 검색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사진은 그의 청소년기 사진 두 장 정도가 전부이다. 그런 그가 만화 <심슨네 가족들>에 얼굴을 가리고 까메오로 두 번이나 출현했다는 사실은 어딘지 모르게 귀여운 구석이 있다.

 대가이자 위대한 작가라고 칭송받는 토마스 핀천의 풋풋한 청년시절의 사유들을 엿보고 싶은 독자들은 주저하지 말고 이 소설집을 읽어보길 추천한다. 내 생각에 그는 꽤 귀엽고 재미있는 할아버지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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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로운 삶 1,2]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자유로운 삶 1
하 진 지음, 왕은철 옮김 / 시공사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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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만치 않은 분량의 책의 마지막 장을 덮었을 때, 나는 비로소 이 책의 제목인 자유로운 삶의 가장자리에 닿은 듯한 기분이었다.

  이 책은 이민 1세대 격이라고 할 수 있는 주인공 우 부부가 미국이라는 나라에서 뿌리를 내리고 정착하는 과정을 담고 있다. 대학에서 공부할 전공까지 국가에서 정해주었던 시기에 중국인 는 미국으로 유학을 갔다. 이후에 아내 핑핑도 미국으로 건너오지만 중국 정부는 그들 부부가 미국에 정착할 것을 염려해 아들인 타오타오는 중국에 놔두고 가도록 했는데, 소설은 타오타오를 미국으로 데려오는 장면에서 시작된다.

  이후 부부는 아들과 함께 미국에서 생활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한다. 그러나 학생운동에 참가하던 가 반체제 인물로 감시를 당하게 되면서 그들은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임을 직감하게 된다. 그 결과, ‘는 가족들과 함께 미국에서 안정적으로 살기 위해 온갖 일을 하기 시작한다. 학자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그의 삶이 이리저리 요동치면서 한 인간으로 그저 자유로운 삶을 살기 위해 고군분투해나가는 모습이 이 소설의 주된 내용이다. 돈과 명예를 위해 체제에 순응하는 인물이나 예술적이지 않은 작품을 만들어내면서 스스로를 기만하는 인물 등 '우'의 주변 인물들은 그의 삶을 돋보이게 하는 장치일 뿐이다. 그런 주변 인물들은 오직 자신만을 위해 살기로 결심하고 자신의 글을 쓰기 위해 애쓰는 의 삶을 부각시켜준다.

  사실 소설의 내용은 단순하다고 할 수 있고, 작은 에피소드들이 나열되어 있기 때문에 쉽게 읽히지만 나는 이 작품을 읽는 내내 개인과 국가’, ‘자유와 같은 거대 담론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국가가 마음에 들지 않을 때 한 개인이 그의 뿌리가 되는 국가를 버릴 수 있는가에 대한 물음은, 내 경우에 요즘 자주 드는 물음이어서 더욱 흥미로웠다.

  이 소설에서 파시즘이 국가가 개인의 삶을 좌지우지하고, 국가를 다른 모든 것에 선행하는 것으로 만드는 것이라고 말한다. ‘국가개인자유로운 삶을 실현하는 데 방해가 된다면, 과연 그 개인은 그 국가의 일원으로 살기를 거부할 수 있을까.

  불편함과 쏟아지는 비난을 감내하면서도, 주인공 는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을 몸소 찾아나간다. 내가 보기에 그는 미국인이 되고 싶은 것도 아니었고, 중국으로 돌아가고 싶은 것도 아니었다. 그는 단지 자신과 자신의 가족이 지낼 수 있는 보금자리를 마련하고 싶어 했고, 아플 때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의료보험 혜택을 받고 싶어 했을 뿐이다.

  동시에 그는 줄곧 시인이 되길 원했다. 식당에서 서빙을 하면서도, 건물의 경비원을 하면서도, 자신의 식당을 갖게 되어 요리사로 일하면서도 그가 일관되게 원했던 것은 시인이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자신의 집을 소유하고 빚을 갚는 등 어느 정도 안정적인 생활의 조건들이 마련되자, ‘를 쓸 수 없는 또 다른 핑계거리를 찾기 시작한다. 새로 생긴 딸아이의 출산에 온갖 희망을 걸어 보는가하면 영감을 불어넣어줄 첫사랑을 다시 만나러 가기도 한다. 그러나 아이는 유산되고 다시 만난 첫사랑은 예전의 그녀가 아니다.

  어찌 보면 한 인간을 자유롭지 못하게 하는 것은 주변 환경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있지 않을까 하는 물음이 드는 대목이었다. 장애물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해소되었음에도 자신이 진정 원하던 것을 하지 않고 다른 장애물을 애써 찾으려는 모습이 안쓰럽기도 하고 우리의 모습과도 닮아서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러나 결국 는 또 다른 핑계거리를 찾는 일을 멈추고 식당을 처분한 후 모텔에서 일을 하며 를 쓰기 시작한다. ‘가 시인이 되었을지, 그의 시가 사람들로 사랑을 받았을지는 알 수 없다. 소설은 가 그러한 생활을 구축하는 데에서 끝이 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나는 확실히 그가 그동안 그를 얽어맸던 주변 상황들에서 벗어났음을 느낄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어떤 이유에서인지 나는 그가 그 자신으로부터도 벗어나 비로소 자유로운 상태가 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건 아마 그가 더 이상 새로운 핑계를 찾으려 하지 않고 자기가 원하는 일을 그냥 하기로 결심했기 때문이 아닐까. 읽는 이에게도 자유로움을 선사하면서 스스로를 옭아매고 있지 않은지 되돌아보게 하는 결말이 마음에 들었다.

  또한 개인은 사회에 속해서 살아갈 수밖에 없음에도, '우'의 삶을 통해서 사회를 능가하는 한 개인의 가능성을 엿본 것 같아 마음 한 구석이 따뜻해지고 위로가 되는 소설이었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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