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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기 집을 남의 집처럼 기웃거리게 되는 사람,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뭔가를 해내는 사람, 리모컨이 없어서 새벽마다 잠에서 깨는 사람, 실제로 만난 적이 없는 여자에게 들은 말 때문에 망상에 시달리는 사람 등. 이승우의 이번 소설집 <신중한 사람>에는 조금 이상하고 소심한 주인공들이 등장한다.

 대표작인 <신중한 사람>을 포함해서 소설 속 인물들은 모두 신중함 혹은 소심함 때문에 문제를 겪는다. <리모컨이 필요해>의 주인공은 새벽마다 텔레비전에서 울리는 알람 때문에 잠에서 깨지만 여관주인에게 맞서서 큰소리를 내기보다는 엉거주춤 선 채로 우물거리다 돌아서서 억울해한다. <신중한 사람>은 딸과 아내의 자기주장 앞에서 거듭 자신의 욕망을 거두고 그것도 모자라 생전 처음보는사람이 자신의 집에서 살고 있는데도 오히려 그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려고 애를 쓰며 조심조심 지낸다. 이들은 모두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하기보다는 타인의 반응을 예민하게 신경쓴다. 이런 맥락에서 보자면, '신중함'이 오히려 문제의 본질을 흐리고 문제를 악화시키는 요인이 되는 것 같다. 자신이 원하는 것만 해도 문제긴 하겠지만 타인의 반응, 타인의 욕망에만 너무 예민한 것도 좋지 않을 것이다. 현대인들이 겪는 많은 정서적, 정신적 문제들이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는 데에서 생기는 것임을 고려해볼 때, 사회적으로 매우 의미있는 지점이라는 생각이 든다.

 <딥 오리진>도 재미있게 읽은 작품이다. 딥 오리진이라는 카페에서 만난 한 여성이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고 생각하는 남자가 있다. 우연히 그녀와 이야기를 할 기회가 있었던 주인공은 어떤 작가의 작품이 그녀가 대신 써준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그래서 인터넷에 그런 내용을 유포한다. 자신이 들은 말의 기원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그녀가 그곳에 앉아있었던 적이 단 한번도 없었다는 것을 알게 되는 내용이 섬뜩하고 재미있었다. 유명한 작품을 쓴 그 작가를 질투하게 되는 마음과 그런 마음들을 억누르기 위해 망상체계를 공고히 해나가는 모습들은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작가는 이 작품집의 말미에서, 자신의 소설 속 인물들을 사랑하지만 세상의 고뇌를 벗겨내주지 못해 속상하고 미안하다고 말하고 있다. 유난히 생각이 많고 약하고 소심한 인물들. 그러나 작가는 그들을 내버려두고 떠나지 않고 정교하게 다듬은 문장들로 우리들의 자화상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8편의 작품 모두가 고루 다 좋았던 소설집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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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의미의 축제]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무의미의 축제
밀란 쿤데라 지음, 방미경 옮김 / 민음사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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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하찮고 의미 없다는 것은 말입니다, 존재의 본질이예요. 언제 어디에서나 우리와 함께 있어요. 심지어 아무도 그걸 보려 하지 않는 곳에도, 그러니까 공포 속에도, 참혹한 전투 속에도, 최악의 불행 속에도 말이에요. 그렇게 극적인 상황에서 그걸 인정하려면, 그리고 그걸 무의미라는 이름 그대로 부르려면 대체로 용기가 필요하죠. 하지만 단지 그것을 인정하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고, 사랑해야 해요,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해요. 여기, 이 공원에, 우리 앞에, 무의미는 절대적으로 명백하게, 절대적으로 무구하게, 절대적으로 아름답게 존재하고 있어요."(147쪽)

 

  삶에서 맞닥뜨리는 대부분의 고통은 의미를 찾으려는 과정 혹은 의지를 발휘하려는 순간에 발생하는 것 같다. 학창시절 우리는 삶의 목표를 분명히 해야한다고 교육받았고, 자유의지는 인간이 가진 특별한 권리라고 배웠다. 그러나 우리는 의미를 찾기 위해 이 세상에 내던져진 것이 아니다. 이건 삶을 아무렇게나 살아도 된다는 말이 아니라, 무의미하다고 해서 존재의 이유가 없어지지 않는다는 말이다. 또한 우리가 자유의지를 발휘할 수 있는 것은 대부분 쓸데없는 것들에만 관련되어 있다. 성별, 시대, 나라, 부모 심지어 태어날지 말지의 중요한 결정권은 우리에게 없었다. 그러니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하면서 뭐든 할 수 있다는 식으로 몰아간다면 그건 인간을 고통스럽게 할 뿐이다.

  이런 맥락에서, 쿤데라의 <무의미의 축제>는 우리가 무의미한 존재임을 적극적으로 인정해주는 소설이다. 그는 이번 소설에서 독자 스스로가 무의미한 존재임을 인정하고 무의미를 사랑할 수 있도록 돕는다. 그의 대표작,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생각하면서 이 작품을 읽는 독자들은 좀 실망할지도 모르겠다. 확실히 이 소설은 그의 전작들만큼 치밀하고 철저한 계산 하에 쓰였다는 느낌은 없다. 그래서 한번 잡으면 멈출 수 없었던 그의 전작만큼 재미있지는 않다. 장면들이 나열된 소설이라서 탄탄한 스토리나 긴장감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개인적으로 이 소설은 작가가 힘을 아주 빼고 썼을 거라고 짐작하는데, 그건 작가가 무의미를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인 것 같기도 하다. 의도적으로 좀 더 느슨하고 여백이 많게 쓴 소설이랄까. 그래서인지 두세번 반복해서 읽을 수록 더 좋았던 소설이었다. 하나의 등장인물이 뭔가를 하는 동안 다른 인물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면서 나중엔 그 모든 인물들을 한데 생각해보게 하는 서술방식이나 화자의 방에 붙어있는 사진 속 어머니와 대화하는 기법도 재미가 있었다.

  사과쟁이(잘못하지 않은 일에서도 늘 미안하다고 먼저 말하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나 알랭이 자신의 예술적인 재능을 무시하고 돈을 버는 일을 선택함으로써 가끔씩 자주 마실 수 있게 된 비싼 술을 여왕처럼 모셔놓는 장면 등 좋았던 장면이 많았지만 내가 특히 좋아하는 장면은 한 여자가 차에서 나오는 장면이다.

  원치 않은 아이를 임신한 그녀는 차에서 나와 문을 잠그지도 않고 대충 닫고는 밖으로 나와 다리 한 가운데에서 몸을 던진다. 한참 뒤, 수영에 능숙한 탓에 죽고자 하는 의지를 거슬러 자꾸만 자동적으로 반응하는 몸이 있고 "그만하세요"라는 누군가의 외침이 들린다. 결국 그녀는 자신을 구하러 온 누군가 위에 누워 그를 살해한다. 그러나 자신의 죽음을 방해하던 남자가 없어졌는데도 그녀는 죽지 못하고 차로 돌아온다. 죽으러 갔다가 누군가를 죽이고 다시 삶을 찾아 돌아온 여자. 죽고자 하는 것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삶에 대해 이야기하는 듯하면서도 삶을 향한 인간의 의지를 보여주는 장면 같아서 서글프고 슬펐다.

  이 장면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 우리는 어떤 의미를 계획하며 만들어진 존재가 아니다. 최초의 인간인 아담과 하와 역시 신의 좋은 기분 때문에 만들어졌을 뿐이니까. 그러니 의미를 찾아내야 한다고 스스로를 괴롭힐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누구도 제 의지로 이곳에 와 있지는 않다. 우리는 무의미하게 내던져진 무의미한 존재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무의미한 모든 것들을 사랑하면서 삶을 축제처럼 살아가는 것, 그것이 의미를 찾으려는 몸부림보다 우선시되어야 하지 않을까.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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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드 모파상]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기 드 모파상 - 비곗덩어리 외 62편 현대문학 세계문학 단편선 9
기 드 모파상 지음, 최정수 옮김 / 현대문학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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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름의 한가운데에서 뜻밖의 선물을 만난 기분이다. 사탕꾸러미 같은 소설집을 받아들고 사탕을 까먹듯 하나씩 읽어보았다. 체호프의 단편 같기도 하지만 그것보다는 조금 더 유머러스하고 경쾌하다. 이 책에 실린 63편의 작품들은 '단편소설의 거장'으로서의 모파상의 입지를 확인할 수 있게 한다. 그의 대표적인 단편인 <목걸이> 외에도 수십 편의 단편에서 그의 독특한 사고를 엿볼 수 있다.

 모파상은 전쟁의 참상,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 남녀간의 사랑 등을 주제로 다양한 단편소설을 썼다. 개인적으로는 <비곗덩어리> 같은 전쟁이야기보다는 <시몽의 아빠>, <폴의 연인>, <미망인>, <나막신>, <의자 고치는 여자>, <어느 농장 아가씨 이야기>, <달빛> 등 남녀간의 사랑을 다룬 이야기들이 좋았다.

 가장 기억에 남는 단편들을 소개해보면, <어느 농장 아가씨 이야기>이다. 이 소설의 여주인공은 농장에서 일을 하는데, 같이 일하던 남자와 연애를 하다가 아기를 갖게 된다. 애인과는 헤어졌으나 아이를 숨겨놓은 채 지내던 그녀는 농장 주인과 결혼을 하게 된다. 그러나 둘 사이에 아이가 생기지 않자 농장주인은 여주인공을 함부로 대하고 때리기까지 한다. 참다 못해 그녀가 자신에게 아이가 하나 있음을 고백하자, 농장 주인은 기뻐하면서 소설이 끝난다. 나는 이 짧은 단편을 읽고 우습기도 하고 슬프기도 했다.  자신의 아내가 전에 만나던 사람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가 있다고 하면 화를 내거나 질투를 해야 마땅할 텐데 기뻐하다니. 농장주는 한 여자로 그녀를 사랑하기보다는 자신의 대를 이어줄 아이를 낳아줄 수단으로 취한 것이 틀림없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는 아이가 있다는 말에 그렇게 기뻐하지 않겠지. 아마 모파상은 그 당시, 사랑이 없이 결혼하던 사람들을 풍자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또 하나 기억나는 단편은 <미망인>이다. 이 단편은 열 세살짜리 남자 아이의 미망인으로 남길 결심한 노처녀의 이야기이다. 그녀는 사랑에 목숨을 건 집안의 남자 중 한명을 알고 지냈다고 하면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어린 아이였던 그가 그녀를 좋아한다고 하자 장난스럽게 아이의 마음을 가지고 놀기도 했던 그녀는 결국 그 어린 남자 아이의 자살 소식을 듣는다. 그런 후에, 그녀는 결혼하기로 결심했던 남자와의 결혼을 포기하고 열 세살짜리 남자 아이의 미망인이 되기로 결심한다. 이 이야기를 다 들은 사람 중 한 사람의 말처럼 "사람이 그 정도로 감상적인 건 불행한 일"일 테지만, 어린 아이의 사랑을 진지함 없이 받아들였던 그녀 역시 어떤 책임을 져야할 것 같다. 그래서 그녀는 열 세살짜리의 미망인이 된 것일 테고.

 이렇게 조금은 황당하고 이상한 사랑이야기를 통해 '사랑'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었던 것 같다. 사탕을 까먹듯 가볍게 읽을 수 있는 단편들이었고 그 단맛은 오래도록 혀끝에 맴돌면서 생각할 거리들을 주었다. 단편소설의 거장답게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방식으로 삶을 바라보고 이야기를 써나간 것이 돋보였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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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인간]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투명인간
성석제 지음 / 창비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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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 중 대부분은 "내가 보여요?" 라고 말하고 싶었던 순간들이 있을 것이다. 내가 뚜렷한 인간의 형상으로 보인다면, 저들이 이렇게 나를 대하지 않을 거라고 확신하게 되는 순간들은 하루에도 몇번씩 발생한다. 돈 때문에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을 당하는 상황이 아니더라도, 자신의 편의를 위해 지하철에서 마구 밀치고 들어오는 사람들을 보면 "내가 보여요?"라는 물음을 던지고 싶은 요즘이다.

  사회적 양극화는 이미 심화될 대로 심화됐고 "개천에서 용 난다"는 말은 더 이상 실현 불가능한 시대가 됐다. 부의 세습 뿐 아니라 가난 역시 철저히 되물림 되는 사회에서 우리는 점점 투명해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성석제의 <투명인간>은 '김만수'라는 인물을 통해 투명인간의 유전자가 어떻게 세습되는지를 보여준다. 그리고 그가 하는 이야기를 따라 읽다 보면 "내가 보여요?"라고 묻고 있는 사람들이 보일 것이다. 물론 "내가 보여요?"라고 묻는 자신을 발견할 수도 있다.

 이 소설은 '김만수'에 대한 이야기이지만 '김만수'가 이야기하는 '김만수'는 없다. 이러한 서술방식에서도 엿볼 수 있듯, 그는 그 자신이 중심이 되어 삶을 살아가지 못했다. 소설은 그의 할머니, 어머니, 아버지, 형, 동생들, 친구, 아내, 그의 아들, 지인 등이 그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에 독자들은 소설을 읽으면서 '김만수'라는 인물에게 조금씩 접근하게 된다.

  육남매 중 둘째로 태어난 "대가리만 절구통겉이 크고 팔다리는 쇠꼬챙이겉이 빌빌 돌아가는" 이 아이는 학창 시절 때부터 바보 같다고 놀림을 받고 자기가 하지도 않은 일을 했다고 해서 벌을 받는다. 그런 그가 집안의 기대를 받던 형 백수가 월남전에서 사망하자 집안의 장남으로, 누나들과 동생들을 책임지게 된다. 연탄가스 때문에 둘째 누나가 장애를 겪게 되고 남동생 석수는 아이를 낳아 놓고 행방불명이 되는 등 그의 인생은 꼬일 대로 꼬여만 간다. 그러던 중 직장이었던 자동차 공장이 인수되자 '김만수'는 공장을 다시 살릴 수 있다는 사장의 말에 속아 공장을 지키려고 하다가 소송에서 패하는 바람에 엄청난 빚을 지게 된다. 평생 일해도 갚을 수 없는 억대의 빚을 진 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루에 두 세시간씩만 자면서 돈을 벌어 그 빚을 갚아나간다. 자신의 명줄이 점점 조여오는데도 그를 옭아맨 족쇄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처럼 성실하기만 한 '김만수'의 모습을 보다 보면 정말 화가 난다. 게다가 뒤늦게 결혼한 아내는 신장 투석을 받아야 할 만큼 아프고, 동생의 아이를 아들로 받아들였는데 아이는 자폐증이 심하다. 누군가가 그의 삶을 이리 비틀고 저리 비틀면서 웃고 있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베베 꼬여버린 그의 인생을 보면서, 새삼 인간에 대한 연민이 생겨나기도 했다. 

 결국 한강 다리에서 '김만수'는 투명인간이 되는데, 그의 아들 역시 그보다 먼저 투명인간이 되었다는 점에서 투명인간의 유전적 속성이 드러난다. 투명인간이 된다는 것, 그것은 죽음을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나는 이 바보같이 성실한 인간이 투명인간이 되어 아직도 빚을 갚아나가고 가족들을 도와주고 있을 것만 같은 생각이 든다. 그리고 점점 투명해지는 주변 사람들을 향해 손을 뻗어주고 싶은 마음도 든다. 따뜻하면서도 날카로운 시선이 돋보이는 소설이었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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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와 하녀 -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마이너리티의 철학
고병권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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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언젠가 '새로운 천국'을 세워본 적이 있는 사람은 누구나 그것을 세우기 위한 힘을 그 자신의 지옥 속에서 발견했다. (니체)

 

 철학자와 하녀라니! 제목을 보고 읽어볼 것을 결심했고, 저자를 보고 곧바로 실천했다. 이 책은 '수유너머'로 유명한 고병권 선생님이 쓴 마이너리티를 위한 철학책이다. 책은 안양 교도소에서 철학을 강의하던 첫날, 한 재소자가 던진 질문에서 시작한다. "왜 우리가 지금 여기서 철학을 공부해야 합니까?" 그의 질문은 먹고 살기에만 급급하고 이미 사회의 주변부로 밀려난 사람들에게 과연 철학이 무엇을 해줄 수 있는지 생각해보게 한다. 저자는 이런 에피소드를 소개한 뒤 "철학은 지옥에서 하는 것이다"라는 말로 첫 장을 연다.

 그렇다면 철학이란 학자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 우리를 위해 존재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는 믿음으로 그의 글을 하나씩 따라 읽어갔다. "철학은 지옥에서 도망치지 않고 또 거기서 낙담하지 않고, 지옥을 생존조건으로 삼아 거기서도 좋은 삶을 꾸리려는 자의 것"이라는 저자의 말은 위로가 되었다. 그리고 지옥에서 함께 있어줄 철학자가 존재한다는 것이 축복이라는 생각을 했다.

 이 책에는 근대 사회를 목표로 삼게 됨으로써 근대 이전의 모든 사회를 '근대사회의 미숙아'로 바라보는 관점이나 저항을 위대하게 여기는 가치 등 색다른 시각의 이야기가 많다. 그 중 가장 흥미로웠던 내용은 마이클 샌델의 '정의론'에 대한 저자의 시각이다. 서점가를 한바탕 뒤흔들었던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란 책에 나오는 '정의'의 개념이 실은 무서운 것일 수도 있음을 지적하는 저자의 논리를 따라가다보면, 철학이란 이렇게 다르게 보는 힘을 의미하는 거라는 확신이 선다. 자유론에 기반한 공동체주의자의 대표주자인 샌델의 '정의' 개념은 내 가족, 내 동포에 한정되는 경향이 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시민'은 '양성'해야 하는 것이며 국가가 시민의 삶에 더 관여해야 한다는 것인데 이러한 주장에서 싹튼 '정의'의 개념은 자칫 위험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저자는 말한다. "네 이웃을 사랑하지 마라" 정의는 국경 안에 없으며, 그것은 국경 바깥, 야만인들에게서 온다. 끝없이 발생하는 국가 간 분쟁 또는 국가 내에서의 분쟁 속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정의의 개념은 어쩌면 이런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또한 그는 책의 말미에 좋은 말은 좋은 말일 뿐, 씹어서 소화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덧붙이고 있다. 그의 글을 통해 다르게 보는 힘을 얻었다면 그것을 어떻게 실행할 것인지는 온전히 독자의 몫으로 남아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을 무용하다고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하녀인 우리들에게, 지옥 같다고 느껴지는 지금 이 순간에 '철학'이 필요함을 알려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을 통해, 그 누구보다 지금 우리에게 철학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많은 '하녀'들이 알았으면 좋겠다. '지옥'에서 연대하고 '새로운 천국'을 세워나갈 힘을 함께 발견하기 위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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