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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리게 배우는 사람 ㅣ 창비세계문학 30
토머스 핀천 지음, 박인찬 옮김 / 창비 / 2014년 4월
평점 :
몇 년 전, 나는 토마스 핀천의 대표적인 장편소설 <제49호 품목의 경매>라는 책을 읽으려다 포기한 적이 있었다. 재미있다는 주변의 평가와 달리, 조금의 난해함과 복잡함을 견뎌낼 수 없었던 나는 그의 책을 책장 한쪽 귀퉁이에 밀어놓고 한동안 그를 잊고 있었다. 그러던 중, 핀천의 초기 단편이 수록된 <느리게 배우는 사람>이 출간되었다는 소식은 나에게 일종의 도전 같은 것을 불러일으켰다.
한번 포기했던 전력이 있는 작가의 작품이어서 약간의 두려움이 있었지만, 우려했던 것과 달리 나는 그의 단편들을 모두 읽어냈다. 사실 그의 단편들을 읽기 이전에 나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제법 긴 분량을 차지하고 있는 작가의 서문이었다. 이십년 전에 쓴 자신의 작품을 다시 들여다보는 일이 엄청난 충격이었음을 고백하면서, 그래도 그 어린아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줄 수 있는 나이가 된 것처럼 행세하기로 했다는 작가의 말은 솔직함과 진정성이 묻어났다.
이 소설집에 실린 5편의 단편들 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품은 <로우랜드>이다. 가장 좋아한다는 것은 아마 가장 많이 이해할 수 있었다는 의미일 것이다. 공과대학을 다니다 영문학으로 전과를 한 이력과 항공기 회사인 보잉사에서 근무를 한 경험 탓에 그의 작품 곳곳에는 과학과 인문학이 마구 넘나들고 있는데, 과학을 싫어하는 나로서는 과학적 요소가 많이 가미된 작품일수록 읽기가 힘들었다.
<로우랜드>에는 플랜지와 씬디 부부가 등장한다. 플랜지는 변호사 사무실에 출근도 하지 않고 청소부인 친구 로코와 하루종일 포도주를 마시면서 보낸다. 씬디는 플랜지가 아마도 동물애호협회 회원일 거라면서 남편의 친구들을 죄다 동물에 비유하며 싫어한다. 마침 그때 피그 보딘(씬디와 결혼하기 전에 총각파티를 열어주겠다면서 몇 잔의 술을 마시게 하고 플랜지를 몇 주 동안 연락두절 상태로 만들었던 친구)이 등장하면서 씬디의 인내심은 폭발하고 만다. 모두 다 나가라는 말을 듣고 친구들과 함께 집을 나온 플랜지는 청소부인 로코의 친구가 있는 쓰레기 폐차장으로 간다.
폐차장에서 매트리스를 주워서 잠을 자려던 플랜지는 어린 소녀가 부르는 소리에 밖으로 나가 그녀를 따라 어딘지 알 수 없는 곳에 당도하게 된다. 예전에 테러리스트들이 파 놓은 굴들을 통과해 그녀의 방으로 들어가는 모습은 꿈과 현실의 경계에서 묘한 느낌을 자아낸다. 그곳에서 어린 소녀는 점쟁이가 앵글로 남자가 자신이 남편이 될 거라고 했다면서, 아내가 있다고 말하는 프랜지에게 계속해서 자신과 살자고 한다. 바닷속 같고 자궁 속 같은 그 방에서 난감해하는 플랜지의 모습이 우스우면서도, 한 가정의 성실한 남편이 되길 거부하는 욕망이 드러난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외에도 <은밀한 통합>은 인종주의 문제를 다룬 작품이다. 동네 친구들과 흑인 알코올중독자를 도와주려고 하는 에피소드나 흑인이 이사오면 그들을 괴롭히는 부모님들을 보면서 드는 감정들에서 인종주의에 대한 작가의 비판적 인식이 드러나 있었다. intergration이라는 단어에는 흑인과 백인 아이들이 같은 학교를 다닌다는 뜻도 있어서, 제목과 이야기가 잘 연결된 작품이라고 느껴졌다.

사실, 이번에도 핀천의 작품을 만족할만한 수준으로 읽어내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 할아버지 작가를 사랑해줘야겠다고 생각한 부분은 약력의 이 부분에서였다. 나는 그가 신비주의를 고수하고 자기 노출을 싫어하는 사람이라고 알고 있었다. 그래서 검색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사진은 그의 청소년기 사진 두 장 정도가 전부이다. 그런 그가 만화 <심슨네 가족들>에 얼굴을 가리고 까메오로 두 번이나 출현했다는 사실은 어딘지 모르게 귀여운 구석이 있다.
대가이자 위대한 작가라고 칭송받는 토마스 핀천의 풋풋한 청년시절의 사유들을 엿보고 싶은 독자들은 주저하지 말고 이 소설집을 읽어보길 추천한다. 내 생각에 그는 꽤 귀엽고 재미있는 할아버지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