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여자들의 은밀한 삶
디샤 필리야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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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흑인 여성들에게 '교회'란 어떤 의미일까?

대서양 건너 아프리카에서 끌려와 갖은 중노동과 학대, 차별을 겪은 그들에게 교회는 탈출구이자 안식처로 기능했을 것이다. 그들이 건설한 교회는 집단으로 모여 신께 구원을 갈구하는 곳이자, 흑인 특유의 리듬과 바이브로 목청껏 함께 노래 부르며 광란에 가까운 영적 체험을 겪는 공간이었으리라.




미국 플로리다 잭슨빌 태생의 흑인 여성 '디샤 필리야'는 어릴 적부터 삶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 교회라는 공간과 그 안에서 다채로운 인물들이 부딪는 대소사들을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할머니, 어머니, 형제자매들, 친구들과 지인들을 지면으로 불러내 그들의 적나라한 욕망과 속내를 드러낸다. 타인뿐만 아니라 자신의 숨기고 싶은 치부까지 대담하게 까발리며 첫 소설집을 대중들과 출판계 인사들에게 깊이 각인시켰다.

디샤 필리야의 <교회 여자들의 은밀한 삶>. 표지에 그려진 목조 교회당의 솟을 지붕이 회빛 하늘을 비죽 찌를 듯하다. 교회 안에서 성령 충만하고 정숙해 보이는 신도들이지만, 일상에서 비치는 그들은 여느 인간들처럼 속된 욕망에 충실하고 현실 밑바닥에서 각자 몸부림치며 삶을 살아내고 있다. 2000년 밀레니엄 전야를 맞이하여 동성인 소꿉친구들이 서로의 육체를 탐하고 밀회를 즐기는 첫 단편은 종교적 믿음과 성적 욕구가 충돌하는 혼란스러운 순간을 그린다. 관계를 맺기 전 기도를 올리며 신께 자비와 용서를 구하는 '율라'의 모습. 이후 제단에 69자세로 바친 제물들처럼.. 뒤엉켜 서로를 혀로 탐하는 장면이 도전적이면서 에로틱하다.




총 9편의 단편들 중, <복숭아 코블러>에 눈길이 머무르고 손이 간다. 올리비아는 매력적인 외모의 어머니와 단둘이 빈민가에 살고 있다. 어머니는 매주 월요일이면 찾아오는 '하느님', 유부남 목사를 위해 '복숭아 코블러'를 정성껏 준비한다. 스위트한 디저트를 매개로 삼아 펼쳐지는 은밀한 불륜과 종교적 타락의 현장이 노골적이면서 생생하다. 올리비아와 함께 흐느적대는 외창 커튼 사이로 다가가 그들의 정사를 엿보는 듯하다. 실로 잔인하게 어머니는 상간남에게는 디저트를 맛보게 하지만, 딸 올리비아에게는 조각 하나 주지 않으려 한다. 어려서부터 달콤함을 경험하면 갈증을 달래려 할 테고, 자라서는 누군가 흘린 그 부스러기나 탐하리라는 명분을 들먹이면서 말이다. 어머니 그 자신을 닮지 말라는 말도 덧붙인다. 올리비아는 어머니의 말에 굴하지 않고 쓰레기통에 버려진, 뭉개진 코블러를 한 주먹 움켜쥐어 맛을 본다. 이브가 경고를 뿌리치고 금지된 악과를 따먹는 것처럼, 바닥까지 내려가 터부시되는 금기를 깨부순 그녀는 천상의 맛에 취한다. 허나 올리비아는 달큼한 복숭아를 탐했지만, 그것에 도취되어 복숭아 자체에 중독되고 싶지는 않았다. 아이러니하게도 아니 불운하게도 목사의 집에 과외 선생으로 초빙되어 그 집 아들과 관계를 맺지만, 그녀는 달콤하고 끈적한 코블러의 늪에 빠져 허우적대지는 않았다. 속된 욕망에 빠져 허우적대고 집착하는 어머니와 달리, 그녀는 아름다움과 달콤함의 본질을 추구하고 곁의 이들과 나누며 살겠다고 항변한다. 부조리하고 타락한 이들이 그녀를 향해 손가락질하고 따귀를 날리고, 갖은 핍박을 가해도 그녀는 끝내 다른 삶을 살아낼 것이다. 다른 이들이 남긴 부스러기를 탐하는 삶을 살지 않기 위해, 어머니를 닮지 않으려 그녀는 분전하고 노력하리라.





디샤 필리야, 배경이 변변치 않은 흑인 여성이기에 누군가는 그녀를 미국 문단의 '신데렐라'라고 일컫기도 한다. 혜성처럼 등장한 천재 작가.. 소설 장르만큼은 이 말이 통용되지 않는다. 작가 자신의 내밀한 삶이 투영되는 장르이기에 빈약하고 일천한 내적 경험과 사상으로는 이토록 파격적이면서 독자의 심정에 깊이 다가서는 소설을 써낼 수 없다는 얘기다.

그녀의 첫 작품은 교회 의자에 나란히 앉아, 십자상을 바라보는 흑인 여자들의 은밀한 삶과 치부를 가감 없이 드러냈다. 책 서두에서 인용한 앤설 엘킨스_<이브의 자서전>의 문장대로.. 은총을 잃고 타락하는 것이 아닌, 자유를 향해 두 날개를 펼친 천사처럼.. 저 하늘 멀리 도약하는 레전드 작가의 데뷔작으로 남길 바란다.




#디샤필리야 #교회여자들의은밀한삶 #데뷔작 #문학동네 #신작리뷰 #신작추천 #서평단 #흑인여성 #소설집 #복숭아코블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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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랑콜리아 I-II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31
욘 포세 지음, 손화수 옮김 / 민음사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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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웨이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욘 포세'. 그의 대표작 <멜랑콜리아 I-II>를 손에 쥐었다.

2023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작가이기에 그의 작품을 접하려는 이들이 많은 듯하다.

각지의 도서관에 소장된 그의 책들마다 장기 대출에 예약이 한가득 밀려 있으니..


발 빠르게 그의 책을 펼쳐 보았다. 그의 문장은 스타카토처럼 짧게 끊어지는, 간결함과 단순함 그 자체이다. 현란한 수식어와 미사여구는 존재하지 않기에 초반 몇 페이지는 읽기 어렵지 않다. 소리 내어 읽으면 중첩되거나 반복되는 단어와 문장 때문에 시적 운율이 느껴진다. 허나 책 전체를 깊이 파고들면 그 느낌이 달라진다. 동일한 의미의 문장들이 난데없이 뒤섞여 반복되는가 하면, 현재와 과거의 사건들이 무차별적으로 난입하는 장면들이 연이어 등장한다.


이를 통해 작가는 정신 착란/분열, 자아도취, 과대망상, 환각/환청에 휩싸인 조울증 화가의 머릿속과 심리를 속속들이 투시한다. 쉴 새 없이 스치는 망상과 사념들이 쇼츠 영상처럼 페이지와 행간을 가득 메우고, 현실과 상상 사이 천 자락으로 휘날리는 빛과 어둠이 예술가 '라스 헤르테르비그'의 뇌리를 지배하는 가운데 결국, 그는 미칠 수밖에 없었다. 반쯤 미친 예술가의 혼란한 머릿속을 투영한 문장들을 통해, 독자들 또한 그의 멜랑꼴리한 정신 상태를 간접 체험하는, 진귀한 독서 경험을 맛볼 수 있다. 욘 포세의 의도적으로 중복 배열한 단어/문장과 살짝 비틀어 변주하는 장면 묘사에 빠지다 보면, 우리 또한 광기와 허상에 빠진 예술가의 심리 상태를 일부나마 겪어볼 수 있다는 의미다.   


멜랑콜리아 I-II를 연결하는 다리 역할을 하는, 두 종교관 사이에서 고민하고 갈등하는 작가 비드메의 에피소드를 통과하면, 앞서 등장한 라스의 누이 '올리네'가 전면에 등장한다. 정신 병원에 갇힌 라스는 비극적인 죽음을 맞은 지 오래다. 그녀 역시 멜랑꼴리한 감정에 취해 허덕이는 캐릭터의 전형이다. 끼니를 해결할 생선을 들고 낡은 요강이 놓인 작은 집으로 거듭 향하는 그녀는 노년에 닥친 치매와 각종 신체적 노화에 시달리고 있다. 힘겨운 현실의 단기 기억이 상실되는 가운데 수시로 틈입하는 과거의 단편적 기억들은 그녀를 불안과 혼란으로 이끌기에 충분하다. 가까운 거리조차 거동하기 어렵고 대소변을 가리기 힘든 그녀의 뇌중 역시.. 맥락 없는 복잡다단한 상념들이 가득하다. 뒤돌아 서면 이름마저 헷갈리는 이웃들과 대화하며 꼬박 하루를 겨우 지탱하던 중.. 투병하던 남동생 '쉬버트'가 허무한 죽음을 맞이하자, 그녀는 자신의 작은집 변기에 앉아 어둑한 생선 눈알을 바라보며 눈부신 빛을 마주하게 되는데..



어느 페이지를 펼쳐도 욘 포세의 문장들은 군더더기 없이 단순하고 시적이다. 허나 작품 전체를 통틀어 바라보면 혼란스럽고 '멜랑꼴리'한 감정을 이보다 예리하게, 고통스럽게 표현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세밀히 파고들었다.  <멜랑콜리아 I-II>, 제목 그대로 온갖 멜랑꼴리한 감정들의 총체를 시적 언어와 문장으로 직조한 작품이라 평하고 싶다. 올해 노벨문학상 수상이라는 수식어를 차치하더라도.. 노르웨이 문학의 정수를 접하고픈 이들이라면 꼭 읽어 보라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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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미국 인문 기행 ㅣ 나의 인문 기행
서경식 지음, 최재혁 옮김 / 반비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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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식 교수. 그는 평생을 디아스포라, 즉 이방인과 소수자의 영토에서 살았다. 어느 국적이나 집단에 명확히 소속되지 않은 채, 내부도 외부도 아닌 경계선을 방랑하며 한국과 세계정세를 주시했다. 1951년 재일조선인 2세로 태어나 전쟁으로 황폐화된 한국의 재건 과정을 낱낱이 지켜본 그는 군홧발에 짓밟힌 모국이 자신의 등에 칼을 꽂을지는 꿈에도 몰랐으리라. 70년대 군부에 의해 조작된 유학생 간첩단 사건으로 두 친형이 구속되자, 그는 전 세계에 부당함을 호소하고 형들을 석방시키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다. 한국의 군사독재 정권을 견제하고 가족들의 무고를 증명할 만한 세계 각지의 인권/시민/종교 단체, 민주화 인사 등과 소통하며 유랑하던 중, 그는 자유 민주주의 체제의 최전방이자 다양한 인종/문화가 뒤섞인 용광로와 같은 미국에 발을 들이는데.. 


세월이 흘러 그는 코로나가 맹위를 떨치던 판데믹 시기에 <나의 미국 인문 기행>을 집필하면서 친형들의 구명 활동을 펼치던 1980년대를 회상한다. 낯선 이국의 땅에 도착한 그는 서투른 영어 실력을 자각하는, 고립되고 소외된 이방인에 불과했다. 그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몇몇 인권 단체들과 구호 운동 관계자들이 없었다면, 지금의 서경식 교수와 수많은 저서는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구명 운동을 펼치는 틈틈이 그는 가까운 미술관에 들러 거장들의 예술작품을 감상하며 위안을 받고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용기를 얻었다. 그는 개인적으로 암울했던 시기를 견디게 했던 '선한 아메리카'의 기운에 대해 말한다. 부당하게 차별 당하고 소외된 자들을 포용하고, 그들의 숨은 이야기를 경청하던 당시의 자유분방한 아메리카를 떠올린다. 겉으로 보기에 미국은 변화무쌍한 혼돈의 소용돌이 중심에 있는 듯하지만, 그 복잡성과 다양성이 '아메리카'라는 거인을 일으켜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동력을 제공했다고 말한다. 



허나 현재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의 동향은 어떠한가? 소수자와 이민자들을 공개적으로 배척하고, 판데믹 시절 수많은 이들을 고통으로 내몰았던 '트럼프'는 백악관에 다시 입성하기 위해 행보가 분주하다. 러시아는 침공한 우크라이나에서 철군할 기미가 보이지 않고, 이스라엘과 반 유대국 간의 국지전과 마찰은 격화되는 상황이다. 서경식 교수는 진정한 자유 민주주의로부터 멀어져 오히려 퇴보하고 있는 작금의 상황에 대해 우려하고 걱정한다. 나치의 홀로코스트와 필리핀과 캄보디아, 미얀마의 학살 등 잔악한 적대 행위가 반복되고 재현되는 최근 세계정세에 대해 진부하게 느끼는 우리의 둔감한 감정에 대해 경고한다. 일찍이 그는 자신을 '어두운 탄광 속에 갇혀 질식해 가는 카나리아'라 표현하며, 평생을 소수자의 처지에서 방랑한 디아스포라의 예민한 감수성을 드러낸 바 있다. 



그가 존경했던 세기의 현자 '에드워드 사이드'는 팔레스타인과 유대 민족의 가시 돋친 경계를 허물고, 세계 평화를 이루기 위해 노력했지만 2003년 9월 세상을 떠났다. 인간 그 자체에 절망하지 않으려 한 줄기 희망을 놓지 않은 서경식 교수는 지난 2023년 12월 고인이 되었다. 우리는 성큼 다가온 전 세계적 비극과 절망에 대해 경고해 줄 날카롭고 명민한 카나리아들을 하나둘씩 잃어가고 있다. 우리는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 과연 지금 걸어가는 이 길이 앞으로 나아가는, 진정한 유토피아로 인도하는 과정이라고 장담할 수 있을까. 우리는 갈수록 짙어지는 어둠과 안갯속을 헤매면서, 아우성치고 서로에게 주먹과 칼을 휘두르고 있다. 




#나의미국인문기행 #디아스포라기행 #이방인 #방랑자 #신작추천 #반비출판사 #서경식교수 #에드워드사이드 #유작 #삼가고인의명복을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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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식 교수. 그는 평생을 디아스포라, 즉 이방인과 소수자의 영토에서 살았다. 어느 국적이나 집단에 명확히 소속되지 않은 채, 내부도 외부도 아닌 경계선을 방랑하며 한국과 세계정세를 주시했다. 1951년 재일조선인 2세로 태어나 전쟁으로 황폐화된 한국의 재건 과정을 낱낱이 지켜본 그는 군홧발에 짓밟힌 모국이 자신의 등에 칼을 꽂을지는 꿈에도 몰랐으리라. 70년대 군부에 의해 조작된 유학생 간첩단 사건으로 두 친형이 구속되자, 그는 전 세계에 부당함을 호소하고 형들을 석방시키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다. 한국의 군사독재 정권을 견제하고 가족들의 무고를 증명할 만한 세계 각지의 인권/시민/종교 단체, 민주화 인사 등과 소통하며 유랑하던 중, 그는 자유 민주주의 체제의 최전방이자 다양한 인종/문화가 뒤섞인 용광로와 같은 미국에 발을 들이는데..




세월이 흘러 그는 코로나가 맹위를 떨치던 판데믹 시기에 <나의 미국 인문 기행>을 집필하면서 친형들의 구명 활동을 펼치던 1980년대를 회상한다. 낯선 이국의 땅에 도착한 그는 서투른 영어 실력을 자각하는, 고립되고 소외된 이방인에 불과했다. 그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몇몇 인권 단체들과 구호 운동 관계자들이 없었다면, 지금의 서경식 교수와 수많은 저서는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구명 운동을 펼치는 틈틈이 그는 가까운 미술관에 들러 거장들의 예술작품을 감상하며 위안을 받고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용기를 얻었다. 그는 개인적으로 암울했던 시기를 견디게 했던 '선한 아메리카'의 기운에 대해 말한다. 부당하게 차별 당하고 소외된 자들을 포용하고, 그들의 숨은 이야기를 경청하던 당시의 자유분방한 아메리카를 떠올린다. 겉으로 보기에 미국은 변화무쌍한 혼돈의 소용돌이 중심에 있는 듯하지만, 그 복잡성과 다양성이 '아메리카'라는 거인을 일으켜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동력을 제공했다고 말한다.




허나 현재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의 동향은 어떠한가? 소수자와 이민자들을 공개적으로 배척하고, 판데믹 시절 수많은 이들을 고통으로 내몰았던 '트럼프'는 백악관에 다시 입성하기 위해 행보가 분주하다. 러시아는 침공한 우크라이나에서 철군할 기미가 보이지 않고, 이스라엘과 반 유대국 간의 국지전과 마찰은 격화되는 상황이다. 서경식 교수는 진정한 자유 민주주의로부터 멀어져 오히려 퇴보하고 있는 작금의 상황에 대해 우려하고 걱정한다. 나치의 홀로코스트와 필리핀과 캄보디아, 미얀마의 학살 등 잔악한 적대 행위가 반복되고 재현되는 최근 세계정세에 대해 진부하게 느끼는 우리의 둔감한 감정에 대해 경고한다. 일찍이 그는 자신을 '어두운 탄광 속에 갇혀 질식해 가는 카나리아'라 표현하며, 평생을 소수자의 처지에서 방랑한 디아스포라의 예민한 감수성을 드러낸 바 있다.



그가 존경했던 세기의 현자 '에드워드 사이드'는 팔레스타인과 유대 민족의 가시 돋친 경계를 허물고, 세계 평화를 이루기 위해 노력했지만 2003년 9월 세상을 떠났다. 인간 그 자체에 절망하지 않으려 한 줄기 희망을 놓지 않은 서경식 교수는 지난 2023년 12월 고인이 되었다. 우리는 성큼 다가온 전 세계적 비극과 절망에 대해 경고해 줄 날카롭고 명민한 카나리아들을 하나둘씩 잃어가고 있다. 우리는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 과연 지금 걸어가는 이 길이 앞으로 나아가는, 진정한 유토피아로 인도하는 과정이라고 장담할 수 있을까. 우리는 갈수록 짙어지는 어둠과 안갯속을 헤매면서, 아우성치고 서로에게 주먹과 칼을 휘두르고 있다.





나의 미국 인문 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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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트료시카의 밤
아쓰카와 다쓰미 지음, 이재원 옮김 / 리드비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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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쓰가와 다쓰미의 두 번째 미스터리 단편집이 출간되었다. 제목은 <마트료시카의 밤>.

책의 말미 작가 후기에서 소개한 기본 방침대로.. 네 개의 단편은 다양하고 파격적인 구성과 형식으로 짜이되 그 골격은 허술하지 않은, 치밀한 본격 미스터리를 지향한다. 또한 암울한 코로나 시대를 배경으로 삼기에 진지하고 딱딱한 내용보다는 유머러스하고 익살스러운 상황을 그리려 애를 썼다. 


서두를 여는 첫 단편부터 독자의 틀에 갇힌 상식과 예측을 사정없이 부수고 비틀어 버린다. 

내 이름은 아쓰가와 다쓰미.. 난 흔해 빠진, 식상한 미스터리 작가가 아니야. 동서고금의 미스터리 고전과 최신작을 고루 섭렵하고 파격적인 작품을 선보인, 기존 작가와 궤를 달리하는 천재 미스터리 작가라고! 이렇게 소리 높여 외치고 선언하는 듯하다. 건조한 하드보일드 탐정물로 운을 떼는 <위험한 탐정>은 고서점 미스터리 물로 흐르는 듯하더니, 중반 이후 일대 반전이 휘몰아치며 독자의 멍한 정신을 흔들어 일깨운다. 이거 이거, 시작부터 만만치 않은데.. 비스듬히 앉은 자세를 바로 하고 미간에 힘을 주어 집중할 수밖에 없더라.


이어지는 단편은 브리콜라주 형식으로 짜였다. 미스터리 퍼즐을 풀어야 하는 대학 입시를 기획한 담당자들, 기자, 교수, 학생, 학원 전문가, 블로거, 인플루언서 등이 총출동하여 다양한 의견을 쏟아낸다. 한바탕 난장이 펼쳐진 듯하다. 판데믹 시절 줌(Zoom)을 통해 온라인 생일 파티를 하던 중, 친구가 살해됐다. 과연 범인은 누구일까?  파행적인 대입 출제 지문이 제시되고, 이를 풀이하는 각계의 의견이 이어지며 독자의 흥미를 돋운다. 좀비 아포칼립스 물의 신경지를 개척한 맥스 브룩스의 <세계대전Z>와 비슷한 형식으로, 이전 미스터리 소설의 틀을 깨는 대담한 시도를 꾀했다고 평하고 싶다. 




장편보다는 단편에 최적화된 저자의 능수능란한 테크닉은 표제작에서 잘 드러난다. 연극적인 구성의 미스터리 단막극을 연출하면서, 치밀한 논리와 텐션을 시종일관 유지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저자는 무대 위에서 심리전을 펼치는 상대의 허점을 파고들다가는, 이쯤이면 결말이 드러나겠지 하는 시점을 노려 반전에 반전을 거듭 선보인다. 심지어 액자 구성을 통해 이야기 속 이야기를 끌어내며, 무한 증식하는 미스터리 물의 '마트료시카 인형'을 꿈꾼다. 이쯤 되면 시공간을 무너뜨리는 평행 우주에서 동일한 범행이 일어나고 범인이 존재하지 않을까 하는 착각마저 불러일으킨다. 그만큼 아쓰가와 다쓰미의 수시로 바뀌는 공수 페이스 전환 속에서 팽팽한 서스펜스와 독자를 납득케 하는 필연성을 유지하는 입담과 필력은 대단하다고 평할 수밖에 없다. 저자의 밀도 높은 미스터리 단편은 Joseph L. Mankiewicz 감독의 1972년작 <sleuth 발자국> 또는 히치콕 감독의 초기작 <rope>를 보는 듯하다. 실제로 저자는 다수의 미스터리 스릴러 연극과 고전 영화, 애니를 통해 영감을 받았다고 밝혔다.





아쉽게도 마지막이다. 낯설고 생경한 프로레슬링 오타쿠의 세계에 빠져야 한다. 소싯적 '타이거 마스크'와 박치기 기술로 이름을 떨친 '김일' 선수를 기억하는 이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시그니처 마스크를 눌러쓴 레슬러들과 링 아나운서가 모인 가운데 동료 선수가 외부에서 살해됐다면 어떤 상황이 펼쳐질까? 그들 사이의 미묘한 신경전과 틈을 파고드는 대화, 인서트로 삽입된 실제 레슬링 장면 묘사가 코믹하면서도 긴장감이 넘친다. 궁금한 이들이라면 망설이지 말고 <마트료시카의 밤>을 펼치기 바란다. 더불어 아쓰카와 다쓰미의 첫 단편집 <투명인간은 밀실에 숨는다>도 관심작 리스트에 올리길 추천한다. 미스터리 물 영토에 인상적인 발자국을 새긴 저자의 뒤를 쫓는 것만으로, 근사한 독서 경험과 번득이는 영감을 선사할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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