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투하는 남자
요 네스뵈 지음, 문희경 옮김 / 비채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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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웨이의 국민 작가, 스티그 라르손의 후계자 '요 네스뵈'는 노르웨이 프로 축구팀 몰데 FK의 선수였으나 부상으로 꿈을 접고 경제학자, 록 밴드 디 데레의 보컬리스트를 거쳐 북유럽 스릴러 문학의 거장으로 자리매김한 이색적인 이력을 지녔다. 전 세계 5500만 부 이상의 판매고를 올린 그의 작품 세계는 인간 내면의 어두운 본성과 도덕적 모호함을 파헤치는 날카로운 통찰력, 치밀한 플롯 설정이 특징이다. 작가는 북유럽 복지 국가의 이면에 숨겨진 계층/사회 문제를 하드보일드 문체로 그려내는 스타일을 고수해 왔다. 그는 인간을 움직이는 가장 원초적인 감정인 질투와 권력에 주목했다고 밝혔으며 신간 <질투하는 남자>는 그 주제 의식을 12편의 단편에 압축적으로 담아냈다. 장편 소설과 달리 짧은 호흡 속에서도 극도의 긴장감을 조율하는 작가의 필력을 확인할 수 있기에 장르 소설 독자들에게 강력 추천할 만한 책이다.


비채 신간 <질투하는 남자>는 작가 데뷔 이후 처음으로 선보이는 단편집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남다르다. 네스뵈는 <박쥐>, <스노우맨>, <레오파드> 등 베스트셀러 해리 홀레 시리즈를 비롯해 <헤드헌터>, <아들>, <맥베스>, <킹덤> 등 방대한 분량의 장편 소설을 집필해 왔다. 이번 단편집은 단 몇십 쪽만으로 독자의 숨통을 조이는 서스펜스, 스릴러를 구축할 수 있음을 증명한다. 영국 범죄작가협회 대거상 단편 부문 최종 후보작과 조셉 고든 레빗 주연의 아마존 프라임 영화 <킬러 히트>의 원작 소설인 표제작 <질투하는 남자>가 수록되어 작품의 탄탄함을 뒷받침한다.


총 12편의 수록작은 1부 질투와 2부 권력으로 나뉜다. 1부의 문을 여는 <런던>은 런던행 비행기 비즈니스석을 배경으로 전개된다. 주인공 숀은 옆자리 승객 마리아에게서 남편의 외도에 복수하고자 자살 에이전시와 계약했다는 충격적인 고백을 듣게 된다. 둘은 사랑에 빠진 듯하지만.. 남자는 치명적인 비밀을 숨기고 있다. 표제작 <질투하는 남자>는 그리스 칼림노스섬을 무대로 치정 사건 전문가인 니코스 발리 경감이 실종 사건을 수사하는 과정을 그린다. 용의자인 일란성 쌍둥이 형 프란츠와 동생 줄리안, 그들이 사랑하는 여인 헬레나 사이에서 벌어진 기만극을 추적하며 감정의 파괴력을 실감 나게 묘사한다. 니코스 경감 또한 과거 암벽 타기를 즐기면서 삼각관계에 빠진 전력이 있는 듯한데.. 막판 서로의 비밀이 밝혀지고 로버트 프로스트의 명시 <가지 않은 길>의 숨겨진 의미와 얼개가 맞춰지는 서사가 일품이다. 차 안 어디선가 낯선 향기가 나는데? 질투의 대상이 된 두 여자는 비밀을 이미 알고 있다! 가 키포인트.. <쓰레기>는 아내의 외도를 알게 된 수거원 이바르가 새벽 거리를 돌며 흐릿한 지난밤의 조각난 기억을 서서히 맞춰가는 과정을 스릴 넘치게 포착한다. <귀걸이>는 택시 기사가 회사 사장의 차 안에서 아내의 귀걸이를 발견하며 전개된다. 우연한 단서 하나가 걷잡을 수 없는 의심으로 번져가는 심리 묘사가 압권.. 아내를 잃지 않기 위해 주인공이 내리는 처절한 선택을 그리며 집착의 서늘한 단면을 조명한다.


2부 권력에 수록된 <기억 파쇄기>는 노화를 멈추는 혁신적인 기술을 발견한 제약회사 연구원의 이야기를 통해 디스토피아적 상상력을 펼친다. 세븐일레븐에서 일하는 주인공이 새치기하는 무례한 청년을 향해 자신만의 응징을 집행하는 <줄서기>, 팬데믹 이후 무법천지가 된 섬에서 무기를 든 변호사의 사투를 그린 <쥐섬> 등 추리물과 SF를 넘나드는 다채로운 장르적 변주를 보여준다. 총 700 페이지에 달하는 꽤 무게감 있는 분량이지만, 한 번 손에 잡으면 단숨에 반 이상 질주할 수 있는 쾌감, 몰입감을 선사한다.


요 네스뵈 미출간작 중 한국 독자들에게 새롭게 다가갈 소설로는 호러 스릴러 <나이트 하우스>를 추천하고 싶다. 범죄물에서 한 걸음 나아가 호러와 미스터리를 결합한 작품으로 고립된 마을에서 벌어지는 기괴한 사건과 십 대 소년의 불안한 심리를 추적하는 작가의 시도를 엿볼 수 있다. 범죄 소설의 틀을 넘어 장르적 확장을 거듭하는 네스뵈의 진면목을 확인하기에 탁월한 선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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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의 펼침면
이제야 지음 / 먼곳프레스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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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야 시인은 한양대학교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하고 2012년 등단했다. 이후 <진심의 바깥> <일종의 마음> 등의 시집과 산문집 <시가 되는 순간들>을 펴내며 2030 세대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는 작가다. 최근 고아성, 카리나, 문상훈, 박정민 등 다양한 분야의 유명인들이 그의 작품을 언급하며 이른바 MZ 세대의 시인으로 자리매김했다. 먼곳프레스 신간, 세 번째 시집 <슬픔의 펼침면>은 일상의 고단함 속에 숨겨진 서늘한 그늘을 찬찬히 들여다보는 작품이다. 시인은 치열한 현실에 지친 이들에게 섣부른 위로 대신 슬픔을 새롭게 정의하고 재회하는 감각을 일깨운다.


서두에 실린 짧은 시인의 말이 눈에 들어온다. 시인은 "우리를 길러낸 건 / 슬픔을 접는 능력이었을걸"이라며 삶의 고통을 대하는 시인들 고유의 태도를 제시한다. 팍팍한 삶을 견디기 위해 슬픔을 접어두는 행위는 현실 도피가 아니다. 언젠가 꼬깃하거나 단정하게 접힌 면을 펼쳐 다시 꺼내어 볼 날을 기약하는 다정하고 성숙한 유예다. "나의 슬픔이 / 너의 슬픔을 되오는 세계에서"는 시인의 내밀한 슬픔을 내보이는 행위를 통해 시집을 펼치는 모든 이들의 슬픔 또한 어딘가의 경계에서 우연히 재회하길 바라는 마음이 담겨있다.


시집은 1부 '빛나는 존재들의 무게를 받아쓰려고'에서 시작해 4부 '한 이가 한 이를 되오는 세계에서'까지.. 총 네 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상실과 아픔을 부정하지 않는 태도를 보여준다.

시인의 마음을 펼치기 시작하는 12쪽 <시소와 시>.. 아끼는 책과 일기를 시소 반대편에 두고 자신을 지탱할 수 있을지 바라보는 시인의 담담한 모습이 떠오른다. 아슬한 수평을 유지할까? 아니면 어느 한 쪽으로 기울어질까? 어찌했든 시인은 빛나는 존재들의 무게를 감각하며 받아쓸 것이다. "꼭 한 번은 슬픔을 펼친 면을 보고 싶다 / 아끼는 것들이 나란히 접히는 모양을"이라는 구절은 펼침면에 고인 아득한 슬픔, 아끼는 것들이 사라지는 두려움을 끌어안으며 읽는 이의 마음에 아릿한 잔상을 남긴다.


110쪽 <유예하는 기분>.. "여전히 우리는 슬픔을 경유합니다 / 백지에 적힌 이야기를 읽지 말아요 / 보이는 슬픔을 다그치지 않기로 해요"라고 고백하며 상실, 공허감에 잇따르는 슬픔을 극복하려 애쓰지 않는다. 그저 선명히 보이는 그 감정을 묵묵히 바라볼 뿐이다. 함부로 자책하지 않고, 나무라지 않으면서 작아질 때까지 접고 접어 저 바다로 흘려보내던가, 아니면 으슥한 골목길 담장 틈에 꽂아둘 수도 있겠지..

120쪽에 수록된 시 <동경과 망각>에서 시인은 동경을 가능케 하는 것은 망각의 능력을 믿어보는 것이라 말하며 "시간을 거스를 수 없다는 것을 / 고단한 날마다 잊는 능력"을 청춘의 무기로 꼽는다. 불가역적인 시간 앞에서도 묵묵히 일상을 지탱하고, '잊음'을 통해 내일을 살아갈 힘을 회복하는 단단한 내면이 돋보인다.


150쪽 산문 '당연한 슬픔과 필연한 재회'에서 시인은 삶의 순간순간을 접고 펼치는 면이 유난히 해진 곳들은 어김없이 슬픔이 배어 있었다고 고백한다. 닳고 해진 이 면들은 석양이 물드는 수평선처럼 정의할 수 없는 색이 혼재하는, 일종의 경계와 닮아 있다. 시인은 이 시집이 밖으로 표출하는 고음이 아니라 안으로 절제하는 '저음의 혼잣말' 같다고 덧붙인다. 접어둔 곳들을 다시 펼치기 위해 격렬한 토로 대신 차분한 책갈피가 필요했음을 표현하는 대목이다.


김다솔 문학평론가가 짚었듯.. 오해의 능력으로 멈춘 것들이 되살아나는 영원한 제철을 살아내는 시어들은 각별한 울림을 지닌다. 156쪽 추천사에서 배우 고아성이 "햇빛에 색이 바랜 아주 화려한 찻잔처럼 슬픔에도 품위를 부여하는 글"이라고 찬사를 보냈듯 <슬픔의 펼침면>은 홀로 견디는 밤에 다정한 위안을 건넨다.


세상에 태어난 이들이라면.. 슬픔은 단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다. 굽이치는 삶의 경계마다 반복되는 고통, 상실, 외로움 속에서 우리에게 왜 시가 필요한지 이제야 시인은 의연한 목소리로 증명한다. 숨 가쁜 일상 속에서 미처 다듬지 못한 무너진 마음을 살피고, 다시 만난 슬픔을 주워 담담한 마음으로 펼쳐 바라보게 하는.. 기어코 다시 살아갈 힘을 얻게 하는 귀중한 시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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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실에 떨어진 폭탄 ㅣ 콩닥콩닥 23
파얌 에브라히미 지음, 하디 바그다디 그림, 제님 옮김 / 책과콩나무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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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 테헤란 출신의 작가 파얌 에브라히미와 일러스트레이터 하디 바그다디가 만나 전쟁의 부조리함을 날카롭게 꼬집은 그림책 <교실에 떨어진 폭탄>이 책과콩나무 출판사에서 출간되었어요. 대학에서 핵물리학을 전공했지만 글쓰기를 택한 파얌 에브라히미는 전작 <진정한 챔피언>에서도 보여주었듯 사회적 쟁점을 위트 있게 풀어내는 통찰력이 돋보이는 작가랍니다. 여기에 2020년 볼로냐 아동도서전 올해의 일러스트레이터로 선정되고 2023년 나미 콩쿠르에 입상한 하디 바그다디의 아기자기하고 상징적인 화풍이 더해져 강렬한 인상을 남기지요. 지구촌 곳곳에서 여전히 참혹한 분쟁이 벌어지는 지금 이 시대에 평화와 안전의 의미를 되새기게 하는 귀중한 그림책이에요.


어느 평화로운 봄날.. 고요한 교실 한가운데에 거대한 폭탄 하나가 떨어져요. 다행히 당장 터지지는 않았지만, 폭탄을 발사한 장군은 옮기다가 터질 수 있다는 핑계를 대며 폭탄을 치우지 않지요. 결국 생사를 오가는 위태로움은 고스란히 아이들, 선생님들의 몫이 된답니다. 그림책 속 장면들처럼 아이들은 뛰지도 크게 소리치지도 못한 채.. 숨죽여 폭탄과 어울려 지내는 법을 터득해요. 폭탄 역시 다정하고 착한 친구가 되려 하거나, 옷걸이 또는 커닝을 가려주는 벽이 되어주려고 노력하는 우스꽝스러우면서도 기이한 장면들이 이어지지요. 차가운 잿빛의 거대한 불발탄과 천진난만한 아이들의 일상이 한 공간에 놓인 몽환적인 대비는 전쟁이라는 거대한 폭력 앞에 방치된 일상의 불안을 생생히 전달해요.


교실 안의 폭탄은 피가 튀는 끔찍한 전면전의 묘사가 아니라 언제 삶을 앗아갈지 모르는 거대한 공포 자체를 상징해요. 어른들의 무책임한 방관 속에서도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폭탄과 친구가 되어야만 했던 아이들의 처지는 안타깝고 먹먹하게 다가오지요. 마침내 아이들이 모두 무사히 집으로 돌아간 텅 빈 교실에서 홀로 남은 폭탄이 폭발하는 마지막 장면은 서글픈 여운을 안겨준답니다. 아이들의 소중한 목숨을 앗아가는 최악의 비극은 피했지만, 결국 그들의 안식처이자 배움터는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음을 보여주며 폭력이 남기는 돌이킬 수 없는 상흔을 증언하고 있어요.


<교실에 떨어진 폭탄>은 단순히 어린이들에게 반전의 교훈을 전하는 데 그치지 않아요. 위험을 외면하고 아이들을 방패막이 삼은 어른들의 이기적인 세계를 준엄하게 꾸짖으며 평화를 지키기 위해 우리가 과연 무엇을 해야 하는지 뼈아픈 질문을 던지지요. 하디 바그다디 특유의 세련된 선과 색감은 시각적인 경이로움을 선사하며 주제 의식을 단단히 받쳐 줘요. 어린이들에게는 평화와 생명의 소중함을 일깨워 주는 철학 도서이자, 어른들에게는 이란, 우크라이나 등 도처에서 벌어지는 비극을 통찰하게 하는 그림책으로서..


모든 세대가 서가에 소장하고 오래도록 펼쳐볼 가치가 충분하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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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은 어떻게 삶을 변화시키는가 - 복종 본능에서 깨어나 주체성을 회복하는 행동과학
수니타 사 지음, 이윤정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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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즈덤하우스 신간 <저항은 어떻게 삶을 변화시키는가>는 타인의 기대와 부당한 압박 속에서 주체적인 삶을 되찾는 방법을 행동과학으로 규명한 책이다. 저자 수니타 사는 영국에서 활동한 의사 출신으로 현재 코넬대학교 존슨 경영대학원 조직심리학 교수로 재직 중인 독특한 이력을 지녔다. 인간의 의사결정과 윤리적 행동을 심도 있게 연구해 온 그녀는 수십 년의 연구 결과와 개인적 경험을 녹여내 이 책을 집필했다. 특유의 데이터 기반 분석과 통찰력 있는 스토리텔링은 출간 직후 큰 주목을 받아 아마존 선정 2025년 올해의 책으로 꼽히는 성과를 이루었다. 최근 인터뷰에서 저자는 성장 과정에서 모범생으로 자라며 겪었던 내면의 갈등을 고백하며 저항이 단순한 반항을 넘어 자신이 원하는 세상을 창조하기 위한 긍정적 도구임을 역설했다. 부당한 권위에 무비판적으로 순응하며 자신을 잃어가는 현대인들에게 뚜렷한 심리적 해방감을 선사한다.


책은 총 3부로 나뉘어 순응의 심리를 해부하고 진정한 자아를 회복하는 여정을 안내한다. 1부에서는 인간이 진화적 사회적 요인으로 인해 맹목적인 복종 본능을 지니게 되었음을 설명한다. 2004년 4월 9일 켄터키주 마운트워싱턴 맥도널드 매장에서 발생한 충격적인 알몸 수색 사기 사건, 권위에 굴복하는 스탠리 밀그램의 전기 충격 실험 등 역사적 사례를 통해 순응의 압박과 불안의 덫을 날카롭게 파헤친다. 2부에서는 거짓된 동의를 멈추고 진정한 거절을 선택하는 과정을 다룬다. 1955년 12월 1일 앨라배마주 몽고메리에서 백인에게 좌석 양보를 거부한 로자 파크스, 2020년 5월 25일 미니애폴리스에서 발생한 조지 플로이드 비극 등을 다루며 도덕적 용기와 굳건한 가치관이 어떻게 세상을 뒤흔드는지 증명한다. 3부는 누구나 자신만의 방식으로 실천할 수 있는 일상 속 저항의 기술을 구체적으로 제시한다. 영국으로 이주한 인도 출신 여성 프라드냐의 억압적인 생애와 저자 자신이 병원에서 불필요한 엑스레이 촬영을 거부했던 일화를 소개하며 단 한 사람의 주체적 행동이 일으키는 거대한 파문을 그려낸다.


타인의 기대에 휩쓸리지 않고 주체적으로 행동하려면 무엇보다 내면의 잣대를 명확히 세우는 노력이 선행되어야 한다. 인간은 집단에서 배제될지도 모른다는 원초적인 두려움 때문에 부당한 요구 앞에서도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저자는 이런 억압적 상황에서 잠시 멈춰 서서 자신의 진짜 욕구를 직시하는 훈련이 필요하다고 조언한다.


실생활과 사회생활에서 불공정한 상황에 놓였을 때 이 책의 지침은 강력한 방어 기제가 된다. 직장 상사가 관행을 핑계로 데이터 조작이나 무리한 업무 지시를 강요할 때 우리는 무리에 동조하려는 본능 탓에 쉽게 타협한다. 저자는 이때 즉각적인 대답을 피하고 스스로 판단할 시간을 확보하는 의도적 멈춤을 실천하라고 제안한다. 회의에서 부당한 의견이 만장일치로 통과되려 할 때 단 한 사람이 침묵을 깨고 반대 의견을 내는 것만으로도 집단사고의 오류를 깰 수 있다. 동료나 거래처가 교묘하게 책임을 전가하려 할 때를 대비해 단호한 거절의 언어를 미리 연습해 두는 사전 조치도 좋은 방법이다. 병원 진료나 공공기관 방문 시 겪는 강압 앞에서도 권위자의 말에 무비판적으로 순응하기보다, 왜 이 절차가 필요한지 질문하고 거부할 권리를 행사해야 한다. 거창한 투쟁이 아니더라도 이처럼 일상의 작은 순간에서 묵묵히 '아니요'를 말하는 법을 익히는 것이 핵심이다.


결과적으로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삶은 우리 내면의 두려움을 몰아내고 진실한 자유를 안겨준다. 맹목적인 친절함과 무기력하게 타협하는 태도를 버릴 때 비로소 삶의 주도권을 온전히 쥘 수 있다. 침묵을 깨고 올바른 목소리를 내는 과정은 처음에는 두렵게 느껴질 수 있지만 점차 굳건한 자존감을 형성하게 돕는다.


자신의 신념에 따라 행동하는 용기는 개인의 자존감을 끌어올릴 뿐만 아니라 타인에게도 긍정적인 영감을 전파하여 사회 전체의 의미 있는 진보를 끌어낸다. 수니타 사 <저항은 어떻게 삶을 변화시키는가>에서 제시하는 저항의 행동과학은 부당한 세상을 향해 건네는 지적이고 실용적인 해방의 처방전이다. 억압적인 환경 속에서 진짜 나를 잃어버렸다고 느끼는 모든 이들이 이 책을 통해 주체적으로 살아갈 힘을 얻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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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리시 페이션트 ㅣ 을유세계문학전집 149
마이클 온다치 지음, 김영주 옮김 / 을유문화사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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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유문화사 신간, 마이클 온다치 <잉글리시 페이션트>는 1992년 부커상과 2018년 골든 맨부커상을 동시 수상하며 전 세계적으로 권위를 인정받은 현대 문학의 걸작이다. 1943년 스리랑카에서 태어나 캐나다로 이주한 온다치는 시인으로 먼저 등단한 이력답게 시와 소설, 역사와 신화의 경계를 넘나드는 파편적이고 서정적인 문체로 유명하다. <살육을 지나며>, <사자 가죽을 쓰고> 등 그의 주요 작품들은 국가, 인종, 경계에 얽매이지 않는 이방인들의 삶을 조명한다. 이 소설은 전쟁이라는 거대한 폭력 속에서 국적과 신분을 잃어버린 개인들이 서로를 보듬고 사랑하고 분열하는 과정을 탁월하게 묘사했다. 파괴된 세계에서 피어나는 연대와 국경을 초월한 인간성의 회복을 아름다운 언어로 직조했기에 수많은 애서가들이 인생 책으로 꼽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제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로 치닫던 1945년 봄.. 폐허가 된 이탈리아의 빌라 산 지롤라모 수도원에 네 명의 인물이 모인다. 폭격으로 지붕이 날아가고 텅 빈 이 수도원은 전쟁의 폭력이 할퀴고 간 상흔을 고스란히 간직한 공간이다. 국가와 민족, 이데올로기라는 외부 세계의 굴레를 벗어던지고 국적 잃은 이방인들이 모여 상처를 보듬는 은신처이자 해방의 공간이라는 상징적 의미를 지닌다. 온몸에 심한 화상을 입고 과거의 기억을 잃어버린 영국인 환자, 전쟁터에서 아버지를 비롯해 사랑하는 이들을 잃고 절망에 빠진 스무 살의 캐나다 간호사 해나, 적군에게 고문을 당해 두 엄지손가락을 잃고 모르핀에 의존하는 도둑 출신 스파이 카라바조, 매일 죽음의 문턱을 넘나드는 인도 출신의 영국군 폭발물 해체 공병 킵이 등장한다.


비밀을 감춘 영국인 환자가 떠올리는 잔상은 영화를 기억하는 이들이라면 익숙한 내용이다.

부상당한 캐서린을 구하려 동분서주하다가 알마시가 추락하는 비행기 속에서 "그는 자신이 왜 환한지 영문을 모르다가 마침내 몸에 불이 붙었음을 깨닫는다"(221쪽)라고 회고하는 사막의 기억은 강렬한 잔상을 남긴다. 카라바조가 알마시의 정체를 캐내기 위해 모르핀을 함께 맞으며 기억의 실타래를 풀어내는 장면,

1939년 사막의 동굴에 연인 캐서린을 남겨두고 "그는 헤로도토스의 책을 꺼내 그녀 옆에 내려놓았소"(314쪽)라고 독백하는 환자의 고백은 짙은 슬픔을 자아낸다. 폭풍우가 치던 밤.. 피아노를 격정적으로 연주하는 해나와 총을 내려놓고 그녀를 지켜보는 인물들을 묘사하며 "번개가 방에 있는 그들 사이로 들이칠 때마다 그들은 그녀를 바라보았다"(83~84쪽)라고 표현한 대목은 전쟁의 공포를 잠시나마 잊게 하는 감각적인 카타르시스를 선사한다. 죽음의 그늘이 배인 공간에서 이질적인 네 사람은 각자의 트라우마, 상처를 내보이며 조심스러운 치유를 시작한다.



앤서니 밍겔라 감독이 연출해 1997년 아카데미 9개 부문을 휩쓴 영화 <잉글리시 페이션트>는 대중에게 이 작품을 확실히 각인시켰다. 영화는 광활한 사막을 배경으로 알마시와 캐서린의 비극적이고 낭만적인 로맨스에 서사의 중심을 두었다. 원작 소설은 서사의 결이 사뭇 다르다. 소설은 특정 인물의 사랑 이야기에 국한되지 않고 해나, 킵, 카라바조의 과거와 내면을 동일한 비중으로 파고든다. 지연 작동 폭탄이 숨겨진 나폴리의 잔해 속에서 폭발물을 해체하는 킵의 숨 막히는 일화들(349쪽)과 소설 후반부 일본에 원자폭탄이 투하되었다는 라디오 뉴스를 듣고 폭발하는 킵의 분노는 서사의 텐션을 끌어올리는 핵심 장치다.

라디오를 통해 일본에 투하된 원폭 뉴스를 듣고.. 영국군에 헌신했던 킵은 아시아 국가를 향한 서구 세계의 끔찍한 폭력 앞에 아연실색한다. 서구 제국주의가 품고 있던 백인 우월주의 & 인종차별적 위선에 깊은 환멸을 느낀 그는 자신이 맹신했던 서구의 상징인 영국인 환자를 향해 소총을 겨눈다. 이념과 국경, 민족을 초월해 쌓아 올린 수도원의 위태로운 평화가 외부 세계의 거대한 폭력 앞에서 산산조각 나는 이 장면은 소설만이 가진 탁월한 주제 의식을 보여준다. 파편화된 기억의 조각들을 시적인 은유로 이어 붙이는 온다치 특유의 문체는 영상이 결코 대체할 수 없는 문학적 우월함을 증명한다. 로맨스를 넘어 제국주의 비판, 탈식민주의적 통찰까지 담아낸 서사는 현실과 허구의 경계를 지우고, 그 밀도는 압도적이다.


제목, 목차부터 자극적인 자기 계발서, 부를 증식시키는 지침서에 온갖 후킹 멘트 & 쇼츠 영상이 넘치는 시대..

소설, 시 같은 정통 문학은 당장 눈앞의 현실적인 이익이나 쓸모를 제공하지 않아 때론 무가치해 보일 수 있다. 이 작품처럼 세계와 시간을 가로질러 독보적인 지평을 개척한 작품들이 시대를 초월해 고전으로서 영원성을 획득하는 이유는 인간 존재의 근원적인 고통과 상실을 끈질기게 탐구하기 때문이다.


문학의 진정한 가치를 알아보는 이들은 페이지 곳곳 물든 타인의 고통에 깊이 공감하며 파괴된 삶 속에서도 다시 일어설 내면의 힘을 얻는다. 마이클 온다치의 <잉글리시 페이션트>는 국가와 민족이라는 거대한 이데올로기가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 집요하게 질문을 던진다. 이름도 국적도 지워진 숯덩이 몸의 환자를 통해 작가는 지도 위의 선들이 만들어낸 위선적이고 폭력적인 경계를 무너뜨린다. 상실과 고통이라는 보편적인 인간의 조건 속에서 서로의 체온에 기대어 상처를 꿰매는 과정은 팍팍한 현실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시대를 초월한 위로와 깨달음을 전한다. 사실과 허구, 과거와 현재가 정교히 교차하는 이 작품은 읽을 때마다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게 하는 찬란한 언어의 성전으로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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