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유문화사 신간, 마이클 온다치 <잉글리시 페이션트>는 1992년 부커상과 2018년 골든 맨부커상을 동시 수상하며 전 세계적으로 권위를 인정받은 현대 문학의 걸작이다. 1943년 스리랑카에서 태어나 캐나다로 이주한 온다치는 시인으로 먼저 등단한 이력답게 시와 소설, 역사와 신화의 경계를 넘나드는 파편적이고 서정적인 문체로 유명하다. <살육을 지나며>, <사자 가죽을 쓰고> 등 그의 주요 작품들은 국가, 인종, 경계에 얽매이지 않는 이방인들의 삶을 조명한다. 이 소설은 전쟁이라는 거대한 폭력 속에서 국적과 신분을 잃어버린 개인들이 서로를 보듬고 사랑하고 분열하는 과정을 탁월하게 묘사했다. 파괴된 세계에서 피어나는 연대와 국경을 초월한 인간성의 회복을 아름다운 언어로 직조했기에 수많은 애서가들이 인생 책으로 꼽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제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로 치닫던 1945년 봄.. 폐허가 된 이탈리아의 빌라 산 지롤라모 수도원에 네 명의 인물이 모인다. 폭격으로 지붕이 날아가고 텅 빈 이 수도원은 전쟁의 폭력이 할퀴고 간 상흔을 고스란히 간직한 공간이다. 국가와 민족, 이데올로기라는 외부 세계의 굴레를 벗어던지고 국적 잃은 이방인들이 모여 상처를 보듬는 은신처이자 해방의 공간이라는 상징적 의미를 지닌다. 온몸에 심한 화상을 입고 과거의 기억을 잃어버린 영국인 환자, 전쟁터에서 아버지를 비롯해 사랑하는 이들을 잃고 절망에 빠진 스무 살의 캐나다 간호사 해나, 적군에게 고문을 당해 두 엄지손가락을 잃고 모르핀에 의존하는 도둑 출신 스파이 카라바조, 매일 죽음의 문턱을 넘나드는 인도 출신의 영국군 폭발물 해체 공병 킵이 등장한다.
비밀을 감춘 영국인 환자가 떠올리는 잔상은 영화를 기억하는 이들이라면 익숙한 내용이다.
부상당한 캐서린을 구하려 동분서주하다가 알마시가 추락하는 비행기 속에서 "그는 자신이 왜 환한지 영문을 모르다가 마침내 몸에 불이 붙었음을 깨닫는다"(221쪽)라고 회고하는 사막의 기억은 강렬한 잔상을 남긴다. 카라바조가 알마시의 정체를 캐내기 위해 모르핀을 함께 맞으며 기억의 실타래를 풀어내는 장면,
1939년 사막의 동굴에 연인 캐서린을 남겨두고 "그는 헤로도토스의 책을 꺼내 그녀 옆에 내려놓았소"(314쪽)라고 독백하는 환자의 고백은 짙은 슬픔을 자아낸다. 폭풍우가 치던 밤.. 피아노를 격정적으로 연주하는 해나와 총을 내려놓고 그녀를 지켜보는 인물들을 묘사하며 "번개가 방에 있는 그들 사이로 들이칠 때마다 그들은 그녀를 바라보았다"(83~84쪽)라고 표현한 대목은 전쟁의 공포를 잠시나마 잊게 하는 감각적인 카타르시스를 선사한다. 죽음의 그늘이 배인 공간에서 이질적인 네 사람은 각자의 트라우마, 상처를 내보이며 조심스러운 치유를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