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파고스의 마지막 꼬리별 - 제15회 정채봉 문학상 대상 수상작 ㅣ 샘터어린이문고 89
곽혜린 지음, 서유은 그림 / 샘터사 / 202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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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와 부모님이 함께 읽기 참 좋은 어린이, 초등학생 창작 동화 한 편을 소개할게요. 샘터 출판사에서 출간된 곽혜린 글/서유은 그림 <갈라파고스의 마지막 꼬리별>이랍니다. 제15회 정채봉 문학상 대상을 받은 수상작이에요. 첨단 로봇이 통제하는 차가운 근미래를 배경으로 자연의 섭리와 가족의 사랑을 다루고 있어서, 성인인 제가 읽으면서도 커다란 위안을 받았답니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누리'라는 상처 입은 열 살 아이예요. 누리의 아빠는 멸종 위기종을 복원하는 꼬리별 연구소의 소장이고, 가족은 집안의 모든 시스템을 관리하는 인공지능 집사 '블루'와 살고 있죠. 누리의 곁을 지키는 단짝은 세상을 떠난 반려묘 고로를 대신해 아빠가 사준 로봇 고양이 '고록스'랍니다. 그리고 이야기의 중심에 있는 특별한 동물, 아빠가 과학 기술로 탄생시킨 갈라파고스 땅거북 '다윈'과 '찰스'가 등장해요. 누리의 엄마는 동물들의 자연 방생을 주장하다 아빠와 의견 충돌을 겪고 별거 중이어서, 누리의 마음속에는 늘 서글픈 외로움이 자리 잡고 있어요.


시대적 배경은 수많은 동물이 자취를 감추고 인공지능이 일상을 지배하는 미래 사회예요. 누리는 전학 간 학교에서 '재수 없는 연구소 딸'이라 불리며 따돌림을 당하고, 부모님의 다툼과 별거로 매일 불안감을 느끼며 살아갑니다. 그러던 어느 날, 연구소에서 지내던 늙은 땅거북 다윈이 뱃속에 세 개의 알을 품게 되는 놀라운 일이 일어나요. 누리는 초음파에 찍힌 알들을 보며 버려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휩싸이지만, 든든한 친구 '로이'의 응원을 받으며 용기를 냅니다. 다윈과 찰스가 본능적으로 고향인 갈라파고스를 그리워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누리는 부모님을 설득해 거북이들을 드넓은 바다로 돌려보내는 방생 여정에 동참하게 돼요. 이 험난한 프로젝트를 통해 이기적인 욕심과 오해로 엇갈렸던 누리의 가족은 비로소 서로의 진심을 이해하고 흩어졌던 마음을 하나로 모으게 된답니다.


기억에 남는 장면은 누리가 다윈이 품은 알을 보며 자신의 상처를 겹쳐 보던 순간이에요. "나 같아. 알이 버려지는 게 꼭 내가 버려지는 것 같아."(62쪽)라며 눈물짓는 누리의 모습은 가정의 불화로 불안에 떠는 아이들의 마음을 대변하는 듯해 가슴이 아팠답니다. 하지만 누리는 마냥 슬퍼하지만은 않아요. 거북이들의 방생을 반대하는 엄마를 향해 "다원이랑 찰스는 그냥 복제 동물이 아니야. 내 가족이야."(79쪽)라고 외치며 생명을 지키려는 강인한 모습을 보여주거든요. 마침내 갈라파고스 해변에 도착해 다윈이 둥지를 트는 결말 부분도 빼놓을 수 없어요. "하얗고 동그란 알을 세 개 낳았다. 마치 커다란 진주 같은 알이었다."라는 문장처럼.. 캄캄한 밤하늘 아래 빛나는 새 생명의 탄생은 그 자체로 커다란 감동을 전해줍니다. 인간의 이기심으로 희생된 동물들을 진심으로 보호하려던 엄마의 애정, 학자로서의 명성에 몰두하다 점차 긍정적인 변화를 맞이하는 아빠, 그리고 외톨이였던 누리가 생명을 통해 스스로 마음을 다독이고 성장해 나가는 과정이 오랜 여운을 남겨요.


엄마, 아빠들에게 이 책을 적극 권하고 싶은 이유는 단순한 생태계 보호 메시지를 넘어 가족의 아픔을 보듬고 치유하는 과정을 섬세하게 다루고 있기 때문이에요. 작가의 말에서 "부모님 이야기만 나오면 고개를 푹 숙이는 세상의 모든 누리에게 이 책을 바치고 싶어요. '너희들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가치 있는 사람이야'라고 말해 주고 싶어요."라고 전한 진심이 이야기 곳곳에 녹아 있답니다. 특히 서유은 작가님의 포근하고 정감 가는 그림이 더해져, 삭막한 설정 속에서도 온화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어요. 아이들뿐만 아니라 부모님들도 함께 읽으며 우리가 진짜 지켜야 할 가치가 무엇인지 되새겨보기에 충분한 작품이에요.


<갈라파고스의 마지막 꼬리별>을 접한 아이들은 멸종 위기 동물들의 처지에 공감하며 높은 관심을 보였다고 해요. 느릿느릿한 거북이들이 무사히 푸른 바다를 헤엄쳐 고향으로 돌아가길 응원하며 마음을 졸이기도 하고, 무뚝뚝한 로봇 고록스와 누리의 우정을 흥미롭게 지켜보았답니다. 무엇보다 누리가 부모님과 다시 화합하고 눈물을 흘릴 때 커다란 안도감을 느끼며, 생명과 가족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자연스럽게 깨닫는 모습이 돋보였어요. 앞으로 다가올 미래 사회와 환경 문제에 대해 아이들과 진솔한 대화를 나누기에도 참 좋은 길잡이가 되어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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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터가이스트의 죄수 ㅣ 아시야 초자연현상 2
가미조 가즈키 지음, 김은모 옮김 / 북다 / 202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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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 신간, 가미조 가즈키 장편소설 <폴터가이스트의 죄수>는 일본 모던 호러의 현주소를 증명하는 경이로운 작품이다. 1992년 일본 나가노현에서 태어나 와세다대학교를 졸업하고 웹 미디어 오모코로의 필자로도 활동 중인 저자는 데뷔작 <심연의 텔레패스>로 제1회 소겐 호러 장편상을 거머쥐며 화려하게 등장했다.

전작이 2024년 베스트 호러 1위와 2025년 이 호러가 대단하다 1위를 차지한 데 이어, 이번 후속작 역시 2025년 베스트 호러 1위와 2026년 이 호러가 대단하다 1위에 연속으로 올랐다. 단 이 년 만에 시리즈 누계 5관왕이라는 전무후무한 대기록을 세운 셈이다. 저자는 최근 인터뷰에서 이 소설이 단순히 공포를 유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엔터테인먼트로 짜릿하게 즐길 수 있는 작품이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초심리학이라는 지적인 소재를 바탕으로 치밀한 논리적 추리를 전개하는 이 책은 미스터리와 오컬트의 결합을 선호하는 장르 소설 팬들에게 훌륭한 선택지가 될 것이다.


일상을 잠식하는 기이한 현상과 초심리학의 조우

소설은 과거 특촬물 강충전대 버그제이버의 주연 레드제이버로 활약했으나, 지금은 엑스트라를 전전하는 단역 배우 도조 쇼고의 쓸쓸한 귀향에서 출발한다.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리던 그는 이십 년 만에 아무도 없는 고향 집으로 돌아오지만 그곳을 시체 같은 집이라 묘사할 만큼 짙은 절망과 서늘함을 느낀다. 홀로 남겨진 낡은 이층 목조 가옥에서는 이내 기괴한 일들이 연달아 벌어진다. 이층에서 들려오는 정체불명의 발소리, 허공에서 떨어지는 아버지의 영정 사진, 어둠 속 계단을 스스로 굴러 내려오는 기괴한 고케시 인형까지.. 시각과 청각을 조이는 묘사가 리얼하다. 영상 제작자 한다의 요구로 빈방에서 합성용 소리를 녹음하던 중 카메라에 포착된 맹장지문 너머의 불길한 거울은 긴장감을 높인다. 잇따른 환각과 알 수 없는 두통에 시달리던 도조는 결국 아시야 초자연현상 조사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는 아시야 하루코와 고시노 소타에게 구원을 요청한다. 전작이 초감각적 지각을 다루었다면 이번 작품의 핵심은 염력이다. 두 조사관은 보이지 않는 물리적 힘이 작용하는 원리를 파헤치며 현상을 통제하려 시도하지만, 도조가 돌연 흔적도 없이 실종되면서 사태는 전혀 다른 미궁 속으로 빠져든다.


오컬트와 미스터리의 경계를 허무는 폭주하는 쾌감

도조 쇼고가 자취를 감춘 직후, 이야기는 도쿄 조시가야에 위치한 낡은 단독주택을 무대로 전혀 예측할 수 없는 궤도에 진입한다. 아시야와 고시노를 비롯해 오컬트 현상에 회의적인 르포 라이터 구라모토, 이누이 일행은 저택을 수색하던 중 창문 유리에 여섯 명인 자신들의 그림자가 일곱 명으로 비치는 섬뜩한 환영과 마주한다. 저자는 1984년 도시마구 연쇄 납치 사건의 실종자 미코시바 교코, 1978년 미국에서 발표된 제이 킴의 초심리학 논문 등 흩어진 단서들을 조립하여 진실을 쫓는다. 환기창 너머 지하실에서 비닐 시트에 싸인 채 두개골이 사라진 백골 사체가 발견되는 장면은 단순한 괴담을 넘어선 정통 미스터리의 짜릿함을 선사한다.

여기에 십자궁을 든 낯선 소녀와 철사를 휘두르는 거한을 피해 종탑 꼭대기로 도망치는 기이한 데스 게임 같은 환각 속 추격전은 페이지를 넘기는 손을 멈출 수 없게 만든다. 낡고 음산한 지하실에서 발아한 공포가 화려한 스카이트리 상공으로 치솟으며 클라이맥스를 장식하는 전개는 가히 압도적이다. 미야베 미유키 작가와 코지마 히데오 게임 크리에이터가 극찬했듯.. 오컬트와 괴이, 미스터리 장르가 한데 뒤섞여 폭주하는 쾌감을 뿜어내는 이 작품은 평소 공포물에 거부감을 느끼는 독자조차 흠뻑 빠져들게 만드는 놀라운 흡입력을 지녔다.


논리로 해체하는 공포, 호러 문학의 진화

<폴터가이스트의 죄수>가 지닌 매력은 미지의 존재를 맹목적으로 두려워하는 전통적인 괴담의 낡은 틀을 깨부수었다는 점이다. 가미조 가즈키는 억울한 원한이나 잔혹한 저주 같은 고전적 동기 대신, 철저한 관찰과 가설 검증이라는 과학적 방법론을 도입하여 공포의 근원을 서서히 해체한다. 차가운 이성으로 기이한 현상을 기록하는 아시야 하루코와 의뢰인의 극심한 불안에 공명하는 고시노 소타의 앙상블은 자칫 건조해질 수 있는 추리 과정에 생생한 온기를 불어넣는다. 타 장르 소설과 비교했을 때 이 작품이 유독 돋보이는 이유는 일상의 평범한 사물이 치명적인 흉기로 돌변하는 찰나의 서늘함을 포착하면서도 자극적인 유혈 묘사에 기대지 않는다는 것이다. 치밀하게 흩뿌려진 복선들이 후반부에 이르러 하나의 거대한 진실로 조립되는 과정은 폭발적인 호러 카타르시스를 선사한다. 작가는 기현상 앞에 선 인간의 한없이 나약한 모습을 조명하면서도 결국 공포에 맞서는 힘은 자신이 발 딛고 선 현재의 위치를 직시하는 용기에서 비롯됨을 역설한다. 환상과 논리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줄타기하는 이 소설은 색다른 차원의 두려움을 탐구하려는 독자에게 강렬한 독서 경험을 안겨줄 것이다.


스카이트리 상공의 거대한 묘비와 비상하는 주사위

후반부 스카이트리 전망대를 무대로 펼쳐지는 클라이맥스는 기이한 현상의 실체를 시각적으로 폭발시키는 구간이다. 붉은 화살을 쏘아 드론을 격추하는 긴박한 액션 묘사는 호러 소설의 한계를 넘어 스릴러의 역동성을 획득한다. 의문의 유골이 초자연적 현상의 매개체로 작용하여 도조 쇼고를 조종했다는 섬뜩한 진상은 미스터리 장르의 정교한 반전을 충실히 따른다. 모든 사건이 일단락된 후 일상으로 돌아온 아시야와 고시노가 카페에서 종이컵과 주사위 다섯 개로 염력 실험을 하는 에피소드는 기묘한 여운을 남긴다. 허공에 뜬 주사위는 눈앞에 펼쳐진 모든 기현상이 결코 환상이 아님을 직관적으로 보여주며, 오컬트와 과학의 경계에서 치열하게 싸워온 주인공들의 향후 행보를 더욱 기대하게 만든다.


시리즈의 서막, 전작 <심연의 텔레패스> 필독 추천

가미조 가즈키의 기발한 세계관을 온전히 만끽하기 위해서는 그의 화려한 데뷔작 <심연의 텔레패스>를 반드시 함께 읽어야 한다. 제1회 소겐 호러 장편상 수상을 시작으로 각종 호러 랭킹을 석권한 이 소설은 우연히 괴담 발표회에 참석한 카렌이 기이한 소리와 비릿한 냄새에 시달리며 아시야 초자연현상 조사에 의뢰를 맡기는 과정에서 출발한다. 전작이 텔레파시와 미래 예지라는 초감각적 지각을 중심으로 두려움을 설계했다면, 신작 <폴터가이스트의 죄수>는 염력이라는 초현실적 타격감을 부여해 엔터테인먼트적 재미를 극대화한 차이가 있다. 두 작품을 연속해서 감상한다면 아시야와 고시노 콤비가 맺어지는 과정부터 그들이 기현상을 논리적으로 해체해 나가는 진화된 추리 방법론까지 한눈에 파악할 수 있다. 일본에서 출간 예정인 시리즈 완결편 <고스트의 계승>을 맞이하기 전, 이 놀라운 시리즈의 시작과 현재를 정주행하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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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격의 무신사 - 무진장 놀라운 무신사 이야기
장주영.김효성 지음 / 스탠스 / 202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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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출판사 스탠스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 개인적인 후기를 포함하여 작성한 서평입니다.





패션을 넘어 K-컬처를 선도하다!

스탠스 신간 <진격의 무신사>는 단순한 패션 기업의 성공담을 넘어, 대한민국 비즈니스 생태계의 지각변동을 면밀하게 기록한 경제 경영서다. 20년 차 중앙일보 장주영 기자와 매일경제신문을 거친 경제학도 김효성 기자는 기업 연구부에서 다진 취재력을 바탕으로 이 방대한 조직의 모든 것을 파헤친다. 저자들은 외부의 시선에서 객관적인 지표와 현장 인터뷰를 교차 검증하며, 2026년 9월 기준 10조 원의 추정 기업 가치를 향해 달려가는 유니콘의 실체를 증명한다. 조남성 공동대표가 "무신사에 대한 최초의 책이자 밖에서 정직하게 들여다본 기록"이라고 평했을 만큼.. 이 책은 무비판적인 찬양을 배제하고 현상을 냉철하게 진단한다. 트렌드 변화에 민감한 패션 산업 종사자는 물론, 압도적인 플랫폼 비즈니스를 구축하여 생태계를 지배하고 싶은 스타트업 창업자와 마케터들에게 훌륭한 길잡이 역할을 수행한다.


스니커즈 마니아, 10조 유니콘의 설계자가 되다

책을 읽으면 '무지하게 신발 사진이 많이 저장된 곳'이라는 이름으로 시작된 2001년 프리챌 동호회가 입점 브랜드 2만 1000개, 온라인 회원 수 2882만 명의 제국으로 장대한 성장을 이룬 궤적이 흥미롭게 펼쳐진다. 이 폭발적인 진화의 중심에는 조만호 대표의 남다른 마니아 기질, 덕후 정신이 굳건히 자리한다. 그가 개인의 취미를 본격적인 비즈니스로 연결하는 과정에서 선택한 핵심 무기는 다름 아닌 데이터와 기술력이다. 전체 임직원의 3분의 1을 테크 인력으로 채우고, 누적된 리뷰와 랭킹 시스템을 통해 소비자들의 행동 패턴을 치밀하게 수치화한 대목은 인상적이다. 직관에만 의존하지 않고 철저한 데이터 경영을 도입했기에 29CM 인수를 비롯하여 뷰티, 우먼, 킥스, 홈 등으로 자신들의 세계관을 거침없이 확장할 수 있었음을 깨닫는다.


덕후의 집념이 빚어낸 맞춤형 큐레이션과 밀착 지원 전략

페이지를 넘기면 경상남도 통영에서 상경하여 은평구 갈현동 반지하에서 출발한 고교생 조만호의 치열한 과거와 마주한다. 나이키 에어포스1에 열광하던 소년이 만든 작은 커뮤니티는 방대한 화보와 감각적인 룩북을 앞세워 독창적인 큐레이션의 산실로 거듭났다. 2012년 법인 설립 이후 이들이 선보인 차별화된 무기는 철두철미한 파트너십과 정교한 데이터 관리다. 초창기 입점 브랜드마다 전담 인력을 배치해 마케팅을 돕는 밀착 지원을 아끼지 않았으며, 소비자의 체형과 핏을 세밀하게 쪼갠 맞춤형 리뷰 시스템을 구축해 반품률을 획기적으로 낮췄다. 이러한 끈질긴 분석은 2026년 9월 기준 무신사 단독 1만 2000개, 29CM 9000개라는 압도적인 입점 브랜드 수를 달성하는 탄탄한 자양분이 되었다. 나아가 2026년 4월 148억 원을 들여 단행한 <매거진 B> 인수는 단순한 유통 채널을 넘어 지적 만족감을 선사하는 콘텐츠 커머스로 도약하려는 이들의 확고한 의지를 대변한다.


성수동의 지도를 바꾸고 유니클로를 정조준하다

오프라인 공간을 영리하게 활용하는 이들의 부동산 및 공간 기획 기법은 플랫폼 기업의 새로운 지향점을 제시한다. 이들은 모바일 화면에만 머물지 않고 오프라인 유행 1번지 성수동 일대에 무려 15개의 점포를 운영하며 거대한 '무신사 타운'을 구축했다. 특히 2026년 4월에 문을 연 2000평 규모의 '무신사 메가스토어 성수'는 단순한 플래그십 스토어를 넘어 앵커 테넌트로서 상권을 주도하려는 뚜렷한 목표 의식을 보여준다.

나아가 글로벌 대형 SPA 브랜드 유니클로의 매장 바로 옆에 무신사 스탠다드를 당당히 입점시키는 용산 아이파크몰의 사례는 이들이 품고 있는 흔들림 없는 자신감을 대변한다. 브랜드 로고를 과감히 지우고 품질과 기본기에 집중하여 770만 장의 슬랙스 판매고를 올린 '무탠다드'의 전략은, 동대문 특유의 생산 DNA를 글로벌 표준으로 끌어올리는 강력한 구심점으로 작용한다.


중동 오일머니를 홀린 K-패션의 선봉장 & 원대한 미래

2024년 5월 방한한 아랍에미리트 대통령과의 만남에서 조만호 대표가 건넨 1만 9900원짜리 무지 티셔츠 일화는 이 기업이 지닌 당찬 포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2024년 3월 경영 일선에 복귀한 그는 국내 시장의 한계를 넘어 글로벌 패션 제국이라는 더 큰 청사진을 제시한다. 이미 미국과 일본에 현지 법인을 세운 데 이어, 2026년 7월에는 중국 내 5개 오프라인 매장을 동시다발적으로 열며 해외 진출의 보폭을 한층 넓히는 중이다. 개점 50일 만에 누적 거래액 70억 원을 돌파하고 전체 고객의 40퍼센트를 외국인으로 채운 성수 메가스토어의 눈부신 성과는 K-패션의 세계화가 이미 가시적인 현실이 되었음을 증명한다.


거대 플랫폼의 이면과 글로벌 미래를 향한 시선

저자들은 눈부신 성장의 이면에 놓인 맹점과 과제들도 가감 없이 수면 위로 끌어올린다. 비슷한 스타일을 입는 젊은 남성을 조롱조로 일컫는 '무신사 냄새'라는 표현은, 역설적으로 이 플랫폼의 막강한 일상적 지배력을 방증함과 동시에 획일화된 패션 생태계가 반드시 극복해야 할 한계를 꼬집는다. 무신사 사우나, 노래방, 호텔까지 상표권을 무더기로 선점하며 다가올 미래를 철저히 대비하는 담당 직원의 일화에서는 기업 특유의 치열하고 예민한 조직 문화를 엿볼 수 있다. 2025년 거래액 5조 원, 연결 영업이익 1405억 원을 달성하며 기업공개(IPO)를 향해 돌진하는 이들은 이제 패션의 본고장 일본 상륙을 시작으로 동남아, 중국 등 본격적인 글로벌 확장의 시험대에 섰다. 단순히 유행을 좇는 것을 넘어 소비자의 데이터를 바탕으로 공간과 문화를 능동적으로 설계하는 쉼 없는 과정은 작금의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기획자가 밑줄을 그어가며 배워야 할 비즈니스 해답을 던진다.


일차원적인 트렌디 의류 업체를 넘어선 뷰티 라이프스타일 장악

이제 이 거대 플랫폼을 유행에 민감한 패션 유통 채널로만 한정 짓는 것은 명백한 오산이다. 이들은 기존의 텃밭인 의류를 넘어 뷰티 영역까지 전선을 과감히 확대하며 유통 생태계의 판도를 거세게 뒤흔든다. 2026년 4월 메가스토어 성수 2층에 첫 뷰티 오프라인 점포를 개설하고 9월에 파머씨 뷰티 콘셉트를 적용한 행보는 CJ 올리브영이나 다이소 같은 이종 업계의 거물들과 정면 승부를 불사하겠다는 맹렬한 야심을 대변한다. 특정 스타일을 소비하는 단계를 지나 개인의 라이프스타일 전반을 기획하고 큐레이션하는 초대형 K-컬처 브랜드로 확연히 진화했음을 실감한다.


2030년 3조 원의 청사진과 마라톤으로 전환된 호흡

저자들은 2027년으로 점쳐지는 기업공개를 앞둔 이들이 100미터 달리기에서 마라톤으로 체질을 전환했다고 날카롭게 진단한다. 2025년 기준 2400억 원에 달하는 글로벌 사업 누적 거래액을 발판 삼아 2030년까지 글로벌 공략 목표 3조 원을 달성하겠다는 공격적인 포부는 결코 허황된 메아리가 아니다. 아시아를 넘어 미국 시장까지 깃발을 꽂으며 K-패션의 문법을 세계의 표준으로 만들고자 고군분투하는 모습이 책 후반부를 장식한다. 단순히 옷을 파는 플랫폼을 넘어 대한민국의 취향 자체를 국경 밖으로 수출하는 문화적 정체성으로 자리매김하려는 조만호 대표의 비전이 인상 깊다.


거침없는 행보에서 발견하는 비즈니스의 정수와 교훈

우리는 이 유니콘의 성장 궤적에서 타협하지 않는 집요함이라는 값진 가치를 배운다. '다 무신사랑 해'라는 기발한 카피가 암시하듯 덩치가 커진 이후에도 철저히 소비자 곁에서 디테일을 챙기며 초심을 잃지 않는 뚝심은 지금의 10조 원 가치를 일궈낸 결정적인 동력이다.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 과감한 실행력 그리고 데이터를 맹신하지 않고 오프라인의 감각적 경험과 결합하는 유연한 사고방식은 다음 단계의 도약을 꿈꾸는 기획자들에게 이정표를 제시한다. 한 소년의 작은 커뮤니티가 거대한 산업의 지형을 바꾼 기적 같은 서사는 결국 본질에 집중하는 자만이 미래를 주도할 수 있다는 변함없는 진리를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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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심 - 내 삶에 내렸던 아름다운 소나기들
차석용 지음 / 열린책들 / 202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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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자 너머의 사람을 향한 단단한 시선

열린책들에서 출간된 차석용 전 휴젤 명예회장의 신간 <하심>은 출간 직후 주요 서점에서 베스트셀러에 오르며 수많은 독자와 평론가의 찬사를 받는 에세이다. 저자는 28년간 한국 P&G, 쌍용제지, 해태제과, LG생활건강 등 굴지의 기업에서 최고경영자를 역임하며 무려 74분기 연속 영업이익 흑자라는 경이로운 성과를 일궈낸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최근 인터뷰에서 그는 무엇을 이루었는지 자랑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세상에 진 빚을 헤아리고 고마운 인연들에게 진심 어린 감사 인사를 전하고자 펜을 들었다고 밝혔다. 철저한 성과주의자로 오해받기 쉬운 화려한 이력 이면에 자리한 사람 중심의 철학, 위기 속에서도 흔들림 없이 지켜낸 원칙들을 세밀하게 조명한다. 경영 일선에 있는 리더뿐만 아니라 불확실성의 시대를 견뎌내는 모든 직장인, 삶의 방향성을 고민하는 일반 독자에게 적극 권하고 싶은 책이다.


삶의 흔적에서 길어 올린 통찰과 위로

이 책의 인상적인 대목은 초심을 지키는 태도와 윗사람이 갖춰야 할 겸손이다. 저자는 여는 글에서 '와비사비'라는 오래된 미학을 인용하며, 새것의 상태보다 세월의 흔적과 자연스러운 변화 속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성숙한 시선을 강조한다. <오디세이아>가 전하는 삶의 지혜를 빌려 유혹에 흔들릴 때 필요한 것은 강한 의지가 아니라 처음 정한 길로 자신을 되돌리는 원칙임을 짚어내는 통찰이 매력적이다. 특히 개성 출신 어머니가 보여준 굳건한 믿음과 천안에 모신 아버지를 향한 절절한 그리움을 박목월의 시 <하관>에 빗대어 회고하는 장면은 잔잔한 여운을 남긴다. 고등학교 3학년 시절 불같은 연애 속에서도 묵묵히 곁을 지켜준 아내와의 일화는 그가 평생 의지해 온 따스한 버팀목이 무엇인지 짐작하게 한다. 경기고등학교 입시에 실패했을 때조차 질책 대신 스스로 깨달을 때까지 기다려 준 부모님의 교육 방식은 훗날 그가 타인의 가능성을 존중하는 리더로 성장하는 든든한 밑거름이 되었다. 영웅은 실패하지 않는 자가 아니라 포기하지 않는 자라는 깨달음은 숱한 좌절을 마주하는 현대인에게 다시 일어서야 할 분명한 명분을 제시한다.


위기를 돌파하는 힘, 결국은 확신과 열정

평생을 전문경영인으로 헌신해 온 저자의 궤적은 난관 극복과 혁신의 연속이었다. 서른두 살 늦깎이로 P&G 미국 본사에 입사해 경쟁하기에 약해 보인다는 동기생의 냉정한 평가를 들었을 때, 이를 부정하는 대신 새벽 6시 출근을 자처하며 스스로 한계를 넘어섰다. 쌍용제지 인수 과정에서는 복잡한 수치나 논리 이전에 마음이 먼저 반응하는 첫 2초의 직관을 신뢰하는 결단력을 보여준다. 훗날 LG생활건강 재임 시절 코카콜라 한국 보틀링 사업 인수를 앞두고 막대한 적자 구조 탓에 모두가 우려했을 때, 제대로 경영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확신으로 돌파구를 찾았다. 이때 고(故) 구본무 회장을 찾아가 너무 튀어서 불편하지 않냐고 조심스레 물었을 때, 우리 그룹도 이제는 바뀌어야지.. 라며 믿음을 실어준 일화는 진정한 리더십의 표본을 여실히 증명한다. 홍콩에서 함께 일했던 정직한 경영자의 이름을 단 닥터그루트 브랜드 론칭 스토리에서 엿볼 수 있듯, 성과라는 지표에 매몰되기보다 현장에서 뛰는 직원을 먼저 챙기고 철학을 녹여내는 균형 감각이야말로 그가 빚어낸 성공의 진정한 비결이다.


누군가의 삶을 바꾼 따뜻한 소나기

<하심>이 단순한 경영 성공담을 넘어 진한 감동을 선사하는 이유는 타인의 삶에 온전히 스며든 저자의 헌신 덕분이다. 구독자 33만 명을 보유한 유튜버이자 전 강원도 교육청 행정국장 최수길 씨가 회고하는 일화는 그 고귀한 단면을 잘 보여준다. 화천군 7사단 인근에서 가난한 아이들을 위해 야학을 운영하던 시절, 청년 차석용은 굶주린 제자들에게 자신의 식사까지 기꺼이 내어주며 절망에 빠진 소년의 미래를 환하게 밝혔다.

누군가에게 대가 없이 베푼 선의는 오랜 세월을 거쳐 또 다른 빛으로 피어난다. 훗날 LG생활건강 후배들이 그에게 전한 편지에서 노벨문학상 수상자 한강 작가의 강연을 인용하며, 매 순간 온 힘을 다해 빚어낸 65분기 연속 영업이익 증가라는 기적에 찬사를 보내는 장면 역시 이와 궤를 같이한다. 진심으로 사람을 대하는 태도야말로 그 어떤 화려한 수치보다 강인한 생명력을 지님을 방증한다.


흔들리지 않는 원칙과 정직이라는 타협 불가능한 가치

오랜 경영 현장에서 검증된 구체적인 지침들은 조직을 이끄는 리더들에게 더없이 귀중한 나침반이 된다. 2005년부터 2020년까지 사내 임직원들과 나누었던 글 모음집에서 저자는 일관성 있는 원칙이 조직의 속도와 신뢰를 단단하게 구축한다고 역설한다. 남들이 지나치기 쉬운 마지막 5퍼센트의 미세한 차이를 집요하게 파고드는 태도만이 기업의 생존을 담보한다는 지적은 매섭고 치밀하다. 특히 '오행무상승'을 언급하며 호황기일수록 긴장의 끈을 조여야 한다는 경고는 불확실성의 시대를 건너는 현시대 기업들이 반드시 새겨들어야 할 아픈 조언이다. 아울러 문제 발생 시 진실을 감추려는 행위가 훗날 100배의 비용을 청구한다는 1:10:100의 법칙을 제시하며, 리더가 갖춰야 할 최우선 덕목으로 언제나 정직을 꼽는 대목은 정도 경영의 본질을 관통한다.


평생 곁에 두고 꺼내 읽고 싶은 소장 가치

이 책이 단순한 경영 지침서나 성공담을 넘어 특별한 소장 가치를 지니는 이유는 숫자와 실적 이면에 숨겨진 인간적인 고뇌와 성찰을 담담하게 기록했기 때문이다. 스테이튼아일랜드 공장 폐쇄 과정에서 한 시대를 품위 있게 마무리하고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는 법을 배웠다는 고백은 뼈아픈 실패를 경험한 이들에게 커다란 위안을 준다. 냉혹한 승부사의 화려한 무용담을 기대하고 책을 펼친 독자라면, 무주상보시를 실천한 우동집 주인의 사연을 통해 진정한 나눔과 배려의 의미를 묻는 저자의 겸허한 태도에 신선한 충격을 받을 것이다. 팍팍한 비즈니스 환경 속에서 어떻게 인간다움을 잃지 않고 조직을 이끌 것인지, 또 삶의 마지막 순간에 어떤 향기를 남길 것인지 고민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곁에 두고 읽어야 할 인생의 나침반 같은 도서다.


자본주의 최전선에서 건네는 진솔한 고백

<하심>은 흔한 자기 계발서나 위인전의 문법을 이탈하여 인문 서적에 가까운 고유한 결을 지닌다. 남을 밟고 올라서는 비법을 과시하는 대신, 자신의 부족함을 솔직히 인정하고 마음을 낮춘다는 하심의 철학을 고요히 고백한다. 회사가 흔들릴 때 도망치지 않고 자리를 지켜내며, 혼자 감당해야 하는 막중한 책임감의 무게를 서술한 대목은 가슴을 울린다. 조지 버나드 쇼의 문장처럼 삶은 자신을 찾는 과정이 아니라 스스로 창조해 나가는 과정임을 몸소 증명했다.

높은 자리에 오를수록 사람 앞에서 허리를 굽히고, 삶이 내어준 소나기 같은 인연들에 진심으로 감사하는 태도는 독자들에게 삶의 참된 의미를 묻게 한다. 치열한 비즈니스 생태계에서 평생을 싸워온 백전 노장이 인생의 황혼 녘에 이르러 우리에게 건네는 따뜻한 길잡이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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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경 - 기억과 상실, '치매'와 문학
이인현 지음 / 히스테리안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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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부터 다큐멘터리를 연출하며 타인을 섣불리 판단하지 않고 관찰하는 태도를 익힌 이인현 작가는 2018년부터 몸으로 마주한 현실을 텍스트로 담아내는 시도를 지속했다. <진동하는 것들>, <숨은 신>, <애도하는 귀>, <이 이야기는 너야> 등의 공저를 통해 기억과 자아의 관계성을 탐구해 온 작가의 고유한 시선은 신간 에세이 <호경>(히스테리안 출판)에서 한층 더 선명해진다. 이 책은 2017년 뇌출혈 이후 2020년 초기 혈관성 치매 진단을 받은 58세 '호경'을 다큐멘터리 감독의 시선으로 좇아가는 기록물이다. 이 책은 치매 당사자의 의학 보고서도 아니며, 그를 헌신적으로 보살피는 가족의 수기도 아니다. 가족이나 전담 돌봄 노동자의 시선이 아닌 제3의 관찰자가 치매인의 파편화된 기억을 직조해 나가는 과정이 지니는 의미에 주목한다. 기억 상실이라는 취약함 앞에서 인간의 존엄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를 고민하는 독자, 질병 서사와 돌봄의 새로운 관계 맺기에 관심 있는 이들에게 적극 권하고 싶다.


낯선 관찰자가 기록한 기억의 재구성

치매를 다룬 기존의 많은 텍스트가 질병을 앓는 당사자의 혼란이나 그를 헌신적으로 돌보는 가족, 돌봄자의 고충에 집중했다면 이 책은 전혀 다른 궤도를 그린다. 치매안심센터에서 안내 봉사를 하던 작가는 믹스커피를 좋아하고 항상 잔잔한 미소를 띠는 인물 '호경'을 만난다. 돌봄의 의무가 없는 타인의 위치에서 작가는 호경의 사라져 가는 기억을 애써 교정하려 하거나 질병의 비극성을 과장하지 않는다. 그저 테이블에 마주 앉아 호경이 자주 쓰는 "똑같아요"라는 말의 여백을 가만히 응시하고 컵이 남긴 물 자국을 바라볼 뿐이다. 나아가 작가는 출퇴근길 지하철 환승 통로를 걸으며 뇌과학 서적 <오작동하는 뇌>를 읽고, 기억과 기억 사이에 놓인 통로가 피나 단백질로 가로막히는 생물학적 메커니즘을 탐구하며 치매인의 상태를 편견 없이 이해하려 노력한다. 발터 벤야민의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에 등장하는 문장처럼 과거를 인식하는 일은 원래 어떠했는가를 아는 것이 아니라, 위험의 순간에 섬광처럼 스치는 어떤 기억을 붙잡는 일이다. 작가는 호경의 머릿속에서 희미해지는 과거의 파편들을 주워 모으며 한 인간이 지나온 생의 윤곽을 조심스럽게 더듬어 간다. 이러한 접근은 대상화의 위험을 피하면서도 인물의 내면에 다가가는 다큐멘터리 창작자 특유의 섬세한 방법론을 엿보게 한다.


지워진 시간 속에서 인간의 고유성을 찾다

전체 치매 발병 원인의 20~30% 정도를 차지하는 혈관성 치매는 호경의 화려했던 과거를 채도가 사라진 회색의 시간으로 탈색해 버렸다. 일본에서 대학교와 석사 과정을 마치고 20년 넘게 직장 생활을 했던 호경은 정작 자신이 어디서 어떻게 살았는지 명확히 떠올리지 못한다. 작가는 노트북을 펼쳐 구글 맵을 실행하고 도쿄 지하철 노선을 따라 게이오타마센터, 나가야마, 세타가야 등 낯선 지명들을 짚어가며 호경의 잃어버린 경로를 함께 추적한다. 비록 지도 위에서 학교를 찾는 일은 실패로 돌아가지만 이 과정 자체로 커다란 의미를 지닌다. 호경이 빨간색 형광펜으로 테두리를 그리고, 정성껏 적어 내려간 일본어 시 <추억의 길>과 <내가 좋아하는 바다!>는 그의 내면을 투명하게 비춘다. 아침의 고요함(아사나기)과 저녁의 잔잔함(유우나기)을 언급하며 바다에 취하고 싶다는 낭만적인 시구, 눈 내리는 길을 혼자 걷는 차가움을 묘사한 문장들은 치매라는 거대한 이름표 뒤에 가려진 그의 생생한 감각을 증명한다. 내용보다 존재 자체가 절대적인 비밀이라는 어린 시절의 일기장 꾸러미, 전라남도 승주군 냇가를 건너며 울었던 최초의 흩어진 기억 그리고 1992년 여름 에노시마역 플랫폼 벤치에 앉아 있던 사진 한 장은 소멸해 가는 개인의 고유성을 지켜내려는 애틋한 연대의 흔적이다.


질병을 넘어선 연대와 상호 작용의 가능성

행복이 무엇이냐는 작가의 질문에 호경은 걱정이 없으면 행복한 것 같다고 덤덤하게 답한다. 집 계약 기간이 끝나는 것과 좋아하는 일을 하며 돈을 벌 수 있을까 하는 현실적인 걱정을 토로하는 작가 앞에서 질병과 기억 상실이라는 거대한 상실을 마주한 호경의 평온한 태도는 진중한 사유의 계기를 제공한다. 기억을 상실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잃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온 가족에게 짐이 될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동반한다. 허나 작가는 이 두려움의 한가운데에 선 치매인 호경을 그저 보호받아야 할 취약한 환자로만 대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를 동등한 대화 상대로 대우하며 미세한 표정 변화와 농담까지도 활자화한다. 매일 새벽 4시마다 출근길에 문자를 건네는 친구 안과 아침 8시경 어김없이 답장을 보내는 호경의 교류는 질병 속에서도 관계가 지속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특히 호경이 하는 말을 다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무슨 말을 하고 싶었는지 끝까지 들어주는 작가의 다정한 태도는 우리가 취약해진 타인과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 본질적인 질문을 던진다. 혈연이나 제도의 굴레를 벗어난 사려 넘치는 관찰과 대화가 어떻게 한 사람의 부서진 세계를 껴안을 수 있는지 보여주는 이 텍스트는 덮고 난 후에도 여운을 남긴다.


소설과 에세이의 경계를 넘나드는 기억의 문학

문학평론가 최가은은 책 말미의 해제 <비밀과 답장: 기억-하기>를 통해 이 책이 지닌 층위를 정밀하게 짚어낸다. 평론가는 작가가 호경의 기억을 좇는 과정을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소설 <서배스천 나이트의 진짜 인생>과 교차하며 팩트와 픽션이 기묘하게 얽히는 지점을 포착한다. 에노시마 여행 사진에서 출발해 오키나와 육군병원 하에바루 갱도 제20호 천장에 새겨진 한국인 성씨 '강'을 마주하는 장면은 압권이다. 사실과 허구가 절묘하게 뒤섞인 이 가상의 오키나와 여행은 개인의 파편화된 기억이 어떻게 잊힌 역사와 장소의 상실로 가닿는지를 보여준다. 최가은 평론가의 지적처럼 이 책에서 기억은 봉인된 편지 속에 고여 있는 사적 소유물이 아니다. 산산조각 난 편지의 잔해를 주워 모아 기꺼이 답장을 쓰기로 마음먹는 아이의 모습은 타인의 미약한 삶에 응답하려는 작가의 굳건한 태도와 포개어진다.


약한 고리를 자처한 만남과 질병 언어의 재정의

작가 이인현이 호경을 처음 마주한 것은 2025년 봄, 노원구에서 진행된 초기 치매 인식 개선 프로젝트 <광고 안 리모컨 with 노원>을 통해서였다. 5개월 남짓한 공식 활동이 종료된 후에도 작가는 1년 이상 만남을 지속하며 호경이라는 미지의 세계로 걸어 들어간다. 작가의 말에서 밝히듯, 과거 세월호 참사 현장을 겪으며 무거운 마음에 다큐멘터리 작업을 그만두어야 했던 창작자에게 타인의 텅 빈 공백을 기록하는 행위는 남다른 고뇌를 동반했다. 그럼에도 그는 삶을 그저 받아쓰는 관찰자를 넘어 특정 조건에 처한 두 사람이 함께 시간을 직조해 나가는 '약한 고리'가 되기를 자처한다. 이어지는 <치매의 언어> 챕터는 질병을 대하는 저자의 올곧은 태도를 방증한다. 어리석다는 뜻을 내포한 한자어 치매(癡呆)나 마음이 박탈된다는 라틴어 어원 대신, 인지 저하 상태에서도 끝내 자아를 지키려 분투하는 환자의 주체성을 역설한다. 이 시선은 문화인류학 연구자 안희제의 추천사처럼 사진과 편지, 대화라는 불완전한 조각들로 서로에게 기꺼이 시간을 내어주는 다정하고 적극적인 교감으로 이어진다. 오키디스트 스튜디오가 작업한 채도 높은 와인색 표지 하단에 호경의 실제 삐뚤어진 손 글씨를 고스란히 배치한 디자인 역시, '치매'라는 병명 뒤에 가려진 한 인간의 생동하는 존재감을 증명하려는 세심한 장치다.


상실의 시대에 띄우는 연결과 응답의 글쓰기

망각이라는 거대한 파도 앞에서 한 인간의 존엄은 어떻게 보존될 수 있는가. 히스테리안 신간 <호경>은 이 까다로운 질문에 대한 성실한 응답이다. 호경은 외국어가 모국어보다 편해진 낯선 감각 속에서 한국 생활을 이어가지만, 그 혼란스러운 궤적조차 그의 삶을 구성하는 중요한 조각이 된다. 누군가의 잃어버린 생애를 온전한 형태로 복원하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과업일지 모른다. 하지만 지워진 공백을 함부로 채워 넣지 않고 미완의 상태 그대로를 존중하며 함께 기억의 언저리를 서성이는 글쓰기 행위는 타인과 새롭게 연결되는 탁월한 매개체가 된다. 가족과 전담 의료진의 시야 바깥에서 섣부른 동정을 거둔 채, 타인의 목소리에 끝까지 귀 기울이는 관찰자의 존재는 우리 사회의 돌봄 담론을 한 차원 더 넓고 자유로운 곳으로 이끈다. 이 특별한 기록물은 단절의 징후 속에서도 인간이 서로를 향해 묵묵히 손을 뻗고 답장을 써 내려갈 수 있다는 연대의 가능성을 분명히 입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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