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심 - 내 삶에 내렸던 아름다운 소나기들
차석용 지음 / 열린책들 / 202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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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자 너머의 사람을 향한 단단한 시선

열린책들에서 출간된 차석용 전 휴젤 명예회장의 신간 <하심>은 출간 직후 주요 서점에서 베스트셀러에 오르며 수많은 독자와 평론가의 찬사를 받는 에세이다. 저자는 28년간 한국 P&G, 쌍용제지, 해태제과, LG생활건강 등 굴지의 기업에서 최고경영자를 역임하며 무려 74분기 연속 영업이익 흑자라는 경이로운 성과를 일궈낸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최근 인터뷰에서 그는 무엇을 이루었는지 자랑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세상에 진 빚을 헤아리고 고마운 인연들에게 진심 어린 감사 인사를 전하고자 펜을 들었다고 밝혔다. 철저한 성과주의자로 오해받기 쉬운 화려한 이력 이면에 자리한 사람 중심의 철학, 위기 속에서도 흔들림 없이 지켜낸 원칙들을 세밀하게 조명한다. 경영 일선에 있는 리더뿐만 아니라 불확실성의 시대를 견뎌내는 모든 직장인, 삶의 방향성을 고민하는 일반 독자에게 적극 권하고 싶은 책이다.


삶의 흔적에서 길어 올린 통찰과 위로

이 책의 인상적인 대목은 초심을 지키는 태도와 윗사람이 갖춰야 할 겸손이다. 저자는 여는 글에서 '와비사비'라는 오래된 미학을 인용하며, 새것의 상태보다 세월의 흔적과 자연스러운 변화 속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성숙한 시선을 강조한다. <오디세이아>가 전하는 삶의 지혜를 빌려 유혹에 흔들릴 때 필요한 것은 강한 의지가 아니라 처음 정한 길로 자신을 되돌리는 원칙임을 짚어내는 통찰이 매력적이다. 특히 개성 출신 어머니가 보여준 굳건한 믿음과 천안에 모신 아버지를 향한 절절한 그리움을 박목월의 시 <하관>에 빗대어 회고하는 장면은 잔잔한 여운을 남긴다. 고등학교 3학년 시절 불같은 연애 속에서도 묵묵히 곁을 지켜준 아내와의 일화는 그가 평생 의지해 온 따스한 버팀목이 무엇인지 짐작하게 한다. 경기고등학교 입시에 실패했을 때조차 질책 대신 스스로 깨달을 때까지 기다려 준 부모님의 교육 방식은 훗날 그가 타인의 가능성을 존중하는 리더로 성장하는 든든한 밑거름이 되었다. 영웅은 실패하지 않는 자가 아니라 포기하지 않는 자라는 깨달음은 숱한 좌절을 마주하는 현대인에게 다시 일어서야 할 분명한 명분을 제시한다.


위기를 돌파하는 힘, 결국은 확신과 열정

평생을 전문경영인으로 헌신해 온 저자의 궤적은 난관 극복과 혁신의 연속이었다. 서른두 살 늦깎이로 P&G 미국 본사에 입사해 경쟁하기에 약해 보인다는 동기생의 냉정한 평가를 들었을 때, 이를 부정하는 대신 새벽 6시 출근을 자처하며 스스로 한계를 넘어섰다. 쌍용제지 인수 과정에서는 복잡한 수치나 논리 이전에 마음이 먼저 반응하는 첫 2초의 직관을 신뢰하는 결단력을 보여준다. 훗날 LG생활건강 재임 시절 코카콜라 한국 보틀링 사업 인수를 앞두고 막대한 적자 구조 탓에 모두가 우려했을 때, 제대로 경영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확신으로 돌파구를 찾았다. 이때 고(故) 구본무 회장을 찾아가 너무 튀어서 불편하지 않냐고 조심스레 물었을 때, 우리 그룹도 이제는 바뀌어야지.. 라며 믿음을 실어준 일화는 진정한 리더십의 표본을 여실히 증명한다. 홍콩에서 함께 일했던 정직한 경영자의 이름을 단 닥터그루트 브랜드 론칭 스토리에서 엿볼 수 있듯, 성과라는 지표에 매몰되기보다 현장에서 뛰는 직원을 먼저 챙기고 철학을 녹여내는 균형 감각이야말로 그가 빚어낸 성공의 진정한 비결이다.


누군가의 삶을 바꾼 따뜻한 소나기

<하심>이 단순한 경영 성공담을 넘어 진한 감동을 선사하는 이유는 타인의 삶에 온전히 스며든 저자의 헌신 덕분이다. 구독자 33만 명을 보유한 유튜버이자 전 강원도 교육청 행정국장 최수길 씨가 회고하는 일화는 그 고귀한 단면을 잘 보여준다. 화천군 7사단 인근에서 가난한 아이들을 위해 야학을 운영하던 시절, 청년 차석용은 굶주린 제자들에게 자신의 식사까지 기꺼이 내어주며 절망에 빠진 소년의 미래를 환하게 밝혔다.

누군가에게 대가 없이 베푼 선의는 오랜 세월을 거쳐 또 다른 빛으로 피어난다. 훗날 LG생활건강 후배들이 그에게 전한 편지에서 노벨문학상 수상자 한강 작가의 강연을 인용하며, 매 순간 온 힘을 다해 빚어낸 65분기 연속 영업이익 증가라는 기적에 찬사를 보내는 장면 역시 이와 궤를 같이한다. 진심으로 사람을 대하는 태도야말로 그 어떤 화려한 수치보다 강인한 생명력을 지님을 방증한다.


흔들리지 않는 원칙과 정직이라는 타협 불가능한 가치

오랜 경영 현장에서 검증된 구체적인 지침들은 조직을 이끄는 리더들에게 더없이 귀중한 나침반이 된다. 2005년부터 2020년까지 사내 임직원들과 나누었던 글 모음집에서 저자는 일관성 있는 원칙이 조직의 속도와 신뢰를 단단하게 구축한다고 역설한다. 남들이 지나치기 쉬운 마지막 5퍼센트의 미세한 차이를 집요하게 파고드는 태도만이 기업의 생존을 담보한다는 지적은 매섭고 치밀하다. 특히 '오행무상승'을 언급하며 호황기일수록 긴장의 끈을 조여야 한다는 경고는 불확실성의 시대를 건너는 현시대 기업들이 반드시 새겨들어야 할 아픈 조언이다. 아울러 문제 발생 시 진실을 감추려는 행위가 훗날 100배의 비용을 청구한다는 1:10:100의 법칙을 제시하며, 리더가 갖춰야 할 최우선 덕목으로 언제나 정직을 꼽는 대목은 정도 경영의 본질을 관통한다.


평생 곁에 두고 꺼내 읽고 싶은 소장 가치

이 책이 단순한 경영 지침서나 성공담을 넘어 특별한 소장 가치를 지니는 이유는 숫자와 실적 이면에 숨겨진 인간적인 고뇌와 성찰을 담담하게 기록했기 때문이다. 스테이튼아일랜드 공장 폐쇄 과정에서 한 시대를 품위 있게 마무리하고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는 법을 배웠다는 고백은 뼈아픈 실패를 경험한 이들에게 커다란 위안을 준다. 냉혹한 승부사의 화려한 무용담을 기대하고 책을 펼친 독자라면, 무주상보시를 실천한 우동집 주인의 사연을 통해 진정한 나눔과 배려의 의미를 묻는 저자의 겸허한 태도에 신선한 충격을 받을 것이다. 팍팍한 비즈니스 환경 속에서 어떻게 인간다움을 잃지 않고 조직을 이끌 것인지, 또 삶의 마지막 순간에 어떤 향기를 남길 것인지 고민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곁에 두고 읽어야 할 인생의 나침반 같은 도서다.


자본주의 최전선에서 건네는 진솔한 고백

<하심>은 흔한 자기 계발서나 위인전의 문법을 이탈하여 인문 서적에 가까운 고유한 결을 지닌다. 남을 밟고 올라서는 비법을 과시하는 대신, 자신의 부족함을 솔직히 인정하고 마음을 낮춘다는 하심의 철학을 고요히 고백한다. 회사가 흔들릴 때 도망치지 않고 자리를 지켜내며, 혼자 감당해야 하는 막중한 책임감의 무게를 서술한 대목은 가슴을 울린다. 조지 버나드 쇼의 문장처럼 삶은 자신을 찾는 과정이 아니라 스스로 창조해 나가는 과정임을 몸소 증명했다.

높은 자리에 오를수록 사람 앞에서 허리를 굽히고, 삶이 내어준 소나기 같은 인연들에 진심으로 감사하는 태도는 독자들에게 삶의 참된 의미를 묻게 한다. 치열한 비즈니스 생태계에서 평생을 싸워온 백전 노장이 인생의 황혼 녘에 이르러 우리에게 건네는 따뜻한 길잡이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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