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집의 탐스러움 픽셔너리 2
정기현 지음 / 북다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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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다정함이 파고든 발칙하고 도발적인 세계

2025년 이상문학상 우수상을 수상한 정기현 작가의 신작 소설 <이웃집의 탐스러움>은 현대인의 고립을 위로하는 흔한 힐링물의 공식을 영리하게 배반한다. 2023년 웹진 림(LIM)에 <농부의 피>를 발표하고 소설집 <슬픈 마음 있는 사람>으로 주목받은 작가는 이번 작품에서 타인과의 관계 맺기가 지닌 아찔한 매력과 위험성을 날카롭게 해부한다. "우리는 이웃이다. 그리고 나는 이웃 그다음이 있다고 자꾸만 믿게 되는 것이다"라는 문장처럼.. 이 책은 삭막한 도심 속 이웃이라는 물리적 거리가 어떻게 가장 내밀하고 전복적인 관계로 변모할 수 있는지를 도발적으로 그려냈다.


705호와 706호, 경계를 지우는 사물들

2024년 마지막 날, 충주를 떠나 서울 반포의 아파트 705호로 이사 온 화자 기현은 706호의 이웃 기은, 준영과 마주한다. 철저히 고립된 1인 가구의 삶을 예상했던 기현의 원칙은 이들의 무람없는 다정함 앞에서 맥없이 허물어진다. 이사 과정에서 기현이 버린 가구들을 기은과 준영이 다시 706호로 들이면서 그들은 안면을 트고 가까워지기 시작한다. 창문을 통해 감자수프를 나누며 서로의 시공간을 침범하기도 하면서..

사물과 음식이 오가는 사이 세 사람의 관계는 단순한 이웃사촌을 넘어선다. 낯선 채로도 다정할 수 있다는 사실은 기현에게 해방감을 주는 동시에 친해지고 싶어서 수상해지는 마음의 발단이 된다.


이야기의 폭력성 & 동장의 죽음

관계의 밀도가 짙어지는 가운데, 세 사람은 래미안 단지의 '한마을 한마음 대축제' 연극 무대를 준비하게 된다. 기현은 희곡을 쓰기 위해 도서관에서 최인훈의 <어디서 무엇이 되어 만나랴>, 손턴 와일더의 <우리 읍내> 등을 읽으며 가상의 '동장 살인 사건'을 극본으로 엮어낸다. 하지만 축제를 전후로 실제 동장이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지면서 소설은 서늘한 국면을 맞이한다. 강보원 평론가가 지적했듯.. 이는 '이야기가 지닌 위험성'이 발현되는 순간이다. 기현 일행은 자신들의 연극이 동장의 죽음에 불씨를 지폈을지도 모른다는 기묘한 부채감에 사로잡히며 허구의 이야기가 현실의 삶을 송두리째 흔들어놓는 아찔한 경험을 겪는다.


우리는 '이웃 그다음'을 상상할 수 있을까

이 소설이 도달하는 파격적인 지점은 기현과 기은, 준영이 꿈꾸는 새로운 연대의 형태에 있다. 기현은 혈연이나 법적 제도로 묶인 가족을 넘어, 세 사람이 성적인 만족까지도 공유할 수 있는 느슨하고도 급진적인 관계를 상상한다. 강보원 평론가가 언급한 "한 사람이 피곤한 날 다른 두 사람이 서로에게 성적인 만족을 선사하는 것"이라는 발칙한 상상은.. 타인에 대한 무관심이 당연함, 공공연한 미덕이 된 시대에 인간이 어디까지 서로에게 가닿을 수 있는지를 묻는 도발적인 질문이다. 함윤이 소설가의 추천사처럼 이들의 이야기는 배신하기에 너무 사랑스럽고 탐낼 수밖에 없는 매력을 지녔다. 동봉된 작가의 친필 편지에서 "글을 쓰고 바로 옆집 분과 이웃이 되었다"라는 고백은 소설의 힘이 현실로 침투하고 전이되는 기적을 방증한다.


<이웃집의 탐스러움>은 고립을 자처하는 현대인들에게 색다르고 이타적인 관계를 꿈꾸게 하는, 의미 있는 문학적 성취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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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만 있다면
고사카 루카 지음, 김지연 옮김 / 모모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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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80만 명의 독자를 울린 베스트셀러 <남은 인생 10년>의 저자 고사카 루카의 미발표 유작 <살아만 있다면>을 펼쳤다. 어릴 때부터 소설 쓰기를 사랑했던 저자는 불치병 진단을 받고 투병하는 중에도 집필을 멈추지 않았다. 문고본 출간을 앞둔 2017년 2월.. 향년 39세의 나이로 안타깝게 세상을 떠났으나 이후 유가족이 컴퓨터에서 이 원고를 발견하여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다. 이 책은 시한부 삶을 살았던 작가가 생의 끝자락에서 길어 올린 치열한 의지를 담고 있다. 죽음의 문턱 앞에서도 삶을 향한 갈망을 놓지 않았던 저자의 자전적 고백과도 같은 이 작품은 절망 속에 웅크린 이들에게 어떻든 살아갈 이유를 건넨다.


블랙홀 같은 여자와 폐허 같은 남자가 빚어내는 로맨스

소설의 화자이자 이야기의 출발점은 초등학교 6학년 소년 지카게다. 부당한 학교 폭력에 시달리며 스스로 목숨을 끊을 결심까지 하던 지카게는 심장병으로 병원에 입원 중인 이모 하루카의 병실에서 수신인이 비어 있는 한 통의 편지를 발견한다. 소년은 사랑하는 이모를 위해 신칸센을 타고 홀로 오사카로 향한다. 편지의 주인공인 하네다 아키하를 만나며 서사는 7년 전 하루카의 찬란하고도 아팠던 대학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어느 날 아키하 앞에 나타난 블랙홀 같은 여자 하루카.. 그녀 앞에 나타난 폐허 같은 남자 아키하는 미친 듯이 열렬한 사랑에 빠져든다. 작가는 봄을 뜻하는 하루카와 가을의 아키하, 겨울을 상징하는 언니 후유쓰키 그리고 휠체어를 타는 여름의 나츠메까지 사계절의 이름을 인물들에게 부여하며 얽히고설킨 가족애와 가혹한 운명의 굴레를 예리한 필치로 그려낸다.


끝난 뒤에도 계속되는 처절한 사랑 이야기

인상적인 대목은 상처 입은 두 영혼이 서로의 결핍을 채워가며 처절한 사랑을 이어가는 과정이다. 방 안을 장식한 싸구려 형광 스티커가 은하수처럼 흘러내리던 밤.. 우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경이로움 속에서 아키하가 처음으로 곁에 있는 사람의 체온에 가슴 떨림을 느끼는 장면은 섬세한 결을 지닌다. 화려한 외모 뒤에 죽음의 그림자를 안고 있던 하루카는 냉담한 아키하를 향해 맹목적으로 직진한다. 지켜야 할 것과 버릴 수 없는 것 사이에서 결국 서로를 놓아버렸지만, 끝난 줄 알았던 그들의 이야기는 지카게가 찾아낸 편지를 통해 다시금 박동하기 시작한다. 죽음을 향해 걷던 12살 소년이 끝난 뒤에도 계속되는 이 애절한 사랑 이야기를 추적하며 내일을 살아갈 힘을 얻는 아이러니는 짜임새 있는 구조 속에서 유감없이 빛을 발한다.


유일무이한 소장 가치를 지닌, 오래도록 여운이 남는 걸작

고사카 루카의 미발표 유작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책장을 넘기면 활자 하나하나에 깃든 작가의 숨결이 애틋하게 다가온다. 작가가 병실에 갇힌 하루카의 입술을 빌려, 내일을 포기하려 했던 치카게의 발걸음을 통해 우리에게 남기고자 했던 메시지는 페이지 곳곳에 선명히 새겨져 있다.

"반드시 다시 이어질 수 있을 거야. 살아만 있다면."이라는 문장은 어떤 거대한 절망이 닥쳐와도 생을 포기하지 말라는 작가의 절박하면서 숭고한 유언이다. 이 작품은 시한부 소재의 단조로운 슬픔에 매몰되지 않고 삶을 향한 눈부신 찬가로 승화시켰다. 생의 감각이 무뎌지거나 삶의 방향을 잃어버렸을 때 곁에 두고 읽고 싶은 책이기에 개인 서재에 꽂아둘 소장 가치는 충분하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탄생한 <살아만 있다면>..

쉽게 잊히지 않는 긴 여운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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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파 in 도쿄 - 일본 미술관에서 만나는 모네와 고흐, 피카소
전원경 지음 / 세종(세종서적)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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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과 도시를 엮어내는 예리한 시선, 가까운 곳에서 마주한 빛의 향연

예술과 음악, 역사와 도시를 연결하는 탁월한 통찰력으로 대중과 소통해 온 전원경 작가의 신작 <인상파 in 도쿄>는 팬데믹 이후 변화한 예술 여행의 지형도를 포착한 책이다. 연세대학교 실내건축학과를 거쳐 영국 시티대학교와 글래스고대학교에서 예술비평과 문화콘텐츠 산업을 연구한 저자는 잡지 기자 시절부터 다져온 탄탄한 필력으로 <런던 미술관 산책>, <예술, 도시를 만나다> 등 다수의 저서를 집필해 왔다. 최근 유튜브 <삼프로TV> 등을 통해 예술 교양의 대중화에 앞장서고 있는 그는 다년간 유럽 미술관 투어를 진행한 베테랑답게 치솟는 비용으로 멀어진 유럽 대신 '가까운 도쿄'라는 현실적이고 매력적인 대안을 제시한다. 이 책은 단순히 전시 관람 안내서를 넘어 일본이 서양 미술을 수용해 온 방대한 문화적 맥락을 섬세하게 짚어주며, 인상파 회화를 전혀 새로운 시각으로 감상하게 만드는 지적 즐거움을 선사한다.


인상주의의 태동, 찰나의 빛을 영원으로 박제하다

책은 총 3장의 구성을 통해 인상주의의 탄생부터 도쿄의 공간에 자리 잡기까지의 궤적을 추적한다.1장에서는 19세기 후반 파리를 중심으로 태동한 빛의 예술가들을 톺아본다. 사진기의 등장이라는 시대적 위기 속에서 화가들이 어떻게 대상을 똑같이 재현하는 강박에서 벗어나 찰나의 인상을 화폭에 담기 시작했는지 그 치열한 고민을 담아낸다. 클로드 모네,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 카미유 피사로 등 인상주의 거장들이 세상의 냉대와 조롱 속에서도 자신들만의 철학을 굽히지 않고 빚어낸 찬란한 명작들은 잔잔한 여운을 남긴다. 대기의 습도와 흔들리는 포플러 나무에 스치는 색채까지 포착하려 했던 이들의 눈물겨운 노력은 오늘날 우리가 여러 인상파 화폭 앞에서 느끼는 벅찬 감동의 기원을 설명해 준다.


우키요에와 자포니즘, 동서양 예술의 경이로운 교차

2장 & 3장에서 전개되는 우키요에와 자포니즘에 대한 통찰은 이 책의 가장 독창적이고 흥미로운 대목이다. 일본의 에도 시대에 서민들의 일상과 풍경을 담아낸 다색 목판화 우키요에는 도자기의 포장지로 쓰여 우연히 유럽으로 건너갔다. 목판화 특유의 평면적이고 파격적인 구도, 강렬한 색감은 19세기 유럽 화단에 엄청난 충격을 안겼다. 서양미술의 근간이던 원근법을 과감히 무시한 가쓰시카 호쿠사이의 <가나가와의 큰 파도> 같은 작품은 모네와 에드가 드가에게 신선한 영감을 주며 '자포니즘'이라는 거대한 흐름을 만들어냈다.

당시 유럽 화가들은 우키요에를 모방하고 재해석하여 자신들의 독자적인 화풍으로 발전시켰다. 빈센트 반 고흐가 우타가와 히로시게의 명작을 모사한 <다리 위의 소나기>를 남기고 훗날 <아몬드 꽃>으로 자신만의 색채를 완성해 나간 에피소드, 1870년대 파리를 휩쓴 자포니즘 열풍을 역사적 사료와 함께 입체적으로 조명한 부분이 흥미롭다. 서양의 화가들이 낯선 동양의 예술에서 근대 회화의 새로운 돌파구를 찾았다는 사실은 예술이 어떻게 국경을 넘어 서로를 매혹하는지 증명한다.


자포니즘의 찬란한 빛 이면, 엇갈린 동아시아의 역사

일본의 우키요에가 유럽 화단을 뒤흔들고 서양 화가들과 활발히 교류하던 19세기 후반, 안타깝게도 당시 조선은 세계 미술사에서 철저히 소외되어 있었다. 여기에는 뼈아픈 역사적, 문화적 배경이 자리한다.

일본이 메이지 유신과 적극적인 개항을 통해 파리 만국박람회 등에 자국 문화를 전략적으로 수출하던 시기.. 조선은 쇄국정책으로 서구와의 교류를 엄격히 통제하고 있었다. 뒤늦게 문호를 개방했지만 제국주의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국가적 존립마저 위태로웠기에 예술을 통한 교류나 막대한 자본을 바탕으로 한 명작 수집은 불가능한 과제였다.

나아가 상업적인 대량 인쇄물로서 서민들의 일상을 역동적으로 담아낸 우키요에와 달리, 당시 조선의 미술은 정신적 수양을 중시하는 사대부 중심의 문인화와 진경산수화가 주를 이루었다. 이러한 예술관의 근본적인 차이 역시 상업적 유통을 매개로 한 서양 미술계와의 접점을 형성하기 어려운 요인으로 작용했다. 찬란한 인상파 걸작들이 도쿄에 안착하기까지 일본이 누렸던 자본과 문화적 교류의 호사를 읽어 내려가다 보면, 동시대를 살았으나 철저히 고립되었던 우리 조선 근대사의 쓰라린 상흔이 번지고 겹쳐진다.


도쿄에서 만나는 인상파의 숨결, 5대 미술관 순례

서양의 예술가들이 일본의 우키요에에 매료되었다면, 근대화 이후의 일본은 막대한 자본을 바탕으로 인상파 원화를 열정적으로 수집했다. 저자는 부록을 통해 도쿄에서 서양미술의 정수를 만끽할 수 있는 5대 미술관을 상세히 소개하며 실용적인 여행 가이드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 미술관에서 감상할 수 있는 소장 작품은 책에서 자세히 확인할 수 있다!

  • 도쿄 국립서양미술관 : 명실공히 도쿄를 대표하는 서양회화 공간으로 우에노 공원에 자리한다. 프랑스 정부로부터 반환받은 마쓰카타 컬렉션을 대중에 공개하기 위해 1959년 개관했다. 르 코르뷔지에가 설계하여 일본 중요문화재로 지정된 본관 앞에는 로댕의 조각상들이 관람객을 맞이하며 르네상스부터 20세기까지 아우르는 방대한 컬렉션을 자랑한다.

  • 아티존 미술관 : 도쿄역 인근에 위치하며 전체 컬렉션 중 인상파가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크다. 카미유 피사로의 <부지발의 센강>, <채소 정원> 등 유려한 명작들을 마주할 수 있다.

  • 솜포 미술관 : 도쿄 신주쿠에 위치하며, 전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빈센트 반 고흐의 우수작 <해바라기>를 소장한 곳으로 유명하다. 인상파 관련 기획전이 자주 열려 미술 애호가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 폴라 미술관 : 자연 친화형 건축으로 하코네의 수려한 주변 경관과 세련된 건물이 탁월한 조화를 이룬다. 풍경 속에서 예술을 음미하는 특별한 경험을 제공한다.

  • 도쿄 후지 미술관 : 하치오지에 위치해 있으며 폭넓은 서양미술 컬렉션을 감상할 수 있는 의미 있는 장소다.


익숙한 도시에서 마주한 낯선 감동

세종서적 신간 <인상파 in 도쿄>가 지닌 가장 큰 의미는 비행기로 단 두 시간 거리에 있는 익숙한 도시 도쿄를 전혀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게 만든다는 점이다. 단순히 작품을 나열하는 것을 넘어 역사와 문화, 동아시아의 시대적 맥락 속에서 미술사를 엮어내는 저자의 스토리텔링은 무척 짜임새가 있고 흥미롭다.

류창호 하나투어 부사장의 추천사처럼 좋은 책 한 권이 여행지 전체의 풍경을 바꿔놓듯, 이 책은 도쿄라는 도시에 다채로운 결을 더해준다. 언젠가 일본행 캐리어에 반드시 담아가야 할 든든한 예술 가이드이자, 방구석에서 훌륭한 도슨트의 해설을 들으며 비밀스러운 정원을 산책하는 듯한 탁월한 예술 교양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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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날레 - 끝까지 강하고 자유로운 나
수전 구바 지음, 정지인 옮김 / 북하우스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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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까지 강하고 자유로운 나를 증명해 낸 노년 여성들의 이야기를 담은 북하우스 신간 <피날레>는 창조적 장수의 경이로운 기록을 남긴 명작이다. 저자 수전 구바는 샌드라 길버트와 함께 <다락방의 미친 여자>, <남자 없는 나라> 3부작, <말들의 전쟁> 등을 집필하며 19세기와 20세기를 아우르는 페미니즘 비평의 이론적 기틀을 완성한 저명한 영문학자다. 방대한 학술 작업을 이어간 공헌을 인정받아 2012년 전미도서비평가협회 평생공로상을, 2020년에는 미국현대언어학회 평생공로상을 받았다. 2008년 예순넷의 나이에 말기 난소암으로 3년에서 5년이라는 시한부 선고를 받은 그녀는 절망 대신 뉴욕 타임스에 칼럼을 연재하고 2012년 실험적인 신약 임상시험에 참여하며 삶의 의지를 다졌다. 바늘과 튜브가 피부를 뚫고 들어오는 암담한 투병 속에서도 저자는 창의력을 유지한 장수 여성들의 전기적 정보를 탐구하며 노년기의 예술적 가능성을 집요하게 추적했다.


목차를 따라 주요 내용을 짚어 보면..


1부 연인들, 관습을 타파한 파격의 사랑

빅토리아 시대의 조지 엘리엇은 예순 살에 스무 살 연하의 존 크로스와 파격적인 결혼을 감행하며 사회적 비난에 맞섰다. 소설가 콜레트는 마흔일곱에 열여섯 살 의붓아들과 연애를 시작했고, 노년에 관절염으로 극심한 통증을 겪으면서도 휠체어에 의지한 채 감각적인 쾌락과 창작의 열의를 놓지 않았다. 화가 조지아 오키프는 황반변성으로 시력을 잃어가는 시련 속에서도 젊은 조수 후안 해밀턴과 교감하며 흙을 빚어 찬란한 캔버스 작업을 이어갔다.


2부 이단아들, 독창적 예술로 승화된 노년

덴마크의 작가 이자크 디네센은 매독 후유증과 위궤양으로 체중이 40kg 아래로 떨어지는 쇠약함 속에서도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 고딕풍의 매혹적인 이야기를 생동감 있게 구연했다. 시인 메리앤 무어는 특유의 삼각모자와 검은 망토를 두르고 예순이 넘어 양키 스타디움에서 시구를 하는 등 괴짜 같은 행보로 노년의 자유를 만끽했다. 조각가 루이즈 부르주아는 80대와 90대에 오히려 전성기를 맞이하며 거미 조각상 <마망> 등 웅장한 조각품들을 창조해 냈다.


3부 현자들, 영성과 정의를 향한 거침없는 연대

재즈 피아니스트 메리 루 윌리엄스는 흑인 영가와 재즈를 결합한 신성한 미사곡을 작곡하며 영적 예술의 지평을 넓혔다. 시인 궨덜린 브룩스는 투쟁적 정치 운동의 옹호자로서 흑인 커뮤니티의 결속을 다졌다. 특히 무용계의 선구자 캐서린 더넘은 여든 살이 넘은 나이에 아이티 난민 강제 송환에 항의하며 47일간의 단식 투쟁을 감행해 굳건한 신념을 행동으로 증명했다.



노년의 여성들이 창조한 강렬하고 웅장한 예술 세계와 우리가 배워야 할 점

책장을 넘길수록 이 노년의 여성들이 이토록 강렬하고 웅장한 예술 세계를 창조해 냈다는 사실에 벅찬 경외감이 밀려온다. 이사벨 아옌데의 통찰처럼.. 이들의 몸은 비록 쇠퇴했을지언정 영혼은 오히려 젊음을 되찾고 폭발적인 영감을 뿜어냈다.


우리가 그녀들에게서 배워야 할 가장 큰 가치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영속성을 발견하는 태도'다. 이들은 노화를 상실이나 축소로 여기지 않았다. 질병, 쇠락, 사랑하는 이의 죽음 등 거대한 타격 앞에서도 타협하거나 위축되지 않고, 자신의 육체적 한계를 새로운 예술적 자원으로 승화시키는 경이로운 열정, 유연함을 보여주었다. 10번가의 마녀 여왕이라 불렸던 캐서린 더넘이 제자들에게 남긴 "매일 내면으로 들어가 네 내면의 힘을 찾아라. 세상이 네 내면의 촛불을 꺼뜨리지 않도록."이라는 말은 나이 듦의 공포에 휩싸인 우리에게 가장 강력한 삶의 나침반이 되어 준다.


끝까지 강하고 자유로운 나를 위해 30~40대부터 해야 할 노력들..

그렇다면 우리 역시 생의 마지막 무대에서 이토록 찬란한 '그랜드 피날레'를 맞이하기 위해, 인생의 중반부인 40대부터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 할까?

  1.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나 '내면의 촛불' 지키기: 3~40대는 사회적 역할(부모, 직장인 등)에 매몰되어 자기 자신을 잃기 쉬운 시기다. 캐서린 더넘의 조언처럼 매일 조용히 자신과 대화하는 시간을 갖고, 세상의 평가와 무관하게 내 심장을 뛰게 하는 고유한 자아, 열정을 발견하고 지켜내야 한다.

  2. 한계와 상실을 자원으로 유연함 기르기: 노화는 필연적으로 상실, 고통을 동반한다. 콜레트나 오키프처럼 육체적 제약이 찾아왔을 때 좌절하는 대신.. 붓 대신 흙을 만지고, 걷는 대신 수영을 하듯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다른 방식'을 찾는 심리적 탄력성을 젊어서부터 훈련해야 한다.

  3. 세상과 연대하며 기개와 호기심 유지하기: 나이가 들수록 세계관이 좁아지는 것, 편협해지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80대의 나이에도 난민을 위해 단식 투쟁을 한 더넘처럼.. 나보다 더 큰 가치나 공동체에 관심을 두고 연대할 때 우리의 영혼은 늙지 않고 번뜩이는 총기를 유지할 수 있다.

  4. 나만의 고유한 리듬과 취향에 당당해지기: 조지 엘리엇과 이자크 디네센이 세간의 시선에 굴하지 않고 파격적인 사랑과 괴짜다운 삶을 선택했듯.. 3~40대부터는 타인이 정해놓은 '나이다움'의 굴레를 벗어던져야 한다. 내가 입고 싶은 옷, 내가 만나고 싶은 사람, 내가 추구하는 쾌락에 온전히 집중하며 독립적인 삶의 태도를 구축해야 한다.


수전 구바의 선구적인 통찰력이 빛나는 <피날레>는 늙은 육신이라는 껍데기 아래에서 여전히 맹렬하게 박동하는 삶에 대한 열정, 에너지, 창조성을 일깨운다. 질병과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삶의 방식을 스스로 결정하고 전진한 그녀들의 피날레는 두려움 없이 나이 들고 싶은 모든 이들에게 가장 완벽한 인생의 참고서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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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동네 신간, 박민경 작가의 첫 소설집 <랠리>를 펼쳐 보았다. 작가는 2022년 세계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살아 있는 당신의 밤>이 당선되며 "유려한 문장과 세밀한 묘사로 꿈과 현실의 괴리를 적절하게 짚어냈다"라는 평단의 극찬과 함께 등단했다. 책머리에 실린 '작가의 말'에서 "소설을 쓴다는 건 결국 누군가를 만나기 위한 일"이라며 "그러니까 나는 여러분과 만나기 위해 썼다. 닿았다 드디어"라고 뭉클한 진심을 건넸듯.. 작가는 벼랑 끝에 몰린 인간 군상의 스펙트럼을 신인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관록과 신묘한 활기로 직조했다. 띠지에 적힌.. 소설가 김기태가 "이렇게나 기꺼이 랠리-하기. 삶을 살고 사람을 아끼는 작가만이 그럴 수 있다"라고 상찬했듯, 이 책은 생존에 매몰되어 살아가는 기쁨을 잃어버린 우리에게 타인과 감각을 주고받으며 다시금 '살아볼 만한 삶'을 쟁취하게 만드는 경이로운 에너지를 선사한다.


<랠리>에 수록된 9편의 단편을 읽어 내려가며, 각 인물들이 발산하는 맹렬하고도 아름다운 생명력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처음 문을 여는 <괴력문정과 다마고치>는 정체불명의 괴력을 가진 소녀 '문정'과 10년 만에 불쑥 찾아와 기를 갈고닦으면 만물을 치유할 수 있다고 믿는 아버지 '장원'의 이야기다. 문정은 남들과 다르다는 이유로 자신의 힘을 봉인하려 하지만, 결국 파괴적인 세계 속에서 자기만의 꿋꿋한 강함을 지향하게 된다. 이어지는 <즐거운 나라>는 비대하게 자라나는 몸을 가진 '신나라'를 통해 여성의 몸이 세상의 편향되고 억압적인 시선에 의해 어떻게 오독되는지를 집요하게 추적한다. 사람들의 시선 때문에 사랑하던 시 쓰기마저 접어야 했던 신나라의 서사와 도심에 풀려난 거대한 코끼리와 마주하는 장면, 거친 초원 위를 내달리는 질주 장면은 억압을 뚫고 나오는 묵직한 카타르시스를 남긴다.


표제작 <랠리>는 고단한 세계 속에서 마찰하는 우리가 어떻게 사소하지만 결정적인 감정과 기억을 주고받는지 그린다. 극심한 스트레스로 신체가 파괴되는 듯한 '입자성 해리' 증상을 겪는 '희원'과 '나미'가 교감하는 과정은 타자와 교류하며 생의 감각을 일깨우는 '랠리'의 기적을 뭉클하게 보여준다. 자신이 마모되고 스러져 감에도 밥벌이를 계속해야 하는 현대인의 비애에 우리는 동질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개울에 처박힌 바람 빠진 인형을 구하기 위해 희원과 나미가 함께 나아가는 장면은 뭉클하면서 극적이다. 등단작 <살아 있는 당신의 밤>은 세상을 등진 전 연인의 GPS 신호가 당도하는 먹먹한 에피소드를 통해 누군가와 나누었던 시간이 결코 사라지지 않고 현재에 어떤 파장을 일으키는지를 아름답게 증명한다.


한편 소설집은 노년의 삶에도 따뜻하고 예리한 시선을 던진다. <긴 하루>의 '병철'은 고령의 요양원 송영 차량 운전사로 해고 압박에 시달리면서도 주변의 안부를 부지런히 살피고, <수색기>의 '애영' 역시 미화팀으로 출근하며 세상에 뒤처지지 않으려 분투한다. 먼저 떠나보낸 반려견 '뭉이' 대신 '로봇 청소기'를 끌어안고 교감하는 애영의 모습은 노년의 공허함, 낭패감 속에서도 끈질기게 생을 감각하려는 눈물겨운 투쟁이다.


누군가의 생존 투쟁은 때로 삶을 지키기 위한 처절하고 섬뜩한 방어 기제로 나타난다. <별개의 문제>의 '병주'와 극 중 화자는 배달 피자가게를 오픈한 부부다. 별점 1개를 테러하는 무례한 개진상 손님을 병주가 직접 찾아가기로 하면서 상황은 걷잡을 수없이 비극으로 치닫는데.. 불길한 예감에 빗속을 운전하며 '음식물 처리기'를 극단적인 마무리가 서늘하다. <스위트 홈>의 '주원'은 평화로운 자신의 공간에 찾아온 불청객, 친동생을 결국 제거하려 한다. 거실 곳곳에 온갖 '시럽'을 뿌려 달콤하고도 끈적한 거대한 디저트 같은 덫을 만드는데.. 이는 '살아볼 만한 삶'을 지키기 위한 필사적인 발악으로 읽혀 가슴을 저미게 한다.


마지막으로 <자라는 자라서>는 유전적인 심근경색으로 에크모 시술을 받은 '윤하나'를 시작으로 남편과 의사, 레지던트, 약혼자 등이 꼬리를 물고 끝없는 랠리처럼 화두를 이어간다. 등장인물의 엄지발가락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자라'의 생존을 위한 맹렬함과 달력에 적힌 '부화'라는 단어를 짚어내는 '오정규'의 에피소드를 통해 순환하는 생명력을 은유하며 짙은 위로로 결론 맺는다. 남편 오정규는 '부화'라는 단어를 '부활'로 오인하면서까지 생을 갈구한 아내의 죽음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허나 힘겨운 삶을 버티고 견딜수록 죽음의 늪으로 끌고 들어가는 운명의 아이러니는 우리를 고개 숙이고 눈물짓게 한다.


성현아 평론가의 해설 <무덤덤이라는 무덤에서 끌어올린 관>을 읽으며 이 소설집이 일종의 거대한 '구원'의 기록임을 깨달았다. 박민경의 인물들은 늙음, 다름, 가난 등으로 인해 가장자리로 밀려난다. 허나 작가는 이들을 불행의 전시품으로 두지 않고, 상실 속에서도 기어이 핑퐁처럼 삶의 공을 맞받아치는 생명력을 부여한다. "내가 보내면 저쪽에서 반드시 받아낼 거라는 믿음", 우리는 각자 외롭게 버티는 것 같지만 실은 누군가와 보이지 않는 랠리를 이어가고 있음을 이 단단한 소설이 증명하고 있다.


문학동네 신간, 박민경 작가 소설집 <랠리>..

삶이 그저 견뎌내는 것이 아니라.. 다시금 뜨겁게 살아가는 일이 될 수 있음을 믿게 하는 경이롭고 유일무이한 독서 경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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