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을 죽인 여자들
클라우디아 피녜이로 지음, 엄지영 옮김 / 푸른숲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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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해자 불상, 1급 살인, 피해자: 아나 사르다, 17세

아르헨티나 아드로게 지역에서 끔찍한 시신 토막/소각 살인이 벌어진지 어느새 30년이 흘렀다.

사르다 집안은 풍비박산이 났고, 가장이자 아버지 알프레도는 막내딸 살인 사건의 내막을 파헤치기 위해 평생토록 동분서주했다. 그는 말기 암 투병 중 죽음을 눈앞에 두고 살인 사건의 비밀이 담긴 편지를 둘째 리아와 손자 마테오에게 각각 남기는데..



보르헤스 이후 가장 많은 언어로 번역 출간된 아르헨티나의 대표 작가 '클라우디아 피녜이로'의 작품이 푸른숲에서 출간됐다. 한글판 제목은 <신을 죽인 여자들>. 도전적인 제목이 아닐 수 없다. 앞표지 또한 범상치 않다. 띠지를 제거하면 강렬한 레드 컬러를 배경으로 양 갈래 땋은 머리가 분리된 여성의 실루엣이 상하로 드러난다. 책 내용을 압축하고 꿰뚫는, 절묘하면서 파격적인 표지 디자인이라 할 수 있다.

책을 펼쳐 읽어보자. 주요 인물들이 순차적으로 전면에 등장하면서, 화자와 시점이 바뀌고 서사가 흘러간다.

리아를 내세운 서두부터 심상치 않다. 참혹하게 죽은 여동생의 장례식장에서 자신이 무신론자임을 당당히 밝히는 리아. 그녀는 수많은 가톨릭 성직자와 신도들 사이에 둘러싸인 채, 자신의 무신론적 신념을 천명한다. 얼마 후 고향을 떠나 순례자들이 오가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정착하여 서점을 차린다. 세월이 흘러 아버지의 유골함을 들고 리아의 서점을 방문하는 큰 언니 카르멘과 형부 훌리오. 불청객처럼 불시에 들이닥친 그들의 방문 목적은 리아의 조카이자 외아들 마테오의 행방을 찾는 것. 뭔가 경직되고 어색해 보이는 카르멘과 훌리오는 종교적 편견과 맹신을 얼핏 드러내며 리아와 껄그러운 긴장 관계를 유지한다. 어느 날 리아는 아버지의 편지를 손에 든 마테오와 마주치게 된다.



이후 리아는 무대에서 퇴장하고 마테오가 등장한다. 그가 무신론자로 거듭난 외조부 알프레도에게 영향을 받아 카르멘과 훌리오의 품을 벗어나 세상 밖으로 나아가는 여정을 보여준다. 마테오는 부모의 종교적 독선과 광신에 의구심을 품고, 자신의 종교적/정신적 독립과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 연락을 끊고 리아의 주위를 맴돈다. 이어서 살해당한 아나의 절친이었던 마르셀라의 독백이 터진다. 아나는 자신의 품에 안긴 채 죽었다니.. 충격적인 고백이 아닐 수 없다. 아나의 생전 마지막 행적을 기억하는 그녀는 친구의 죽음 이후 단기 기억상실증을 앓고 있다. 마르셀라는 의혹투성이인 살인 사건의 실마리를 쥐고 있는 중요한 인물이지만, 혼란스러운 언행과 기억 상실 때문에 증인석에 앉지도 못했다.



이후 등장하는 범죄학자 엘메르와 마르셀라, 알프레도의 삼자 회동을 통해 뒤죽박죽 섞인 살인 사건의 조각이 하나둘 맞춰지기 시작한다. 그들이 그토록 파헤치고 싶었던 사건의 진실은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고통스러웠다. 알프레도는 유서로 남긴 비밀 편지를 통해 진실과 대면하지 않은 채 죽는 것이 차라리 나을 거라고 고백하기까지 했다.

책의 후반부는 가해자들의 변명이 페이지를 채우고, 잔혹한 범행이 수면 위로 드러난다. 그들이 맹종하는 신이 선사했다는, 위선 가득한 가면과 포도주가 담긴 잔 뒤에 숨어 내뱉는 자기변호가 이어진다.

그들은 자신이 저지른 죄악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형벌을 피하기 위해 신을 방패로 내세운다. 그들이 믿는 신의 의지와 선택에 이끌려 그렇게 행동했을 뿐이라고, 아나의 죽음 또한 신의 계획에 따른 필연이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미성년자인 아나가 최종 결정을 내리고 무책임하게 행동했을 뿐, 그들은 아무 책임이 없다고 강변한다.

은밀한 공간에 숨어 고해성사를 하고 신의 대리자에게 용서를 받은 이상, 자신들이 인간 세상에서 받아야 할 죄과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거짓을 둘러댄다. 작가가 공들여 묘사하는, 아나의 시신을 토막 내고 그 일부를 불태우는 장면은 잔혹한 고어 영화를 방불케 한다. 가해자들의 광신적 종교관으로 누군가를 죽음으로 내몰아도, 자의적으로 해석된 종교적 관용과 위선, 잣대에 기대어 사건이 유야무야 종결되고 무죄가 선고될 수 있는가? 피해자의 억울하고 고통스러운 죽음은 잿더미 속에 파묻혀도 되는 것인가?



작가는 아니라고, 그럴 수는 없다고 분명히 말한다. 종교적 편견과 대립 때문에 무고한 자들의 고통은 계속되고 있다.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접경 지역에서 벌어지는 무차별적인 살상과 보복 테러를 지켜보라. 폭탄이 투하된 빌딩 더미에 깔려 숨진 수많은 아이들의 죽음은 누가 보상할 것인가. 여성의 자립과 건강을 위해 필요한, 임신 중지에 대한 권리는 종교적 독선에 의해 음지로 내몰리고 묵살되고 있다. 대다수 종교인들이 바라는 대로 사후 세계가 존재한다면, 심판대에 자리한 신은 무고한 자들을 학대하고 고통과 죽음으로 내몬 광신도들을 너그러이 용서할 수 있을 것인가. 우리는 이 물음을 곱씹어 되묻고, 신중히 대답할 필요가 있다.



작가는 <신을 죽인 여자들>을 통해 다양한 관점에서 종교인들을 바라보고 그들의 신념을 분석한다. 그 결과 무신론자들에게 찬사를 보낸다. 어느 신이 내민 성배를 받아들어 허울뿐인 술잔 그림자에 숨는 것이 아닌, 자신만의 찬란한 대성당을 지어 그 안에 은거하고 바르게 행동하는 독립자들을 향해.. 당신들은 어리석거나 무지하거나, 고립된 혼자가 아니라고 적극 옹호한다. 고유하고 독자적인 대성당을 창조한, 자신의 내면에 자리한 예술적 영혼의 힘을 믿으라고 용기를 불어넣는다.



이 책의 원작 제목은 <Catedrales>, 대성당이다. 그렇다, 애서가들이라면 레이먼드 카버의 소설집이 떠오를 것이다. 클라우디아 피녜이로는 그에게서 영향을 받아 이 작품을 완성할 수 있었다고 감사를 표했다. 그녀는 전형적인 범죄 스릴러 소설의 틀에서 벗어나, 참신하고 파격적인 문학적 시도를 통해 금기시하는 주제를 드러내고 이를 다각적으로 분석하려 했다. 한 소녀가 종교적 가스라이팅과 모두의 무관심 속에 처참히 짓밟히는 과정을 다양한 캐릭터의 관점에서 서술함으로써, 고통스러운 진실을 독자들의 뇌리에 각인시키는데 성공했다. 이 책은 2021년 대실해밋상을 만장일치로 수상하고, 아마존 평점 4.4점을 기록하여 평단과 대중의 관심을 모두 사로잡았다.

스페인의 거장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은 이 책을 읽고 영화화를 하고 싶다는 욕심을 내비쳤다. 그의 영원한 페르소나 '페넬로페 크루즈'가 자신의 종교관에 사로잡힌 광적인 가해자를 연기한다면 어울릴 듯하다. 아울러 중년의 '안토니오 반데라스'가 성적 욕구를 주체하지 못해 타락하는, 우유부단한 성직자를 연기한다면 영화의 구색이 얼추 맞춰질 듯한데.. 소설과 영화를 모두 애정하는 내 억측이라 치부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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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토박물관 순례 1 - 선사시대에서 고구려까지 국토박물관 순례 1
유홍준 지음 / 창비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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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는 전 국토가 박물관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




일종의 유행어처럼 번진 그의 어록들.

수많은 독자들이 그의 책을 가이드 겸 필독서 삼아 전국의 문화재를 답사하던 때가 있었다.

한국 인문서 최초 500만 부 판매, 한국 문화사 전체를 다룬 기념비적 서술, 100년 후에도 한국 문화의 증언으로 남을 유일한 책. 수많은 수식어가 붙는 '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가 올해로 30주년을 맞이했다고 한다.




30년 넘게 축적된 답사 경험과 필력을 바탕으로 그가 <국토박물관 순례> 시리즈를 새로 출간했다. 출판사로부터 가제본판을 받아 1권을 읽어보니 그의 입담은 여전하다. 문화재 길잡이로서 그의 재담은 전혀 녹슬지 않았다. 유홍준 교수는 해당 지역의 고고학/문화재, 유적지, 박물관에 대한 해박한 배경지식뿐만 아니라, 인근 지역까지 망라하는 지리학, 문화/예술적 가치가 높은 인물들과의 에피소드까지 수록하여 독자들의 흥미를 이끌어낸다.

삼불 김원용 선생, 요산 김정한, 오영수 소설가, 신경림 시인 등 다수의 인물들과의 교류를 떠올리며, 순례기의 생생한 현장으로 독자를 초대한다. 우리는 구석기, 신석기, 청동기/초기 철기 시대, 고구려 등으로 구성된 국토박물관 순례기를 따라 걸음을 옮기며 그의 가이드를 주의 깊게 경청하면 된다.



1978년 동두천 미군부대에서 근무하던 병사가 연천 전곡리 강변에서 주먹도끼를 발견하게 된 사연을 시작으로.. 부산 영도와 언양 일대의 문화사적 가치를 재조명하고, 패총과 반구대 암각화를 비롯한 수많은 유적과 비경들을 폭넓게 살피는 것이 인상적이다. 1권의 중/후반부를 할애하여 고구려의 옛 수도와 왕궁터, 주요 산성들을 순례하고 답사하며, 옛 조상들의 웅혼한 기상과 호연지기를 되새긴다. 우리 민족의 동북아 정복 전쟁사의 중심에 서있는 태왕릉과 장군총, 광개토대왕릉비의 최근 사진들이 수록되지 않아 아쉽기만 하다. 중국의 치졸하고 비열한 동북공정 때문에 동북 삼성에 위치한 주요 고구려 문화재들에 대한 관람과 사진 촬영이 자유롭지 못하다 하니, 이에 대한 정부의 공식적인 항의 및 대책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순례에 동행한 신경림 시인이 압록강변을 둘러보고 남긴 '강은 가르지 않고 막지 않는다'라는 시구대로.. 굽이치는 압록강 본류를 따라 뗏목을 타고 누비는 북한 주민들은 국경을 거스르며 자유로이 항해를 하고 있었다. 머지않아 남북이 통일된다면, 압록강 너머 훼손되고 방치된 고구려 유적에 대한 복원과 재조명이 시급하다 말할 수 있겠다. 유홍준 교수가 이 책에 미처 담지 못했지만, 마음 깊이 진정 바라는 염원은 이것 아닐까 짐작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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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어가 빛날 때 (블랙 에디션) - 푸른 행성의 수면 아래에서 만난 경이로운 지적 발견의 세계
율리아 슈네처 지음, 오공훈 옮김 / 푸른숲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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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록빛 바다를 아끼는 해양 과학자이자 한 인간의 호기심 넘치는 탐구서이자 애정 어린 연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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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어가 빛날 때 (블랙 에디션) - 푸른 행성의 수면 아래에서 만난 경이로운 지적 발견의 세계
율리아 슈네처 지음, 오공훈 옮김 / 푸른숲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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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딘가로 여행을 떠날 때마다 육지 끝에 맞닿은 바다를 바라보곤 했다. 코발트빛 해수와 잘게 마모된 입자가 깔린 해변을 무심히 바라보면 아무것도 없는 듯하다가도.. 쭈그려 앉아 오래도록 지켜보면 수많은 생물들이 꼼지락대며, 크고 작은 각자의 존재감을 뽐내곤 했다. 아이들은 조그만 물고기와 소라게, 조개류 등을 쫓으며 하루를 보냈고, 난 수평선 가까이 매끈한 등과 삼각 지느러미를 드러내며 어딘가로 떠나는 돌고래 무리들을 눈길에 담으며 감탄했다. 최근 서점 신간 코너에서 상어가 위아래로 헤엄치는 모습이 담긴 표지와 <상어가 빛날 때>라는 제목을 마주하곤, 난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리는 것처럼 이 책을 펼쳐 읽기 시작했다.



이 책은 심해 생물을 연구하는 여성 과학자의 바다와 그 안에 서식하는 크고 작은 생물에 대한 호기심과 애정 어린 시선이 담긴 탐구서이자 연서이다. 저자는 해양생물학에 몸을 담은 자신의 이런저런 고난을 토로하면서, 인간이 바다에 대해 얼마나 무지하고 무관심한지를 설명하기 위해 지면을 아끼지 않는다. 상어를 비롯한 여러 해양 생물들이 빛을 발하는 원리와 이유를 삽화를 곁들여 알기 쉽게 풀어낸다. 칠흑 같은 밤에 해수면 아래로 다이빙했을 때, 곁을 헤엄치는 바다 생물들이 얼마나 눈부시고 찬란한 빛을 뿜으며 자신을 매혹하는지를 묘사하고 서술한다. 바다는 단순히 환각적인 아름다움만을 선사하는 것이 아니라, 해양 생물에 새겨진 형광 단백질과 분자를 활용해 인간의 생명 연장과 의학의 발전에 응용되고 있음을 강조한다.

저자는 상어뿐만 아니라 돌고래의 다양한 의사소통 방법과 홍해파리의 무한에 가까운, 불사불멸의 생활 주기에 대해 관심을 기울인다. 돌고래는 인간을 닮거나 이에 근접한 소통을 하는 것이 아닌, 독자적이고 광범위한 대화를 통해 서로 교감하고 사회성을 구축하고 있었다. 우리는 단지 그들을 수조에 가두어 관찰하며, 오랜 연구를 통해 일부의 소통 방법과 그 의미를 찾은 것에 불과하다. 저자는 그들을 감금하여 한낱 재주를 부리는 동물로 취급하는 것을 비판하면서, 바다 생명체의 권리와 존엄성을 보장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나 또한 저자의 주장에 적극 동의한다.



페이지를 넘길수록 흥미진진한 내용들이 가득이다. 바다에 쌓이는 플라스틱 쓰레기의 위험성을 지적하고, 이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기도 한다. 한국은 인근 바다에 누적된 플라스틱 쓰레기 양이 세계 3위권 내에 자리할 정도로 심각한 환경오염 국가이다. 우리는 후세에 청정한 바다를 물려주기 위해 플라스틱 쓰레기를 줄이고, 재활용 비율을 획기적으로 늘리기 위한 노력을 적극 실천해야 한다. 

또한 해수면에 서식하는 폰토마이아, 클루니오마리누스 등 이름도 생소한 해양 곤충의 생태와 번식 방법 등을 다루며 앞으로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개인적으로 마지막 챕터에서 다룬, 바이러스와 미미한 해양 생물들 간의 긴밀하면서 치열한 공생/경쟁 관계가 무척 흥미로웠다. 인간들은 이들의 기나긴 투쟁과 생존의 몸부림을 목격하고, 주의 깊게 관찰하면서 유전자 가위 이론, 새로운 항바이러스 기법 등을 발견할 수 있었다. 어쩌면 우리를 공포에 떨게 했던 코로나 바이러스의 급격한 유행은 지구상에 존재하는 인류 개체의 폭증과 야만적인 횡포를 견제하기 위해, 전체 생태계의 균형과 평화를 유지하기 위한 나름의 자정 작용이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이들 파괴적인 바이러스에 저항하고, 면역을 갖추어 적응하기 위한 기간을 겪으면서 무수한 희생자들의 묘비를 세울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지난 고통과 희생을 무의미하게 축소하고 무심히 망각하기보다는.. 다시는 그런 아픔을 겪지 않도록 지난 과오를 되새길 필요가 있다. 인류가 탐욕에 물든 과성장, 급속 발전을 통해 전 지구 생태계 및 환경에 끼친 해악을 인정하고, 이를 빠른 시간 내 되돌리려는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상어가 빛날 때>의 저자는 해양 생태에 천착하는 한 인간으로서 그 책임을 통감하고, 생명체 존중 및 환경 보호를 위해 전 세계가 연대하고 행동해야 한다고 말한다. 과학자 특유의 집요하면서 세밀한 탐구심과 지성이 이 책 행간 곳곳에 묻어난다. 우리는 그녀의 친절하면서 세심한 가이드를 따라 저 고운 백사장을 거닐다가, 청록빛 바다로 거침없이 뛰어들면 그만이다. 어쩌면 우리는 형광의 무늬를 뽐내며 우아하게 헤엄치는 체인캣 샤크와 자신을 알리는 고유한 서명 휘파람을 부르며 다가오는 돌고래 무리와 조우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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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의 마지막 여름
지안프랑코 칼리가리치 지음, 김현주 옮김 / 잔(도서출판)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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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로마'는 화려하고 북적이는 대도시지만, 그 이면은 황량하고 혼탁한 데다 퇴색되어 가는 그림자가 기울었다. 그 도시에 머무르는 이들은 수많은 군중들에 둘러싸여 정처 없이 표류한다. 그들은 과장된 미소를 지으며 관심과 사랑을 갈망하지만, 도시가 내뿜는 어둑한 그림자에 온몸이 물드는 것을 피할 수는 없었다. 외로움과 고독은 떨어질 수 없는, 그들의 절친이었다.




1973년 첫 출간 이후, 절판과 재출간을 거듭하며 시대를 초월하는 고전으로 남은 컬트 소설 <도시의 마지막 여름>이 출간되었다. 알음알음 입소문으로 이어진 명성답게, 로마의 명소를 묘사한 '지안프랑코 칼리가리치'의 문장들은 생동감이 넘치고 정교하기까지 하다. 커플의 애정 행위를 정밀 스케치한 문장들은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것처럼 에로틱하게 들끓는다. 책을 읽다 보면 밀라노에서 로마로 건너온 '레오'가 되어 핀초 언덕의 테라스, 캄포 데이 피오리의 쉼터, 움베르티노 지구 등 한여름 로마의 곳곳을 방랑하듯 거닐 수  있다. 레오는 완벽한 혼자가 아니었다. 로마 상류층에 속하는 어느 부부와 가까이 지냈고, 뜻이 맞아 함께 영화를 제작하려 한 절친 '그라지아노'도 외로움을 달래 주었다. 그와 사랑 비슷한 감정을 나누는 '아리아나' 또한 나비처럼 그의 곁에 머물다 사라짐을 반복하며 육체적 관계를 맺는다.


번잡한 도시 안에서 무의미하고 공허한 나날을 지속하던 레오는 곁의 모든 이들을 관찰한다. 어떠한 분석이나 냉철한 비판 없이 방관자의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보며 끝 모를 고독의 중심으로 점차 끌려간다. 가혹한 운명은 무더운 도시 한가운데서 표류하는 그를 놓치지 않았다. 진심으로 교류하던 그라지아노가 극단적인 선택을 하고, 그의 시신을 수습하면서 레오는 도시 안에서 자신의 정체성, 존재의 의미에 대해 강한 의문을 가지게 된다. 사랑이라는 감정을 애써 숨기고 부정하면서 아리아나 곁에 머물려 했던 그는 벼랑 끝으로 자신을 몰고 간다. 헛된 허영심과 사치에 잠식당한 그녀는 결국 레오의 곁을 떠날 수밖에 없다. 레오는 하이에나처럼 타인이 남긴 음식을 먹어치우고, 사랑하는 애인을 독차지하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를 절감하며, 도시에서 버림받고 추방당한 모든 이들을 받아주는 푸른 '바다'를 향해 다가간다. 그는 모든 것을 버리고, 영원을 향해 나아갔다.

 



50년 전에 출간된 이 책이 대중들 사이에서 망각되지 않고 복간되는 데는 어떤 보편적 의미가 숨어있을 것이다. 우리는 각종 SNS로 촘촘히 연결된 인터넷/디지털 AI 시대를 살고 있음에도 레오가 느끼는 고독감과 허무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고 있다. 온라인과 오프라인에서 극명하게 대비되는 인간관계는 이런 모순을 극대화하며, 무수한 팔로워에 둘러싸여 소외감과 외로움을 면치 못하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 정량적인 숫자로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을 견디다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고, 장기간 고립되어 끝내 고독사할 처지에 몰리는 이들이 어디 한둘이던가. 도심의 이면에 깔린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진심 어린 사랑과 우정을 나누지 못하는 '레오'들은 오늘날 대도시 어디에나 존재한다. 돛을 올리고 나아가야 할 뚜렷한 목적지 없이 떠도는 이들. 이 시대를 살아야 하는 존재 의미를 숙고하지 않은 채, 부유하는 이들이 여러 도시에 남아있는 한, 이 책은 폭넓은 공감대를 형성하며 보편성을 획득할 것이다. <도시의 마지막 여름>이 시대를 관통하는 영원한 고전으로 남을 수밖에 없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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