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백루프 창비교육 성장소설 11
박서련 지음 / 창비교육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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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원에서 나고 자란 작가. 한겨레문학상, 문학동네 젊은작가상, 이상문학상을 수상한 박서련 작가의 첫 청소년 소설집 <고백 루프>. 근래에 창작한 청소년 소설 다섯 편과 작가가 청소년 시절 쓴 소설 두 편이 3부로 나뉘어 창작 후기와 함께 실렸다.


1부의 시작을 여는 <솔직한 마음>은 아이돌 막내가 학교에서 왕따를 당하면서, 쌓여가는 억한 심정과 속마음을 내색 안 하려는 가장된 담담함을 1인칭 시점으로 그린다. 곁에서 맴도는 원따(원래 왕따)를 어떻게든 친구로 포섭하려는 그녀의 노력이 애처롭다. 어떻게든 희망을 놓지 않으려는 그녀의 노력이 결실을 맺으려는 마지막 장면에서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다. 

누구에게나 정서적 고향으로 남아 있을, 어린 시절 단관 극장에 대한 추억을 되살릴 만한 <안녕, 장수극장>의 도입부를 읽자마자.. 지금은 멀티플렉스로 바뀐 쌍문동 구 '동광 극장'에 대한 애잔한 향수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초딩 시절 그곳에서 상영한 <마루치와 아라치>, <우뢰매> 시리즈가 떠오르는 한편, 상영관에 진동하던 팝콘이며 사발면 냄새가 그립다. 


1부의 마지막 <엄마만큼 좋아해>는 아이들 어릴 적 추억을 떠올리게 한다. 머리를 가지런히 묶어 주겠다는 아빠의 서투른 손길을 냅다 거부하고 엄마에게 달려가던 아이들. 봉두난발 휘날리며 "엄마~! 나 머리 묶어줘. 이쁘게 말이야!" 소리치며 방방 뛰던 아이들 모습이 떠올라 절로 웃을 수밖에 없더라. 이쁜 이모에게 머리를 맡기려는 주비의 마음, 자신의 양 갈래머리 스타일을 따라 한 친구 시아에 대한 질투심이 너무나 귀엽고 앙증맞게 그려진다. 전국 각지의 이모와 삼촌의 마음을 들었다 놓을 만한, 심쿵 한 소설이라 할 만하다.


페이지를 넘기면 2부에 속한 표제작 <고백 루프>가 기다린다. 하루의 끝에 되돌이표가 맺힌 것처럼, 되풀이되는 타임 루프에 갇힌 현지는 매일 행복한 고민에 빠지는데.. 학교에서 잘나가는 우지현이 수줍은 고백 공세를 펼치는 가운데 현지는 무한 루프에서 탈출할 방법을 어렴풋 깨닫게 된다. 앞표지에 그려진 빨간 곰 젤리처럼 상큼하고 스위트한, 페이지마다 핑크빛 하트가 가득 담긴 청소년 애정소설이 아닐까 싶다.


3부는 작가가 20여 년 전, 청소년 시기에 겪은 경험을 바탕으로 쓴 소설 두 편이 실려 있다. 우리는 이태준 작가, 김소진 작가 등이 출생한 철원에서 나고 자란 박서련 작가의 어엿한 뿌리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짚어볼 수 있다.


엄지손톱에 박힌 묵은 가시가 점점 깊숙이 박히는 듯한 혼란하고 불안한 당시의 마음, 곁에 유일하게 남은 띠동갑 엄마이자 큰언니의 발톱을 조심스레 깎아주고 손질하는 마음이 애틋하고 아련하게 피어오른다. 우리는 박서련 작가의 소설집 원형에 언뜻 드러나는 상처가 아물어 돋아난 새 살을 만져본다. 작가가 말한 "눈물이 나도록 연하고 깨끗한 살"이 그 아래 웅크린 채, 눈부신 빛을 기다리고 있다.




#서평단 #창비교육 #고백루프 #박서련작가 #청소년소설집 #성장소설 #신간추천리뷰 #창작의날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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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생의 숨결 가까이 - 무너진 삶을 일으키는 자연의 방식에 관하여
리처드 메이비 지음, 신소희 옮김 / 사계절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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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에서의 1년은 메트로놈 움직임처럼 규칙적이다. 자연은 오래된 기억과 회복력을 지닌 장소다."

"나는 글쓰기를 다시 익히면서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었다. 언어와 상상력은 우리를 자연으로부터 멀어지게 하기보다 자연과 다시 연결해 줄 가장 강력하고도 자연스러운 도구다."



영국 최고의 자연 작가이자 식물학자로 손꼽히는 '리처드 메이비'가 신간 <야생의 숨결 가까이>로 찾아왔다. 그는 <영국 식물 백과사전>, <춤추는 식물>등 30여 권의 자연과 식물에 관한 책을 저술했다.



저자는 새들을 바라본다. 호수와 습지대 위를 떼 지어 배회하고 부유하는 새무리들. 칼새, 도요새, 물떼새, 두루미, 갈까마귀, 찌르레기, 홍머리오리 등. 우리에게 생소한 새들의 춤사위와 날갯짓, 습성이 책에 소개된다.

그는 새들이 사라지는 동쪽 끝을 바라보다가 자신 또한 정든 정착지를 떠나야 할 시기가 왔음을 깨닫는다. 걷잡을 수 없이 번진 공허함과 우울. 창백하고 음울한 그의 낯빛은 어디서부터 잘못되고 그릇되었는지를 찾기에는 이미 늦었음을 알려준다. 지인이 거주하는 이스트 앵글리아, 브레클랜드 지역으로 이주하면서 그는 원초적인 자연 그대로의 산림에 묻혀 살아가게 된다.


계절이 바뀌면서 하루하루 천변만화하는 자연을 주의 깊게 관찰한 그는 사색적인 기록을 펼쳐놓는다. 자연 속에서 어울려 서식하고, 치열한 투쟁을 통해 생존하는 동식물들의 행동 양식을 서술한다. 문학, 생태학, 역사학 등에 통달한, 박학다식한 저자의 지식은 그가 영국 최고의 자연 작가이자 왕립 문학협회 회원으로 선임되었는지를 깨닫게 한다.


리처드 메이비는 같은 종과 전쟁을 벌이고 대량 학살을 주저하지 않는 인간의 야만성과 보호하고 공존해야 할 자연 생태계를 말살하는 무책임함을 반성한다. 갈수록 비인격적으로 극개인적으로 일탈하는 인간들의 우울함, 단절감을 치유하고 회복하기 위해 자연으로 돌아가, 인간을 포함해 하나로 연결된 생태계의 의미를 숙고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그는 자신 또한 원시 자연에 둘러싸여, 야생의 숨결을 고스란히 느끼며 심신을 회복시켰다고 고백한다. 또한 글쓰기를 통해 언어와 상상력을 동원해 생생한 자연을 서술하고, 그 안에 살아 숨 쉬는 존재들과 연결되기를 희망하면서 무너진 삶을 다시 세울 수 있었다고 말한다.


자연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성찰하고, 이를 통해 인간의 존재 가치를 탐구하는 리처드 메이비의 <야생의 숨결 가까이>. 인간 문명의 무자비함과 일탈을 방조하는, 우리를 기울어진 운동장 구석으로 밀어붙이는 속도전에 지친 이라면 꼭 읽어보시라 추천하고 싶다.





#서평단 #야생의숨결가까이 #리처드메이비 #사계절출판사 #신간추천리뷰 #자연과생물가까이 #신소희번역 #이스트앵글리아 #브레클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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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클린의 소녀
기욤 뮈소 지음, 양영란 옮김 / 밝은세상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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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은 태양과 같다. 세상 만물을 모두 비추지만, 정작 자신의 모습은 보여주지 않으니까.."_빅토르 위고

"마태복음 7장 13절을 기억하시죠?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_83p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인 '기욤 뮈소'의 2016 년작 <브루클린의 소녀>가 리커버판으로 재출간되었다.

라파엘은 첫 결혼의 실패로 인해 진정 사랑하는 안나의 비밀을 실토하게 하려 애를 쓴다. 곁의 누군가가 비밀을 감추고 있다면 모르는 척 용인하는 것도 삶의 지혜련만.. 그는 집요하게 매달려 그녀의 입을 열게 만든다. 허나 그 비밀은 안나가 목숨을 걸고 무덤까지 지고 가려던 끔찍한 비극을 품고 있었으니.. 베일에 싸인 그녀의 과거 행적을 되짚으면서 라파엘은 점차 드러나는 충격적인 사건들에 경악을 금치 못한다.


기욤 뮈소는 로맨스/스릴러 소설의 거장답게 라파엘과 안나 주변의 인물들을 차례로 등장시켜 그들 시점에서 사건을 재조명하고, 이야기를 구성하는 퍼즐 조각을 하나씩 끼워 맞춘다. 라파엘과 조력자 마르크가 프랑스와 뉴욕을 오가며 포착한 실낱같은 단서들은 낱낱이 흩어진 퍼즐 조각들이 큰 그림을 이루어 한 인물을 가리키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다. 자신의 이기적인 야욕을 위해, 대의를 지킨다는 명목으로 어린 소녀와 일가족을 희생시킨 용의자의 정체를 밝히지만, 법의 심판대에 올리지 못하고 유야무야 타협하는 결말이 지극히 현실적이다. 어쩌면 기욤 뮈소는 집권 기간 내내 미국을 분열시키고, 최근 유죄 평결을 받은 미국의 트럼프가 공화당의 유력 대선 후보로 다시 나서는 웃지 못할 현실을 예견했는지도 모른다.



기욤 뮈소는 막대한 자본과 결탁해 부패하고 타락한 작금의 거대 정치세력들을 비판한다. 이들이 추종하는 '대의'란 것이 암암리에 개개인을 짓밟아 희생양으로 전락케 하는, 피 묻은 부메랑으로 돌아올 수 있음을 경고한다.


저자는 브루클린의 한 소녀가 지옥 한가운데 파묻혔다가, 지상으로 탈출하여 불굴의 의지로 갱생하는 일대기를 신데렐라 스토리이자 리얼한 복수극으로 완성시켰다. 정신없이 달리던 롤러코스터가 평탄한 선로에 들어서는가 싶더니, 모두의 예상을 뒤집는 막판 반전 서사에 이르러 감탄사를 뱉으면 어느새 소설은 종착역이다. 우리는 끝까지 긴장을 늦추지 못하게 하는, 서스펜스 마스터 '기욤 뮈소'가 자아낸 이야기에 매혹될 수밖에 없다.




#서평단 #사랑하기 때문에 #내일 #브루클린의소녀 #기욤뮈소 #양영란번역 #재출간 #리커버 #소설 #소설추천 #베스트셀러 #책스타그램 #북스타그램 #밝은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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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들 환상하는 여자들 2
브랜다 로사노 지음, 구유 옮김 / 은행나무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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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싸웠던 전장에는 꽃을 가지고 가야 하는 법이야."

"아이 버섯은 지혜롭습니다. 지혜가 곧 언어이기 때문이지요. 지혜는 몸이 아닌 목소리입니다."


남미 문학의 신경향을 이끌 작가로 손꼽히는 '브렌다 로사노'의 <마녀들>이 은행나무 '환상하는 여자들' 시리즈의 제2권으로 출간되었다.

소설은 오악사카의 후예로서 치유자의 피가 흐르던 '팔로마'가 살해당한 장면으로 시작한다.

팔로마는 가스파르라는 이름의 소년으로 출생한, 사포텍 문화권에서 제3의 성으로 인정받는 '무셰'이다.

일종의 주술적 언어를 통해 길흉화복을 점치고 미래를 예지하는 전통 무속인인 듯하다.


팔로마의 살인 사건을 취재하는 젊은 기자 '조에'와 팔로마의 사촌이자 후계자인 '펠리시아나'가 번갈아 등장하고 또는 마주치면서 이야기는 진행된다. 자신 혹은 주위의 여성들이 성장하면서 다양한 폭력에 노출되고, 위험에 처하는 장면이 연이어 묘사된다.


현대적인 도회지 멕시코시티와 호젓한 산골 마을 산펠리페에서 각각의 여성들은 신체적/정신적으로 심각한 상처를 입지 않기 위해, 어떻게든 생존하기 위해 몸부림친다. 딸에게 닥칠 위험을 예지하는 엄마의 기이한 능력 때문에 몇 번의 구사일생을 경험한 조에는 그 비결을 묻는다.

"여자들은 모두 자기 안에 마녀 같은 면을 조금은 품은 채로 태어난단다. 우리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서지."


여성들은 무법천지의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한 신비한 능력을 일부 지니고 태어난다. 그 필살기는 후천적으로 습득될 수도 있다. 허나 온갖 폭력이 난무하는 사회에서 홀로 생존하기는 불가능하다. 여성들은 연대와 협력을 통해 서로의 무사안녕을 끊임없이 확인하고, 단단히 맞잡은 손을 놓지 않아야만 마녀사냥을 피할 수 있다. 지금도 세계 곳곳에는 고립되어 반사회적인 이단으로 취급받는 마녀들을 불태우기 위한 제단이 높이 솟아 있다. 활활 불타오르는 화형대를 목전에 두고 여성들은 공동체 의식을 굳게 다지는 한편, 각자의 언어적 능력을 발휘해 연대할 필요가 있다. 마술적인 힘과 집단의식이 깃든 언어는 지혜를 발화시키며, 이를 통해 이질적인 세계와 진영은 조화를 이루고 평안을 되찾을 수 있다. 세대를 넘은 치열한 투쟁이 마침내 종지부를 찍을 때.. 생살이 타드는 고통이 멈추고 잿더미만 남은 전장에 검붉은 꽃무리를 수놓을 수 있는 것이다.


브렌다 로사노의 장편 소설 <마녀들>은 두 여성과 세계가 대립이 아닌, 언어적 치유와 연대를 통해 폭력의 상처를 회복하고 해소하는 이야기를 마술적인 필치로 그린다. 우리는 그녀의 소설을 통해 다양한 형태의 상처가 집단의 언어를 통해 회복되는 주술적 현장을 목격할 수 있다. 이를 통해 현실 사회의 편견과 무자비한 폭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를 깨닫게 된다.




#서평단 #해외문학 #시리즈 #환상하는여자들 #마녀들 #화형대 #브렌다로사노 #은행나무 #환상독서단 #신작추천리뷰 #마술적집단언어 #조에 #팔로마 #펠리시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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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들 - 정재율 김선오 성다영 김리윤 조해주 김연덕 김복희
박참새 지음 / 세미콜론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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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시를 애정하고 아낀다. 종종 시를 끄적이기도 한다.

그동안 글을 쓰면서 시만큼 시간 가는 줄 모르도록 몰입케 하고, 짧은 순간에 폭발적인 쾌감을 발산시키는 장르를 만나보지 못했다. 소설은 상상, 허구임을 눈치채지 못하도록 장면 연출과 인물 묘사에 기울이는 노력이 소모적인 면이 있다. 물론 제대로 쓴다면 자신이 전지전능한 신 또는 레전드 감독이 된 것만 같은 착각을 선사하기도 하지만.. 에세이는 자기 주변사를 세밀히 서술하다 보면 부득이하게 누군가의(자신을 포함한) 흠결이 만천하에 노출되고, 과한 자기애 & 영웅심에 빠지는 경우가 잦다. 반면 자기 절제가 가능하다면 자신의 생을 돌아보고, 보다 나은 삶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는 측면도 있다.


시가 참 매력적인 요물이긴 한데, 진정 시를 써본 이들은 알 것이다. 시가 마음대로 의지대로, 매끄러이 써지지 않는다는 것을.. 키보드에 손을 올리기 전까지는 번득이는 영감에 도취되어 자신감이 가득하지만, 막상 첫 행을 끄적이고 나면 다음 구절이 막막하고 진도가 나가지를 않는다. 인내심을 발휘해 억지로 행갈이를 하고 끝맺음을 하지만, 영 개운치가 않다. 애초에 내리친 번개 같은 시상에는 결과물이 턱도 미치지 못함을 깨닫고 낙담하고 좌절하기를 수십 번.. 이런저런 시행착오 끝에 겨우 깨닫는다. 시라는 것은 예측불허의, 종잡을 수 없이 틀에 갇히기를 거부하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언어유희라는 것을.. 또한 시는 삶과 근접한 장르 또는 그 자체라는 것을.. 그리하여 시를 단숨에 붙잡기는 어렵다. 기본적으로 일정 퀄리티의 시를 쓰기 위해서는 강인한 피지컬과 지력이 요구된다. 시는 짧지만 함축적인 의미와 불투명한 다층적인 이미지를 품어야 하므로, 어둑한 밤하늘에 각양각색 폭죽을 연달아 터뜨릴 만한 화력이 필요하다.


시에 비해 분명한 의미와 선명한 이미지를 전하는 산문이 진입 장벽이 낮고 기력이 덜 소모될 수 있다. 한 편의 시를 써내기 위해서는 본인 정신세계의 바닥을 봐야 함은 물론이고, 타인이 창조한 무언가를 오래도록 깊이 바라볼 줄도 알아야 한다. 아침에 일어나 멍한 정신으로 커피 한 잔 뚝딱 마시고 단숨에 그럴듯한 시를 완성하는 이, 지인들과 술을 마시고 즉석에서 호탕한 시를 짓는 이는 진정한 언어 천재, 랭보와 이태백/두보의 후예라 칭할 만하다.


허나 일반적인 범주에 속하는 나 같은 이는 시의 세계에 들어서기 위해 특정 루틴을 거쳐야 한다. 이를테면 곁에 놓인 시집을 들어 말미의 장황한 평론 전까지 완독한다든지(간혹 평론이 배제된 시집을 만나면 꽤나 반갑다)..

혹은 쇼미더머니 특정 시즌의 파이널 대전을 끝없이 재생한다든지 하는 일련의 입문 과정들(시와 힙합은 애매모호한 언어를 각자의 리듬으로 주절댄다는 면에서 일맥상통한다). 화창한 날씨에 실내 감금이 답답하다면 밖으로 나가 산을 오르기도 한다. 사지를 움직여 다채롭게 변화하는 자연 풍경을 접하다 보면, 짙은 안개를 뚫고 흐릿한 시상이 손에 잡힐 듯 다가오기도 한다. 시간이 흘러 시력과 경험이 쌓이면 이런 지난한 과정이 생략될 수 있을까? 어찌했든 일상 틈틈이 태어난 한 편 한 편의 시는 소중하기만 하다.



등단이든 아니든 한 권의 시집을 낸 이는 대단하다. 전체 독자의 소수만 시를 읽는 척박한 환경에서 새싹을 틔웠으니 이보다 더한 경사가 있겠는가? 이에 더해 세 권 이상의 시집을 내고, 십 년 이상 시라는 업에 빠진 이는 금강불괴이자 철인이고 극강의 괴물이라 할만하다. 진심으로 존경하고 리스펙 한다는 의미다. 그토록 인생의 쓴맛을 보고, 창작의 고달픔을 겪었음에도 시업을 중도 포기하지 않는 자는 시인 중의 시인 아니 삶의 이치를 깨달은 도인이라 부를 만하다. 그만큼 평생을 두고 시를 갈고닦기는 어렵고, 죽음 직전까지 시를 밀어붙일 수 있는 자는 극히 소수이다.

헝형한 눈빛을 발하는 노회한 시인은 자신의 끝 모르는, 시를 향한 천착, 절차탁마에 하늘마저 감복한 귀인임에 틀림없다. 이토록 잔인하고 냉혹한 장르임에도 우리는 멋모르고 시에 빠지곤 한다. 시는 중독적이고 어마 무시한 쾌락에 젖게 한다. 제대로 심취하기만 하면 마약에 가까운 도파민을 분출케 한다. 절정의 시르가슴에 중독된 우리는 오늘도 시작이라는 무모한 행위에 뛰어든다. 문제는 시 쓰기라는 행위를 우리네 삶과 일상에 자연스레 녹아들게 해, 둘의 경계를 최대한 무너뜨리고 모호하게 지우는가 하는 것이다.



시라는 녀석은 진정 간사한 요물이란 말인가. 시에 도취되어 오늘도 사설이 늘어졌다. 밤이 늦어 기력이 딸리니 이만 각설하고.. 박참새 시인의 대담 인터뷰집 <시인들>은 여러 시인들을 밀착 취재하고 살갑게 대화하며 그들의 속 얘기를 끌어낸다. 우리는 책을 통해 젊고 유망한 시인들의 일상과 시 쓰기의 비결을 엿볼 수 있다. 혹시나 오랜 시 쓰기에 지쳐 시태기가 온 분들은 세미콜론의 신간 <시인들>을 통해 슬럼프를 능히 극복할 수 있으리라. 언제든 꺼내볼 수 있도록 눈에 잘 띄는 서가에 두고 소장하기를 권하고 싶다. 부디 이 책에 실린 모든 시인들이 지속적으로 자신의 시 세계를 유지하고 확장할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라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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