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산부 로봇이 낳아드립니다 - 교유서가 소설 2022 경기예술지원 문학창작지원 선정작
정은영 지음 / 교유서가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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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산부 로봇이라니. 제목에서부터 기발함이 마구 느껴진다. 이 책은 SF라는 프레임으로 우리 사회와 인간을 내면을 보는 즐거움을 전파하고 있는 소설가 정은영 작가의 소설집이다. 책의 두께 자체도 얇고 각각 분량도 짧은 소설이지만 이 책에 실린 두 작품 모두 SF의 프레임 하에 삶과 세계를 들여다 보는 아주 기발하면서도 임펙트 있는 작품들이다.


이 책에는 <임산부 로봇이 낳아드립니다>와 <소년과 소년>의 두 작품이 실려 있는데, 이 소설들은 현재 작가가 집필 중인 부모 연작 시리즈 중 첫번째, 두번째 작품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 책은 경기문화재단 주관 '2022 경기예술지원 문학창작지원' 선정작으로, 경기도에 거주하는 문인들에게 창작지원금을 지원하고 그들의 작품을 시리즈로 출간하는 기획의 결과물이기도 하다. 올해 출간되는 시리즈는 9명의 소설가들이 참여한 소설집이 9권, 13명의 시인들의 신작시를 묶은 앤솔러지 시집 1권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한다.


표제작인 <임산부 로봇이 낳아드립니다>은 어린이날 시 낭송을 마친 임산부 로봇들의 모습을 묘사하면서 시작된다. 임산부 로봇 시스템이 구현된 것은 현재로부터 삼십년 전이다. 유례없는 학교 폭력 사건으로 출생아들의 전수 조사가 진행되고, 아동들의 공감 인지 능력 저하가 사회성 발달장애로 직결되었다는 보고가 나오면서 기존의 캡슐 인공 자궁은 폐기되었다. 그 대신 인구관리국은 태아의 두뇌, 감성 지수를 높이기 위해 예전에 엄마들이 했던 태교의 형태를 발달시킨 임산부 로봇을 출시하게 된다. 임산부 로봇은 요과에서부터 뜨개질까지 태아의 공감력과 두뇌력 발달을 위해 존재했고, 모든 일과에는 행복한 설렘이라는 명령어가 삽입되어 진행되었다. 

최첨단 과학기술이 실현된 인구관리국의 목표는 바로 혐오 없는 도시만들기의 일환으로 장애아 출산률 0%이다. 행복한 설렘이라는 명령어거 삽입된 주인공 임산부 로봇 헐스(HERS)는 갑작스레 태아보호센터로 호출되게 된다. 과연 헐스는 왜 태아보호센터로 호출되어 가는 걸까? 그리고 왜 헐스는 장애가 무엇인지 알고 싶었던 걸까?


로봇이라고 하나 헐스는 인간이 임신을 했을 때와 비슷한 양상을 보였다. 인간들이 자주 하는 입덧마저도 모방했는데, 특히 헐스는 다른 로봇과는 달리 음식에서 나는 냄새 분자 때문에 트레시룸으로 자주 달려갔다. 그런데 16주째에 기형아 검사를 받은 헐스는 모든 게 주의 단계라는 것을 인지했다. 인간이 하는 임신도 아니고 임산부 로봇이 낳아주니 건강한 아이를 낳기를 바라는 것은 어쩜 당연한 일일것이다. 물론 임산부 로봇이 유산을 하는 경우도 있다. 이럴 경우 임산부 로봇의 프로그램을 초기화시켜 유산에 대한 기억을 아예 제거해버린다. 그런데 여기서 버그가 생겨나게 되낟. 유산을 실행한 임산부 로봇에 유난히 버그가 많이 일어나는 기이한 현상이 일어났지만 인구관리국의 조치로 임산부 로봇은 유산과 유산의 기억제거에서 비롯되었음을 알아차리지는 못한다. 

이 책에서 인구관리국이 목표로 하는 '장애아 출산율 0%'는 실현 불가능한 목표이거나 진실을 은폐하는 거짓임이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드러나게 된다. 헐스는 기형아 검사를 위해 고물상이 관리하는 태아보호센터로 이동해 그곳에서 자신과 닮은 꼴로 전시된 로봇을 보고서 동료 임산부 로봇에 대한 기억을 떠올린다.


그리고 헐스가 임신한 행복이가 안면장애를 지닌 것으로 판정되고, 헐스는 행복이를 제거하려는 고물상에게 묻는다. "장애라는 것은 밀리유공원의 새소리, 나뭇잎 소리, 바람 소리처럼 그렇게 공존할 수 없는 겁니까?"(p27)라고 말이다. 과연 헐스는 행복이를 무사히 지켜낼 수 있을까? 아니면 장애를 가졌다는 이유로 행복이는 제거되고야만 말까? 뒷 이야기가 궁금하신 분들은 책을 통해 확인해 보길 추천해본다. 뒷부분의 반전에 이태껏 우리가 생각했던 장애에 대한 편견 자체가 아무 의미 없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이 작품은 속도감 있는 전개로 이야기를 진행하며 이야기 자체도 아주 짧다. 임산부 로봇이라는 SF 프레임을 통해 이 작품은 장애에 대한 우리가 가진 편견에 대해 묻고 또 묻는다. 과연 장애와 비장애의 경계는 누가 만든 것이며, 그것이 행복을 거스리는 큰 장벽이 될 수 있느냐고 말이다. 짧지만 아주 임팩트 있는 결말은 행복의 참 의미를 깨닫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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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칙한 이솝우화 - 삶의 자극제가 되는
최강록 지음 / 원앤원북스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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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솝우화라 하면 아이들에게 많이 읽어줬던, 혹은 아이들이 좋아하는 이야기로 생각했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며 이솝우화를 다시 보게 되었다. 이 책은 웃음과 감동, 재치와 교훈을 주는 이솝우화에서 삶의 방향을 발견하고 이를 통하여 답을 찾는다. 이솝우화에 인생의 전환점에서 삶을 다잡아주는 자극제와 처방전의 역할을 부여한 것이 신선하게 다가와서 이 책의 이야기들에 더더욱 공감하고 깨달음을 함께 얻어본다. 

저자는 이솝우화가 짧은 이야기지만 인생의 애환과 각축, 그리고 인간 심리의 온갖 작동들이 함축적으로 담겨 있음에 집중하였다. 그렇기에 저자는 내 마음의 주인이고 싶을 때, 좀 더 성숙한 어른이고 싶을 때, 복잡한 마음을 홀가분하게 하고 싶을 때, 살면서 한 번은 이솝우화를 만나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가 살다보면 삶의 전환점을 맞이하는 순간이 몇 번은 찾아온다. 저자는 이솝우화를 통해 그 때마다 적절한 자극과 올바른 조언과 처방을 찾아보고 있는데, 이 책에 담긴 28가지 심리 처방은 아마 많은 사람들에게 아주 적절하고 훌륭한 처방전이 될 듯 싶다.


이 책은 총 4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는 내 마음의 주인이 되는 이솝우화 이야기다. '개미와 베짱이' 우화로 내일을 예측하고 준비하되, 주어진 오늘을 즐기는 삶에 대하여 생각해보고, '외나무 다리에서 만난 두 염소' 우화로 내가 먼너 물러나는 건 결국 나를 위한 일임을 깨닫는다. 이 밖에도 여러 이야기가 '불안'을 키워드로 마음을 들여다 보게 한다. 2부는 좀 더 성숙한 어른을 위한 이솝우화 이야기다. '토끼와 거북이' 우화로 공정한 경쟁을 위해 수반되어야 할 것들이 무엇일지 들여다보고, '금도끼 은도끼' 우화로 거짓이나 꾸밈 없이 바르고 곧은 가진 마음을 가진 사람이야 말로 성숙한 어른임을 깨닫게 한다. 이 밖에 여러 이야기가 '성찰'을 키워드로 하여 이야기들을 담아내고 있다. 3부는 인생의 전환점을 마련하고 싶을 때 읽는 이솝우화 이야기다. '고깃덩어리를 입에 문 개' 우화로 타인을 존중하고 배려하며 깊이 공감하는 태도가 인생의 전환점을 마련하게 해준다는 깨달음을 얻고, '양치기 소년' 우화로 거짓말로 인생이 무너뜨려지기 전에 무엇을 해야할 지를 생각해보게 한다. 이 밖에 '성숙'을 키워드로 여러 이야기를 담아내고 있다. 마지막 4부는 복잡한 삶이 홀가분해지는 이솝우화 이야기다. '북풍과 태양' 우화로 사람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는 강요보다는 부드러운 설득임을 깨닫게 하고, '시골 쥐와 도시 쥐' 우화로 성공한 사람보다 가치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하는 지 생각해본다. 이 밖에 여러 이야기가 '활기'를 키워드로 하여 담겨져 있다.

이 책의 구성은 먼저 각 장의 키워드에 대응되는 이솝우화의 이야기를 제시한 뒤, 이솝우화 이야기의 분석을 통한 각 장의 키워드로 인해 대처되는 상황에 대한 심리처방 모색하고 제안한다. 제일 먼저 수록된 이솝우화는 '늑대와 당나귀'로, 이 이야기를 통하여 위기에 직면했들 대 침착하게 대응하려면 어떻게 해야할 지에 대한 이야기를 담아내고 있다. 위기 상황에서 침착하게 꾀를 내어 목숨을 구한 당나귀와 먹잇감도 놓치고 목숨까지 잃은 늑대의 이야기를 통해 먼저 공포라는 자극에 대해 알아본 뒤, 공포를 회피할 것인지, 아니면 이겨낼 것인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 생존과 안전을 위협받을 때 누구나 공포를 느끼는 건 참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렇다면 공포 상황에 대한 대처방안으로 당나귀에게 배울 점은 과연 무엇일까? 목숨이 위태로운 위기 상황에서도 당나귀는 섣불리 도망하거나 모든 것을 포기한 채 잡아 먹으라고 주저앉지 않았다. 당나귀는 늑대의 행동을 주시하며 자신의 생존과 안전을 지킬 방법을 생각해 낸다. 자신만의 무기인 발굽을 이용하여 지혜를 발휘해 늑대가 자기 머리를 스스로 발굽데 들이 밀도록 만든 것이다. 이러한 당나귀의 탁월한 위기 대처 능력에서 우리는 자신의 생존과 안전을 위협하는 대상이나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는 안전장치는 직접 발견하고 만들어야 함을 깨달을 수 있다. 즉, 나는 결국 내가 지켜야 하는 거다. 


'외눈박이 사슴' 이야기를 읽은 사람들은 누구나 외눈박이 사슴의 어리석음을 지적하게 된다. 한쪽 눈이 보이지 않더라도 다른 쪽 눈으로 두리번거리며 충분히 경계를 했어야 한다고 하거나 혹은 보이는 게 다라고 생각하며 안이하게 있었으니 그런 꼴을 당한 거라는 비난을 할 것이다. 모두 맞는 말이지만 저자는 사슴이 비참한 종말을 맞이한 것은 외눈박이였기 때문이 아니라 한쪽 눈에 보이는 게 전부라고 믿고 보이지 않는 곳에 도사린 위험을 간과하였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따지고 보면 많은 이들이 사슴처럼 살아가고 있다. 우리는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믿고 싶은 것만 믿으며 살아간다. 보지 못하는 것, 듣지 못하는 것, 믿지 못하는 것 사이에 진실이 있을 수 있음을 간과하며 살아간다. 그렇다면 이러한 확증편향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우리는 과연 어떻게 해야 할까? 저자는 나는 언제든 틀릴 수 있고, 잘못 볼 수 있으며, 잘못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여 한다고 말하고 있다. 무엇이든 받아들이고 인정할 수 있는 열린 마음을 가진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렇듯 이 책에 담긴 28가지 이솝우화를 통해 알아본 심리처방은 살아가는 데 있어 굉장히 유용한 지혜와 깨달음을 내포하고 있다. 예를 들어 결혼한 두 딸을 향한 걱정이 상반되어 걱정인 어느 아버지의 이야기 '아버지와 딸들'을 통해 쓸데 없는 걱정으로 인생을 좀 먹는 이들에게 권하는 심리처방은 걱정해 봐야 해결되지도 않는 것들, 좋은 것만 생각하면 된다는 당연한 말이 주는 깨달음이 바로 걱정에서 벗어나는 길임을 깨닫게 한다. 모든 것은 생각하기 나름이고 또 마음먹기에 달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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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내식 먹는 기분 - 정은 산문집
정은 지음 / 사계절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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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만으로 왠지 마음이 두근거렸다. 비행기를 타고 기내식을 먹고 여행을 간다는 것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많은 사람들이 그러할 듯 싶다. 하지만 이 책의 기존의 여행 에세이와는 조금 다르다. 저자는 15년 동안 세계 여러 도시에 한두 달 머무르다 한국으로 돌아오는 생활을 이어왔는데, 흔히들 하는 '외국에서 한달 살아보기'와는 생활 자체가 너무나 다르다고 할까. 지금의 생이 자신의 삶이 아닌 것 같아 유령처럼 서성이는 마음을 어찌하지 못하고 숨이 막혀 도망치듯이 한국을 떠났다가 돈이 떨어지면 되돌아와 최저시급을 받고 일을 하며 돈을 모아 다시 비행기 티켓을 사는 저자의 생활은 기존의 여행 에세이와는 너무나 결이 다르다 하겠다. 


비행기를 타기 전 설레이는 마음으로 기내식을 기다리다가도 막상 먹으면 그 맛에 실망한 경험은 아마 많은 이들에게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행에 앞서 비행기를 타면서 또 기내식을 기대한다. 저자는 '기내식을 먹는 기분'의 맛은 땅 위 어느 식당도 재현할 수 없을 꺼라고 말한다. '기내식을 먹는 기분'의 맛의 핵심은 바로 비행기가 멈추면 내 삶도 멈춘다는, 죽음에 대한 불안감을 근간으로 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기내식을 먹고 나면 죽음에 대한 생각은 사라지고 살아 있다는 안도감과 함께 땅 위에 두고온 자잘한 고민들은 사라지고 잠이 오게 된다. 그리고 잠에서 깨면 또 기내식이 나온다. 이러한 망각 서비스야 말로 비행기가 제공하는 최상의 서비스라고 저자는 말한다. 그래서 저자는 자신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을 때마다 비행기 티켓을 샀다. 그렇게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고, 인도와 미국을 여행하고, 마침내 뿌리를 내리고 살게 해준 서울에 대한 저자의 매력적인 이야기들이 저자가 직접 찍은 사진들과 함께 이 책에 담겨져 있다. 

저자가 산타아고로 향하게 된 것은 '순례자의 길'을 걷고 나면 작가가 될 수 있다고 해서이다. 그 때 저자는 한국을 벗어나 어디로든 떠나고 싶었고, 작가가 되고 싶었다고 한다. 악마가 걸작을 쓰게 도와준다면 영혼이라도 팔고 싶은 심정이었기에 저자는 800 킬로미터에 이르는 길을 걷기로 한 것이다. 하지만 돈도 없고, 근육도 없던 저자는 그 길을 추천한 친구를 증오하기도 하고, <연금술사>와 <순례자>라는 글을 써서 순례자 길을 유명하게 만든 파울로 코엘료를 미워하면서 길을 걸었다. 당시 저자는 사람이 힘든 일을 겪고 나면 성장한다고 믿었다고 고백한다. 그렇기에 고난과 역경 속에 일부러 자신을 던지곤 했지만 그 여정 속에서 몸이 힘든 것과 정신이 성숙하는 것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그리고 그 여정 속에는 고생 빼고는 얻을 것이 없다는 걸 깨닫고는 자신이 가진 많은 것을 버린다. 가방의 무게를 줄이기 위해 하나씩 버리다가 저자는 자신이 누군지를 알게 된다. 끝까지 포기 못했던 수동카메라와 필름, 책과 노트 덕에 저자의 시선으로 포착한 많은 멋진 사진들을 이 책에서 만날 수 있다. 그리고 내가 겪은 것과 같이 생생한 이야기들도 함께 마주할 수 있다.


저자는 카미노에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대접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해준 방송작가 K, 순례자의 길을 걷는 사람들의 불문율이었던 직업을 묻지 않을 수 없게 만든 전 국회의원, 전기도 화장실도 없는 열악하기 짝이 없는 곳이지만 다시는 만날 수 없는 영혼의 음식을 담아 내놓았던 알바르게의 주인, 불편한 몸으로 구걸을 하며 순례길 여비를 마련하는 진짜 순례자들, 경멸의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며 불쾌해하던 고급 등산화를 신은 사람들 등등과 저자의 뇌리 속에 끝까지 남았던 에리히와 복스. 순례자의 길에서 만난 다양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는 길의 뒷모습이자 진짜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기에 저자의 이야기 속에 나는 빠져들 수 밖에 없었고, 순례자의 길을 떠나며 울었다는 대목에서 나 또한 울컥해졌다.


이 책에는 오직 저자만이 마주친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지만 그 이야기를 읽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따스해지는 사람 냄새 가득한 이야기들이 참 많다. 저자가 함께 순례길을 걷고 싶었던 유일한 외국인인 에리히는 군인 복장을 하고 복스라는 개와 함께 걷고 있었다. 선한 눈빛과 개에 이끌려 어설픈 영어와 몸짓으로 열심히 대화를 이어가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프랑스어를 유창하게 하는 미국 여자애에게 기회를 빼앗기기도 한다. 설레이는 마음으로 자신이 가진 애정을 확인하기도 전에 그가 자신에게 보낸 관심과 배려가 '혼자 있는 외롭고 불쌍한 소녀'에 대한 연민이었음을 깨닫지만 또다시 마주치면 산티아고까지 같이 걷자고 제안하기도 한다. 하지만 운명의 장난처럼 두 갈래의 갈림길에서 그와 다른 선택을 한 저자는 결국 여정이 끝날 때까지 그를 만나지 못핸다. 여기서 재미있는 사실은 저자에게 아직도 떠올리면 마음이 저릿저릿한 통증처럼 다가오는 에리히가 다른 이들에겐 그저 '냄새 나는 군인 아저씨' 였다는 점이다. 누군가와의 인연은 정말 특별할 수도 있지만 스쳐지나가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정말 하찮을 수 있음을 깨닫게 하는 장면이기도 하고, 왠지 끝까지 만나지 못해 더 가슴 아프기도 하는 대목이다. 


저자가 만들어낸 연인이란 단어의 유래는 너무나 그럴 싸해서 왠지 굳건히 믿고 싶어진다. 서로 거울을 들고 비춰주는 관계에 있는 사람들은 발전할 수 밖에 없듯이 여행 역시 우리를 성장시킨다. 이는 '여행을 다녀오는 일이 먼 땅에 거울을 하나 만들어두고 오는 일'이기 때문이다. 저자가 보기엔 지구에게도 전파망원경이라는 거울을 들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1977년에 쏘아 올린 무인 탐사선 보이저호는 지구가 떠난 여행이자 지구에서 쏘아 오린 거울과 같아 보인다. 1990년 보이저호가 태양계 바깥쪽을 향하던 카메라를 돌려 창백한 푸른 점처럼 보이는 지구 사진을 보냈을 때 거기에 비친 우리는 그제서야 우리 자신이 누군지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보이저호가 그랬던 것처럼 우리는 나를 정확이 보려고 비행기 티켓을 사고서 여행을 떠난다.


이 책에 담아낸 풍경과 사람, 공간에 자꾸만 빠져들게 된다. 이태껏 나란 사람은 결코 경험하지 못했던, 마주하지 못한 것들이라서 더더욱 매혹적이다. 그리고 정확하게 자신을 보기 위해 남들이 가지 않는 낯선 길을 걸어온 저자에게 응원의 박수를 보내고 싶다. 저자의 시선으로 담아낸 사진들이 자꾸만 눈길을 잡아 끄는 것은 그 안에 담긴 저자의 스스로를 믿는 용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나는 그 용기를 조금이라도 얻고 싶어 보고 또 보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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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스트 라이터
앨러산드라 토레 지음, 김진희 옮김 / 미래지향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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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에서부터 호기심이 마구 생기는 책이다. 이 책은 한 유명 작가의 말할 수 없었던 어두운 비밀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3개월의 시한부 선고를 받은 그녀가 마지막으로 선택한 것은 바로 그녀의 이야기를 책으로 내놓는 것이다. 부와 명성을 모두 가진 베스트셀러 작가 헬레나 로스는 32살이라는 나이에 암 말기 진담과 함께 시한부 판정을 받는다. 그녀는 충분히 준비가 되었을 때, 그러나 반드시 죽기 전에는 쓰려고 미뤄두었던 그녀의 마지막 소설을 더이상 미룰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그녀에게 남은 시간은 단 3개월. 누군가의 도움 없이 작품을 완성시키기란 불가능하다. 그녀는 결국 자신의 마지막 소설을 도와줄 대필 작가를 찾게 되는데.. 헬레나가 그토록 쓰고 싶어 하는, 죽기 전에 꼭 써야 한다고 생각한 지난 4년간 비밀로 간직해 온 그날의 이야기란 도대체 무엇일까?

"완벽한 아침. 완벽한 남편. 완벽한 딸. 완벽한 거짓말.(p9)"


 이 책에서 제일 먼저 만나게 되는 프롤로그 속 헬레나와 그녀의 남편 사이먼, 그리고 너무나 사랑스러운 딸 베서니와 함께 하는 그야말로 완벽한 아침의 모습들. 누구나 꿈꾸는 행복한 풍경 그 자체다. 하지만 본격적인 이야기로 들어가면서부터 이야기의 분위기는 완전히 바뀐다. 

 본격적인 헬레나의 이야기는 그녀가 말기 암에 걸려 본인에게 남은 시간이 3개월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녀는 죽음 자체를 그다지 끔찍하게 생각치는 않는다. 하지만 죽음을 앞두고 보니 그동안 미뤄두었지만 반드시 써야 할 그 이야기에서 벗어날 수 없다.


 4년 전, 헬레나는 경찰과 그녀의 친구들 그리고 가족 앞에서 그녀 인생 최고의 거짓 이야기를 꾸며 냈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그녀의 이야기를 믿었다. 사실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것이야 말로 그녀를 유명하게 만든 타고난 그녀의 능력이었다. 15권의 베스트 셀러, 수백만의 팬. 부와 명성을 모두 가진 그녀는 지금 친구도 가족도 없이 홀로 죽음 앞에 서게 되었다. 그녀에게 남은 시간은 3개월. 죽기 전에 꼭 해야만 하는, 4년이란 시간동안 회피했던 그 진실과 마주서서 이야기로 풀어내야만 한다.

 헬레나는 자신의 편집자 케이트에게 은퇴를 하겠다고 말한다. 그리고 지금 집필 중인 작품도 중지하겠다고. 그리고 새로운 이야기를 쓸 예정이며 그 이야기는 시놉시스도 없지만 그럼에도 자신은 꼭 쓸거라고 말이다. 헬레나의 말에 케이트는 엄청난 충격을 받는다. 그리고 케이트가 아무리 어떤 말을 해도 까칠하고 예민한 헬레나의 마음은 역시나 되돌려지지 않았다.


 케이트와의 전화를 끊고 나서 헬레나는 자신이 쓰고자 하는 이야기를 계속해서 쓰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녀의 작업 속도로 볼때 3개월안에 이 작품을 완성 시키기란 불가능하다. 헬레나는 자신이 죽기 전에 다 완성하기 위해서는 대필작가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리하여 케이트에게 대필 작가를 구해달라고 하는데, 헬레나가 요구하는 대필 작가는 헬레나의 몇 년가 서로 이메일로 비난과 공격을 서로에게 주고 받던 마르카 반틀리다. 케이트는 도무지 헬레나를 이해할 수가 없다. 하여 헬레나를 찾아가게 되는데, 그녀를 직접 만나고 나서야 알게 된다. 헬레나 로스는 은퇴하는 것이 아니라, 그녀는 죽어가고 있는 거라는 것을.. 그리고 얼마후 마르카 반틀리가 헬레나를 찾아온다.

 헬레나와 몇 년동안 비난과 힐난의 이메일을 주고 받았던 마르카 반틀리가 그녀의 예상과는 달리 남자라니. 남자라고 해서 그녀가 대필 작가를 다른 사람으로 구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놀란 것은 마크 포춘 역시 마찬가지였다. 나이가 지긋하고 꼬장꼬장한 여자일 거라고 생각했던 헬레나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데다가 자신의 딸보다 겨우 열살 정도밖에 많지 않은 너무나 어린 여성이었던 거다. 헬레나는 마크 포춘에게 자신의 글을 대신 써달라고 부탁을 하고 마크 포춘은 헬레나의 상태를 알아차리게 되면서 헬레나가 죽기 전에 꼭 써야 한다는 그 소설을 대필하게 된다.


 이 책은 헬레나가 죽기 전에 꼭 완성하고자 하는 소설과 4년 동안 회피했던 그 진실을 한 줄기로 하고, 또다른 줄기로는 헬레나와 마크 포춘의 우정 이야기를 담고 있다. 시간이 흘를 수록 앙숙이었던 헬레나와 마크 포춘이 서로를 이해하게 되고 우정을 쌓게 되는 과정들이 참 따스하여 좋다. 그리고 헬레나가 4년 동안 피하고자 했지만 죽기 전에 꼭 알리고자 했던 이야기는 그야말로 섬뜩하다. 헬레나에게 계속 연락을 취하는 샬럿 블랜튼의 정체도 그 이야기의 결말과 함께 풀리게 되는데 그야말로 반전 그 자체다.


 그리고 헬레나를 끝까지 챙겨주는 편집자 케이트와 대필작가 마크 포춘으로 인해 헬레나는 쌀쌀하고 까칠한 헬레나가 시간이 갈수록 조금 말랑해지는 것은 참 좋은데, 이 때문에 마지막 장면에서 꽤 많이 울컥해지고야 만다. 헬레나의 어두운 비밀을 하나씩 알아가지만 그녀를 온전히 이해하려하는 마크의 모습은 인간이 타인을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것은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를 알려준다. 그리고 헬레나 역시 마크에 대한 오해와 자신의 잘못을 순순히 인정하고 용서를 구하는 장면은 그래서 더 감동적이었다.


 그리고 처음의 분위기와는 완전히 달라지는 이야기들과 뒤로 갈수록 밝혀지는 헬레나의 어두운 비밀은 이 책 자체의 몰입도를 완전히 높인다. 그렇기에 책을 다 읽고서도 한참을 이 책이 주는 울림과 감동에 머물러 있게 만든다. 헬레나는 인물이 자신에게 주어진 짐을 받아드리는 방식은 아마 우리가 살아가면서 마주하게 되는 삶의 선택에서 큰 방향을 알려주고 있는 듯하다. 흡입력도 있고, 빠른 이야기 전개와 반전, 그리고 마지막에 밝혀지는 충격적이며 섬뜩한 비밀은 아마 누구라도 책을 손에서 놓지 못하게 만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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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의 죽음 작품 해설과 함께 읽는 작가앨범
안톤 파블로비치 체호프 지음, 고정순 그림, 박현섭 옮김, 이수경 해설 / 길벗어린이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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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고정순 작가가 그려낸 안톤 파블로비치 체호프의 <관리의 죽음>을 담은 그림책이다. 처음에 고정순 작가가 체호프의 <관리의 죽음>을 그림책으로 발간한다는 소식을 듣고 도대체 어떤 그림으로 그려낼 지가 무척이나 궁금했었다. 체호프 단편선 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작품을 애정하는 고정순 작가가 그려낸다는 것만으로도 기대가 되고 설려였다. 책을 받고서 한 장 한 장 넘기다 보니, '역시!!'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글로 읽을 때보다 더 인상적이며 인생이란 무대 위에 서 있는 불안한 영혼을 정말 제대로 그려낸 <관리의 죽음>이다.


안톤 파블로비치 체호프는 미국의 에드거 앨런 포, 프랑스의 모파상과 함께 세계 3대 단편 작가라고 불리는 러시아를 대표하는 소설가이자 극작가이다. 일반 소시민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객관적인 시선으로 전달하기로 유명한 리얼리즘의 대가인 체호프는 '하찮음 속에서 진실'을 담아내느 수많은 작품들을 집필하였다. <관리의 죽음>은 이러한 체호프 문학의 특징을 특히나 잘 드러내는 작품이다. 소심한 관리 이반을 죽음으로 몰은 것은 그의 아주 사소한 재채기 때문이었는데, 이 이야기가 남기는 날카로운 풍자는 보는 이들에게 웃픔과 안쓰러움을 동시에 가져다 준다.

이야기는 어느 멋진 저녁, 이에 못지않게 멋진 이반 드미트리치 체르뱌코프는 객석 두 번째 줄에 앉아서 오페라글라스로 <코르네빌의 종>을 보고 있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공연을 보면서 그는 행복의 절정에 다다른 기분이었다.

우리네 삶이 그러하듯이 '그런데 갑자기' 그가 얼굴을 찡그리더니 눈을 떼고 몸을 숙인다. '그런데 갑자기'라는 표현이 소설 속에서 자주 마주치는 것에 작가들이 그러는 것도 당연하다는 말은 체호프 단편선에 그대로 있는 말이기도 하다. 원작에서도 체호프는 '그런데 갑자기'라는 표현에서 있어 인생이란 그처럼 예기치 못한 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살아가다보면 얼마나 예기치 못한 일들이 많이 벌어지는지, '어느 날 갑자기'라는 표현은 바로 우리의 인생을 말하는 것이기에 우리는 이 단어에도 공감할 수 밖에 없다.

그는 보시다시피 재채기를 한다. 세상 그 누가 재채기를 막을 수 있겠는가. 체르뱌코프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손수건으로 얼굴을 훔친 다음 예절 바른 사람답게 주위를 둘러 본다. 재채기 때문에 혹여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친 게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당황스러운 일이 생기고야 만다. 그의 앞의 첫 번째 줄에 앉아 있던 한 노인이 투덜거리며 자신의 머리와 목을 닦는 장면을 본 것이다. 게다가 그 노인은 바로 운수성에 근무하는 브리잘로프 장군이라는 것을 그는 알아차리게 된다. 그걸 깨닫는 순간부터 그는 사과를 해야 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그는 장군의 귀에 대고 속삭이며 사과를 한다. 하지만 그의 계속된 사과에 장군은 그만하고 앉으라고 한다.


체르뱌코프는 머쓱해져 바보 같은 미소를 짓고 다시 무대 쪽을 보지만 더이상 이전과 같은 행복을 느낄 수도 없었다. 불안감이 그를 괴롭히기 시작한 것이다.


불안감에 그는 쉬는 시간에 다시 사과를 하지만 장군은 자신은 벌써 잊었다며 그만하라고 한다. 이러한 반응에 더더욱 커지는 불안감. 과연 체르뱌코프는 어떻게 되었을까? 결론은 이 작품 자체가 워낙에 알려진 작품이라보니 다 알지만 이 책을 통해 꼭 다시보길 추천해본다.


고정순 작가는 체호프의 작품 중 블랙코미디적인 요소가 가장 잘 부각되어 있는 <관리의 죽음>을 연극이라는 구조 안에 넣어서 막이 오르고 내리기까지 한 편의 연극으로 구성하고 있다. 처음 책을 펼치면 한 사람이 공연에 대한 설레임과 기대감을 가득 안고 홀로 객석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리고 다음 장, 공연의 시작을 알리는 암전이 지난 후, 객석을 가득 채운 사람들 사이로 체르뱌코프의 운명을 바꾸어 넣는 재채기 사건이 벌어진다. 그리고 체르뱌코프가 장관에게 계속해서 사과를 건네는 장면들 속에 그림을 잘 살펴보면 몇몇 사람들은 책 안의 인물이 아닌 정면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모습들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장면들은 책을 보고 있는 동안 독자와 책 속 등장인물들이 눈을 맞추도록 의도된 장면으로 이를 통해 우리는 이 책 속의 이야기에서 들어가 있는 것처럼 이야기 자체에 폭 빠져들게 만드게 한다. 그리고 이야기는 계속 이어지고, 장관의 외침에 충격을 받은 체르뱌코프는 죽음에 이르며 끝이 난다. 그리고 다음 장, 암전이 이어지고, 그림은 텅빈 객석을 보여줌으로써 이 이야기가 끝이 났음을 말한다. 이를 통해 책 속 인물, 체르뱌코프의 불안이 다만 책 속 이야기만은 아님을, 어쩌면 너무나 소심하고 하찮아 보이는 그의 죽음 앞에서 우리는 알수 없는 허무와 섬뜩함을 느끼게 된다. 이렇게 고정순 작가의 의도로 이야기의 구성을 연극처럼 진행하는 것과 인물을 너무나 잘 표현한 그림들은 원작을 읽는 것보다 이야기 자체를 더 극 대화시켜 <관리의 죽음>이 주는 허무와 불안감, 한 편의 블랙 코메디가 주는 효과를 더욱 극대화시킨다. 누군가에게는 겨우 재채기 하나일 뿐이겠지만 누군가에게는 죽음에 이르게 할 수 있도 있는 불안. 어쩌면 누군가의 삶 자체를 잠식시켜 버리는 그 불안이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 지 이 책을 통해 다시금 생각하게 되고, 우리 자신에게도 묻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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