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풍류 - 멋스럽고 운치 있게 서울을 감각하는 법
은모든 지음 / 인플루엔셜(주) / 2026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너무 바쁘게만 살아가는 오늘날의 우리는 어느새 풍류를 잊어버린 게 아닐까. 해야 할 일은 늘 많고 하루는 빠르게 흘러가지만, 정작 계절의 변화를 살피거나 맛있는 음식을 천천히 즐기고, 마음에 드는 풍경 앞에서 잠시 머무는 일에는 점점 인색해진다. 그래서 서울이라는 익숙한 도시에서 풍류를 즐기는 법을 이야기하는 <서울 풍류>에 더욱 관심이 갔다. 풍류라고 하면 흔히 옛 선비들의 고상한 취미나 한가로운 생활을 떠올리기 쉽지만, 은모든 작가가 말하는 풍류는 훨씬 현실적이고 일상적이다. 자신이 사는 곳을 세심하게 바라보고 그 안에 있는 맛과 멋과 흥을 발견하며 오늘의 삶을 제대로 즐기는 일에 가깝다.

소설가 은모든의 첫 에세이인 이 책은 저자가 오랫동안 서울 곳곳을 누비며 직접 보고 맛보고 즐긴 것들을 담아낸다. 오래된 노포에서 만나는 추억의 음식부터 매화가 풍성하게 피는 장소, 성곽길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도서관, 도심에서 반딧불을 볼 수 있는 곳까지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서울의 다양한 얼굴이 책 속에 펼쳐진다. 꽃과 술, 음식과 산책, 계절과 공간을 넘나드는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익숙하다고 생각했던 서울에도 아직 발견하지 못한 즐거움이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어쩌면 <서울 풍류>는 특별한 곳으로 떠나지 않아도 지금 내가 살아가는 곳을 조금 다르게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얼마든지 잘 놀고 잘 즐길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듯하다.


저자가 말하는 풍류의 바탕에는 잘 놀아야 계속할 수 있다는 생각이 자리하고 있다. 저자는 국악 공연에서 듣게 되는 ‘잘한다!’라는 추임새를 떠올리며 잘한다는 말을 제대로 건네는 일조차 생각만큼 쉽지 않다고 말한다. 치열한 경쟁과 평가에 익숙한 우리는 타인에게는 물론이고 스스로에게도 좀처럼 후한 말을 건네지 못한 채 무엇이든 잘 해내야 한다는 압박 속에서 살아간다. 하지만 저자는 처음부터 완벽하게 잘하려 하기보다 일단 시작하고 꾸준히 이어가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강조하고 있다. 글쓰기 역시 마찬가지이다. 잘 쓰고 싶다면 우선 써야 하고 오래 쓰기 위해서는 새로운 것을 보고 듣고 경험하며 스스로를 환기할 시간도 필요하다. 그래서 그가 내놓은 답은 의외로 단순하다. 잘하고 싶은 일은 꾸준히 하고, 계속하기 위해서는 잘 놀기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에게 잘 노는 일의 중심에는 서울이 있다. 한강과 천변을 걸으며 계절을 느끼고, 궁궐과 미술관을 찾고, 작은 서점이나 음악 감상 공간을 기웃거리며 새로운 것을 만난다. 낯선 동네에서 처음 먹어보는 음식과 술을 즐기고, 마음에 남은 장소는 다시 소설 속 이야기로 옮겨가기도 한다. 서울에서 20년 넘게 살았던 나 역시 이런 대목을 읽으며 익숙했던 풍경들을 새삼 떠올리게 되었다. 오래 살았다는 이유로 서울을 잘 안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대전에서 지내며 이 책을 읽다 보니 정작 지나치고도 보지 못했던 장소와 즐거움이 얼마나 많았는지를 깨닫게 된다. 결국 풍류란 멀리 떠나 특별한 경험을 하는 일이 아니라 내가 살아가는 곳을 조금 더 천천히 바라보고 그 안에서 새로운 즐거움을 발견하는 태도에 가까운 것이 아닐까.


책은 맛의 풍류에서부터 본격적으로 서울 곳곳의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다. 맨 처음으로 책은 연희동의 오래된 식당들을 따라가며 그 안에 쌓인 맛과 기억, 시간의 흔적을 들여다본다. 양은 주전자에 담긴 따뜻한 엽차와 육수, 어린 시절 먹던 냉면의 맛은 자연스럽게 가족과 함께했던 외식의 기억을 불러낸다. 그렇게 한 끼의 음식은 어느 순간 한 사람의 과거와 연결되고 같은 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의 공통된 기억으로까지 확장된다. 이어 저자는 노포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이제는 사라진 피맛골을 떠올린다. 나 역시 서울에서 오래 살며 피맛골의 유래와 그곳이 지닌 의미를 알고 있었기에 이 대목이 더욱 반갑게 다가왔다. 과거 서민들이 고관대작의 행차를 피해 다니던 골목이 수백 년 동안 식당과 주점이 모인 공간으로 이어졌다는 사실은 서울의 오래된 맛이 단순한 음식 이상의 시간을 품고 있음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사라진 피맛골의 흔적은 종각의 오래된 빈대떡집 ‘열차집’으로 이어진다. 1950년부터 이어져온 이곳에는 옛 피맛골의 사진과 세월이 묻은 낙서가 남아 있고 맷돌에 직접 간 녹두를 돼지기름에 지져낸 빈대떡 역시 오랫동안 지켜온 방식으로 만들어진다. 작가는 요즘의 바삭한 전과는 다른 그 맛과 식감을 경험하며 익숙한 취향만 고집하기보다 새로운 맛을 시도해 보는 것 또한 작은 모험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벽을 가득 채운 서로 반대되는 정치적 구호들이다. 처음에는 첨예한 대립의 흔적으로 보이지만 작가는 오히려 그것을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같은 공간을 오가며 같은 음식을 먹어 왔다는 공존의 증거로 바라본다. 오래된 음식 한 접시 안에서 개인의 추억과 서울의 역사, 서로 다른 사람들의 삶까지 발견해내는 것. 바로 이런 시선이 <서울 풍류>가 보여주는 맛의 풍류를 더욱 흥미롭게 만든다.

각각의 이야기 뒤에 덧붙인 ‘풍류 노트’도 책을 읽는 재미를 더한다. 노포 이야기에 이어지는 풍류 노트에서는 '자녀나 조카에게 소개해주고 싶은 오래된 식당’을 노포의 기준으로 제시하며 하천이나 시장 주변을 살피고 제철 메뉴가 있는 가게를 눈여겨보는 등 자신만의 노포를 발견하는 방법을 알려준다. 작가의 경험을 읽는 데서 그치지 않고 독자가 직접 자신만의 풍류를 찾아 나서게 한다는 점에서 <서울 풍류>만의 흥미로운 구성이 아닐까 싶다.

결국 <서울 풍류>가 이야기하는 것은 서울의 좋은 장소를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느냐만은 아닌 것 같다. 하루하루를 버텨내는 데만 몰두하다 보면 어느 순간 우리는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바라볼 때 마음이 움직이는지조차 잊기 쉽다. 은모든 작가는 그런 우리에게 계속 살아가고, 계속 무언가를 해나가기 위해서는 자신을 즐겁게 만드는 것들을 곁에 둘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보고, 듣고, 먹고, 걷고, 사람을 만나며 얻은 경험이 다시 글쓰기로 이어지는 작가의 모습을 따라가다 보면 ‘잘 노는 일’ 역시 삶을 지속하게 만드는 중요한 힘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이 책은 서울의 맛과 멋과 흥을 소개하는 에세이인 동시에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발견하고 그것을 오래 이어가며 살아가는 방법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서울에서 20년 넘게 살다가 지금은 대전에 살고 있는 나에게 이 책은 익숙했던 도시를 새삼 돌아보게 만들었다. 오래 살았다는 이유만으로 서울을 충분히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책장을 넘길수록 미처 보지 못하고 지나친 풍경과 경험이 적지 않았음을 깨닫게 된다. 동시에 풍류가 반드시 서울에서만 가능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다. 중요한 것은 어느 도시에 사느냐보다 지금 내가 있는 곳을 얼마나 관심 있게 바라보고 그 안에서 나만의 즐거움을 발견하느냐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는 서울에서 미처 누리지 못했던 풍류를 아쉬워하기보다 내가 살고 있는 대전의 맛과 멋과 흥에도 조금 더 눈을 돌려보고 싶다. <서울 풍류>가 내게 남긴 가장 큰 변화는 어쩌면 바로 그렇게 익숙한 일상을 다시 바라보고 싶게 만든 마음인지도 모르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어떤 계절은 영원하지 꿈꾸는돌 47
하유지 지음 / 돌베개 / 2026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제목과 감성 넘치는 책표지에 끌려 읽게 된 책이다. <어떤 계절은 영원하지>는 부모의 부재 속에서 자란 열일곱 살 오한봄에게 어느 날 엄마와 첫사랑이 동시에 찾아오면서 벌어지는 사계절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여름에서 시작해 가을과 겨울을 지나 봄으로 향하는 시간 동안 한봄은 가족과 사랑, 독립과 관계에 대해 이전과는 다른 질문을 마주하게 된다. 오랫동안 비어 있던 엄마의 자리가 다시 채워질 수 있는지, 누군가를 사랑하면서도 그 사람에게 지나치게 의존하지 않을 수 있는지, 그리고 혼자 살아가는 것과 함께 살아가는 것 사이에서 어떤 거리를 찾아야 하는지를 한 소녀의 성장 과정 속에 섬세하게 풀어낸다.

이 소설은 모녀 관계를 중심에 둔 가족 이야기이면서 첫사랑의 설렘을 담은 이야기이고, 동시에 정서적인 자립과 관계의 의미를 묻는 작품이기도 하다. 특히 부모로부터 독립한다는 것이 반드시 갈등하거나 등을 돌리는 일만은 아니며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 역시 그 사람에게 전적으로 기대는 것과는 다를 수 있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런 질문들은 단지 청소년기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어서 청소년 소설임에도 어른인 내가 읽으면서도 여러 장면과 감정에 공감하며 이야기에 빠져들 수 있었다. 무엇보다 가족의 부재와 상처, 실패처럼 다소 무거울 수 있는 문제를 지나치게 어둡게 끌고 가지 않고 불완전하고 자주 흔들리는 사람도 다시 관계를 맺고 자신의 삶을 이어갈 수 있다는 회복의 가능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래서 열일곱 살 한봄이 사계절을 지나며 어떤 관계를 선택하고 어떤 모습으로 달라지게 될지 더욱 궁금하게 만든다.


소설은 여름방학 수학 특강 첫날, 한봄이 학원 복도에서 낯익은 얼굴의 추동하와 마주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동하는 한봄이 사는 아파트에서 종종 보았던 택배 기사였고 알고 보니 자신과 같은 고등학교 1학년 학생이었다. 한봄은 그동안 동하가 1401호로 와야 할 택배를 자꾸 1301호에 두고 갔다며 말을 걸고 조금은 엉뚱한 첫 대화를 나누게 된다. ‘가을 추, 겨울 동, 여름 하’를 쓰는 동하의 이름에 봄만 빠져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한봄은 자신의 이름을 밝히고 두 사람은 서로의 이름에 담긴 계절을 계기로 조금씩 가까워진다. 택배 기사와 고객으로 스쳐 지나가던 사이가 같은 학원에서 다시 만나면서 새로운 관계로 이어지는 이 장면은 앞으로 펼쳐질 두 사람의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열어주며 더욱 궁금하게 만든다.

그리고 주인공 한봄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어린 시절부터 자신을 키워온 할머니 강만춘이다. ‘늦봄’이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할머니는 한봄에게 유일한 가족이나 다름없는 존재이고, 한봄 역시 할머니가 없는 집에 들어서는 순간 그 부재를 온몸으로 느낄 만큼 깊이 의지하고 있다. 반면 엄마 서윤혜는 한봄에게 이름 그대로 서운한 사람이다. 직접 키우지는 않았지만 매달 돈을 보내고 수박과 감, 영양제 같은 물건을 꾸준히 택배로 보내며 멀리서 두 사람의 삶에 관여해 왔다. 한봄은 그런 엄마를 일부러 ‘서운해 씨’라고 부르며 궁금해하지 않으려 애쓴다. 자신에게는 할머니만 있으면 된다고 믿어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느 날 할머니가 대동맥 판막 협착증으로 수술을 받아야 한다는 진단을 받고 보호자로 엄마를 불러야겠다고 말하면서 한봄이 애써 밀어두었던 엄마의 존재가 다시 삶의 한가운데로 들어오기 시작한다.


할머니의 수술이 결정되면서 한봄이 오랫동안 외면해 온 엄마의 존재도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문제가 된다. 한봄의 아빠는 한봄이 태어나기 전 급성 심근경색으로 세상을 떠났고, 엄마 서윤혜는 갓 태어난 한봄을 시어머니인 강만춘에게 맡긴 뒤 떠났다. 이후 엄마는 매달 양육비를 보내고 계절마다 과일이나 생활용품, 영양제 등을 택배로 보내며 멀리서 한봄의 삶에 흔적을 남겨왔다. 하지만 어린 한봄이 할머니의 휴대전화에서 엄마의 존재를 알아내 연락을 보냈을 때 돌아온 것은 아무런 답도 없는 침묵이었다. 그 뒤로 도착하는 택배 상자는 한봄에게 엄마가 보내는 일방적인 답장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한봄은 서윤혜라는 이름을 일부러 ‘서운해 씨’라고 부르며 엄마를 향한 궁금증과 기대를 차단하고 자신에게는 할머니만 있으면 된다고 믿으며 살아왔던 것이다.

그런 한봄에게 할머니가 수술 전후의 보호자로 엄마를 부르겠다고 선언한 일은 단순히 낯선 사람과 함께 지내야 하는 문제와는 달랐다. 더구나 할머니는 한봄이 서윤혜를 ‘엄마’라고 부르지 않으면 수술도 받지 않겠다고 못을 박는다. 한봄은 이미 자신이 다 컸고 엄마에게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지만 막상 엄마가 집으로 돌아온다는 사실 앞에서는 오래전의 감정들이 다시 흔들리기 시작한다. 엄마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하면서도 좋은 사람일까 봐 오히려 두렵고, 미워하는 편이 차라리 마음 편할 것 같다고 생각하는 모습에서는 한봄이 쌓아 온 무관심이 사실 자신을 지키기 위한 방어였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그렇게 한봄은 할머니의 수술을 계기로 애써 철벽 밖에 두었던 엄마를 다시 자신의 삶 안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상황에 놓이고 자신에게 찾아올 변화가 어떤 모습일지 알 수 없는 채 그 시간을 기다리게 된다.

한봄은 할머니에게서 평생 서로 믿고 아끼는 사람이 세 명만 있어도 성공한 인생이라는 말을 듣고서 자신의 세 자리 가운데 두 자리는 이미 할머니와 단짝 규림이가 채우고 있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남은 한 자리이다. 할머니의 심장 수술을 앞두고 오래된 상실의 공포가 다시 고개를 들면서 한봄은 자신도 모르게 곁을 지켜 줄 또 한 사람을 찾기 시작하고 그 후보에 엄마를 올렸다가 다시 내려놓기를 반복한다. 오랫동안 미워하고 외면해 온 사람에게 다시 마음이 움직이는 일이 못마땅하면서도 함께 지내는 시간이 쌓일수록 엄마를 향한 기대와 연민까지 완전히 밀어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소설은 누군가를 받아들인다는 것이 과거의 상처를 없던 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상처를 안은 채 조금씩 서로를 이해해 가는 일일 수 있음을 보여준다. 과연 한봄의 세 번째 자리는 누구로 채워질지, 그리고 엄마와 동하를 비롯해 한봄의 곁에 새롭게 들어온 사람들이 어떤 변화를 만들어 갈지는 책을 통해 직접 확인해 보길 추천해본다.

소설을 읽으며 가장 오래 남은 것은 ‘슬픔과 불행은 엄연히 다르다’는 한봄의 생각이다. 부모의 부재로 때때로 슬펐지만 할머니에게 충분한 사랑을 받았기에 자신의 삶을 불행하다고 여기지 않는 한봄의 모습은 결국 삶을 결정하는 것은 결핍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살아가느냐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한봄은 사계절을 지나며 엄마와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 가고 동하와 마음을 나누며 언제까지나 그대로일 것 같았던 할머니와 규림이와의 관계 역시 언젠가는 달라질 수 있음을 조금씩 받아들인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관계는 영원히 같은 자리에 머물지 않더라도 함께 보낸 시간과 그 안에서 주고받은 사랑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

무엇보다 한봄이 평생 믿고 아낄 세 사람을 찾는 데서 출발해 결국 그중 한 자리를 자기 자신에게 내어주는 과정이 인상적이었다. 누군가가 곁에 있어야만 외롭지 않은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으면서도 혼자일 때 온전할 수 있는 힘을 갖는 것이 진정한 자립에 가까운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 책에서 말하는 회복은 상처를 완전히 지우거나 더 이상 실패하지 않는 상태가 아니라 무너진 뒤에도 다시 시작하고 변화하는 관계 속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아가는 힘에 가깝다고 본다. 계절은 머물지 않고 사람과 관계 역시 계속 변하지만, 어떤 시간은 오래도록 한 사람 안에 남아 다음 계절을 살아갈 힘이 된다. <어떤 계절은 영원하지>는 그렇게 변화하는 관계 속에서도 자신을 잃지 않고 조금씩 자신을 믿고 환대하는 법을 배워 가는 이야기를 따뜻하게 보여주기에 더욱 긴 여운을 남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내 마음을 키우는 100문장 - 푸른 사자 와니니 필사책 푸른 사자 와니니
이현 지음 / 창비 / 2026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우리 집 아이들이 너무나 좋아했던 <푸른 사자 와니니>. 2015년 첫 권을 시작으로 10년 동안 이어진 이야기가 2026년 10권으로 완결되었을 때, 긴 이야기를 끝까지 함께했다는 뿌듯함보다 이제 더는 새로운 와니니를 만날 수 없다는 섭섭함이 더 크게 남았다. 그런데 그 아쉬운 마음을 달래 주듯 <내 마음을 키우는 100문장: 푸른 사자 와니니 필사책>이 찾아왔다. IBBY가 선정한 ‘전 세계 어린이가 함께 읽어야 할 책’이자 권정생문학상 수상작, 인기 뮤지컬의 원작으로도 잘 알려진 <푸른 사자 와니니> 시리즈는 지난 10년 동안 누적 판매 100만 부를 기록하며 많은 독자에게 사랑 받아 왔다. 이번 책은 그 긴 여정을 마무리한 뒤 시리즈 전권에서 오래 기억하고 싶은 문장 100개를 골라 한 권에 담았다는 점에서 와니니를 좋아했던 독자라면 더욱 반갑게 느껴질 만하다.

무리에서 쫓겨났던 어린 암사자 와니니가 친구들을 만나 자신만의 무리를 이루고 진정한 우두머리로 성장하기까지, 열 권에 걸쳐 펼쳐졌던 이야기를 이번에는 필사라는 방식으로 다시 만날 수 있다. 용기와 가능성, 우정과 가족, 나다움과 성장에 관한 문장을 하루 한 줄씩 천천히 읽고 직접 써 보면서 무심코 지나쳤던 문장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으며 ‘오늘의 단어’를 통해 어휘를 익히고 자신만의 문장까지 만들어 볼 수 있다는 점도 눈에 띈다. 무엇보다 <푸른 사자 와니니>의 팬이라면 익숙한 장면과 문장을 손으로 한 자 한 자 옮겨 쓰며 그때의 이야기를 다시 떠올릴 수 있다는 점이 가장 좋고 반갑다. 완결된 이야기를 처음부터 다시 읽는 것과는 또 다른 방식으로 와니니를 만나고 필사를 통해 와니니가 전해 주었던 용기와 성장의 감동에 다시 한번 빠져볼 수 있다니 이보다 더 반가운 책이 있을까.


책은 본격적인 필사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이 책을 활용하는 법’을 제시해 독자가 자신의 방식으로 부담 없이 책을 사용할 수 있도록 안내하고 있다. 처음부터 순서대로 필사할 필요 없이 차례를 살펴 그날 나에게 필요한 문장을 골라도 되고, 문장 전체를 따라 쓰거나 강조된 부분만 선택해 필사해도 좋다. 필사를 마친 뒤에는 ‘오늘의 단어’를 활용해 뜻과 예문을 살펴보고 자신만의 문장을 만들어 볼 수 있으며 마지막에는 해당 문장의 번호를 ‘마음을 키우는 필사 습관 기록’에 표시해 얼마나 진행했는지도 한눈에 확인할 수 있다. 단순히 좋은 문장을 베껴 쓰는 데 그치지 않고 읽고, 쓰고, 생각하고, 기록하는 과정을 자연스럽게 이어 갈 수 있도록 구성해 놓았다는 점이 돋보인다.


책의 첫 번째 필사 문장은 1권 29쪽, ‘초원 제일의 암사자’라는 제목의 장면에서 시작한다. 아직 작고 약한 와니니가 마디바 할머니를 닮은 멋진 사자가 되고 싶어 하는 장면으로, “와니니는 마디바 할머니를 닮고 싶었다. 아직 작고 약하지만 반드시 멋진 사자로 자라날 자신이 있었다.”라는 문장이 강조되어 있다. 지금의 모습만으로 자신의 가능성을 단정 짓지 않고 앞으로 자신이 어떤 존재가 되고 싶은지를 바라보는 와니니의 마음이 잘 드러나는 대목이다. 특히 ‘아직’이라는 말에는 현재의 부족함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이 끝은 아니라는 뜻이 담겨 있고, ‘반드시’라는 말에서는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 느껴진다. 그래서 이 문장은 단순히 어린 사자가 어른 사자로 자라는 모습을 넘어 자신이 바라는 모습에 가까워지기 위해 조금씩 성장해 가는 마음을 보여 주는 문장으로 읽힌다.

한 장의 구성도 이런 문장의 의미를 충분히 생각해 볼 수 있도록 짜여 있다. 왼쪽에는 원작의 앞뒤 문맥과 함께 필사할 부분을 따로 표시해 두었고, 문장이 어느 권 몇 쪽에서 나온 것인지도 적혀 있어 필요하면 원작의 장면을 다시 찾아볼 수 있다. 이어 아래쪽의 ‘오늘의 단어’에서는 이 장면과 연결되는 ‘자라나다’를 제시해 단어의 여러 뜻을 살펴보게 한다. 오른쪽에는 문장을 직접 써 볼 수 있는 넉넉한 공간과 함께 ‘오늘의 단어’를 활용해 새로운 문장을 만들어 보는 활동도 마련되어 있다. 한 문장을 그대로 따라 쓰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문장을 이해하고, 단어의 뜻을 넓혀 보고, 마지막에는 자신의 언어로 다시 표현해 보게 한다는 점에서 필사와 어휘 학습이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책에 실린 여러 문장들 가운데 가장 마음에 오래 남은 것은 3권 182~183쪽에서 가져온 “그러니 어려움과 함께 지내는 법을 찾아 보자는 거야.”라는 문장이다. 앞으로도 계속 어려운 일이 있을 거냐는 잠보의 물음에 와니니는 그렇다고 답하면서, 어려움을 없애거나 피하는 대신 그것과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찾아보자고 말한다. 보통 우리는 힘든 일이 닥치면 빨리 해결하거나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이 문장은 삶에서 어려움이 완전히 사라지기를 기다리기보다 그것을 받아들이면서도 계속 앞으로 나아가는 태도가 더 중요할 수 있음을 생각하게 한다. 특히 “어차피 우리는 늘 어려웠어. 한 번도 쉬운 적이 없었잖아.”라는 앞선 대화와 이어서 읽으면, 와니니의 말이 단순한 위로나 낙관이 아니라 이미 여러 번 힘든 시간을 지나온 경험에서 나온 생각이라는 점에서 더 깊게 다가온다.

이 장면의 제목인 ‘어려움과 함께 사는 법’ 역시 문장의 의미를 잘 보여 준다. 어려움을 무조건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삶의 일부로 인정하면서 그 안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가는 것이다. 아래에 제시된 오늘의 단어도 바로 ‘어렵다’로, ‘하기가 까다로워 힘에 겹다’, ‘겪게 되는 곤란이나 시련이 많다’라는 뜻을 함께 살펴보게 한다. 익숙하게 사용하는 단어이지만 와니니의 이야기를 통해 만나니 그 뜻이 조금 더 구체적으로 느껴진다. 무엇보다 누구에게나 힘든 시기는 찾아오고 모든 문제가 뜻대로 해결되는 것도 아닌 만큼 그때마다 어떻게 버틸 것인지보다 어떻게 함께 살아갈 것인지를 생각하게 한다는 점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오래 기억하고 싶은 문장이다.

결국 <내 마음을 키우는 100문장: 푸른 사자 와니니 필사책>은 <푸른 사자 와니니>를 좋아했던 독자에게는 익숙한 이야기를 새로운 방식으로 다시 만나는 책이고, 아직 시리즈를 읽지 않은 독자에게는 와니니의 세계를 부담 없이 접할 수 있는 입구가 되어 준다. 무엇보다 마음에 드는 문장을 눈으로 읽고 지나가는 데서 끝나지 않고, 직접 손으로 써 보며 그 문장이 왜 오래 남는지 생각하게 만든다는 점이 좋다. 용기, 우정, 가족, 희망, 나다움, 성장처럼 어린이들이 살아가며 자연스럽게 마주하게 되는 주제들이 와니니와 친구들의 구체적인 경험 속에서 전해지기 때문에 억지로 교훈을 가르친다는 느낌도 적다. 한 문장씩 따라가다 보면 어느 순간 와니니의 이야기를 읽는 동시에 지금의 나에게 필요한 말이 무엇인지도 돌아보게 된다.

특히 이 책은 어린이만을 위한 필사책이라기보다 <푸른 사자 와니니>를 함께 읽어 온 부모나 어른 독자에게도 충분히 의미가 있다. 같은 문장이라도 처음 이야기를 읽었을 때와 시간이 흐른 뒤 다시 마주했을 때 받아들이는 의미는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아이와 함께 한 문장씩 골라 써 보며 서로 어떤 문장이 마음에 남았는지 이야기해 보는 것도 좋은 독서 시간이 될 것 같다. 시리즈가 완결되었다는 아쉬움은 여전히 남아 있지만 100개의 문장을 통해 와니니와 다시 만나고 오래 기억하고 싶은 말을 내 손으로 남길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책은 꽤 반가운 선물처럼 느껴졌다. 한 번 읽고 책장에 꽂아 두기보다, 그날그날 마음에 필요한 문장을 찾아 천천히 오래 곁에 두면 더더 좋을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여성의 자리에서 본 한국 근현대사 사계절 1318 교양문고
최성희 지음, 권용철 옮김 / 사계절 / 2026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제목에 끌려 읽게 된 책이다. <여성의 자리에서 본 한국 근현대사>는 우리가 익숙하게 배워 온 한국 근현대사를 여성의 시선에서 다시 바라보는 책이다. 개항과 근대화, 일제강점기와 항일운동, 해방과 한국전쟁, 독재와 민주화, 그리고 오늘날의 촛불과 응원봉 시위에 이르기까지 굵직한 역사적 사건들을 따라가면서 그동안 역사 기록의 중심에서 쉽게 만나지 못했던 여성들의 삶과 역할을 함께 살펴본다. 명성황후와 순헌황귀비처럼 왕실에서 근대를 맞이한 여성부터 신식 교육을 받은 여학생과 유관순을 비롯한 독립운동가, 새로운 삶의 방식을 선택한 신여성, 전쟁과 산업화의 시간을 살아낸 여성, 민주주의와 여성의 권리를 위해 거리와 광장으로 나선 이들까지 다양한 인물과 장면이 등장한다. 이를 통해 역사의 모든 순간에 여성들이 함께 있었으며 다만 그 존재가 충분히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동안 비어 있거나 가려져 있던 여성들의 자리를 하나씩 되짚으며 우리가 알고 있던 한국 근현대사의 모습을 보다 넓고 입체적으로 바라보게 만든다.

이 책을 쓴 최성희 저자는 재일 교포 3세로 조선 근대사와 교육사, 젠더사를 연구해 온 역사학자이다. 이러한 배경 덕분에 책에는 잘 알려진 여성 인물들 뿐만 아니라 재일 조선인, 재한 일본인 여성, 북한 여성, 중국 조선족과 이주 여성 등 서로 다른 위치에서 한국 근현대사의 시간을 살아온 여성들의 이야기도 폭넓게 담겨 있다. 특히 역사를 왕과 장군, 정치가와 전쟁을 중심으로만 바라보지 않고 교육과 노동, 가족과 일상, 저항과 연대의 영역으로까지 시선을 넓혀 살펴본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또한 각 시대와 관련된 영화와 드라마, 뮤지컬, 다큐멘터리 등 다양한 콘텐츠를 함께 소개해 자칫 어렵고 딱딱하게 느껴질 수 있는 근현대사를 보다 친숙하게 접하고 이해할 수 있도록 하였다. 책을 통해 여성들의 삶을 따라가다 보면 익숙하다고 생각했던 한국 근현대사의 장면들이 전혀 다른 각도에서 새롭게 보이기 시작한다.


책은 저자가 대학에서 역사 수업을 할 때 학생들에게 “역사 속 인물 중 세 사람을 떠올려 보세요”라고 던진 질문에서 시작한다. 막상 머릿속에 떠오르는 인물들을 생각해 보면 왕이나 장군, 정치가처럼 대부분 남성인 경우가 많다. 우리가 배워 온 역사 역시 정복과 전쟁, 정치와 권력의 변화를 중심으로 기록되어 왔고 그 과정에서 여성들의 삶과 역할은 상대적으로 잘 드러나지 않았다. 비교적 가까운 근현대사에서도 식민 지배와 항일운동, 분단과 전쟁, 독재와 민주화 같은 사건을 떠올릴 때 먼저 언급되는 인물들은 여전히 남성인 경우가 많다. 하지만 여성들이 역사에 없었던 것은 아니다. 여성들 역시 같은 시대를 살아가며 서로 연대하고 저항하며 정치에 참여해 역사적 장면들을 함께 만들어 왔다. 다만 그들의 존재와 목소리가 충분히 기록되지 못했고 우리가 배우는 역사에서도 쉽게 만나기 어려웠을 뿐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저자가 ‘history’를 ‘his story’와 ‘her story’라는 말로 풀어내는 대목에서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history’는 본래 ‘탐구’를 뜻하는 그리스어 historia에서 유래했지만, 저자는 오랫동안 남성을 중심으로 서술되어 온 역사가 마치 ‘his story’, 즉 ‘그들의 이야기’처럼 보인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를 ‘her story’, 즉 ‘그녀들의 이야기’의 자리에서 다시 바라본다면 우리가 알고 있던 역사가 어떻게 달라질지를 묻는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기존 역사에 몇몇 여성 인물을 덧붙이는 데 있지 않다. 지금까지 누구의 경험이 역사로 기록되어 왔고, 누구의 삶과 목소리가 그 바깥에 놓여 있었는지를 다시 살펴보는 데 의미가 있다. 더구나 저자가 말하는 ‘her story’는 여성만을 위한 역사도 아니다. 여성과 남성, 성소수자를 포함한 모든 사람이 함께 살아가는 역사를 보다 넓은 시선으로 바라보려는 시도이며 결국 누구의 삶도 역사에서 쉽게 지워져서는 안 된다는 메시지로 이어지는 듯하다.

책의 첫 장은 조선 왕실과 대한제국 황실에서 근대를 마주한 여성들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명성황후는 당시 여성에게 쉽게 허락되지 않았던 정치의 영역에 직접 등장하여 개화와 외교 문제에 관여했고, 순헌황귀비 역시 아관파천에 관여하는 한편 여성 교육의 확대에 힘썼다. 저자는 명성황후를 둘러싼 엇갈린 평가를 함께 제시하면서도 한 여성이 정치 공간에 모습을 드러내고 근대의 변화와 직접 맞부딪쳤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이들의 이야기는 이후 왕실을 넘어 학교와 거리, 사회 곳곳으로 활동 영역을 넓혀 가는 여성들의 모습으로 이어진다.

특히 2장에서 다루는 1910~1930년대 여학생들의 모습은 그 변화가 얼마나 적극적이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신식 학교에 다닌 여성들은 단순히 교육의 기회를 얻는 데 만족하지 않고 학교 안의 부당한 현실에 직접 목소리를 냈다. 여성 차별적이거나 낡은 사고방식을 지닌 교원을 거부하며 집단으로 수업을 거부하는 동맹 휴학에 나섰고 자신들의 요구가 받아들여질 때까지 행동으로 맞섰다. 당시 여성에게 기대되던 모습이 집 안에서 남편이나 형제를 따르며 조용히 살아가는 것이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러한 행동은 더욱 인상적으로 다가온다. 여학생들은 학교 안의 문제뿐 아니라 만세 운동과 항일운동에도 참여했고, 그 과정에서 유관순뿐 아니라 이름이 널리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여성들이 함께 역사의 한 장면을 만들어 갔다. 여기에 나혜석, 허영숙, 최승희처럼 예술과 전문직의 영역으로 나아간 신여성들의 삶까지 더해지며 근대가 여성들에게 새로운 기회를 열어 준 시대인 동시에 기존의 질서와 끊임없이 충돌하며 자신의 자리를 만들어 가야 했던 시대였음을 보여준다.


3장에서는 전쟁이라는 거대한 폭력 속에서 여성들이 어떤 방식으로 동원되고 피해를 입었는지를 집중적으로 다룬다. 1930년대 이후 일본의 전시 체제가 강화되면서 조선 여성들 역시 공장과 탄광 등으로 동원되었고 그중에서도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은 바로 일본군 위안부의 피해이다. 저자는 위안부와 위안소의 존재를 부정하거나 일본군의 관여를 축소하려는 주장에 맞서 관련 일본군 문서와 모집 광고 등 확인된 1차 자료를 통해 그 실체를 짚어 간다. 1932년 상하이에 처음 설치된 것으로 알려진 위안소는 이후 일본, 조선, 대만, 중국,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미얀마, 필리핀, 인도네시아 등 일본군이 진출한 여러 지역으로 확산되었다. 이처럼 위안소가 광범위하게 운영되었다는 사실은 그것이 일부 지역에서 우연히 발생한 일이 아니라 전쟁 수행 과정에서 조직적으로 만들어지고 관리된 제도였음을 보여준다.

이 장이 더욱 무겁게 다가오는 이유는 전쟁이 끝났다고 해서 여성들의 고통까지 끝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1945년 해방 이후에도 한반도는 곧 한국전쟁을 맞았고 여성들은 군인으로 전쟁에 참여하기도 했지만 동시에 민간인 학살과 사별, 피난과 이산을 겪으며 또 다른 상처를 떠안아야 했다. 저자는 이처럼 전쟁을 국가와 군대의 움직임만으로 설명하지 않고 그 과정에서 여성들의 몸과 삶이 어떻게 전쟁 체제에 편입되고 희생되었는지를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특히 일본군 위안부 피해를 둘러싼 역사적 사실을 분명히 짚는 대목은 이 문제가 과거의 한 사건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지금도 정확하게 기억하고 기록해야 할 역사라는 점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4장에서는 한국전쟁 이후 독재 정권과 민주화의 시간을 지나온 여성들의 모습을 살펴보고 있다. 그동안 반정부 시위와 5·18 민주화운동, 1987년 6월 민주항쟁은 주로 시위대의 최전선에 섰던 남성들을 중심으로 기억되어 왔다. 하지만 저자는 그 곁에 수많은 여성들이 함께 있었다는 사실을 다시 보여준다. 〈임을 위한 행진곡〉으로 기억되는 박기순, 이한열의 어머니이자 이후 거리의 투사가 된 배은심을 비롯해 5월 광주에서 시민군에 합류하고 부상자를 치료하거나 주먹밥을 만들어 나르며 항쟁을 지원했던 여성들이 바로 그들이다. 특히 민주화 과정에서 희생된 이들의 어머니와 부인, 딸들이 가족의 죽음을 개인적인 슬픔으로만 남겨 두지 않고 사망의 진상을 밝히기 위해 거리로 나섰다는 점은 무척이나 인상적이다. 민주화운동의 역사는 직접 시위에 참여한 사람들뿐 아니라 남겨진 자리에서 진실을 요구하며 싸움을 이어 간 여성들의 시간까지 함께 보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장은 민주화운동에 참여한 여성들만 다루는 게 아니라 타국으로 떠나 노동했던 파독 간호사와 농촌에서 새마을운동에 동원되었던 여성들의 삶을 함께 살피며 산업화와 국가 정책 속에서 여성들이 맡아야 했던 역할까지 보여준다. 또한 민주화 이후에도 여성들의 싸움은 끝나지 않았음을 짚는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이 자신의 피해를 세상에 알리고 책임을 요구하기 시작한 운동, 가족법 개정 운동과 여성 노동 운동을 거쳐 촛불 시위와 응원봉 시위에 이르기까지 여성들은 각 시대의 문제 앞에서 끊임없이 목소리를 내왔다. 특히 민주화가 이루어진 뒤에도 사회의 남성 중심적 구조가 곧바로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는 점에서 이들의 투쟁은 민주주의의 완성 이후에 덧붙여진 이야기가 아니라 민주주의의 범위를 계속 넓혀 온 과정으로 읽혔다.

책의 후반부로 갈수록 시선은 한반도 안에만 한정짓지 않는다. 일본과 중국으로 건너가 재일 조선인과 조선족으로 살아간 여성들, 반대로 일본에서 한반도로 건너와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 여성들, 그리고 2000년대 이후 한국 사회로 들어온 이주 여성들의 삶까지 살펴보며 젠더와 민족, 노동과 결혼의 문제가 서로 얽혀 있음을 보여준다. 이어 민주화 이후 여성들의 사회·정치 진출과 IMF 외환 위기, 여성 혐오 범죄와 미투 운동, 트랜스젠더 여성의 권리 문제, 북한 여성들의 삶까지 다루면서 여성의 역사가 과거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도 계속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각 장의 끝에 영화와 드라마, 뮤지컬, 다큐멘터리 등을 함께 소개해 책에서 만난 역사적 장면들을 또 다른 방식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한 구성도 무척 흥미롭다. 익숙하게 알고 있던 역사적 사건도 누구의 자리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다른 모습과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는 점을 잘 보여주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결국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her story’를 새롭게 만들어 기존의 남성 중심 역사를 대신하자는 것이 아니라고 본다. 오히려 그동안 충분히 기록되지 못했던 여성들의 삶과 목소리를 되찾아 서로의 역사를 함께 이해하는 ‘our story’로 나아가자는 데 더 가깝다. 저자는 역사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침묵하지 않아야 미래의 불행을 하나라도 줄일 수 있다고 말한다. 지금도 성별과 세대, 국적과 정체성을 둘러싼 갈등과 대립이 이어지고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 말은 더욱 무겁게 다가온다. 이 책을 읽으며 역사를 배운다는 것은 이미 정해진 사건과 인물의 이름을 기억하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 누구의 목소리가 기록에서 빠져 있었는지를 돌아보고 서로 다른 삶을 이해하는 과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의미에서 <여성의 자리에서 본 한국 근현대사>는 가려져 있던 여성들의 자리를 다시 보여주는 역사책인 동시에 우리가 앞으로 어떤 역사를 함께 만들어 가야 할지 생각하게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우리에게도 고양이 같은 잠이 필요하다 - 김남희 잡문집
김남희 지음 / 수오서재 / 2026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제목만으로도 한 번쯤 멈춰 보게 되는 책이 있다. <우리에게도 고양이 같은 잠이 필요하다>도 그런 책이었다. 고양이가 담긴 표지와 함께 '고양이 같은 잠'이라는 표현이 눈길을 끌었고, 바쁘게 움직이고 더 많은 일을 해내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지는 요즘 우리에게 왜 이런 잠이 필요하다고 말하는지 궁금해 읽게 되었다. 이 책은 여행작가 김남희 작가가 2003년 첫 여행을 시작한 이후 20년 넘게 써온 일기와 세계 곳곳에서 직접 촬영한 고양이 사진을 함께 엮어낸 책이다. 그날 먹은 음식과 하루의 지출처럼 사소한 기록부터 여행지에서 만난 사람들, 당시의 고민과 감정, 시간이 흐르며 달라진 생각까지 수십 권의 일기장에 남겨진 문장들이 책의 바탕이 되었다. 여기에 다마스쿠스의 시장 골목과 그리스의 오래된 항구, 알바니아의 숲을 비롯해 여러 여행지에서 마주친 고양이들의 사진이 더해져 저자가 지나온 시간과 여행의 흔적을 글과 사진으로 함께 만날 수 있다는 점도 이 책의 인상적인 특징이다.


“기록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남지 않기에, 어떻게든 기록하고자 했다”는 작가의 말처럼 이 책은 여행지의 특별한 풍경이나 경험을 소개하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2003년 1월 인천 포구에서 시작된 여행의 기록이 2026년 여름까지 이어졌다는 사실만 보더라도, 이 책이 한두 번의 여행을 정리한 일반적인 여행 에세이와는 조금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수많은 길을 걷고 낯선 곳에 머무는 동안 자신을 알아가는 과정과 나이 들고 변해가는 삶을 받아들이는 태도, 무엇이든 더 많이 이루려 하기보다 자신이 할 수 있는 만큼 해나가는 법에 대한 생각이 오랜 시간의 기록 속에 자연스럽게 쌓여 있다. 결국 이 책은 세계 곳곳을 걸어온 한 여행자의 기록이면서 빠르게 살아가는 것이 익숙해진 우리에게 자신의 속도와 보폭으로 살아가는 삶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만든다.


저자는 먼저 여행을 다니면서 유난히 고양이에게 눈길이 갔던 이유를 들려준다. 고양이는 주변의 흐름이나 사람의 기준에 자신을 맞추지 않은 채 제 방식대로 움직이고 쉬어 간다. 그런 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면 저자 역시 걷던 속도를 늦추게 되고, 꼭 세워 둔 계획대로 움직이지 않아도 괜찮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해야 할 일과 목표로 하루를 빈틈없이 채우는 데 익숙한 사람에게 고양이는 가만히 머무는 시간도 충분히 필요하다는 사실을 떠올리게 하는 존재다.


그렇기에 저자에게 고양이는 여행지에서 마주치는 귀여운 동물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쉼 없이 성과를 내고 성실해야 한다는 삶의 방식과는 전혀 다른 태도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해내야 한다는 부담에서 잠시 떨어져 쉬고, 멈추고, 마음이 이끄는 대로 시간을 보내는 일 역시 삶을 지탱하는 데 필요하다는 것이다. 책 제목 속 ‘고양이 같은 잠’도 이런 맥락에서 읽힌다. 더 잘 살아가기 위해 계속 힘을 쏟는 것만큼,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을 스스로에게 허락하는 일도 중요하다는 메시지가 책의 시작부터 또렷하게 드러나며 이후 이어질 저자의 이야기가 더욱 궁금해진다.


책장을 넘기다 보면 여행과 삶에 대한 짧은 문장 사이사이에 세계 곳곳에서 만난 고양이들이 불쑥 나타난다. 그 사진들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 순간 사람과 관계에 대한 저자의 생각으로 시선이 옮겨가게 된다. 특히 ‘한 사람의 영원’이라는 글에서는 우리가 누군가를 안다고 말할 때 과연 그 사람의 어디까지를 알고 있는지 묻는다. 오랜 시간을 함께했다고 해도 결국 기억 속에 남는 것은 특정한 순간의 표정이나 말, 그때의 분위기처럼 아주 제한된 장면일 수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렇게 잠시 마주했던 모습을 그 사람 전체인 것처럼 오래 간직하기도 한다. 누군가를 완전히 이해하는 일은 어쩌면 불가능할지 모르지만 짧게 스쳐간 한순간이 오랫동안 한 사람을 기억하게 만드는 모습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특히 인상 깊었던 것은 저자가 여행지에서 만난 나이 든 여자들을 바라보는 시선이다. 버스에서 길을 묻자 주변의 여성들이 함께 나서서 방법을 알려주고, 말을 튼 뒤에는 과자와 빵까지 챙겨주는 모습을 보며 저자는 나이가 들수록 이런 여자들이 더 좋아진다고 말한다. 저자에게 나이 든 여자들은 오랜 시간 가족과 주변 사람을 돌보며 살아온 경험 덕분인지 타인의 곤란함이나 어려움을 그냥 지나치지 않는 존재로 다가온다. 누군가 도움을 청하면 계산보다 먼저 손을 내미는 모습, 자신보다 타인의 안부를 먼저 살피는 태도에서 삶을 오래 살아온 사람만의 너그러움을 발견하는 것이다. 이 부분은 나 역시 너무 공감이 되었다. 나이가 든다는 것이 단순히 시간의 흐름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사정을 조금 더 이해하고 기꺼이 품어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가는 과정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기에 저자가 자신도 그런 여자들처럼 너그럽고 순박하게 늙어가고 싶다고 말하는 대목이 오래 남았고 나 역시 그러고 싶다.


삶에 대해 이야기한 여러 글 가운데 '삶을 견디는 재능'에 대한 이야기는 오래 남는다. 저자는 매일의 노을과 꽃향기, 공기와 바다의 소리가 어제와는 다르게 느껴진다는 사실에서 작은 위로를 발견한다. 거창한 사건이나 특별한 성취가 아니라 일상에서 쉽게 지나칠 수 있는 변화에 마음이 움직이고 그 안에서 기쁨을 느낄 수 있는 태도야말로 삶을 버텨내는 자신의 힘이라고 말한다. 이 글을 읽으며 삶을 견디는 힘은 반드시 강한 의지나 대단한 목표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사소한 것에서 위로를 발견할 수 있는 마음에서도 생겨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범한 하루 속 작은 변화에 여전히 마음이 반응한다는 사실 자체가 삶을 계속 살아가게 하는 힘이 될 수 있다는 점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책을 다 읽고 나면 <우리에게도 고양이 같은 잠이 필요하다>는 여행의 기록이면서 동시에 한 사람이 자신의 방식으로 삶을 견디고 받아들여온 시간의 기록이라는 생각이 든다. 길 위에서 만난 사람과 풍경, 피할 수 없는 외로움과 관계의 빈자리, 나이 들어가는 마음과 사소한 것에서 얻는 위로까지 저자가 지나온 여러 순간들이 짧은 글 속에 차곡차곡 담겨 있다. 모든 것을 잘해내거나 흔들리지 않는 삶을 말하기보다 때로는 지치고, 누군가를 그리워하고, 혼자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면서도 다시 하루를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이 좋았다. 그래서 이 책은 삶에 대한 특별한 답을 제시한다기보다 각자의 방식으로 삶을 견디고 이어가는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더욱 공감이 갔다.


결국 이 책이 전하는 위로는 삶이 힘들지 않을 것이라는 낙관보다는 힘든 순간이 있어도 자신에게 맞는 방식으로 계속 살아갈 수 있다는 데에 가깝다고 본다. 누군가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해도 한순간의 기억을 오래 간직할 수 있고 외로움을 피할 수 없어도 타인의 온기에 기대어 다시 힘을 얻을 수 있으며 거창한 행복이 아니더라도 하루의 작은 변화에서 위로를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때로는 고양이처럼 조금 느슨해지고 아무것도 이루지 않는 시간을 가져도 괜찮다. 오랜 시간 걷고 쓰며 자신에게 가장 어울리는 삶을 찾아온 저자의 문장들을 따라가다 보면 잘 살아낸다는 것은 끝까지 애쓰는 일이 아니라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도 다시 자신의 보폭으로 하루를 이어가는 일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남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