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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자리에서 본 한국 근현대사 ㅣ 사계절 1318 교양문고
최성희 지음, 권용철 옮김 / 사계절 / 2026년 9월
평점 :
제목에 끌려 읽게 된 책이다. <여성의 자리에서 본 한국 근현대사>는 우리가 익숙하게 배워 온 한국 근현대사를 여성의 시선에서 다시 바라보는 책이다. 개항과 근대화, 일제강점기와 항일운동, 해방과 한국전쟁, 독재와 민주화, 그리고 오늘날의 촛불과 응원봉 시위에 이르기까지 굵직한 역사적 사건들을 따라가면서 그동안 역사 기록의 중심에서 쉽게 만나지 못했던 여성들의 삶과 역할을 함께 살펴본다. 명성황후와 순헌황귀비처럼 왕실에서 근대를 맞이한 여성부터 신식 교육을 받은 여학생과 유관순을 비롯한 독립운동가, 새로운 삶의 방식을 선택한 신여성, 전쟁과 산업화의 시간을 살아낸 여성, 민주주의와 여성의 권리를 위해 거리와 광장으로 나선 이들까지 다양한 인물과 장면이 등장한다. 이를 통해 역사의 모든 순간에 여성들이 함께 있었으며 다만 그 존재가 충분히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동안 비어 있거나 가려져 있던 여성들의 자리를 하나씩 되짚으며 우리가 알고 있던 한국 근현대사의 모습을 보다 넓고 입체적으로 바라보게 만든다.
이 책을 쓴 최성희 저자는 재일 교포 3세로 조선 근대사와 교육사, 젠더사를 연구해 온 역사학자이다. 이러한 배경 덕분에 책에는 잘 알려진 여성 인물들 뿐만 아니라 재일 조선인, 재한 일본인 여성, 북한 여성, 중국 조선족과 이주 여성 등 서로 다른 위치에서 한국 근현대사의 시간을 살아온 여성들의 이야기도 폭넓게 담겨 있다. 특히 역사를 왕과 장군, 정치가와 전쟁을 중심으로만 바라보지 않고 교육과 노동, 가족과 일상, 저항과 연대의 영역으로까지 시선을 넓혀 살펴본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또한 각 시대와 관련된 영화와 드라마, 뮤지컬, 다큐멘터리 등 다양한 콘텐츠를 함께 소개해 자칫 어렵고 딱딱하게 느껴질 수 있는 근현대사를 보다 친숙하게 접하고 이해할 수 있도록 하였다. 책을 통해 여성들의 삶을 따라가다 보면 익숙하다고 생각했던 한국 근현대사의 장면들이 전혀 다른 각도에서 새롭게 보이기 시작한다.
책은 저자가 대학에서 역사 수업을 할 때 학생들에게 “역사 속 인물 중 세 사람을 떠올려 보세요”라고 던진 질문에서 시작한다. 막상 머릿속에 떠오르는 인물들을 생각해 보면 왕이나 장군, 정치가처럼 대부분 남성인 경우가 많다. 우리가 배워 온 역사 역시 정복과 전쟁, 정치와 권력의 변화를 중심으로 기록되어 왔고 그 과정에서 여성들의 삶과 역할은 상대적으로 잘 드러나지 않았다. 비교적 가까운 근현대사에서도 식민 지배와 항일운동, 분단과 전쟁, 독재와 민주화 같은 사건을 떠올릴 때 먼저 언급되는 인물들은 여전히 남성인 경우가 많다. 하지만 여성들이 역사에 없었던 것은 아니다. 여성들 역시 같은 시대를 살아가며 서로 연대하고 저항하며 정치에 참여해 역사적 장면들을 함께 만들어 왔다. 다만 그들의 존재와 목소리가 충분히 기록되지 못했고 우리가 배우는 역사에서도 쉽게 만나기 어려웠을 뿐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저자가 ‘history’를 ‘his story’와 ‘her story’라는 말로 풀어내는 대목에서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history’는 본래 ‘탐구’를 뜻하는 그리스어 historia에서 유래했지만, 저자는 오랫동안 남성을 중심으로 서술되어 온 역사가 마치 ‘his story’, 즉 ‘그들의 이야기’처럼 보인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를 ‘her story’, 즉 ‘그녀들의 이야기’의 자리에서 다시 바라본다면 우리가 알고 있던 역사가 어떻게 달라질지를 묻는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기존 역사에 몇몇 여성 인물을 덧붙이는 데 있지 않다. 지금까지 누구의 경험이 역사로 기록되어 왔고, 누구의 삶과 목소리가 그 바깥에 놓여 있었는지를 다시 살펴보는 데 의미가 있다. 더구나 저자가 말하는 ‘her story’는 여성만을 위한 역사도 아니다. 여성과 남성, 성소수자를 포함한 모든 사람이 함께 살아가는 역사를 보다 넓은 시선으로 바라보려는 시도이며 결국 누구의 삶도 역사에서 쉽게 지워져서는 안 된다는 메시지로 이어지는 듯하다.
책의 첫 장은 조선 왕실과 대한제국 황실에서 근대를 마주한 여성들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명성황후는 당시 여성에게 쉽게 허락되지 않았던 정치의 영역에 직접 등장하여 개화와 외교 문제에 관여했고, 순헌황귀비 역시 아관파천에 관여하는 한편 여성 교육의 확대에 힘썼다. 저자는 명성황후를 둘러싼 엇갈린 평가를 함께 제시하면서도 한 여성이 정치 공간에 모습을 드러내고 근대의 변화와 직접 맞부딪쳤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이들의 이야기는 이후 왕실을 넘어 학교와 거리, 사회 곳곳으로 활동 영역을 넓혀 가는 여성들의 모습으로 이어진다.
특히 2장에서 다루는 1910~1930년대 여학생들의 모습은 그 변화가 얼마나 적극적이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신식 학교에 다닌 여성들은 단순히 교육의 기회를 얻는 데 만족하지 않고 학교 안의 부당한 현실에 직접 목소리를 냈다. 여성 차별적이거나 낡은 사고방식을 지닌 교원을 거부하며 집단으로 수업을 거부하는 동맹 휴학에 나섰고 자신들의 요구가 받아들여질 때까지 행동으로 맞섰다. 당시 여성에게 기대되던 모습이 집 안에서 남편이나 형제를 따르며 조용히 살아가는 것이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러한 행동은 더욱 인상적으로 다가온다. 여학생들은 학교 안의 문제뿐 아니라 만세 운동과 항일운동에도 참여했고, 그 과정에서 유관순뿐 아니라 이름이 널리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여성들이 함께 역사의 한 장면을 만들어 갔다. 여기에 나혜석, 허영숙, 최승희처럼 예술과 전문직의 영역으로 나아간 신여성들의 삶까지 더해지며 근대가 여성들에게 새로운 기회를 열어 준 시대인 동시에 기존의 질서와 끊임없이 충돌하며 자신의 자리를 만들어 가야 했던 시대였음을 보여준다.
3장에서는 전쟁이라는 거대한 폭력 속에서 여성들이 어떤 방식으로 동원되고 피해를 입었는지를 집중적으로 다룬다. 1930년대 이후 일본의 전시 체제가 강화되면서 조선 여성들 역시 공장과 탄광 등으로 동원되었고 그중에서도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은 바로 일본군 위안부의 피해이다. 저자는 위안부와 위안소의 존재를 부정하거나 일본군의 관여를 축소하려는 주장에 맞서 관련 일본군 문서와 모집 광고 등 확인된 1차 자료를 통해 그 실체를 짚어 간다. 1932년 상하이에 처음 설치된 것으로 알려진 위안소는 이후 일본, 조선, 대만, 중국,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미얀마, 필리핀, 인도네시아 등 일본군이 진출한 여러 지역으로 확산되었다. 이처럼 위안소가 광범위하게 운영되었다는 사실은 그것이 일부 지역에서 우연히 발생한 일이 아니라 전쟁 수행 과정에서 조직적으로 만들어지고 관리된 제도였음을 보여준다.
이 장이 더욱 무겁게 다가오는 이유는 전쟁이 끝났다고 해서 여성들의 고통까지 끝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1945년 해방 이후에도 한반도는 곧 한국전쟁을 맞았고 여성들은 군인으로 전쟁에 참여하기도 했지만 동시에 민간인 학살과 사별, 피난과 이산을 겪으며 또 다른 상처를 떠안아야 했다. 저자는 이처럼 전쟁을 국가와 군대의 움직임만으로 설명하지 않고 그 과정에서 여성들의 몸과 삶이 어떻게 전쟁 체제에 편입되고 희생되었는지를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특히 일본군 위안부 피해를 둘러싼 역사적 사실을 분명히 짚는 대목은 이 문제가 과거의 한 사건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지금도 정확하게 기억하고 기록해야 할 역사라는 점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4장에서는 한국전쟁 이후 독재 정권과 민주화의 시간을 지나온 여성들의 모습을 살펴보고 있다. 그동안 반정부 시위와 5·18 민주화운동, 1987년 6월 민주항쟁은 주로 시위대의 최전선에 섰던 남성들을 중심으로 기억되어 왔다. 하지만 저자는 그 곁에 수많은 여성들이 함께 있었다는 사실을 다시 보여준다. 〈임을 위한 행진곡〉으로 기억되는 박기순, 이한열의 어머니이자 이후 거리의 투사가 된 배은심을 비롯해 5월 광주에서 시민군에 합류하고 부상자를 치료하거나 주먹밥을 만들어 나르며 항쟁을 지원했던 여성들이 바로 그들이다. 특히 민주화 과정에서 희생된 이들의 어머니와 부인, 딸들이 가족의 죽음을 개인적인 슬픔으로만 남겨 두지 않고 사망의 진상을 밝히기 위해 거리로 나섰다는 점은 무척이나 인상적이다. 민주화운동의 역사는 직접 시위에 참여한 사람들뿐 아니라 남겨진 자리에서 진실을 요구하며 싸움을 이어 간 여성들의 시간까지 함께 보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장은 민주화운동에 참여한 여성들만 다루는 게 아니라 타국으로 떠나 노동했던 파독 간호사와 농촌에서 새마을운동에 동원되었던 여성들의 삶을 함께 살피며 산업화와 국가 정책 속에서 여성들이 맡아야 했던 역할까지 보여준다. 또한 민주화 이후에도 여성들의 싸움은 끝나지 않았음을 짚는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이 자신의 피해를 세상에 알리고 책임을 요구하기 시작한 운동, 가족법 개정 운동과 여성 노동 운동을 거쳐 촛불 시위와 응원봉 시위에 이르기까지 여성들은 각 시대의 문제 앞에서 끊임없이 목소리를 내왔다. 특히 민주화가 이루어진 뒤에도 사회의 남성 중심적 구조가 곧바로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는 점에서 이들의 투쟁은 민주주의의 완성 이후에 덧붙여진 이야기가 아니라 민주주의의 범위를 계속 넓혀 온 과정으로 읽혔다.
책의 후반부로 갈수록 시선은 한반도 안에만 한정짓지 않는다. 일본과 중국으로 건너가 재일 조선인과 조선족으로 살아간 여성들, 반대로 일본에서 한반도로 건너와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 여성들, 그리고 2000년대 이후 한국 사회로 들어온 이주 여성들의 삶까지 살펴보며 젠더와 민족, 노동과 결혼의 문제가 서로 얽혀 있음을 보여준다. 이어 민주화 이후 여성들의 사회·정치 진출과 IMF 외환 위기, 여성 혐오 범죄와 미투 운동, 트랜스젠더 여성의 권리 문제, 북한 여성들의 삶까지 다루면서 여성의 역사가 과거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도 계속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각 장의 끝에 영화와 드라마, 뮤지컬, 다큐멘터리 등을 함께 소개해 책에서 만난 역사적 장면들을 또 다른 방식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한 구성도 무척 흥미롭다. 익숙하게 알고 있던 역사적 사건도 누구의 자리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다른 모습과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는 점을 잘 보여주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결국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her story’를 새롭게 만들어 기존의 남성 중심 역사를 대신하자는 것이 아니라고 본다. 오히려 그동안 충분히 기록되지 못했던 여성들의 삶과 목소리를 되찾아 서로의 역사를 함께 이해하는 ‘our story’로 나아가자는 데 더 가깝다. 저자는 역사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침묵하지 않아야 미래의 불행을 하나라도 줄일 수 있다고 말한다. 지금도 성별과 세대, 국적과 정체성을 둘러싼 갈등과 대립이 이어지고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 말은 더욱 무겁게 다가온다. 이 책을 읽으며 역사를 배운다는 것은 이미 정해진 사건과 인물의 이름을 기억하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 누구의 목소리가 기록에서 빠져 있었는지를 돌아보고 서로 다른 삶을 이해하는 과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의미에서 <여성의 자리에서 본 한국 근현대사>는 가려져 있던 여성들의 자리를 다시 보여주는 역사책인 동시에 우리가 앞으로 어떤 역사를 함께 만들어 가야 할지 생각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