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사회 법학 - 고등학교 들어가기 전에 읽는 ㅣ 통합사회
민성원.김재현 지음 / 다산북스 / 2026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우리는 하루에도 수없이 법과 마주하지만 정작 법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친구의 사진을 SNS에 올리는 사소한 행동부터 아르바이트를 시작하며 작성하는 근로계약서까지 우리의 일상은 생각보다 법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교과서에서 만나는 법은 여전히 낯설고 어렵기만 하다. 자유권과 사회권은 어떻게 다르며 권력분립은 왜 필요한 것일까? 개념을 암기하는 것만으로는 이러한 질문에 답하기 어렵다. 특히 국어 비문학 지문이나 통합사회 시험에서 법과 관련된 문제가 등장하면 생소한 용어와 복잡한 논리 구조 때문에 막막함을 느끼기 쉽다. 고등학교 진학을 앞둔 중학교 3학년인 우리 집 2호에게도 법이 어렵고 딱딱한 학습 내용으로만 다가가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다. 그런 생각에서 함께 읽어 보고 싶어진 책이 바로 <통합사회 법학>이다. 추상적인 법률 지식을 나열하기보다 청소년에게 친숙한 일상 속 사례를 통해 법의 원리와 역할을 쉽고 흥미롭게 풀어낸다는 점이 무엇보다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

'10년간의 수능과 모의고사 문제 완전 분석! 오직 시험에 나오는 법만 완벽하게 담아낸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법학 교양서.' 책의 띠지에 적힌 이 문구 역시 학습서로서의 실용성과 교양서로서의 재미를 동시에 기대하게 한다. 실제로 이 책은 법의 탄생에서 시작해 헌법과 기본권, 국가기관의 역할과 권리 구제, 노동법과 국제법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내용을 체계적으로 엮어냈다. 특히 통합사회2의 핵심 단원인 ‘인권 보장과 헌법’과 연계해 교과서에서 간략하게 다루는 개념의 배경까지 짚어 주고 주요 법률 용어의 차이와 실제 출제 현황도 함께 정리해 놓았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법을 처음 접하는 중학생에게는 기초를 탄탄하게 다지는 입문서가 되고 고등학생에게는 교과 학습은 물론 수능 비문학 독해에 필요한 배경지식을 넓히는 길잡이가 되어 줄 듯하다. 무엇보다 법을 단순히 시험을 위해 외워야 할 지식이 아니라 자신의 권리를 이해하고 사회를 올바르게 바라보는 판단력을 기르는 데 필요한 학문으로 접근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시험에 필요한 개념을 익히는 데서 그치지 않고 세상을 이해하는 안목까지 넓힐 수 있다면 이보다 더 알찬 법학 공부가 있을까.

​

책은 법에 대한 설명을 중학교 2학년 지호의 사연으로 시작한다. 두 달 동안 모은 15만 원으로 중고 게임기를 구입했지만 돈을 송금한 뒤 판매자의 계정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부모님께 말씀드리기도 두렵고 경찰에 신고하기도 망설여지는 상황에서 지호는 누구에게 도움을 청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하다. 저자는 이처럼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억울한 상황을 통해 법학의 근본적인 질문을 끌어낸다. 무엇이 공평한지, 잘못에 대한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지, 부당한 일을 당했을 때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 고민하는 과정이 곧 법적 사고의 출발점이라는 것이다. 특히 법을 몰랐다는 이유로 책임을 피하기는 어려운 반면 자신에게 보장된 권리조차 알지 못하면 제대로 행사할 수 없다는 사실은 법을 배워야 하는 이유를 더욱 분명하게 보여 준다.

​

이어 저자는 체육대회에서 찍은 친구의 우스꽝스러운 사진을 단체 대화방에 올린 상황을 통해 권리의 충돌을 설명한다. 사진을 올릴 자유가 있는 만큼 자신의 얼굴이 함부로 공개되지 않도록 요구할 권리도 존재한다. 이처럼 갈등은 반드시 누군가의 악의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권리가 부딪치는 과정에서도 발생한다. 법은 그 경계를 정하고 각자의 입장을 조율하는 기준이 되어 준다.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만큼 타인의 권리를 존중하는 태도 역시 중요하다는 의미이다. 결국 저자가 던지는 ‘함께 산다는 건 무엇일까?’라는 질문은 법학이 지향하는 본질과 맞닿아 있다. 나의 자유와 타인의 권리가 공존할 수 있는 기준을 마련하고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며 살아가는 것. 그것이 법이 존재하는 이유이자 우리가 법을 알아야 하는 까닭일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법은 어떻게 생겨났으며 어떤 원리로 작동하는 것일까? 1장에서는 이러한 물음을 바탕으로 법의 형성과 발전 과정을 살펴본다. 저자는 아무런 규칙이 없는 교실을 상상하게 하면서 사회 규범이 필요한 이유부터 설명한다. 사회 규범은 크게 관습과 도덕, 법으로 구분되며 각각 사람들의 행동을 규율하는 방식에 차이가 있다. 오랜 세월에 걸쳐 형성된 관습은 사회적 시선과 비난을 통해 유지되고 도덕은 개인의 양심과 내면의 판단에 따라 작동한다. 반면 법은 국가가 정해진 절차에 따라 제정하고 강제력을 행사한다는 점에서 구별된다. 이러한 차이를 설명한 뒤 저자는 법이 수행하는 세 가지 기능인 질서 유지와 분쟁 해결, 사회 변화의 역할을 구체적인 사례와 함께 풀어낸다. 특히 2005년 헌법재판소의 헌법불합치 결정 이후 2008년 완전히 폐지된 호주제는 법이 오래된 관행을 바로잡고 사회의 인식과 제도적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있음을 보여 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다만 법이 강력한 수단인 만큼 모든 문제에 개입하는 것이 능사는 아니다. 개인의 자율성과 양심을 존중하면서도 공동체의 안전과 질서를 유지할 수 있는 적절한 균형이 필요하다는 점도 놓치지 않는다.

​

이어서 법의 종류와 체계를 구분하는 기준을 제시하며 복잡한 법학의 구조를 하나씩 풀어 나간다. 국가와 개인 사이의 관계를 중심으로 하는 공법과 개인 간의 법률관계를 다루는 사법을 비교하고 형식적인 평등만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현실의 불균형을 보완하기 위해 등장한 사회법의 필요성도 살펴본다. 또한 권리와 의무의 내용을 정하는 실체법과 이를 실현하는 과정을 규정한 절차법, 폭넓게 적용되는 일반법과 특정한 경우에 우선 적용되는 특별법의 차이를 설명한다. 나아가 법의 존재 형식이자 법적 판단의 근거가 되는 ‘법원(法源)’을 소개하며 성문법과 불문법의 특징을 짚어 준다. 특히 헌법을 최상위 규범으로 하여 법률과 명령, 자치법규로 이어지는 위계질서는 서로 다른 법규범이 충돌할 때 적용 기준을 정하고 법체계의 일관성과 안정성을 확보하기 위한 장치라는 점에서 중요하다. 여기에 관습법과 판례, 조리가 성문법의 빈틈을 보완하는 역할까지 설명해 법의 전체적인 구조를 이해하도록 돕는다. 이처럼 각 개념의 특징뿐 아니라 서로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비교하며 설명하는 방식이 인상적이다. 단편적인 용어의 암기에서 벗어나 법의 체계와 작동 원리를 하나의 맥락으로 파악할 수 있도록 구성했다는 점에서 법학을 처음 접하는 독자에게도 유익하게 다가온다.


이 책에서 눈여겨볼 또 하나의 특징은 각 장의 끝에 마련된 ‘한눈에 알아보는 법학의 차이’와 ‘수능과 모의고사 출제현황’이다. 앞서 이야기로 익힌 내용을 표와 도식으로 정리해 복잡한 개념을 명확하게 구분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1장에서는 관습과 도덕, 법을 발생 방식과 제재 수단, 판단 기준 등에 따라 비교하고 헌법을 정점으로 법률과 명령, 자치법규가 이어지는 위계질서를 ‘법 피라미드’로 시각화했다. 특히 성문법의 체계와 이를 보완하는 관습법, 판례, 조리의 관계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다는 점이 유용하다. 여기에 정치와 법, 통합사회 영역에서 관련 개념이 출제된 수능과 모의고사의 연도와 시행 월, 문항 번호까지 정리해 놓아 실제 문제를 찾아 풀어 볼 수 있도록 했다. 단순히 내용을 읽고 끝내는 것이 아니라 개념을 비교하고 정리한 뒤 기출문제에 적용하는 단계로 학습을 확장할 수 있다는 점이 돋보인다. 특히 비슷한 용어를 혼동하기 쉬운 학생들에게는 이러한 구성이 학습 내용을 오래 기억하고 정확하게 구별하는 데 도움이 될 듯하다.

​

<통합사회 법학>은 총 3부 8장에 걸쳐 법의 기초에서 국가의 운영 원리와 사회적 갈등의 해결 방법까지 단계적으로 안내하고 있다. 1부에서는 법의 형성과 법치주의의 의미를 살펴보며 자연법론과 법실증주의, 형식적 법치주의와 실질적 법치주의를 비교한다. 2부에서는 헌법의 기본 원리와 국민의 기본권을 중심으로 국가권력이 어떻게 나뉘고 견제되는지 설명한다. 특히 자유를 보장하는 국가가 어떤 경우에 개인의 권리를 제한할 수 있는지, 국회와 정부, 법원은 각각 어떤 역할을 맡는지 등 한 번쯤 궁금했을 질문을 다룬다. 마지막 3부에서는 헌법재판소를 통한 권리 구제와 노동법, 국제법으로 범위를 넓힌다. 청소년 근로 10계명을 비롯해 근로계약과 노동 3권에 관한 내용까지 담아 앞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할 학생들에게도 유익한 정보를 제공한다. 무엇보다 개별적인 법률 지식을 전달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법이 만들어진 배경과 제도의 취지를 함께 살펴보게 이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본다.

​

이제는 문과와 이과를 구분하지 않고 모든 학생이 통합사회를 배우는 만큼 법에 관한 기본적인 소양은 이제 선택이 아닌 필수에 가깝다. 그렇다고 고등학교 진학을 앞둔 학생들에게 무작정 어려운 개념부터 공부하도록 하는 것이 최선은 아닐 것이다. 그런 점에서 <통합사회 법학>은 본격적인 교과 학습에 앞서 법에 대한 부담을 덜고 흥미를 키우기에 좋은 책이다. 부모의 입장에서도 아이가 시험에 필요한 지식을 쌓는 것에 그치지 않고 사회의 여러 문제를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능력을 길렀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법률의 이름을 많이 아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어떤 상황에서 무엇을 살펴야 하며 왜 그런 기준이 필요한지 이해하는 일이 아닐까. 이 책을 통해 우리 집 2호 역시 법이 자신과 무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앞으로 살아가면서 꼭 알아야 할 지식임을 깨닫게 되기를 기대한다. 나아가 정해진 규칙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규칙이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이며 얼마나 공정한지 스스로 질문할 수 있다면 더욱 좋겠다. 결국 법을 배운다는 것은 세상이 정해 놓은 질서를 이해하는 동시에 우리가 만들어 가야 할 더 나은 사회의 모습을 고민하는 일이기도 하니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약의 탄생 - 한 조각씩 꺼내 보는, 14가지 약 이야기
김효정 지음 / 반니출판 / 2026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표지에 적힌 ‘실험실에서 약국까지, 세상을 바꾼 14가지 약의 역사’라는 문구가 호기심을 자극했다. 우리가 일상에서 흔히 접하는 약에는 과연 어떤 역사가 숨어 있을까? 두통이 생기면 찾는 타이레놀부터 감염병 치료에 혁명을 일으킨 항생제, 최근 전 세계적으로 주목받고 있는 비만 치료제 위고비까지 약은 인류의 삶을 변화시켜 온 중요한 과학적 성과물이다. 하지만 정작 약이 어떤 과정을 거쳐 개발되었으며 우리 몸에서 어떻게 작용하는지 제대로 알고 사용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더욱이 그 탄생 과정에는 과학적 발견뿐 아니라 수많은 시행착오와 우연, 연구자들의 집념, 제약회사의 이해관계까지 복잡하게 얽혀 있다. <약의 탄생>은 이처럼 익숙하지만 잘 알지 못했던 의약품의 세계를 역사와 과학의 관점에서 흥미롭게 풀어낸다.

​

약학 박사이자 단백질 구조생물학 연구자인 저자는 제약회사 영업 현장과 병원 약국을 거쳐 대학 연구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경험을 쌓아 왔다. 이러한 이력을 바탕으로 의약품의 개발 과정과 작용 원리는 물론 그 이면에 가려진 실패와 논쟁, 특허와 마케팅의 영향까지 폭넓게 조명한다. ‘고통과 감각’, ‘생존과 공포’, ‘욕망과 균형’이라는 세 가지 주제 아래 펼쳐지는 14가지 이야기는 인류가 질병과 고통에 맞서 온 과정과 더 나은 삶을 추구해 온 역사를 함께 보여 준다. 특히 저자가 직접 그린 19컷의 과학 도판과 다양한 역사적 사료는 복잡한 약학 지식을 보다 쉽게 이해하도록 돕고 각 장에 마련된 ‘Lab box’는 실생활에 유용한 정보까지 전하고 있다. 단순히 의약품의 효능이나 발견의 역사를 나열하는 데 그치지 않고 과학적 성과를 둘러싼 사회적 배경과 인간의 선택까지 함께 살펴본다는 점이 무척이나 인상적이다.


오늘날 학생들을 가르치는 과학자가 된 저자에게도 약학은 처음부터 친숙한 학문이 아니었다고 한다. 문과 출신으로 대학에 진학한 저자는 낯선 화학 용어와 영어 교재 앞에서 어려움을 겪었고, 다른 학생들은 쉽게 이해하는 듯한 수업에서 질문조차 망설이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강의실에서 마주한 한 장의 흑백사진이 그의 진로를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바로 왓슨과 크릭이 DNA의 이중나선 구조를 밝히는 데 중요한 단서로 삼았던 X선 회절 사진이었다. 얼핏 흐릿한 점과 선으로만 보이는 사진에서 어떻게 DNA의 구조를 알아낼 수 있었는지 궁금했던 저자는 그 원리를 이해하려면 대학원에서 더 공부해야 한다는 답을 듣는다. 막막함과 호기심이 교차하던 시절, 교수님이 건넨 "이거 효정이도 할 수 있는 거야"라는 말은 새로운 도전을 이어갈 용기가 되었다. 그렇게 과학의 세계에 한 걸음씩 다가간 저자는 이제 구조생물학자로서 학생들에게 같은 사진을 보여 주며 자신이 받았던 격려를 되돌려 주고 있다.

​

프롤로그에서 저자는 자신을 지금의 자리까지 이끈 것은 특별한 재능보다 예상치 못한 기회를 알아보고 붙잡으려 했던 용기였다고 회상한다. 처음에는 학생들에게 배움의 즐거움과 자신감을 전하고자 시작한 강의였지만 오히려 학생들의 변화와 진심 어린 반응이 강의실 밖으로 이야기를 확장할 힘이 되어 주었다. 이러한 경험은 의약품의 발전에 기여한 사람들을 바라보는 저자의 시선과도 맞닿아 있다. 과학사의 중요한 성과는 언제나 비범한 천재들의 독창적인 발견에서만 비롯된 것이 아니다. 뜻하지 않게 마주한 가능성을 지나치지 않고 끈질기게 탐구한 이들의 선택이 때로는 새로운 치료법을 탄생시키고 의학의 흐름을 바꾸기도 했다. 저자가 프롤로그를 통해 전하고 싶은 것도 바로 이러한 발견의 이면에 자리한 인간적인 이야기일 것이다. 우연히 찾아온 순간을 의미 있는 성취로 바꾸는 것은 결국 그 가능성을 믿고 끝까지 나아가는 사람의 몫이라는 사실이 오래도록 생각할 거리를 남긴다.


우연한 발견이 의학의 발전을 이끈 사례는 우리 주변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중 하나가 누구나 한 번쯤 복용해 보았을 타이레놀이다. 그 시작은 1880년대 독일의 한 약국에서 발생한 어처구니없는 실수였다고 한다. 장염 치료에 사용할 나프탈렌 대신 아세트아닐리드가 잘못 전달되었는데, 뜻밖에도 이를 복용한 환자들의 열과 통증이 가라앉은 것이다. 이 사건은 새로운 해열진통제 개발의 출발점이 되었지만 이후의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1893년 독일의 생리학자 요제프 폰 메링이 아세트아미노펜의 독성을 지적하면서 해당 성분은 오랫동안 외면받았다. 반면 안전하다고 여겨졌던 페나세틴은 널리 사용되다가 심각한 부작용이 드러났다. 1948년 생화학자 버나드 브로디와 연구 보조원 줄리어스 액설로드가 약물의 대사 과정을 추적한 끝에 실제 진통 효과를 내는 성분은 아세트아미노펜이며 페나세틴의 대사 과정에서 독성 물질이 생성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무려 60년 가까이 이어진 오해가 바로잡힌 것이다. 이후 1955년 미국에서 타이레놀이라는 이름으로 출시된 이 약은 효과적인 마케팅과 아스피린의 부작용에 따른 반사이익까지 더해지며 세계적인 진통제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오랜 누명을 벗고 안전한 진통제로 인정받은 타이레놀의 성공은 역설적으로 또 다른 문제를 낳았다. 누구나 쉽게 구할 수 있는 약이 되면서 그만큼 위험성을 간과하기 쉬워진 것이다.

​

저자는 이러한 현상을 심리학의 '가용성 휴리스틱'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사람들은 자주 접하고 익숙하게 느끼는 대상일수록 무의식적으로 안전하다고 판단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타이레놀의 주성분인 아세트아미노펜은 과다 복용할 경우 간에서 독성 대사산물인 NAPQI가 증가해 심각한 간 손상을 일으킬 수 있다. 편의점에서 판매하는 타이레놀 500mg 제품이 약국의 10정짜리와 달리 8정으로 포장된 것도 이러한 위험을 줄이기 위한 조치다. 더욱 흥미로운 사실은 오랫동안 사용된 약임에도 통증을 억제하는 정확한 작용 기전이 아직 완전히 밝혀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일부 연구에서는 아세트아미노펜이 신체적 통증뿐 아니라 사회적 소외감 같은 정서적 고통과 타인에 대한 공감 반응에도 영향을 줄 가능성을 제시했다. 물론 이러한 연구 결과를 일상적인 복용에서 감정이 둔화된다는 확정적인 결론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 결국 타이레놀의 역사는 익숙하다는 사실이 곧 안전하다는 증거는 아니며 약과 독의 경계는 적절한 용량과 올바른 사용에 달려 있다는 중요한 교훈을 남긴다. 너무 잘 안다고 생각하기에 오히려 경계심을 늦추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하는 대목이다.

​

타이레놀의 역사가 하나의 의약품에 대한 잘못된 판단을 바로잡는 과정이었다면 스페인 독감의 역사는 정체조차 알 수 없었던 치명적인 바이러스를 추적해 온 인류의 긴 수사 기록이라 하겠다. 1918년 전 세계를 휩쓴 스페인 독감은 최소 5,000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것으로 추정되는 대재앙이었다. 하지만 그 명칭부터 잘못된 오해에서 비롯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참전국들이 전쟁에 미칠 영향을 우려해 감염병 관련 보도를 통제한 반면, 중립국 스페인은 피해 상황을 비교적 자유롭게 보도하면서 발원지라는 억울한 오명을 떠안게 된 것이다. 당시에는 바이러스의 실체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 원인 규명도 이루어지지 않은 채 유행이 끝났다. 그렇게 미제로 남았던 사건은 수십 년 뒤 과학자들의 집념으로 다시 수면 위에 떠올랐다. 1951년 알래스카 영구동토층에 묻힌 희생자들의 폐 조직을 채취했다가 실패했던 요한 훌틴은 1997년 일흔셋의 나이로 다시 현장을 찾았다. 그가 '루시'라고 이름 붙인 여성의 폐 조직에서 확보한 시료는 병리학자 제프리 토벤버거의 연구에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했고, 마침내 2005년 1918년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의 전체 유전체가 복원되었다. 반세기 가까운 세월을 건너 다시 도전에 나선 훌틴의 행적은 과학적 성취가 얼마나 오랜 기다림과 끈질긴 탐구 끝에 이루어지는지를 보여 준다.

​

이러한 연구가 더욱 의미 있는 이유는 과거의 비극을 밝히는 데 그치지 않고 새로운 감염병에 대응할 과학적 기반을 마련했다는 데 있다. 저자는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의 작동 방식과 치료제의 원리를 범인을 추적하고 체포하는 수사 과정에 빗대어 설명한다. 바이러스는 헤마글루티닌이라는 단백질을 이용해 인체 세포에 침입하고 세포 안에서 증식한 뒤에는 뉴라미니데이즈라는 효소로 세포 표면과의 연결을 끊어 주변으로 퍼져 나간다. 항바이러스제 타미플루는 바로 이 효소의 작용을 억제해 바이러스의 확산을 막도록 개발되었다. 특히 쌀국수의 향신료로 익숙한 팔각회향에서 얻은 시킴산이 타미플루 합성의 출발 물질로 활용되었다는 사실도 흥미롭다. 이처럼 바이러스의 구조와 증식 과정을 이해한 성과는 2009년 신종플루 유행 당시 치료에 활용되었고 이후 감염병 연구에도 중요한 토대가 되었다. 물론 치료제가 등장했다고 해서 감염병의 위협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변이를 거듭하는 바이러스에 대응하려면 지속적인 연구와 대비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결국 스페인 독감의 수사 기록은 과거의 실패를 정확히 분석하고 축적된 지식을 다음 위기에 활용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일깨운다. 한 세기에 걸쳐 이어진 과학자들의 노력이 오늘날 인류의 대응 능력을 키워 왔다는 사실이 새삼 인상적으로 다가온다.

​

<약의 탄생>이 다루는 이야기는 질병을 치료하는 의약품의 역사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인슐린의 발견과 특허를 둘러싼 논쟁, 실패한 농약 연구에서 탄생한 국소 마취제 리도카인, 모르핀의 대안으로 개발되었다가 심각한 중독 문제를 일으킨 헤로인 등은 의학의 발전이 언제나 인류에게 이로운 결과만을 가져온 것은 아님을 보여 준다. 특히 경구 피임약과 비만 치료제, 탈모 치료제에 이르면 약의 역할은 질병을 치료하는 수단에서 개인의 선택과 삶의 방식에 영향을 미치는 영역으로 확장된다. 효과에 대한 기대가 커질수록 부작용과 윤리적 문제도 함께 살펴야 하지만, 상업적 이해관계와 과장된 광고가 때로는 합리적인 판단을 가로막기도 한다. 이러한 사례들은 과학기술의 진보를 무조건 긍정하거나 부정하기보다 그 성과가 어떤 과정을 거쳐 사회에 받아들여졌으며 누구에게 이익과 부담을 안겨 주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음을 일깨운다.

​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저자가 의약품을 둘러싼 여러 사건을 흥미로운 이야기로 풀어내면서도 독자가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근거를 놓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하나의 치료제가 널리 사용되기까지는 연구실의 성과뿐 아니라 임상시험을 통한 검증, 규제기관의 판단, 의료 현장의 경험 등 수많은 과정이 필요하다. 그럼에도 우리는 흔히 광고에서 강조하는 효능이나 주변 사람들의 경험담만으로 약의 가치를 판단하곤 한다. 저자는 이러한 정보의 한계를 짚으며 과학적 근거를 확인하고 의심스러운 주장에는 질문을 던질 수 있는 태도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렇기에 이 책을 읽고 나면 평소 아무렇지 않게 집어 들던 약 상자에 적힌 성분명과 복용법, 주의사항도 이전과는 다르게 보일 듯하다. 약을 제대로 이해한다는 것은 단순히 효능을 아는 데 그치지 않고 그 효과를 뒷받침하는 근거와 위험성까지 함께 살피는 일이다. 일상의 작은 알약 하나에서 출발해 과학과 산업, 사회를 바라보는 시야를 넓혀 준다는 점에서 이 책은 충분히 읽어 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본다.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판다 패드가 멈춘 날
마이크 벤터 지음, 척 딜런 그림, 최미정 옮김 / 다봄 / 2026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언제부터 심심함은 견뎌야 할 불편함이 되었을까? 버스를 기다리는 짧은 순간에도 스마트폰을 꺼내 들고 식사 중에도 영상을 시청하며 잠들기 직전까지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모습은 이제 너무나 익숙한 풍경이 되었다. 특히 숏폼 콘텐츠가 대중화되면서 우리는 단 몇 초 만에 새로운 자극을 얻고 지루해질 틈도 없이 다음 영상으로 넘어간다. 문제는 이러한 자극에 익숙해질수록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을 견디기 어려워진다는 사실이다. 아이들이 심심하다고 말하면 스마트폰이나 태블릿을 건네는 어른들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끊임없이 즐길 거리를 찾으면서도 정작 스스로 재미를 만들어 내는 능력은 점점 잃어 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

<판다 패드가 멈춘 날>은 이러한 디지털 과잉 시대의 일상을 재치 있는 이야기와 유머러스한 그림으로 담아내고 있다. 스마트폰과 태블릿 사용을 무조건 경계하거나 디지털 기술의 부정적인 측면을 일방적으로 강조하는 대신 우리가 당연하게 여겨 온 즐거움의 방식을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특히 주목할 점은 대부분의 사람이 피하려고만 하는 심심함을 새로운 가능성으로 바라본다는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은 정말 낭비일까? 누군가 만들어 놓은 콘텐츠를 소비하는 데 익숙해진 우리는 스스로 즐거움을 발견하는 방법을 잊어버린 것은 아닐까? <판다 패드가 멈춘 날>은 지루함이 사라진 시대에 오히려 지루함이 필요한 이유를 유쾌하면서도 설득력 있게 이야기한다.


책은 먼저 패드와 함께라면 언제 어디서든 즐거운 판다의 모습으로 시작된다. 침대에 누워서도, 간식을 먹으면서도, 장난감이 가득한 방에서도 판다의 시선은 오직 패드에만 머물러 있다. 주변에는 재미있는 놀잇거리가 넘쳐나지만 판다에게는 화면 속 세상이 무엇보다 흥미롭다. 이처럼 책의 첫 장면은 디지털 기기가 일상의 중심이 되어 버린 우리의 모습을 너무나 현실적으로 보여 주며 누구에게나 공감을 이끌어낸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갑자기 판다의 패드가 먹통이 되어 버리고 만다. 화면에는 '인터넷에 연결되어 있지 않습니다'라는 메시지만 덩그러니 떠 있다. 패드가 멈추자 판다도 그대로 멈춰 버린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신나게 놀던 판다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당황한다. 방 안을 아무리 둘러봐도 재미있어 보이는 건 하나도 없다. 결국 심심함을 참지 못한 판다는 하품만 연달아 내뱉는다. 장난감과 책이 가득한 방에서도 패드가 없다는 이유만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된 판다의 모습은 우스꽝스러우면서도 어딘가 낯익다. 화면 속 즐거움에 익숙해진 나머지 주변의 다른 재미에는 관심조차 두지 않게 된 우리의 일상을 그대로 보여 주는 듯하다.


판다는 심심한 게 세상에서 가장 싫다. 콩을 먹는 것도 싫고 얼음처럼 차가운 물로 샤워하는 것도 싫지만 그보다 더 견디기 힘든 것은 바로 지루함이다. 심지어 이모가 모은 클립을 구경하는 것조차 싫어하는 판다에게 아무런 즐길 거리 없이 시간을 보내는 일은 그야말로 고역이다. 그런데 책장을 넘기는 순간 '너무'라는 단어가 빼곡하게 채워진 장면이 등장한다. 얼마나 지루한지 말로 표현하기조차 어려운 판다의 심정을 반복되는 글자로 시각화한 것이다. 화면을 가득 메운 수많은 '너무'와 한쪽에 축 늘어져 있는 판다의 모습은 보는 이의 웃음을 자아낸다. 짧은 문장과 과장된 그림만으로도 지루함에 몸부림치는 판다의 심리가 생생하게 전달된다.

​

그렇다면 이렇게 너무너무 심심해진 판다는 과연 어떻게 해야 할까? 누군가 새로운 놀잇거리를 찾아 주거나 인터넷이 다시 연결되기만을 기다려야 할까? 이 대목에서 책은 심심함을 없애기 위해 반드시 특별한 무언가가 필요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생각하게 한다. 아이들은 무료한 순간마다 어른들에게 무엇을 하며 놀아야 하는지 묻곤 한다. 그러나 지루함을 해결하는 방법까지 누군가 알려 준다면 스스로 새로운 즐거움을 찾아볼 기회는 그만큼 줄어들 수밖에 없다. 어쩌면 판다에게 찾아온 뜻밖의 심심함은 단순한 불행이 아니라 자신만의 놀이를 발견할 수 있는 새로운 출발점인지도 모른다. 이제 판다에게 필요한 것은 또 다른 자극이 아니라 익숙한 방식에서 벗어나 세상을 바라보는 작은 변화일 것이다.

​


<판다 패드가 멈춘 날>은 패드가 멈추자 자신도 함께 멈춰 버렸던 판다가 새로운 즐거움을 찾아가는 과정을 통해 심심함이 지닌 뜻밖의 가능성을 보여 주는 그림책이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처럼 막막해하던 판다가 숲속 친구들을 만나며 조금씩 달라지는 모습은 무척이나 인상적이다. 끊임없이 질문하는 호저의 호기심과 세상을 색다르게 바라보는 부엉이의 엉뚱한 상상력 그리고 똥으로 조각품을 만드는 쇠똥구리의 기발한 도전은 재미란 누군가 만들어 놓은 것을 소비하는 데서만 얻어지는 것이 아님을 일깨워 준다. 특히 책의 마지막에 수록된 부록은 판다가 경험한 변화를 독자들도 직접 실천해 볼 수 있도록 돕는다. 가족이 함께 스마트폰을 내려놓는 시간을 정하거나 주변을 관찰하며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등 일상에서 손쉽게 시도할 수 있는 활동들이 담겨 있어 더욱 유용하다. 책을 읽은 뒤 아이와 함께 놀이를 실천하며 이야기를 확장할 수 있다는 점도 매력적이다.

​

우리는 잠깐의 여유만 생겨도 스마트폰을 꺼내 들고 끊임없이 쏟아지는 콘텐츠를 소비하며 시간을 보낸다. 그러나 그렇게 쉬지 않고 새로운 자극을 좇는 일이 반드시 진정한 휴식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을 허락하고 주변의 사소한 것들에 관심을 기울일 때 이전에는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즐거움을 만날 수 있다. 그렇기에 <판다 패드가 멈춘 날>이 건네는 제안은 단순히 디지털 기기 사용을 줄이자는 주장에 머무르지 않는다. 아이들이 심심하다고 말할 때마다 새로운 놀잇거리를 찾아 주기보다 스스로 궁금해하고 상상하며 무언가를 시도할 기회를 주자는 것이다. 물론 어른들도 예외는 아니다. 판다의 패드가 멈춘 덕분에 새로운 세상이 시작되었듯 우리도 가끔은 화면을 끄고 일상의 속도를 늦춰 보면 어떨까? 심심함은 반드시 없애야 할 문제가 아니라 새로운 재미를 발견하기 위한 출발점일지도 모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후회 병동 - 만약 그때 다른 선택을 했다면
가키야 미우 지음, 송경원 옮김 / 문예춘추사 / 2026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가키야 미우 작가의 신작이라는 이유만으로도 읽어 보고 싶었던 <후회 병동>은 누구나 한 번쯤 떠올려 보았을 법한 질문에서 출발하고 있다. 만약 인생에서 단 한 번 과거로 돌아가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다면 우리는 과연 더 행복해질 수 있을까? 살다 보면 그때 다른 길을 선택했더라면 지금쯤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지 궁금해지는 순간이 있다. 이루지 못한 꿈이나 놓쳐 버린 기회는 시간이 흐를수록 아쉬움으로 남고 때로는 지나온 삶을 평가하는 기준이 되기도 한다. 특히 생의 끝자락에 선 사람이라면 그간의 선택이 더욱 무겁게 다가올 것이다. 이 책은 이처럼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는 후회를 소재로 우리가 선택하지 않은 또 하나의 인생을 직접 경험할 수 있다는 흥미로운 상상을 펼쳐 보이고 있다.

​

이야기는 말기 암 환자들을 돌보는 의사 하야사카 루미코가 병원 안뜰에서 정체불명의 청진기를 발견하면서 시작된다. 환자의 마음을 잘 헤아리지 못한다는 평가로 고민하던 루미코는 우연히 청진기에 상대방의 속마음을 들을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이 있음을 알게 된다. 더욱 놀라운 것은 환자들이 과거로 돌아가 다른 선택을 했을 때의 인생까지 경험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배우가 되고 싶었지만 꿈을 포기해야 했던 여성과 일에 몰두하느라 가족에게 소홀했던 남성 등 저마다의 사연을 지닌 환자들은 그렇게 자신이 살아 보지 못한 인생과 마주한다. 그러나 기대했던 새로운 삶이 반드시 더 나은 결과를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선택하지 않은 길은 언제나 더 좋아 보이지만 그 길에도 미처 예상하지 못한 문제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러한 역설을 통해 후회 없는 인생이 가능한지 묻는 동시에 지금까지 살아온 자신의 삶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아야 하는지 생각하게 한다.


가키야 미우 작가의 신작이라는 이유만으로도 읽어 보고 싶었던 <후회 병동>은 누구나 한 번쯤 떠올려 보았을 법한 질문에서 출발하고 있다. 만약 인생에서 단 한 번 과거로 돌아가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다면 우리는 과연 더 행복해질 수 있을까? 살다 보면 그때 다른 길을 선택했더라면 지금쯤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지 궁금해지는 순간이 있다. 이루지 못한 꿈이나 놓쳐 버린 기회는 시간이 흐를수록 아쉬움으로 남고 때로는 지나온 삶을 평가하는 기준이 되기도 한다. 특히 생의 끝자락에 선 사람이라면 그간의 선택이 더욱 무겁게 다가올 것이다. 이 책은 이처럼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는 후회를 소재로 우리가 선택하지 않은 또 하나의 인생을 직접 경험할 수 있다는 흥미로운 상상을 펼쳐 보이고 있다.

​

이야기는 말기 암 환자들을 돌보는 의사 하야사카 루미코가 병원 안뜰에서 정체불명의 청진기를 발견하면서 시작된다. 환자의 마음을 잘 헤아리지 못한다는 평가로 고민하던 루미코는 우연히 청진기에 상대방의 속마음을 들을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이 있음을 알게 된다. 더욱 놀라운 것은 환자들이 과거로 돌아가 다른 선택을 했을 때의 인생까지 경험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배우가 되고 싶었지만 꿈을 포기해야 했던 여성과 일에 몰두하느라 가족에게 소홀했던 남성 등 저마다의 사연을 지닌 환자들은 그렇게 자신이 살아 보지 못한 인생과 마주한다. 그러나 기대했던 새로운 삶이 반드시 더 나은 결과를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선택하지 않은 길은 언제나 더 좋아 보이지만 그 길에도 미처 예상하지 못한 문제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러한 역설을 통해 후회 없는 인생이 가능한지 묻는 동시에 지금까지 살아온 자신의 삶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아야 하는지 생각하게 한다.


환자의 마음을 이해하고 싶지만 좀처럼 뜻대로 되지 않던 루미코에게 뜻밖의 사건이 일어난다. 어느 날 병원 안뜰에서 주운 청진기로 사토코를 진찰하던 중 어디선가 낯선 목소리가 들려온 것이다. 죽고 싶지 않다는 절박한 외침에 이어 자신의 뜻대로 살았더라면 좋았을 것이라는 후회가 들려오지만 정작 사토코는 입을 다문 채 누워 있다. 처음에는 과로와 스트레스 때문에 환청이 들린다고 생각했지만 목소리의 내용은 사토코가 어머니와 나누는 대화와 정확히 맞아떨어진다. 사토코가 평생 마음에 담아 둔 미련은 어머니의 반대로 포기해야 했던 배우의 꿈이었다. 연예계의 냉혹한 현실을 잘 아는 어머니는 딸을 보호하기 위한 선택이었다고 주장하지만 사토코에게는 자신의 가능성을 시험할 기회조차 빼앗긴 일이었다. 루미코는 그동안 이해하기 어려웠던 사토코의 분노가 이루지 못한 꿈에 대한 아쉬움과 어머니를 향한 원망에서 비롯되었음을 알게 된다.

​

청진기의 신비로운 능력은 다른 환자를 진찰하면서 더욱 분명해진다. 췌장암 말기인 마흔다섯 살 야에가시 고지의 가슴에 청진기를 대자 중학교 3학년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는 간절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루미코가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언제로 가고 싶은지 묻자 그는 실제로 중학교 3학년을 이야기하며 친구에게 저지른 잘못을 지금까지 후회하고 있다고 털어놓는다. 청진기에서 들려온 내용과 환자의 대답이 일치하면서 루미코는 자신이 경험한 현상이 단순한 착각이 아님을 깨닫는다. 그동안 환자의 말과 행동만으로 심정을 짐작해야 했던 그녀에게 청진기는 타인의 내면에 다가갈 수 있는 새로운 통로가 된 셈이다. 나아가 이 특별한 도구는 환자들이 후회의 순간으로 돌아가 당시와 다른 선택을 했을 때 펼쳐졌을 인생까지 경험하도록 이끈다. 과연 지나간 선택을 바꾼다면 오랫동안 품어 온 미련도 사라질 수 있을까? 소설은 이러한 설정을 통해 누구나 한 번쯤 상상해 보았을 또 다른 삶의 가능성을 구체적으로 펼쳐 보인다.


사토코는 과거로 돌아가 그토록 바라던 배우의 길을 선택한 또 하나의 인생을 경험한다. 어머니의 반대를 무릅쓰고 연예계에 데뷔해 꿈을 이루지만 화려한 무대 뒤에는 예상하지 못했던 어려움이 기다리고 있었다. 결혼 후 평범한 가정주부로 돌아가려 해도 유명인의 딸이라는 꼬리표에서 벗어날 수 없었고 생활고 때문에 시작한 아르바이트마저 언론의 관심거리가 된다. 자신이 원했던 삶을 선택했음에도 새로운 후회가 생겨난 것이다. 그제야 사토코는 어머니가 연예계 진출을 반대했던 이유를 이해하기 시작한다. 가난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배우가 되었던 어머니 역시 성공의 대가로 사생활을 포기해야 했고 딸에게만큼은 그러한 고충을 물려주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사토코는 다른 인생을 살아 보고서야 어머니의 결정에 담긴 진심을 깨닫는다.

​

현실로 돌아온 사토코는 배우의 꿈을 막았던 일을 사과하는 어머니에게 오히려 그 선택을 이해한다고 말한다. 자신이 오래도록 살아갈 것이라 믿었기에 평온한 삶을 바랐던 어머니의 마음을 이제는 받아들일 수 있게 된 것이다. 특히 '안 해보고 후회하느니 해보고 후회하는 편이 낫다'는 말이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니라는 깨달음은 작품의 핵심을 잘 드러낸다. 선택하지 않은 길이 더 행복했으리라는 보장은 없으며 어떤 인생에도 저마다의 어려움과 아쉬움은 존재하기 때문이다. 결국 사토코는 과거를 바꾸는 것보다 지나온 삶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일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오랫동안 품었던 원망과 미련을 내려놓은 그녀는 비로소 마음의 평안을 얻고 삶의 마지막 순간에도 미소 지으며 죽음을 맞이할 수 있게 된다.

​

<후회 병동>에는 이루지 못한 꿈을 아쉬워하는 사토코 외에도 저마다의 선택을 되돌아보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일에 매달리느라 가족과 함께할 시간을 놓쳐 버린 게이치와 딸의 결혼을 반대했던 일을 후회하는 지토세 그리고 중학교 시절 친구에게 저지른 잘못을 평생 마음의 빚으로 간직해 온 고지까지 사연은 제각각이다. 이들이 품은 미련은 꿈과 가족 그리고 인간관계에 이르기까지 우리 삶의 다양한 모습을 보여 준다. 루미코는 네 사람의 또 다른 인생을 함께 경험하며 그들이 선택하지 않았던 길의 끝을 지켜본다. 그러나 소설은 어느 쪽이 더 행복한 삶이었는지 쉽게 결론짓지 않는다. 선택하지 않은 인생은 언제나 더 근사해 보이지만 그 길에도 예상하지 못한 어려움과 새로운 후회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가키야 미우는 이들의 사연을 통해 후회란 반드시 잘못된 선택의 결과가 아니라 살아가는 동안 누구나 마주할 수밖에 없는 감정임을 일깨운다.

​

인생은 수많은 선택이 이어져 만들어지는 것이기에 어느 한 순간의 결정만으로 그 가치를 판단할 수는 없다. 지나간 시간을 되돌릴 수 없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지만 그 시간을 바라보는 마음은 달라질 수 있다. 어쩌면 우리가 끝내 받아들여야 할 것은 선택하지 못한 삶에 대한 미련이 아니라 수많은 갈림길을 지나 여기까지 살아온 자신의 인생인지도 모른다. 삶의 마지막에 필요한 것은 모든 후회를 지워 버리는 기적이 아니라 그 후회까지 자신의 삶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일 것이다. 지나온 날들이 모두 만족스러울 수는 없겠지만 그 모든 선택과 우연이 모여 지금의 내가 되었다는 사실만큼은 부정할 수 없다. 그렇게 더 이상 살아 보지 못한 인생을 아쉬워하지 않고 자신에게 주어진 단 하나의 삶을 온전히 인정할 수 있다면 마지막 순간에도 조용히 미소 지을 수 있지 않을까? 결국 좋은 인생이란 후회를 남기지 않은 삶이 아니라 후회마저 품은 채 자신의 삶과 기꺼이 화해할 수 있는 인생일지도 모른다.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편지할게요 (10주년 기념 전면 개정판)
정영욱 지음 / 부크럼 / 2017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편지 봉투를 보는 듯한 표지가 눈길을 끌어 읽게 된 책이다. 손으로 쓴 편지를 주고받는 일이 드물어진 요즘, 정영욱 작가의 <편지할게요>는 표지와 제목부터 흥미롭게 다가왔다. <잘했고 잘하고 있고 잘될 것이다>, <참 애썼다 그것으로 되었다> 등으로 독자들에게 사랑받아 온 정영욱 작가의 데뷔작인 이 책은 2017년 첫 출간 이후 10주년을 기념해 전면 개정판으로 새롭게 선보인 작품이다. 초판의 분위기를 유지하면서도 문장을 세심하게 다듬고 그동안 작가가 쌓아 온 경험과 정서를 더해 한층 깊이 있는 글로 완성하였다.

​

<편지할게요>는 사랑과 이별, 그리움과 후회처럼 인간관계에서 겪는 다양한 감정을 편지 형식으로 풀어낸 에세이이다. 책에는 누군가를 사랑할 때 미처 표현하지 못했던 마음부터 관계가 끝난 뒤에야 깨닫게 된 감정, 끝내 전하지 못한 안부까지 여러 사연이 담겨 있다. 각각의 글은 서로 다른 대상을 향하고 있지만 그 안에서 누구나 한 번쯤 경험했을 법한 순간들을 발견하게 된다. 특히 상대에게 직접 말하지 못했던 생각을 편지라는 형식을 빌려 풀어낸다는 점이 이 책의 특징이다. 저자는 특별한 사건이나 극적인 이야기를 내세우기보다 관계 속에서 쉽게 지나치거나 표현하지 못했던 감정에 주목하고 있다. 그렇게 이 책은 독자들의 공감을 이끌어내는 동시에 저마다 지나온 관계를 되짚어 보고 미처 전하지 못했던 마음까지 돌아보게 만든다.


책에 가장 먼저 실린 「편지하겠습니다」는 이 책이 어떤 마음에서 시작되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저자는 자신의 문체가 편지를 읽는 것 같다는 말을 자주 들었다며 그 이유가 누군가에게 전하지 못한 문장이 너무나 많기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이야기한다. 특히 수취인이 분명하지만 끝내 전해지지 못한 글들을 바닥에서 주워 모으듯 하나둘 엮다 보니 한 권의 책이 되었다는 표현이 인상적이다. 이는 이 책이 처음부터 완성된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 쓰인 것이 아니라 미처 표현하지 못한 감정과 지나간 관계의 흔적을 모아 만들어진 책임을 보여 준다. 저자는 자신의 문장이 고르지 못하고 모든 글이 습작처럼 보일지도 모른다고 말하지만 오히려 이러한 고백에서 꾸미지 않은 글의 진정성이 느껴진다. 누군가에게 보내려다 끝내 부치지 못한 편지처럼 이 책의 글들은 완벽하게 정돈된 문장보다 그 안에 담긴 마음에 더 무게를 둔다. 그런 점에서 「편지하겠습니다」는 단순한 머리말을 넘어 앞으로 만나게 될 글들을 어떤 시선으로 읽어야 하는지 알려 주는 안내문처럼 다가온다.


「윤슬」은 평범한 단어 하나가 누군가와 함께했던 시간을 떠올리게 하는 특별한 기억이 될 수 있음을 보여 주는 글이다. 부산의 관람차에서 바다를 바라보던 연인이 물결 위에 반짝이는 햇빛을 가리키며 ‘윤슬’이라는 순우리말을 알려 준다. 그러나 저자의 시선이 머문 곳은 아름다운 바다도 햇빛도 아닌 창에 비친 연인의 얼굴이었다. 그에게 윤슬은 물결에 비치는 빛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의 표정과 눈빛이었으며 그 순간 느꼈던 설렘이었다. 시간이 흘러 그 사람과의 관계는 지나간 일이 되었지만 바다 위에 햇살이 반짝일 때마다 함께했던 순간은 여전히 되살아난다. 특히 “그에게 배운 단어는 윤슬과 사랑, 그리고 나지막한 슬픔이었다”라는 마지막 문장은 이 글의 여운을 더한다. 하나의 단어에 사랑의 시작과 이별 이후의 그리움까지 담겨 있기 때문이다. 누구에게나 특정한 장소나 음악, 익숙한 말 한마디를 통해 문득 떠오르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윤슬」은 이처럼 일상의 사소한 풍경에 남겨진 기억을 통해 사랑이 끝난 뒤에도 그때의 감정은 예상치 못한 순간에 다시 찾아올 수 있음을 보여 준다.


「외로움에 대하여」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외로움의 의미를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게 한다. 저자는 외로움이 단순히 혼자 있거나 곁에 의지할 사람이 없는 상태에서 비롯되는 감정은 아니라고 말한다. 오히려 더는 그리워할 사람조차 없을 때, 힘든 순간에도 누구에게 기대고 싶지 않을 때,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서도 함께 나누고 싶은 사람이 떠오르지 않을 때 비로소 진정한 외로움을 느낀다고 이야기한다. 누군가를 그리워한다는 것은 그만큼 마음속에 소중한 사람이 남아 있다는 뜻이며 기댈 사람을 찾는다는 것 역시 여전히 타인과 연결되고 싶은 마음이 존재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저자가 말하는 외로움은 단순한 고독을 넘어 누군가를 향한 마음마저 사라진 상태에 가깝다. 특히 과거에는 사랑하는 사람을 떠올리며 글을 썼지만 이제는 그 사람을 그리워하던 자신의 모습을 그리워한다는 고백이 인상적이다. 그리움의 대상이었던 사람보다 그를 그리워할 수 있었던 시간 자체가 그리워졌다는 점에서 외로움의 깊이가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이 글은 외로움이 곁에 사람이 없어서 생기는 감정만은 아니며 누군가를 그리워하고 마음을 나눌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우리 삶에서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지 생각하게 한다.

​

<편지할게요>는 누군가에게 전하지 못한 말들을 모아 놓은 책이지만 그 안에 담긴 이야기는 사랑과 이별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저자는 한때 소중했던 사람과의 기억을 되짚으며 관계가 끝난 뒤에도 쉽게 사라지지 않는 감정들을 들여다본다. 특히 상대의 하루를 궁금해하며 수많은 안부를 묻던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면 이제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그저 말없이 안아 주고 싶다는 고백이 인상적이다. 상대를 더 많이 알고 싶었던 마음이 시간이 흐르면서 그 사람의 힘겨운 순간을 이해하고 위로하고 싶은 마음으로 바뀐 것이다. 또한 자신의 글이 누군가의 외로운 새벽을 위로할 수 있다면 서로를 알지 못하고 관계가 이어지지 않더라도 괜찮다는 말에서는 편지가 지닌 또 다른 의미를 발견하게 된다. 편지는 반드시 답장을 받거나 상대에게 도착해야만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마음을 글로 남기는 행위 자체가 지나온 시간을 정리하고 미처 표현하지 못했던 진심을 전하는 방법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

그런 점에서 이 책은 타인의 사연을 읽는 동시에 자신의 지난날을 돌아보게 한다. 누구에게나 다시 연락하고 싶지만 선뜻 용기가 나지 않는 사람이 있고 이제는 전할 수 없게 된 말이나 뒤늦게 깨달은 마음이 남아 있기 마련이다. 저자는 “주소가 변했다 해도 편지하겠습니다”라고 말하며 상대에게 닿을 수 없더라도 글을 쓰겠다는 마음을 전한다. 이는 지나간 관계에 매달리겠다는 다짐이라기보다 한때 자신이 품었던 감정까지 부정하지 않겠다는 태도로 읽힌다. 손으로 편지를 쓰는 일이 낯설어진 시대이지만 누군가에게 마음을 전하고 싶은 바람까지 사라진 것은 아닐 것이다. 이 책을 덮으며 문득 오래전 연락이 끊긴 사람과 미처 전하지 못했던 말들을 떠올리게 된다. 어쩌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완벽하게 다듬어진 문장이 아니라 서툴더라도 자신의 마음을 솔직하게 전하려는 작은 용기인지도 모르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