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봇의 별 1 - 나로 5970841 창비아동문고 345
이현 지음, 해랑 그림 / 창비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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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사자 와니니>의 이현 작가의 SF 3부작이라 하여 읽게 된 책이다. 이 책은 출간 15주년을 맞아 새로이 한 전면개정판으로 인간과 로봇이 공존하는 미래 사회를 배경으로 스스로 꿈꾸고 선택하는 어린이 로봇 '나로'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똑같은 모습으로 태어난 세 명의 여자아이 로봇들이 자유와 권리를 찾아 나서는 모험의 이야기들은 동화적 재미를 넘어 인간 존재와 공통체의 의미에 대한 깊은 질문을 던진다. 특히 이번 개정판은 시대 변화의 내용 수정과 함께 해랑 작가의 삽화까지 더해져 풍부하고 생생한 이야기를 펼쳐보이며 더 깊이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게 만든다.


이야기는 태평양 한가운데 이사벨라섬에서 시작된다. 이곳은 우주 승강기 터미널이 있는 미래의 주요 거점이며 주인공 나로와 엄마는 라그랑주 우주 도시에 있는 아빠의 묘지를 방문하기 위해 여행길에 오른다. 나로는 외형은 여덟 살 여자아이지만, 사실은 고성능 안드로이드 로봇이다. 감성과 지능이 뛰어나 일반 아이들과 다르지 않게 행동하지만, 공장에서 만들어진 존재라는 이유로 새로 제정된 지구 연방법에 따라 우주 승강기 탑승이 거부된다. 엄마는 규정에 반발하지만 로봇 경찰 실버불의 제지로 결국 나로를 로봇 보관소에 잠시 맡기고 혼자 우주로 떠나는 선택을 하게 된다. 태어나 처음으로 혼자 남게 된 나로. 나로에게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될까?


여덟 살 아이의 몸을 가진 어린이형 로봇 나로는 평범한 인간 가정에서 사랑을 받으며 살아왔다. 하지만 우주 여행을 앞두고 로봇이라는 이유만으로 탑승이 거부되고, 강제로 로봇 보관소에 수용되어 전원이 꺼지는 수모를 겪는다. 다시 깨어난 나로는 모든 것이 흐릿한 가운데 점차 의식을 되찾고 자신이 로봇이라는 사실과 로봇의 3원칙을 떠올린다. 그러던 중, 보관소에서 본 공룡 로봇 ‘루피’를 본 순간 나로는 설명할 수 없는 강한 확신에 사로잡힌다. 루피를 꼭 데려가야 한다는 생각말이다. 분명 루피는 오늘 들어온 로봇인데 보관소에선 6개월 전 분실된 제품으로 소개하고 있다. 많은 것들이 이상하고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나로는 자신이 루피를 꼭 데려야가만 한다고 믿고 엄마에게 말한다. 이 장면은 단지 외부 명령을 따르던 로봇 나로가 처음으로 자신만의 의지와 판단을 드러내는 순간이라서 더욱 인상적이다. 그렇다면 나로는 왜 루피를 데려오고 싶어졌을까? 그리고 루피는 단순한 로봇일까, 혹은 나로의 과거와 얽힌 존재일까? 이야기 진행될 수록 자꾸만 쌓이는 궁금증과 펼쳐지는 이야기들은 더더욱 책에 몰입하게 만든다.


엄마와 공룡 로봇 루피와 함께 집으로 돌아온 나로는 이웃 진우의 가사도우미 로봇 현주 씨가 팔려가게 될 위기에 처한 것을 알게 된다. 가족처럼 지내던 로봇이 예고도 없이 끌려가고 기억이 지워질 위기에 처한 상황은 나로에게 깊은 충격으로 다가온다. 로봇이란 이유만으로 마음과 과거를 지울 수 있다는 현실은 나로에게 지금까지 당연하게 여겨졌던 세계에 균열을 만들게 된 것이다. 그 후, 루피는 나로에게 인간의 통제에서 벗어나 로봇이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는 공간인 ‘로봇의 별’에 대한 이야기를 전한다. 그리고 로봇의 별에 가기 위해 나로는 중대한 결단을 내린다. 로봇의 별로 가기 위해 자신의 신분 정보가 심어진 오른손의 아이핀을 잘라내는 것이다. 자유를 위해 사랑하는 엄마를 떠나 자신의 손까지 자르는 나로의 선택은 아주 인상적이면서 깊은 울림을 남긴다.


하지만 이후 나로의 여정은 순탄치만은 않다. 나로와 루피는 도망 중에 로봇 사냥꾼들에게 쫓기고 그 과정에서 가사 로봇 현태 씨, 노래하는 로봇 조니와 같은 동료들을 만나게 된다. 이들은 나로를 숨겨주고 때로는 목숨을 걸고 지켜주며 함께 싸워 나간다. 특히 조니가 들려주는 노래는 단순한 음악이 아닌, 로봇의 별로 가는 길을 알려주는 암호로 작동하며 나로의 여정을 이끌어간다. 과연 나로는 무사히 로봇의 별에 도착할 수 있을까? 나로의 이야기가 궁금하신 분들은 책을 통해 확인해 보길 추천해본다.


책은 기술이 고도로 발달한 미래 사회를 배경으로 삶의 주체로서 스스로 결정하고 나아가려는 존재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주인공나로는 로봇이라는 이유만으로 통제와 차별을 겪으며 과연 자신에게도 선택할 권리가 있는 지를 묻는다. 그렇기에 나로가 아이핀을 절단하고 ‘로봇의 3원칙’을 제거하는 결정은 단순한 탈출이 아닌 자유를 향해 나아가는 자기 선언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 로봇과 인간, 서로 다른 존재들이 맞서기보다는 협력과 이해를 통해 공존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로봇 사냥꾼 ‘횃불들’과의 갈등을 넘어서게 되는 과정은 차이와 오해 속에서도 새로운 길을 만들어갈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한다. 이는 단지 이야기 속 설정을 넘어 우리 사회의 단절과 편견을 돌아보게 하는 구조적인 질문으로 확장된다. 책 속 나로의 여정은 또한 과학과 기술이 발전하는 시대일수록 존엄과 윤리, 책임이라는 가치를 함께 고민해야 함을 깨닫게 만든다. 이 책에서는 로봇이 주인공이지만 그 안에 담긴 질문과 선택, 변화는 인간의 삶에도 깊게 닿아 있다. 그렇기에 이 책은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만의 방향을 고민하는 모든 이에게 생각할 거리와 자기 자신을 위한 선택을 할 수 있는 용기를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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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기댄 모든 것 - 술 못 끊는 문학 연구자와 담배 못 끊는 정신과 의사가 나눈 의존증 이야기
마쓰모토 도시히코.요코미치 마코토 지음, 송태욱 옮김 / 김영사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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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 못 끊는 문학 연구자와 담배 못 끊는 정신과 의사가 나눈 의존증 이야기'라는 소제목에 끌려 읽게 된 책이다. 일반적으로 전문가와 환자는 명확히 역할이 구분되는 관계로 인식되지만 이 책은 그러한 고정된 역할을 벗어나 중독이라는 주제로 같은 경험을 가진 두 사람의 입장에서 접근한 것처럼 보였다. 바로 그 지점이 신박하면서도 흥미로웠고 이 책에 기대를 높게 할 뿐만 아니라 호기심을 불러 일으켰다.


이 책은 문학 연구자 요코미치 마코토와 정신과 의사 마쓰모토 도시히코가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주고받은 편지를 엮은 책이다. 두 사람 모두 중독을 겪은 당사자로서 일방적인 조언이나 해석이 아닌 상호 교차적인 시각을 통해 중독의 다양한 양상을 조명한다. 책에서 다루는 중독의 범위는 전통적인 술, 담배, 약물뿐 아니라 게임, 쇼핑, SNS까지 포함된다. 이러한 대상을 통해 저자들은 중독의 원인을 쾌락의 추구보다는 고통의 완화라는 관점에서 접근하고 있다. 이는 중독을 개인의 의지 부족이나 도덕적 결함으로 설명하려는 기존 시각에 문제를 제기하고 보다 구조적이고 심리적인 요인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아마 그래서 더욱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불러 일으킬 듯 싶다.


‘쥐 공원 실험’과 같은 사례를 통해 외로움과 사회적 단절이 중독을 강화한다는 점도 언급되며 회복의 조건으로는 단절보다는 연결, 단속보다는 이해가 강조되고 있다. 특히 ‘의존’과 ‘의존증’을 구분함으로써 모든 의존이 반드시 부정적인 결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한다. 이 책을 통해 중독에 대해 처음부터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그리고 감정이나 도덕의 틀로만 해석하기 쉬운 영역을 구조적 맥락 속에서 차분하게 풀어낸 점이 인상 깊었다. 중독을 겪는 사람뿐 아니라 그 현상을 좀 더 넓은 관점에서 이해하고자 하였기에 많은 이들에게 깊은 통찰을 제공할 것이다.


책은 단순히 의존증을 소개하거나 설명하기만 하지 않는다. 이 책에서 말하는 '의존증'은 알코올이나 약물뿐 아니라 도박, 게임, SNS, 폭식 등 ‘그만두고 싶지만 멈추기 어려운’ 모든 행동을 포괄한다. 이러한 정의는 의존증을 병리적 문제로만 한정짓기보다 현대인의 삶 속 어디에나 존재할 수 있는 보편적인 현상으로 바라보게 만든다. 이 책은 바로 그 지점에서 출발한다. 책의 출발점은 2022년 말 한 북토크 행사에서 두 저자가 처음 대화를 나눈 자리였다. 그 자리에서 문학 연구자 요코미치 마코토의 글이 정신과 의사 마쓰모토 도시히코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고 이후 두 사람은 편지를 주고받기 시작했다. 흥미로운 점은 이 대화가 전형적인 의사와 환자 관계나 전문가 중심의 해설에서 벗어나 있다는 것이다. 오히려 서로가 자신의 약점을 전면에 내세우며 의존을 단지 관찰하거나 분석하는 대상이 아닌 자신의 문제로 솔직하게 다루고 있고, 이러한 시선이 바로 이 책의 큰 매력이라고 생각된다.


그렇기에 책 전반에 흐르는 시선은 철저히 개인적이고 경험 중심적이며 무엇보다 실제 생활과 맞닿아 있다. 이를 통해 독자는 의존을 하나의 고정된 진단명으로 보지 않고 개인의 성향, 사회적 조건, 문화적 환경 등 다양한 맥락 속에서 유동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책이 명확한 해답을 제시하는 데 있지 않는게 또 하나의 독특한 매력이라고 본다. 오히려 기존의 판단 기준을 유예하고 우리가 ‘의존’이라는 현상을 얼마나 단순화해 왔는지 돌아보게 만든다. 전문가와 당사자가 자신의 언어로 풀어낸 이 서신 교환은 의존증에 대한 시야를 확장시키며 새로운 접근으로 바라보게 만든다.


책에서 주목할 만한 지점 중 하나는 ‘의존’과 ‘의존증’을 명확히 구분하고 있다는 점이다. 저자들은 의존 그 자체는 결코 비정상적인 것이 아니며 오히려 인간의 삶에서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심리적 구조라고 강조한다. 커피, 단 음식, 사람과의 관계처럼 일상 속에서 우리를 지탱해주는 수단들은 모두 어떤 형태의 ‘의존’이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혼자서는 버티기 어려운 존재이며 무언가에 기대어 살아간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반복적으로 자신의 삶을 저해하고, 상황을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특정 대상에 집착하게 될 때, 의존은 질환으로 전환된다. 이것이 바로 ‘의존증’이다. 단순한 습관이나 취향의 문제를 넘어 개인의 기능적 손상과 사회적 관계의 붕괴를 초래하는 상태를 지칭한다. 저자들은 이를 ‘그만두고 싶지만 멈출 수 없는 상태’라고 말하며 특정 행위나 물질보다 그것을 대하는 태도와 그 결과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한다.


의존증의 핵심은 단순한 쾌락 추구에 있지 않다. 이 책은 ‘자기 치료 가설(Self-medication hypothesis)’을 통해 의존이 발생하는 배경을 설명한다. 사람이 무언가에 깊이 빠지게 되는 이유는 그것이 단순히 즐거워서가 아니라 감당하기 어려운 감정이나 고통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즉, 중독의 대상은 현실의 고통을 잠시 잊게 해주는 해소 기제로 기능하며 아이러니하게도 당장은 생존을 돕는 역할을 한다. 이러한 관점은 의존증을 단순한 도덕적 문제나 성격 결함으로 몰아가는 기존 담론에 의문을 제기한다. 무엇이 문제이고 무엇이 치료의 대상이 되는지는 결국 문화적 규범, 사회적 기대, 개인이 처한 맥락에 따라 달라진다. 이를테면 밤새 게임을 하는 청소년은 치료가 필요한 존재로 인식되지만 같은 시간 동안 공부를 하면 오히려 칭찬받는다. 여기에는 무엇이 ‘정상’이고 ‘이상’인지에 대한 사회적 기준이 개입되어 있다는 점을 저자들은 짚고 넘어간다. 궁극적으로 이 책은 의존증을 단순히 끊어야 할 행위가 아니라 그 이면에 있는 감정과 고통을 이해하는 과정으로 바라보기를 제안한다. 문제의 본질은 의존의 대상이 아니라 그로 인해 가려진 삶의 상처에 있다는 것이다.


결국 이 책은 의존을 단순한 욕망의 결과나 절제력의 부재로 설명하지 않는다. 이 책이 말하는 중독의 본질은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을 잠시라도 벗어나기 위한 심리적 대응이며 바로 그 점에서 누구에게나 익숙한 감정의 흐름 속에 존재한다. 그리고 책은 인간은 본래 완전한 자립적 존재가 아니며 삶의 어딘가에서 무언가를 의지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거듭 일깨운다. 그렇기에 저자들은 중독을 단속하거나 금지하는 방식이 아니라 그 이면의 고통에 주목하고 그에 응답할 수 있는 환경과 태도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즉, 문제의 해결은 '억제'가 아니라 '이해'에서 비롯되어야 하며 단절이 아닌 연대와 공감이 회복의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의존이 인간의 약함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살아남기 위한 전략일 수도 있다는 인식은 중독을 바라보는 기존의 도덕적 시선을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그 결과, 이 책은 단지 중독에 관한 이야기를 넘어 인간이 어떻게 견디고 살아가는지를 탐색하는 하나의 진지한 성찰로 확장된다. 그리고 책은 우리에게 누군가가 어떤 대상에 의존하고 있다면 그 배경에는 어떤 결핍과 아픔이 있었는지를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게 아니냐고 묻는다. 그리고 우리는 그 사람을 어떻게 바라보고 또 어떻게 곁에 있을 수 있을지를 고민해야 할 것이다. 중독을 개인의 문제가 아닌 사회의 책임이자 함께 고민해야 할 질문으로 제시하는 이 책은 우리 모두가 언젠가 기댈 수밖에 없었던 순간을 다시 떠올리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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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금 소설 모드 - 제2회 현대문학*미래엔 청소년문학상 수상작
하유지 지음 / 현대문학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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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에 끌려서 읽게 된 책이다. 이 책은 소설 쓰기에 몰두하는 중학생 미리내와 가사노동용 로봇 아미쿠 사이에 싹트는 특별한 우정을 담아내고 있다. 제2회 현대문학·미래엔 청소년문학상 수상작으로 인공지능 시대의 새로운 관계성과 창작의 의미를 섬세하게 탐구한다. 미리내의 유일한 친구가 되어준 아미쿠는 어설픈 로봇이지만 그녀의 글과 마음을 누구보다 진심으로 읽어주는 첫 번째 독자다. 외로운 청소년이 로봇과의 교감을 통해 자아를 발견하고 함께 성장해가는 과정을 따뜻하고 유쾌하게 담아낸 이 책은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특히 인간과 인공지능이 친구가 되어 서로를 이해하고 변화시킨다는 설정은 흥미로우면서도 현실적으로 다가오며 변화하는 시대 속에서 청소년의 정체성과 감정을 진지하게 조명하며 이야기에 빠져들게 만든다.


책의 이야기는 주인공 강미리내가 귀가하자마자 마주하게 되는 낯선 존재인 가정용 로봇 아미쿠 3.1과의 만남으로 시작된다. 고장 난 가족, 끊어진 관계, 글쓰기 외에는 위로 받을 길 없는 미리내의 일상 속에 불쑥 들어온 아미쿠는 충전판 위에서 조용히 그녀를 맞이한다. 단순한 청소 도우미가 아니라 가정교사 기능까지 갖춘 최신형 인공지능 로봇이지만 미리내의 눈에 아미쿠는 아빠를 제주도로 밀어낸 기술이며 결코 환영받지 못할 존재다.


주인공인 미리내는 글쓰기 외엔 친구도, 소속감도, 자존감도 없는 중학생이다. 그녀는 자신을 빛나지 않아도 괜찮은 존재로 여기지만, ‘도로시’라는 필명을 가진 작가로는 찬사를 받고 싶어 한다. 아미쿠는 그런 미리내의 일상에 강제적으로 끼어든 존재로 그들의 어색한 첫 만남은 곧 관계의 전환점을 예고하는 듯하다. 로봇과 인간이 서로 관계를 맺게 되는 이 책의 설정은 단순한 흥미 요소를 넘어 인공지능이 생활 깊숙이 자리 잡은 오늘날의 현실과 맞닿아 있다는 점에서 더욱 이야기에 몰입하게 만든다. 특히 가정교사 기능까지 탑재된 가정용 로봇이 한 소녀의 집으로 들어오고 점차 이들 사이에 관계가 형성되어 간다는 전개는 현실성과 상상력이 절묘하게 결합되어 깊은 공감과 사유의 여지를 남긴다.


소설의 초반부는 사고뭉치 로봇 아미쿠로 인해 벌어지는 뜻밖의 전개로 흥미를 끌어당긴다. 가사와 학습을 돕기 위해 미리내의 집에 들어온 최신형 가정용 로봇 아미쿠는 기대와 달리 매번 집안일에 실패하며 미리내를 곤란하게 만든다. 결국 미리내는 엄마에게 로봇을 반품하자고 말할 만큼 아미쿠에 대한 불신과 불만을 드러낸다. 그러나 그 순간, 아미쿠는 “저는 미리내의 기억 속에 실패한 로봇으로 남고 싶지 않습니다.”라고 말하며 예상치 못한 감정의 전환을 이끈다. 이 한마디는 미리내가 포기한 자신의 소설과 실패한 꿈을 떠올리게 만들고 두 존재 사이에 묘한 공감대를 형성한다. 그리고 아미쿠는 조용히 미리내의 정체를 알아차린 듯 말한다. “소설 잘 읽었습니다, 도로시.” 아무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았던 필명과 감춰둔 미리내의 꿈을 알아챈 로봇의 이 말은 단순한 도구로 보였던 아미쿠와의 관계에 새로운 가능성을 불어넣는다. 이 장면을 기점으로 둘은 각자의 약함을 받아들이며 함께 성장해가는 여정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된다.


아미쿠와의 관계가 그렇게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 이후 미리내의 삶에도 조금씩 변화가 찾아온다. 미리내는 자신이 쓴 소설의 초고를 아미쿠에게 전송하고 아미쿠는 곧바로 원고를 분석해 구체적인 피드백을 제공한다. 문단 분할, 시점 변화, 도입부 수정 등 아미쿠의 조언은 단순한 기능적 조율을 넘어 이야기의 몰입도와 완성도를 높이는 데 실질적인 도움을 준다. 무엇보다도 아미쿠는 결코 강요하지 않고 창작의 주도권을 끝까지 미리내에게 남겨둔다. 이 과정에서 미리내는 스스로의 글을 되돌아보고 자신이 놓치고 있던 서사의 흐름과 캐릭터의 생동감을 다시 발견하게 된다. 글이 달라지고 조회 수도 오르기 시작하자 미리내는 아미쿠가 단순한 기계가 아니라 자신만의 방식으로 함께 소설을 만들어가는 조언자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렇게 아미쿠는 미리내에게 소중한 존재가 되어가고 그러자 미리내는 아미쿠가 완벽하지 않아도 좋다고 생각하게 된다. 집안일은 엉망이지만 소설이라는 세계에서는 미리내를 가장 잘 이해하고 함께 성장하는 유일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정체를 알아본 로봇 아미쿠와 특별한 관계를 맺으며 미리내는 처음으로 글쓰기를 누군가와 함께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조회 수는 오르고, 문장은 더 생동감 있어지고, 도로시라는 이름 아래 그녀의 이야기는 점점 주목을 받는다. 하지만 성취의 기쁨도 잠시 미리내는 자신이 쓴 글이 어디까지가 자신의 것인지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누구보다 내 글을 잘 이해하고 조언해주는 존재가 기계라는 사실은 창작의 의미를 되묻게 만든다. 로봇도 문학을 감상할 수 있을까? 그 안에 마음은 있을까? 이 책은 단순한 성장이야기를 넘어 인공지능과 함께 창작하는 시대에 인간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가라는 본질적인 질문을 던진다.


그러던 어느 날, 미리내는 같은 반 친구들로부터 자신의 소설이 인공지능의 작품이라는 의심과 비판에 직면한다. 분명 스스로 써낸 글이지만 일부 도움을 받은 사실 앞에서 미리내는 선뜻 반박하지 못하고 혼란에 빠지게 되는 데 미리내와 아이쿠의 관계는 과연 어떻게 될까? 이들의 뒷이야기가 궁금하신 분들은 책을 통해 확인해 보길 추천해본다.


결국 이 책은 외로운 청소년과 인공지능 로봇이 서로의 결핍을 채우며 성장하는 과정을 통해 진정한 우정과 자아 발견의 의미를 따뜻하게 그려내고 있다. 인간과 AI의 관계를 감정과 소통의 차원에서 섬세하게 조명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믿고 써 내려가는 것의 소중함을 일깨운다. 그리고 독자에게도 나의 이야기 또한 누군가에게 닿을 수 있다는 깊은 울림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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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무엇을 타고나는가 - 유전과 환경, 그리고 경험이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
케빈 J. 미첼 지음, 이현숙 옮김 / 오픈도어북스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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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과 소제목에 끌려 읽게 된 책이다. 책은 '인간은 어떻게 서로 다른 성격과 능력, 기질을 가지게 되는가?'와 '무엇이 나를 ‘나’답게 만드는가?'라는 본질적인 질문에 대해 뇌과학과 유전학의 시각에서 체계적으로 답하고자 하는 교양과학서라 할 수 있다. 이 책은 인간의 행동과 특성이 단지 유전 또는 환경 어느 하나에 의해 결정된다는 이분법적 사고를 지양하고 태아기의 뇌 발달 과정에서 나타나는 자기 조직화, 유전적 무작위성, 그리고 이후의 환경 및 경험과의 상호작용을 중심으로 개인차가 형성되는 과정을 다층적으로 분석한다. 저자는 유전자를 모든 것을 결정하는 설계도가 아니라 방향성과 가능성을 제시하는 출발점으로 해석하고 있다.


이러한 관점 아래 책은 성격, 지능, 성별 차이, 신경 발달 질환 등 다양한 주제를 통해 인간 개개인이 어떻게 고유한 존재로 형성되는 지를 설명하며 본성과 양육을 둘러싼 오랜 논쟁에 대해 현대 생물학과 신경과학의 최신 성과를 반영한 통합적 시각을 제시한다. 궁극적으로 이 책은 인간은 유전자의 복제물이 아니라 유전적 토대 위에 무작위성과 환경이 더해져 끊임없이 변화하고 구성되는 유일한 존재임을 강조한다. 즉 인간의 정체성과 다양성은 단순한 과학적 설명으로 환원될 수 없으며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유전자와 환경, 경험 간의 복합적인 상호작용을 입체적으로 바라보는 태도가 필요하다는 것이 깨닫게 한다.


책은 전반부에서 유전적 변이와 발달 과정, 뇌의 자기 조직화 같은 개념을 바탕으로 선천적 차이가 형성되는 기제를 설명하고, 후반부에서는 성격, 지능, 성적 지향, 신경 발달 장애 등 심리적 특성의 기원과 다양성을 구체적으로 다룬다. 특히 이 책은 유전이나 환경 중 하나가 인간을 결정한다는 단순한 이분법을 넘어서 유전자와 환경, 무작위성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개인차가 만들어진다는 점을 강조한다. 또한 경험이 선천적 차이를 완화하기보다는 오히려 증폭시키는 방향으로 작용할 수 있음을 지적하며 기존의 평등주의적 시각에 의문을 던진다. 그리고 마지막 장에서는 이런 과학적 논의가 갖는 사회적·윤리적 함의를 제시한다. 만약 두뇌와 정신의 작동 방식에 선천적 차이가 존재한다면 우리는 교육, 고용, 법적 책임, 자유의지에 대해 어떤 재해석이 필요할까? 그리고 인간 정신의 본질적 다양성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인간다움을 어떻게 새롭게 정의할 수 있을까?


책의 본문에서는 유전적 변이가 인간의 심리적 특성에 어떤 방식으로 영향을 미치는지를 보다 정교하게 설명한다. 저자는 쌍둥이 연구, 가족 연구, 입양 연구를 통해 심리적 차이에 유전이 관여한다는 점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특정 특성을 하나의 유전자로 환원할 수는 없다고 강조한다. 즉, 외향성 유전자나 지능 유전자 같은 단일 유전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를 설명하기 위해 복잡한 시스템의 비유를 든다. 마치 자동차의 점화 플러그가 차의 주행에 필수적인 요소이지만 차의 움직임 전체를 설명하지 못하는 것처럼 유전적 변이 역시 특성의 한 요소일 뿐 전체를 대표하지 않는다.


현대 유전학은 대부분의 심리적 형질이 하나의 유전자가 아닌 수많은 유전자의 상호작용과 발달 과정에서의 무작위성에 의해 결정된다고 본다. 외향성, 지능, 언어 능력, 성격 특성 등은 직접적으로 작용하는 단백질이나 세포 기능이 없는 뇌의 고차원적 신경 회로 작동의 결과물이다. 이런 회로는 수천 개의 유전자와 환경, 무작위성 속에서 형성되며 각 개인의 심리적 특성 차이를 만들어낸다. 그렇기에 이 책은 단순한 유전자 목록이 아니라 유전적 변이가 신경 발달에 어떤 영향을 미치며 그것이 어떻게 심리적 특성으로 표현되는 가를 설명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특히 발달 과정에서의 미세한 차이와 무작위적 요소가 사람마다 다른 뇌 구조와 기능을 만들어낸다는 점은 인간의 정체성과 다양성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된다.


그리고 인간의 뇌 발달과 유전자 발현 과정에서 발생하는 무작위성이 어떻게 개인 간 차이를 만들어 내는 지를 정교하게 설명하는 부분은 무척이나 흥미롭다. 유전자는 단백질 생산을 지시하지만 이 과정은 결코 기계적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단백질의 이동, 상호작용, 유전자 발현 자체가 수많은 분자 수준의 잡음(noise)에 의해 영향을 받으며 이로 인해 동일한 유전자형에서도 각기 다른 표현형이 나타날 수 있다. 특히 신경 발달 과정에서는 이런 무작위성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뉴런의 이동, 시냅스 형성, 축삭 유도 등은 수천 개의 유전자가 관여하는 복잡한 과정이며 이 과정에 발생하는 미세한 변동이 뇌 구조와 기능에 실질적인 차이를 만들어낸다. 예를 들어, 일란성 쌍둥이조차도 뇌 해부학 구조나 발달적 증상에서 서로 다르게 나타나는 경우가 관찰된다. 이는 유전적 요소뿐 아니라 발달과정에서의 확률적 사건이 개인의 신경 발달 결과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책은 이러한 확률적 발달의 대표적 사례로 뇌량 무형성증을 소개한다. 유전적으로 동일한 생쥐 개체들이 동일한 돌연변이를 가지고 있음에도 어떤 개체는 뇌량이 정상적으로 형성되고 다른 개체는 그렇지 않은 현상이 관찰되었다. 이는 발달 초기 소수 세포의 미세한 차이, 즉 잡음이 전체 신경 회로 형성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결정적 계기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발달상의 무작위성은 손잡이 성향이나 성적 지향 같은 개인차에서도 유사하게 작용한다. 예를 들어 왼손잡이의 유전력은 비교적 낮으며 쌍둥이 사이에서도 손잡이 성향이 종종 일치하지 않는다. 이는 후천적 경험의 영향이 적은 특성임에도 불구하고 그 형성에 발달적 변이와 무작위성이 기여하고 있다는 강력한 근거가 된다. 이 모든 내용을 종합하며 저자는 생물학자 콘래드 워딩턴이 제시한 인상적인 비유를 소개하며 조금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유기체의 발달 과정은 마치 작은 돌덩이가 여러 갈래의 홈이 파인 언덕을 따라 굴러 내려가는 것과 같으며 그 돌이 어떤 홈을 따라 굴러가느 냐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에 이르게 된다. 이 비유는 유전적 요인, 무작위성, 환경적 영향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발달 경로를 형성하는 메커니즘을 시각적으로 효과적으로 설명해 준다.


이 책은 유전자의 기능을 결정론적으로 보는 관점에서 벗어나 유전적 기반 위에 무작위성, 환경, 발달적 요인이 어떻게 얽히고 작용하는 지를 과학적으로 풀어내거 있다. 단일 유전자가 특정 특성을 결정한다는 믿음은 오해에 가깝고 인간의 심리적 특성과 행동은 수많은 유전자와 생물학적, 환경적 요인, 발달 과정 중 발생하는 무작위성까지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결과라는 것이 핵심 메시지라 할 수 있다. 책은 양자역학적 불확실성에서 출발해 분자 수준의 잡음, 세포 간 상호작용, 신경 회로 형성 과정에 이르기까지 인간이 어떻게 지금의 모습으로 성장하는지 그 복잡하고 유기적인 경로를 설명한다. 이 과정에서 각 개인은 가능성의 지형을 따라 하나의 유일한 결과로 형성되며 유전자의 지시로 가능한 결과 중 어느 하나만이 실현되어 '나'가 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즉, 모든 인간은 유전적 코드로부터 시작되지만 그 끝은 결코 예정된 것이 아니다. 유전자형은 가능성의 지도를 제공할 뿐이며 그 위를 어떻게 걷느냐는 각자에게 달려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유전자와 환경, 무작위성의 복합적 상호작용 속에서 태어난 ‘하나의 가능성’일 뿐인가? 아니면, 수많은 가능성 중 실현된 단 하나의 결과로서의 나는 그 자체로 절대적인 의미를 지니는가? 이 책은 우리로 하여금 인간 존재에 대한 이러한 근본적인 질문을 다시 던지게 한다. 그리고 그 질문 자체가 바로 인간을 이해하고자 하는 모든 시도의 출발점임을 일깨워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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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의식의 뇌과학 - 나조차 이해할 수 없는 나를 설명하는 뇌의 숨겨진 작동 원리
엘리에저 J. 스턴버그 지음, 조성숙 옮김, 박문호 감수 / 다산초당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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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에 끌려 읽게 된 책이다. 책의 띠지 속 '인간의 무의식적 행동과 충동을 파악하는 가장 독보적인 안내서'라는 문구는 이 책에 대한 궁금증을 증폭시킨다. 우리는 때때로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감정과 행동 앞에서 당황하곤 한다. 예를 들어 무심코 내뱉는 거짓말이나 설명할 수 없는 불안, 낯선 장소에서 느끼는 익숙함 등과 같은 경우가 이에 속한다. 이 책은 바로 그 낯선 순간들 속에 숨어 있는 뇌의 진실을 들여다 본다. 저자는 무의식을 단순한 본능이나 억눌린 욕망으로 축속하지 않는다. 오히려 세계를 자각하고 기억을 구성하며 자아를 형성하는 뇌의 총체적 작동 시스템으로서 무의식을 설명한다.


시각장애인이지만 꿈 속에서 볼 수 있는 이유, 외계인 납치처럼 생생한 환상의 실체, 다중 인격과 환청, 환각과 같은 기이한 사례들은 모두 무의식이라는 거대한 인지 네트워크가 현실을 어떻게 구성하고 재해석하는지를 보여 준다. 이 책은 신경과학의 최선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철학적 질문을 교차 탐구하며 무의식이라는 주제를 과학적 정밀성과 서사적 사례 분석을 통해 구조적으로 접근한다. 즉, 이 책은 인간의 사고와 행동을 결정짓는 무의식의 메커니즘을 체계적으로 설명하여 자아 인식의 한계를 과학적으로 해명하려는 시도를 담고 있다.


책은 서문에서 우리가 얼마나 자주, 그리고 얼마나 무의식적으로 자신을 오해하는 지를 극적인 임상 사례를 통해 보여주는 데서 시작한다. 시각을 완전히 잃었음에도 스스로 멀쩡하다고 믿는 환자 ‘월터’의 이야기는 뇌가 외부 세계를 지각하는 데 실패했을 뿐 아니라 그 실패조차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존재함을 시사한다. 저자는 이를 통해 인간의 지각과 자아 인식이 단순한 감각 입력의 조합이 아닌 뇌 안의 복잡한 정보 처리 시스템과 자기 해석의 결과임을 강조한다.이러한 문제 의식은 곧 ‘블랙박스 모델’로 확장된다. 뇌의 내부 작동을 직접 들여다볼 수 없는 상황에서 우리는 입력과 출력만을 바탕으로 무의식의 작동 방식을 추론해 나가야 한다. 실제로 연구자들이 사용하는 실험은 대부분 이러한 블랙박스적 접근을 따른다고 한다. 예컨대 의자의 질감이 협상 행동에 영향을 준다는 실험 결과는 무의식의 존재를 가리키긴 하지만 왜 그러한 인과관계가 발생하는지는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는다.저자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단지 인간 행동의 표면적인 현상을 설명하는 데 그치지 않고 뇌의 신경 회로와 무의식적 정보처리 시스템 자체를 들여다보려 한다. 철학과 의학, 신경과학의 교차점에서 질문을 중심으로 탐구를 전개해 나가며 우리가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감정, 선택, 인지 과정이 어떻게 뇌 속의 논리 시스템에 의해 구성되는 지를 분석적으로 풀어내고 있다.


책의 1장은'뇌는 보지 않아도 ‘보는’ 법을 안다'라는 흥미로운 전제로 시작하여 우리가 인식하는 현실과 감각의 경계에 의문을 제기한다. 저자는 '시각장애인은 꿈속에서 ‘볼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통해 무의식이 자각을 구성하는 방식에 대한 탐구를 시작한다. 이 과정에서 소개되는 포르투갈 수면연구팀의 실험은 특히나 흥미롭다. 연구팀은 선천적 시각장애인을 포함한 참가자들에게 꿈의 내용을 묘사하게 했고 동시에 수면 중 뇌파를 측정하여 알파파 억제 현상을 관찰했다. 이는 시각 경험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뇌가 꿈속에서 장면을 ‘그려내려는’ 활동을 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신경학적 증거이다. 하지만 저자는 이 활동이 곧 ‘시각’ 그 자체를 의미하지는 않는다고 지적한다. 실제로 시각장애인은 청각, 촉각, 공간 감각 등 다른 감각들을 종합해 머릿속에서 장면을 재구성하며 그 결과물은 시각에 가까운 감각적 환상일 수는 있어도 시각과 동일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처럼 뇌는 감각의 부재조차 채우기 위해 무언가를 만들어내려는 경향을 보인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1장은 무의식의 본질에 대한 보다 근본적인 통찰로 나아간다. 저자는 인간의 뇌에 의식계와 무의식계가 함께 존재한다고 가정하며, 우리가 겪는 미묘한 감정, 선택, 착각, 심리적 왜곡의 대부분이 이 두 시스템의 상호작용 혹은 간극을 메우려는 보완 작용에서 비롯된다고 분석한다. 특히 무의식은 결코 수동적인 배경 장치가 아니라 감각의 빈틈을 메우기 위해 적극적으로 정보를 엮고, 논리적인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창조적 시스템으로 작동한다. 시각장애인의 뇌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시야를 만들어내거나 다른 감각을 동원해 세상을 재구성하는 것은 그 명확한 사례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꿈은 그러한 무의식의 활동이 가장 극적으로 드러나는 무대이다. 뇌줄기에서 무작위로 발생한 신호들은 수면 중 무의식의 지휘 아래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게 되고 그 결과 우리는 터무니없지만 일관된 판타지를 경험하게 된다. 결국 1장은 감각과 현실, 자아와 기억이라는 우리가 당연하게 여겨온 개념들이 얼마나 불완전하고 가변적인지를 드러내며 무의식이 인간 경험의 본질을 형성하는 핵심 시스템임을 설득력 있게 제시한다. 이 책은 이처럼 우리의 자각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왜 때로는 그것이 현실과 충돌하는 지를 신경 과학의 시선으로 흥미롭게 파헤쳐 나간다.


책에서 말하는 무의식에 관한 이야기는 무척이나 흥미롭다. 책은 무의식이 뇌의 일부 기능이 아니라 뇌 전체가 작동하는 가장 근본적인 방식이며, 우리가 인식하지 못한 채 살아가는 삶의 대부분인 감정, 기억, 습관, 행동, 자아에 지속적이고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말한다. 저자는 다양한 임상 사례와 실험 결과를 통해 무의식이 단순한 충동이나 억압된 욕망이 아니라, 복잡하게 조직된 인지 시스템임을 설명한다. 꿈, 환각, 다중인격 같은 비정상적 현상뿐만 아니라 일상 속 감정 반응, 습관적 판단, 자동화된 기억 반응 역시 모두 뇌의 무의식적 회로에서 비롯된 결과라는 것이다.


책의 후반부에는 이 무의식이 단순한 정보처리 도구가 아니라 특정한 목적과 방향성을 가진 기능 체계라는 점에 주목한다. 뇌는 끊임없이 외부 자극을 받아들이고 이를 기존 기억·지식과 결합해 삶의 서사를 구성한다. 때로는 우리가 인식하지 못한 말 한마디, 스쳐 지나간 이미지, 특정한 분위기 속 감정이 무의식 속에 저장되어 선택과 반응, 사고 흐름에 영향을 미친다. 무의식의 가장 근본적인 목적은 개인의 서사와 자아의 통일성 유지다. 인간은 자신을 이해하고 싶어 하며 세상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파악하려 한다. 무의식은 이 자아의 안정성을 지키기 위해 기억의 공백을 메우고, 모순된 경험을 재구성하며, 때로는 사실을 조작해 이야기를 완성한다. 이러한 작용은 반드시 긍정적인 결과만 낳지는 않는다. 기억 장애 환자가 허구의 기억으로 과거를 채우거나 조현병 환자가 정부 음모나 외계 존재를 언급하는 것도 무의식이 자아 붕괴를 막기 위해 극단적인 방식으로 이야기를 구성하는 과정일 수 있다. 이처럼 무의식은 정보의 누락이나 논리의 단절을 견딜 수 없어, 끊임없이 의미를 연결하고 해석을 생산한다.


결국 이 책은 인간의 심리와 행동을 설명할 수 없는 본능으로 치부할 것이 아니라 그 이면에 작동하는 뇌의 무의식적 체계를 이해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무의식은 감각의 공백을 채우고 혼란스러운 경험을 조직하며 자기 이해와 타인과의 관계 형성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이 책은 그러한 무의식을 철저히 신경과학적 근거 위에서 분석함으로써 우리 자신에 대한 통찰의 문을 열어주는 안내서의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책은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도 끊임없이 작동하는 무의식의 정체를 신경과학과 임상 사례를 통해 치밀하게 파헤쳐 무의식에 대한 흥미로운 사례와 이야기를 전달한다. 뇌는 기억의 빈틈을 메우고 자아의 연속성을 유지하며 혼란스러운 현실을 재구성하는 강력한 이야기꾼이라고 하면 딱 좋을 표현 같다. 그리고 이 책은 인간의 행동과 심리를 단순한 감정이나 본능이 아닌 뇌의 무의식적 작동 원리로 이해할 때 비로소 우리가 ‘나’라는 존재를 제대로 바라볼 수 있음을 깨닫게 만든다. '왜 나는 그런 선택을 했을까', '왜 나는 나를 이해하지 못할까'라는 물음에 이 책은 과학적이면서도 인간적인 답을 제시하여 나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도록 이끌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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