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관과 객관 - 과잉 정보의 시대, 본질을 보는 8가지 규칙
키코 야네라스 지음, 이소영 옮김 / 오픈도어북스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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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정보가 넘쳐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정보가 넘칠수록 사실 정확한 판단은 더 어려워진다. 수치와 그래프, 통계 결과가 하루에도 수없이 쏟아지지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차분히 따져볼 시간은 점점 줄어든다. 빠른 결론과 단순한 해석을 요구하는 환경 속에서 우리는 종종 숫자를 근거로 삼았다는 이유만으로 판단이 객관적이라고 믿어버리곤 한다. 그러나 데이터 역시 누군가의 선택과 관점, 전제 위에서 만들어진 결과물이며 읽는 방식에 따라 얼마든지 다른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이러한 지점에서 '과잉 정보의 시대, 본질을 보는 8가지 규칙'이라는 소제목은 이 책의 내용 자체를 아주 궁금하게 만든다. 

이 책은 데이터의 시대에 요구되는 새로운 사고 방식을 제안하고 있다. 저자는 통계와 숫자를 맹신하는 태도도, 직관에만 의존하는 판단도 모두 경계하며 정보의 복잡성과 불확실성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법을 설명하고 있다. 책은 동물의 생태, 스포츠와 게임, 역사와 정치 등 다양한 사례를 통해 데이터가 어떻게 우리의 인식을 이끌고 때로는 왜곡하는지를 짚어내고 그 과정에서 데이터 리터러시의 핵심은 정답을 찾는 게 아니라 질문하는 태도임을 강조한다. 그렇기에 이 책은 통계 입문서를 넘어 정보의 홍수 속에서 흔들리지 않고 사고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한 현대적 사고력의 안내서로 읽힌다.

책은 데이터가 결코 현대에 갑자기 등장한 새로운 도구가 아니라 인류가 세상을 이해해 온 오래된 방식이라고 이야기하며 시작한다. 과학자들은 오래전부터 표본을 수집하고 분류하며 기록을 남겨 왔고, 고대 사회의 유물을 분석한 연구자들 역시 측정과 비교를 통해 인간의 삶과 사고를 추론해 왔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디지털화 이후 데이터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 우리 삶의 거의 모든 영역을 둘러싸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직업과 상관없이 누구나 수치와 정보를 바탕으로 판단해야 하는 시대가 되었으며 과학 연구뿐 아니라 일상적인 선택 역시 정량적 관점과 분리될 수 없게 되었다. 저자는 이 책이 바로 이러한 복잡한 현실을 이해하기 위한 해독의 도구로서 데이터를 다룬다고 밝히고 있다.

그리고 이어지는 개인적인 경험의 이야기는 무척이나 인상적이다. 어린 시절 병뚜껑을 모으고 목록을 만드는 데서 느꼈던 집착에 가까운 호기심은 이후 박사 과정에서의 연구와 데이터 분석, 그리고 저널리즘으로 이어졌다. 저자에게 데이터는 숫자 자체가 아니라 질문을 정리하고 세상을 이해하려는 방식이었다. 그래서 이 책은 명확한 답을 제시하기보다 사고를 점검하는 규칙과 질문의 목록을 제안하고 있다. 복잡성을 인정하고 표본의 편향과 인과관계의 함정을 경계하며, 우연과 불확실성을 고려하는 태도는 모두 직관의 한계를 인식하는 데서 출발한다. 책을 통해 저자가 반복해 강조하는 메시지는 바로 세상은 대체로 우리가 보기에 더 복잡하며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순간에야 비로소 보다 정교하고 책임 있는 판단이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책은 제일 먼저 뱀장어의 생애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으로 하여 우리가 세계를 이해할 때 당연하게 여겨 온 비례와 예측 가능성이 얼마나 쉽게 무너지는 지를 보여주고 있다. 수천 킬로미터의 바다를 건너 특정 강에 정착했다가 다시 아무것도 먹지 않은 채 출생지로 돌아가는 뱀장어의 삶은 단순한 원인과 결과로 설명되지 않는다. 오랜 시간 거의 변화 없이 머무르던 상태에서 어느 순간 갑작스럽게 이동과 변태가 일어나고, 그 결정의 계기조차 명확히 드러나지 않는다. 저자는 이러한 뱀장어의 삶을 통해 자연과 세계가 본질적으로 비선형적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시간과 결과, 노력과 성과가 항상 정비례하지 않으며 일정한 구간에서는 완만하다가도 임계점을 넘는 순간 급격한 변화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이는 포획량이 어느 순간 급격히 줄어드는 포화 현상이나, 작은 하중 차이로 무너지는 구조물의 예시와도 맞닿아 있다.

이 비선형성은 특히 지수적 현상과 혼돈 시스템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감염병 확산처럼 초기에는 미미해 보이던 변화가 어느 순간 폭발적으로 증폭되는 현상은 인간의 직관이 가장 취약한 영역이다. 치사율의 증가보다 전파력의 소폭 상승이 훨씬 치명적인 결과를 낳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더 나아가 저자는 혼돈 이론을 통해 세계가 단순히 아직 덜 알려진 것이 아니라 원리상 예측이 불가능한 영역을 포함하고 있음을 설명한다. 초기 조건의 미세한 차이가 전혀 다른 결과로 이어지는 혼돈 시스템에서는 법칙을 안다고 해서 미래를 내다볼 수 없다는 것이다. 뱀장어의 이동 경로처럼 자연과 사회의 많은 현상은 결정론적이면서도 동시에 예측 불가능하다. 이를 통해 책은 세상은 선형적이지 않으며 우리의 직관은 이러한 복잡성과 변덕 앞에서 반복적으로 실패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바로 이 책이 제시하는 사고의 출발점이다.


앞서 비선형성과 지수적 성장, 그리고 혼돈 시스템을 통해 저자는 세상이 우리의 직관이 기대하는 방식으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작은 차이가 예상치 못한 결과로 증폭되고 원인을 모두 알고 있어도 미래를 정확히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 현실에서는 흔하다는 점이다. 이러한 복잡성은 자연 현상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사회를 이해하려는 시도, 특히 여론조사와 같은 데이터 분석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우리는 숫자를 통해 세상을 파악하려 하지만 그 숫자가 어떤 방식으로 만들어졌는지에 따라 결론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갈 수 있다.

이 맥락에서 저자가 제시하는 표본의 편향성 문제는 역시 아주 인상적이다. 2016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여론조사가 실패한 이유는 유권자들이 갑자기 변덕을 부렸기 때문이 아니라,조사에 포함된 표본이 현실의 복잡한 구조를 충분히 반영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특히 대학을 나오지 않은 백인 유권자 집단이 과소대표되면서 이들의 선택이 결과에 미치는 영향이 예측 단계에서 과소평가되었다. 이는 평균적인 유권자라는 가정이 얼마나 쉽게 무너질 수 있는 지를 보여준다. 사회 역시 뱀장어의 이동 경로나 감염병의 확산처럼 비선형적이며 일부 집단의 변화가 전체 결과를 급격히 뒤흔들 수 있는 구조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한계를 인정하는 데서 출발하여 불완전한 데이터로도 현실에 더 가까이 다가가는 방법을 제안하고 있다. 완벽하게 대표성 있는 표본을 얻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지만 표본이 어디에서 왜 왜곡되었는 지를 인식한다면 가중치와 보정 기법을 통해 그 영향을 줄일 수 있다는 것이다. Xbox 이용자처럼 명백히 편향된 집단조차도 적절한 통계적 조정을 거치면 선거 결과를 정확히 예측할 수 있었던 사례는 이를 잘 보여준다. 결국 책은 세상은 단순하지 않으며 예측의 실패는 데이터의 부재보다 복잡성을 무시한 태도에서 비롯된다는 점을 강조한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숫자를 더 많이 모으는 일이 아니라 그 숫자가 담고 있는 구조와 한계를 끊임없이 점검하는 자세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결국 이 책이 도달하는 지점은 숫자에 대한 신뢰도, 직관에 대한 불신도 아닌 판단의 책임이다. 이 책에서 데이터는 세계를 단순화하는 도구가 아니라 오히려 그 복잡성을 정직하게 마주하게 만드는 언어로 기능한다. 저자는 수치와 모델이 언제든 오용될 수 있음을 숨기지 않으면서도, 그렇기 때문에 더욱 엄밀한 태도로 다뤄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숫자는 판단을 대신해 주지 않으며 판단의 자리를 비워 두지도 않는다. 다만 무엇을 알고 있고, 무엇을 모르는 지를 분명히 드러냄으로써 성급한 확신을 경계하게 만든다. 이 점에서 데이터 리터러시는 계산 능력이 아니라 불확실성을 견디는 사고의 훈련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인상적인 점은 이 책이 정량적 사고를 인간적인 시선과 대립시키지 않는다는 데 있다. 만물을 수치로 환원하려는 충동의 위험을 인식하면서도 저자는 숫자를 통해 오히려 인간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한다. 고통과 선택, 위험과 책임이 교차하는 현실에서 필요한 것은 냉혹한 효율이 아니라 근거를 갖춘 숙고와 겸손한 판단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데이터 활용법을 안내하는 실용서이자 현대 사회에서 이성이 어떤 방향을 향해야 하는 지를 묻고 있어 더 읽을 만한 가치가 있다. 직관의 유혹에서 한 발 물러나 숫자와 함께 생각하는 법을 익힐 때 우리는 비로소 복잡한 세계를 더 정확하고도 인간적으로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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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난 것은 돌아오지 않는다
줄리언 반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다산책방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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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리언 반스의 마지막 소설이라고 해서 읽게 된 책이다. 이 책은 줄리언 반스가 스스로 자신의 마지막 소설임을 밝힌 작품이다. 40여 년간 영국 현대문학을 이끌어 온 저자가 더 이상 다음 작품을 예고하지 않은 채 내놓은 이 소설은 신작이라는 범주를 넘어 하나의 문학적 정리로 읽혀서 더 오랫동안 이 책을 잡고 있었다. 책은 2026년 1월 22일, 영국과 미국, 한국을 포함한 16개국에서 동시에 출간되며, 저자의 여든 번째 생일 직후라는 시점 또한 이 책이 지닌 상징성을 분명히 하는 듯하다. 출간을 앞두고 영국에서 예정된 이언 매큐언과의 대담 역시, 이 책을 단순한 발표가 아닌 문학적 사건으로 부각시키고자 하는 듯하다.

그렇다고 이 소설에서 저자는 자신의 문학 세계를 정리하거나 업적을 회고하지 않는다. 대신 사랑과 상실, 역사와 진실, 기억의 불확실성이라는 그가 평생 담아온 온 주제들을 다시 호출하며, 삶의 끝에서 정체성을 어떻게 사유할 수 있는 지를 이야기하며 더 깊은 여운과 울림을 남긴다.


소설의 시작은 화자는 여러 의학적 사례를 계기로, 기억이 무엇이며 인간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 지에 대해 집중적으로 이야기한다. 이 때 기억은 단순한 회상이 아니라 현재의 인식과 자아를 구성하는 핵심 요소로 제시된다. 화자는 우리가 기억을 반복해 말하고 정리하는 과정에서 그것이 점차 변형되고 미화된다는 점을 짚으며, 만약 뇌가 경험을 왜곡 없이 그대로 재생한다면 우리가 믿어온 자기 서사는 쉽게 흔들릴 수 있다고 말한다. 이때 기억은 위로나 추억의 영역이 아니라 정체성을 교정하고 때로는 위협하는 힘으로 작동한다.

이어 화자는 기억과 도덕의 문제로 사고를 확장한다. 뇌 속에 먹은 음식이나 사소한 경험 뿐 아니라, 말했거나 말하지 못했던 고백, 거짓말과 위선, 잔혹함과 회피의 순간들까지 시간 순서로 저장되어 있다면 인간은 결국 자신의 삶을 스스로 심문하게 될 것이라고 상상한다. 기억은 선택적으로 불러오는 회상이 아니라 책임과 판단을 되돌려주는 기록 장치에 가깝다. 이러한 논의의 흐름 속에서 화자는 이 단계에서 언급할 두 가지를 분명히 하며 시선을 집중시킨다. 하나는 이야기, 혹은 이야기 속의 이야기가 나오겠지만 아직은 아니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 책이 자신의 마지막 소설이 될 것이다. 이는 지금까지의 사유가 본격적인 서사가 아니라 이후에 펼쳐질 이야기를 위한 사전 정리임을 밝히는 동시에 왜 이 책이 기억이라는 주제에 이토록 집착하여 이야기 하는 지를 드러내는 장치로 기능하는 듯하다. 특히 소설 한가운데서 마지막 작품임을 직접 선언하는 방식은 이례적이며 그 자체로 독자의 주의를 환기시킨다. 이후 과연 이후 진행될 이야기는 도대체 어떤 내용인지, 그리고 왜 저자는 이렇게 서두부터 이 책이 자신의 마지막 책이라 밝히고 있는지 자연스럽게 궁금해진다.


그리고 이어지는 2장은 이야기의 시작을 담고 있다. 화자는 앞으로 전개될 이야기가 하나의 연속된 서사가 아니라 긴 공백을 사이에 둔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밝힌다. 전반부는 오래된 기억과 사진 몇 장에 의존해 재구성된 이야기이고, 후반부는 이미 작가가 된 이후 수첩과 일기 같은 동시 기록에 기대어 서술된 이야기라는 거다. 그러나 화자는 기록이 기억보다 더 신뢰할 만하다는 통념을 곧바로 부정한다. 기록 역시 기억하게 된 것을 적은 결과이며 나중에 글로 쓸 가능성을 염두에 둔 선택의 산물이기 때문에 또 다른 형태의 왜곡과 누락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이야기는 실화이지만 기록과 기억 모두 완전하지 않다는 단서를 달고 출발한다.

이어 화자는 두 중심인물의 이름을 바꿨음을 밝히고 자신이 작가임에도 사람들이 삶의 이야기를 털어놓는 이유를 설명한다. 삶이 곧바로 픽션이 되는 것은 아니며 시간이 지나 천천히 썩어 퇴비가 되는 과정을 거쳐야 비로소 이야기로 변환된다는 거다. 그는 배경 설명을 최소한으로 줄이겠다고 선언하며 이야기의 핵심만 남기겠다는 태도를 분명히 하여 자꾸만 그의 이야기에 집중시킨다. 그리고 이 이야기에는 결정적인 공백이 존재하는데 그건 바로 화자가 두 인물을 모두 만나지 못한 수십년의 시간이다. 그 중간의 사건들은 전적으로 당사자들의 개략적인 기억에 의존할 수밖에 없고, 결국 이 이야기 역시 결함 있는 기억 위에 세워진 구조임이 드러난다. 이를 위해 앞선 책의 시작에 기억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부분이라 자꾸만 화자의 이야기들에 설득당하며 빠져드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또한 화자는 세 사람이 옥스퍼드에서 만났던 시절과 자신의 학부 과정, 전공 변경과 좌절을 간략히 서술하며 이 모든 것이 스티븐과 진이 서로를 만나게 된 계기였음을 밝힌다.

이처럼 2장은 그가 이 책에서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에, 이 서사가 어떤 조건과 한계 속에서 전개되는 지를 먼저 제시하고 있다. 특히 화자가 반복해서 강조하는 것은 이 이야기가 꾸며낸 픽션이 아니라 실화라는 점이다. 소설의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실제 있었던 인물과 사건을 바탕으로 하며, 다만 기억과 기록의 불완전성 때문에 완전한 재현은 불가능하다는 태도를 유지한다. 이로 인해 독자는 이 작품을 허구로 읽기보다 저자가 직접 겪고 오래 품어온 경험을 조심스럽게 꺼내놓는 고백처럼 받아들이게 된다. 게다가 저자의 마지막 책이라고까지 말하니 자연스레 그 이야기들에 집중할 수 밖에 없지 않은가.


이후 전개되는 세 사람의 이야기는 극적이면서도 동시에 지극히 일상적인 삶의 궤적을 따르고 있다. 오랜 시간 각자의 삶을 살아온 끝에 40년이라는 공백을 지나 다시 재회하고 결국 결혼에 이르는 스티븐과 진, 그리고 그들 곁에서 두 사람의 이야기를 가장 가까이에서 듣고 지켜보는 화자가 중심에 놓인다. 이들의 관계는 특별한 사건의 연속이라기보다 중년과 노년의 삶에서 누구나 겪을 법한 너무나 일상적인 이야기라 더욱 공감이 되어진다. 화자는 두 사람 사이에서 오가는 불안과 불만, 지나온 시간에 대한 해석을 묵묵히 받아들이는 위치에 머물며 한 커플의 삶이 다시 이어지고 마무리되는 과정을 끝까지 함께한다.

그리고 이야기는 점차 떠남과 도착이라는 이야기로 수렴된다. 우리는 일상적으로 출발과 도착, 귀환이라는 질서를 전제로 살아가지만 삶 전체를 놓고 보면 도착이 먼저 주어지고 떠남은 마지막에 온다. 그리고 그 떠남은 더 이상 새로운 도착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소설은 임종을 앞둔 사람들의 마지막 말, 의료 현장에서 사용되는 완곡한 언어들, 죽음을 둘러싼 표현의 변화들을 차분히 나열하며, 삶의 끝이 어떻게 말해지고 받아들여지는 지를 보여주고 있어 마지막에 다다를 수록 자꾸만 먹먹해진다. 화자가 마지막까지 지켜보는 과정은 특정 인물의 비극을 강조하기보다 결국 우리 모두가 맞닥뜨리게 될 삶의 마무리를 담담히 응시하게 만든다.

책에서 줄리언 반스는 그 어느 때보다 삶의 유한성을 분명하게 의식하고 있는 듯하다. 죽음을 앞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절박함과 동시에, 그것을 과장하지 않고 비틀어 바라보는 유머가 책 전반에 기조를 이루고 있다. 저자는 마지막을 앞둔 작가로서 사물과 사람, 그리고 자기 자신을 이전보다 한 발 물러선 위치에서 관찰하며 그 거리에서 생겨나는 아이러니와 통찰을 놓치지 않는다. 그 결과 이 소설은 무거운 주제를 다루면서도 지나치게 비장해지지 않고 오히려 날카로운 재치와 절제된 웃음을 유지한다.

그래서 이 책은 저자의 다른 작품들에 비해 한층 가볍게 읽히면서도 읽고 난 뒤에는 오래 남는다. 웃음과 씁쓸함, 명료한 문장과 깊은 성찰이 자연스럽게 공존하며 저자가 평생 탐구해 온 기억과 정체성, 삶의 끝에 대한 질문들이 가장 정제된 형태로 제시된다. 책을 덮고 나면 제목이 지닌 의미가 뒤늦게 실감이 나게 만들며 오랫동안 마음에 두고두고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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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를 만드는 커다란 귀 - 나의 경청 이야기 마음이 자라는 사회성 그림책
허은미 지음, 소복이 그림 / 다봄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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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과 표지 그림에 끌려서 읽게 된 책이다. 이 책은 말을 잘하는 아이 보다 잘 들어주는 아이가 어떻게 관계를 만들어 가는 지를 중심에 두고 이야기하는 사회성 그림책이다. 스마트 기기에 익숙해질수록 또래의 목소리에는 둔감해지기 쉬운 오늘의 아이들을 배경으로 이 책은 사회성의 출발점을 경청이라는 구체적인 능력에 놓고 있다. 말하기 기술이나 규칙을 가르치기보다 상대의 이야기를 끝까지 듣는 태도가 관계에 어떤 변화를 만들어 내는 지를 이야기로 보려주기에 더욱 공감이 간다.

그리고 책은 내 말부터 하고 싶어 하던 아이가 커다란 귀를 얻게 되면서 말의 내용뿐 아니라 그 뒤에 숨은 감정과 마음을 듣게 되는 과정을 따라가고 있다. 이 변화는 단번에 이상적인 관계로 이어지지 않고, 혼란과 시행착오를 거치며 점진적으로 드러나고 있어 더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게다가 허은미 작가님의 서사는 경청을 도덕적 훈계가 아닌 경험의 축적으로 제시하고, 소복이 작가님의 그림은 표정과 색감의 미묘한 변화를 통해 듣는 태도의 차이를 시각적으로 전달하여 더욱 이야기에 빠져들게 만든다. 그렇게 이 책은 사회성을 추상적으로 설명하기보다 관계가 실제로 어떻게 열리고 유지되는 지를 세밀하게 보여 줌으로써 읽는 이로 하여금 듣는다는 것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이야기는 바로 지금 우리 아이들의 모습을 닮은 주인공의 일상에서 출발한다. 주인공 ‘나’는 듣기 싫은 말이 들리면 귀가 저절로 접히는 특별한 능력을 가진 아이다. 이 능력 덕분에 아이는 엄마와 아빠의 말은 귓등으로 흘려버리고, 선생님의 말씀은 제대로 들리지 않으며 친구들의 이야기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데 익숙해져 있다. 듣지 않는 것이 습관이 된 아이의 모습은 주변의 말이 넘쳐나는 환경 속에서 자기 말에만 집중하는 오늘날 아이들의 모습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한다.

그 날도 평소와 다르지 않게 부모의 잔소리를 피해 귀를 접은 채 집을 나서던 아이는 뜻밖에 이상한 마녀와 마주친다. 마녀는 아이에게 말을 걸고 질문을 던지지만 귀가 접힌 상태의 아이에게 그 목소리는 닿지 않는다. 그렇다면 마녀는 아이에게 뭐라고 말했을까? 그리고 이상한 마녀의 정체는 과연 무엇일까?


아이는 그날 이후 자연스럽게 마녀를 관찰하게 된다. 마녀의 집 앞에는 “뭐든지 들어 드립니다. 누구나 들어 드립니다. 언제나 들어 드립니다. 방문 및 견학 환영합니다.”라고 적힌 간판이 걸려 있고, 하루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드나든다. 아이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사람들이 마녀의 집에 들어갈 때와 나올 때의 모습이 서로 다르다는 점이다. 들어갈 때는 표정이 굳어 있거나 어딘가 답답해 보이던 사람들이 나올 때는 한결 가벼워진 얼굴로 돌아간다.

그 변화가 궁금해진 아이는 마녀가 무엇을 하는지, 어떤 태도로 사람들을 대하는 지를 유심히 지켜보기 시작한다. 마녀는 크게 말하지도 조언을 늘어놓지도 않는다. 대신 상대의 말을 끊지 않고 끝까지 듣고, 고개를 끄덕이며 반응한다. 아이는 마녀가 무언가를 해주는 것이 아니라 들어주는 것 만으로 사람들을 바꾸고 있다는 사실을 조금씩 깨닫게 되는 것이다.


드디어 엄마의 심부름으로 옆집에 가게 된 아이는 마녀가 건넨 차를 마신 뒤, 자신도 모르게 마음속 이야기를 꺼내 놓는다. “저는 친구가 없어요.” 이 말은 특별한 설명도 없이 툭 튀어나오지만 그만큼 오래 눌러 두었던 고백이기도 하다. 그리고 마녀에게 털어놓은 이 쓸쓸한 고백은 소통에 서툴러 외로움을 느끼는 많은 아이들의 속마음과 겹쳐서 울컥해졌다.흔히 말을 잘하고 자기 표현이 뛰어나야 친구가 많을 것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이 책은 관계의 깊이가 결국 다정하게 들어 주는 태도에서 비롯된다는 점을 짚고 있어서 참 인상적이다. 판단 없이 이야기를 들어 주는 사람 앞에서 아이는 비로소 존중받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고 안전하다는 확신을 얻고 마음을 열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과연 이후 아이에게는 어떤 변화가 찾아올지는 너무나 궁금하게 된다. 다른 사람의 말을 듣는 것만으로 아이가 얻게 되는 변화가 궁금하신 분들은 책을 통해 확인해 보길 추천해본다. ^^


책은 끝까지 ‘경청’이라는 태도에 집중하고 있다. 마녀의 조언을 통해 아이는 친구의 눈을 바라보고,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끊지 않고 끝까지 듣는 방법을 차분히 배워 간다. 이는 막연한 마음가짐이 아니라 실제로 관계 속에서 실천할 수 있는 구체적인 행동으로 제시된다. 그 변화는 극적이지 않지만 분명하고, 아이가 경청의 즐거움을 알게 되자 관계는 자연스럽게 확장된다. 친구들이 곁에 머무는 이유도, 특별한 말솜씨가 아니라 다정하게 들어 주는 태도에 있음을 이야기로 보여 주어 더욱 공감이 가며 현실적이다.

그리고 이 책이 전하는 메시지는 단지 아이에게만 머물지 않는다는 생각이 든다. 디지털로 끊임없이 연결된 듯 보이지만 정작 서로의 마음에는 귀 기울이지 못하는 오늘의 환경 속에서 듣기가 관계의 출발점이라는 사실을 이 책을 통해 다시 확인하게 된다. 가정과 교실에서 반복되는 갈등 역시, 대부분은 제대로 듣지 못한 순간에서 비롯된다는 점을 다시근 깨달아 본다. 책은 어른인 우리에게도 아이에게 잘 들어라고 말하기보다 함께 눈을 맞추고 귀 기울이는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 먼저임을 깨닫게 만든다. 그렇기에 이 책은 관계를 가르치려 들기보다 관계가 자라나는 과정을 보여 주는 그림책으로, 아이와 어른 모두에게 마음을 여는 가장 기본적인 방법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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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와 함께한 진균의 역사 - 곰팡이, 버섯, 효모가 들려주는 공생의 과학
니컬러스 P. 머니 지음, 김은영 옮김, 조정남 감수 / 세종(세종서적)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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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균의 역사가 궁금해서 읽게 된 책이다. 표지 아랫부분에 있는 '곰팡이 없이 인류는 생존할 수 없다!'라는 기존의 많은 사람들의 생각에 반하는 문장은 책에 대한 궁금증을 더욱 야기시킨다. 이 책은 곰팡이를 단순한 부패나 질병의 원인으로 바라보는 기존의 시선을 넘어 진균이 인류의 생존과 문명 형성에 얼마나 깊이 관여해 왔는 지를 과학적·역사적 맥락에서 풀어내고 있다. 인류보다 오래된 생명체인 진균은 생태계의 분해자이자 순환의 축으로서, 의학과 식문화, 종교와 사회 제도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삶 전반에 흔적을 남겨 왔다.

저자 니컬러스 P. 머니는 세계적인 균류학자로서 효모와 곰팡이, 버섯이 인간의 호흡계, 면역계, 소화계, 신경계와 맺는 관계를 구체적인 연구 사례를 통해 설명하고 있다. 장내 생태계의 핵심 요소인 마이코바이옴과 항생제와 면역억제제 개발에 기여한 진균 연구의 역사, 발효 식문화와 정신의학적 논의까지 폭넓게 다루며 그동안 의학과 생명과학의 주변부에 머물러 있던 진균 연구의 의미를 재조명하여 더욱 흥미롭고 인상적이다.

책은 제일 먼저 1장에서 저자의 개인적 경험(곰팡이 포자로 유발된 심각한 천식 발작)에서 출발하여 그것이 인간과 진균의 공생관계로 확장하여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다. 어린 시절 거의 죽음에 이르렀던 사건은 트라우마로 남았지만, 동시에 저자를 균류학자로 이끌었고, 훗날 치료 과정에서 위대한 분해자(진균)와 죽음 집착이 연결될 수 있지 않느냐는 질문을 통해 인간과 진균 관계를 더 넓은 관점에서 바라보게 한다. 즉, 진균은 공포의 원인이면서도 연구와 이해의 대상으로 다시 돌아오는 존재로 제시되며 독자들의 시선 역시 여태껏 가졌던 것과는 다른 시선으로 유도한다.

1장에서 말하는 인간과 진균의 공생관계에서의 핵심은 가깝지만 보이지 않는 동거라는 거다. 진균은 피부, 두피, 구강, 호흡기, 소화관, 생식기 등 인체 거의 모든 부위에 존재하며, 박테리아·바이러스와 함께 인체 미생물 군집(마이크로바이옴)을 이루는데, 그중 진균의 영역이 마이코바이옴이다. 대부분은 숙주에게 이익이 되는 방식으로 균형을 이루지만, 면역이 약해지면 기회감염을 일으켜 무좀 같은 흔한 증상부터 생명을 위협하는 감염까지 이어질 수 있다. 그래서 저자는 공생을 무조건 선한 협력이 아니라, 이익과 위험이 함께 공존하는 기브 앤 테이크 관계로 정의하며, 인체 면역체계가 이 균형을 관리하는 조절자임을 강조한다. 그리고 인간과 진균의 공생은 단지 출생 이후만의 이야기은 아니다. 태변 분석 등을 근거로 진균과의 만남이 출생 이전부터 시작될 수 있으며, 출산 방식(질 분만/제왕절개), 모유 수유 여부, 생활환경과 식습관 변화는 아기의 초기 미생물 정착에 영향을 준다. 더 나아가 인류의 농경 정착, 저장 곡물과 도시화는 진균 노출 양상을 바꾸며 천식과 피부질환 같은 문제를 역사적으로 확대하기도 했고, 반대로 발효(빵, 맥주, 와인, 치즈), 의약(항생제, 면역억제제, 생명공학 생산물), 정신의학(환각버섯 연구)처럼 인간이 진균을 의식적으로 활용하는 공생의 방식도 커져 왔다. 마지막에는 죽음 이후의 분해 과정까지 포함하여 인간이 생태계의 영양 순환 속에서 결국 진균의 작동에 기대어 존재한다는 결론으로 나아간다.

이런 흐름은 앞서 말한 '곰팡이 없이 인류는 생존할 수 없다'를 생물학적으로 구체화한다. 1장이 보여주는 인간과 진균 공생은 특별한 사건이 아니라, 자궁에서 무덤까지 이어지는 상시적 상호작용이며, 그 핵심은 균형인 점이 아주 흥미롭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진균은 우리의 몸을 황무지로 만들지 않게 지탱하는 파트너이지만, 조건이 바뀌면 즉시 위협으로 전환될 수 있다. 결국 저자는 공생을 좋게만 포장하지 않고, 면역, 환경, 문화가 맞물린 현실적인 관계로 제시하며 지금이야말로 이 내밀한 동거의 규칙을 과학적으로 알아야 함을 강조하여 다음으로 올 내용들을 더욱 궁금하게 만든다.


책의 2부에서는 인간의 몸을 벗어나 환경과 문화 속으로 확장된 진균과의 공생을 본격적으로 다루고 있다. 특히 인상적인 대목은 신석기시대 암각화에 등장하는 버섯을 통해 인류가 아주 이른 시기부터 진균을 단순한 식재료가 아니라 치료와 의례, 기억과 의식의 변화에 관여하는 존재로 인식해 왔음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약과 마법의 경계가 분명하지 않았던 시대부터 버섯은 치유의 도구이자 초월적 경험의 매개로 기능해 왔고, 이러한 인식은 오늘날까지도 약용버섯과 기능성 식품 담론의 밑바탕을 이룬다. 더불어 기억과 인지 기능 회복 가능성으로 주목받는 노루궁뎅이버섯 사례는 신경세포 성장과 면역 반응을 둘러싼 실험 결과와 상업적 과장이 어떻게 엇갈리는지를 보여주며 특히 흥미롭게 다가온다.

이와 함께 2부는 야생버섯과 재배버섯이 형성한 식문화에서 출발하여 마이코프로틴 기반 대체육처럼 식품산업에 활기를 불어넣는 현대적 활용으로 시야를 넓힌다. 전통 의학과 유전자변형균을 활용한 현대 의약품 생산, 과학적 근거가 충분하지 않은 버섯 추출물 마케팅과 독성 버섯·곰팡이독의 위험성, 우울증과 정신 질환 치료에 활용되는 마법의 버섯 연구와 이를 종교의 기원과 연결하려는 논쟁까지 폭넓게 검토한다. 마지막으로 생태계에서 진균이 수행하는 분해자이자 순환자로서의 역할을 짚으며 진균과 인간의 관계가 개인의 건강을 넘어 문명과 자연의 차원으로 얼마나 멀리 확장될 수 있는 지를 보여주고 있다.

결국 이 책을 통해 인류와 함께한 진균의 역사가 도달하는 지점은 아주 명확하다. 인간은 자연의 주인이 아니라, 진균을 비롯한 수많은 미생물과 함께 구성된 하나의 생태계라는 사실이다. 진균은 때로는 질병과 공포의 이름으로, 때로는 약과 음식, 치료의 이름으로 등장하지만 그 모든 모습은 인간과의 관계 속에서 형성된 결과이다. 저자는 진균을 선하거나 악한 존재로 단순화하지 않고, 조건과 맥락에 따라 끊임없이 역할을 바꾸는 동반자로 그려낸다. 이 시선은 인간 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나 생명을 관계망 속에서 이해하도록 이끈다.

이 책의 매력은 진균을 둘러싼 과학적 사실을 나열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지식이 우리의 삶과 선택을 어떻게 바꿀 수 있는 지까지 질문하게 한다는 것이다. 진균을 완전히 제거하려는 강박이 오히려 건강을 해칠 수 있으며 공존의 균형이 무너질 때 문제가 발생한다는 논지는 현대 위생 관념과 의료 시스템을 다시 돌아보게 만든다. 동시에 약용버섯과 환각버섯을 둘러싼 과장과 희망을 비판적으로 검토함으로써 과학적 근거에 기반한 태도의 중요성도 분명하게 만든다.

그렇기에 이 책은 우리에게 곰팡이를 혐오의 대상에서 이해의 대상으로 새로이 바라보게 만든다. 보이지 않는 생명체가 인간의 몸과 문화, 환경을 어떻게 빚어왔는 지를 따라가다 보면 생명이란 독립된 개체가 아니라 끊임없는 상호작용의 결과임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된다. 결국 책은 곰팡이에 관한 이야기를 넘어 인간이 자연과 어떤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야 하는 지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로 이끌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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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마음 청진기
김보라 지음 / 창비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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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 그림과 제목에 끌려서 일게 된 책이다. 이 책은 엉뚱하고 발랄한 상상력으로 어린이의 일상을 그려 온 김보라 작가의 두 번째 그림책이다. 전작 <조용희 청소기>에 이어 같은 주인공 조용희의 또 다른 하루를 담은 이 작품은 유쾌한 발명과 사건을 통해 타인의 마음을 이해하는 과정을 담아내고 있다. 책은 만들기를 좋아하는 여덟 살 아이의 시선을 따라가며 배려와 공감이 어떻게 행동으로 이어지는 지를 자연스럽게 드러내고 있다.

이야기는 반려견 돌돌이의 달라진 모습에 눈길을 주는 용희의 세심한 관찰에서 출발한다. 예전처럼 활기차지 않은 돌돌이를 위해 이것저것 시도해 보지만 상황은 쉽게 나아지지 않는다. 답을 찾지 못한 채 고민하던 용희는 상대를 바꾸려 하기보다 마음을 먼저 이해해 보려는 쪽을 택한다. 그렇게 등장한 속마음 청진기는 문제 해결의 도구라기보다 보이지 않는 감정에 다가가기 위한 상징적 매개로 작용하며 이야기의 방향을 이끈다.


이야기는 갑자기 축 늘어진 돌돌이의 모습을 마주한 용희가 단순히 기운을 북돋우는 데서 그치지 않고 왜 그런 상태가 되었는 지를 알아보겠다고 마음먹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평소와 다른 반려견의 태도를 가볍게 넘기지 않고 그 변화의 이유를 찾으려는 용희의 선택은 이 책이 문제를 서둘러 해결하는 이야기보다 상대의 마음을 이해하려는 과정에 초점을 맞추며 전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축 처진 돌돌이의 모습을 바라보며 용희의 걱정은 점점 커져가고 돌돌이를 다시 웃게 해 주고 싶다는 마음으로 장난감도 내밀고 간식도 챙겨 보지만 기대했던 반응은 돌아오지 않는다. 무엇이 문제인지 알 수 없다는 답답함 속에서 용희는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방법을 떠올린다. 바로 돌돌이의 마음을 직접 들어 보기 위한 속마음 청진기를 만드는 것이다. 상자와 끈을 잇고 상상력을 더해 완성한 청진기를 손에 쥔 순간 용희의 얼굴에는 해냈다는 기쁨이 또렷이 번진다. 이 장면은 문제를 해결하려는 아이의 진지한 태도와 그 과정에서 느끼는 성취감을 담담하면서도 따뜻하게 보여 주며 이야기에 활기를 더한다.


직접 만든 속마음 청진기를 통해 용희는 반려견 돌돌이가 기운을 잃게 된 이유가 소중히 아끼던 애착 인형과 깊이 관련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인형의 행방을 좇아 나선 길에서 용희와 돌돌이는 여러 동물 친구들을 만나고 그 과정에서 인형을 둘러싼 예상치 못한 사연과 마주하게 된다. 이야기는 단순히 잃어버린 물건을 찾는 데서 그치지 않고 누군가의 마음을 이해해야만 다음으로 나아갈 수 있는 상황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이후 전개는 선택의 순간들을 통해 공감의 의미를 더욱 또렷하게 드러낸다. 용희는 눈앞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보다 상대의 처지를 먼저 헤아리는 방향으로 한 발짝 물러서며 주변의 동물 친구들과 다시 힘을 모으게 된다. 과연 이 과정 끝에서 인형은 어떻게 될지, 그리고 용희와 돌돌이가 마주한 선택은 어떤 변화를 가져올지 그 결말은 이 책을 통해 직접 확인해 보기를 권하고 싶다.

이처럼 이 책은 특별한 교훈을 앞세우기보다 어린이의 일상적인 선택과 시선을 따라가며 공감이 어떻게 만들어지는 지를 차분하게 보여 주고 있다. 용희의 행동은 언제나 완벽하지 않지만 그 과정에서 드러나는 고민과 망설임이 오히려 이야기를 현실에 가깝게 만든다. 덕분에 독자는 누군가를 이해하려는 마음이 거창한 결심이 아니 작은 관심과 질문에서 시작된다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된다.

이 책은 어린이에게는 타인의 마음을 살피는 연습의 기회를, 어른에게는 아이가 이미 지니고 있는 감정의 깊이를 다시 바라보게 만든다. 그렇게 이 책을 통해 우리는 누군가의 마음에 귀 기울이는 태도가 관계를 바꾸고 일상을 조금 더 단단하게 만들 수 있음을 깨닫게 된다. 결국 이 책은 공감과 배려가 자라는 순간을 따뜻하게 담은 이야기들로 아이와 어른이 함께 읽고 이야기를 나누기에 충분한 여운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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