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도시문헌학자 김시덕의 강남 - 우리는 왜 강남에 주목하는가
김시덕 지음 / 인플루엔셜(주) / 2025년 5월
평점 :
'인문학자의 시선으로 살핀 강남, 그 땅과 사람의 이야기'라는 띠지 속 문구에 이끌려 이 책을 집어 들었다. 강남 스타일이라는 노래가 세계적인 인기를 얻을 만큼 왜 이토록 많은 한국인들이 강남에 열망을 품게 되었는지 궁금했다. 그리고 그 이유가 단지 집값과 학군만의 문제는 아닌 것 같았다. 이 책은 그런 질문에 인문학자의 시선으로 다가가며 우리가 미쳐 보지 못했던 강남의 진짜 얼굴에 조명한다.
이 책은 인문학자의 발걸음을 따라 강남이라는 세계에 한 발짝 더 깊이 들어가고 있다. 저자는 강남 3구 곳곳에서 살아본 경험은 물론, 두 발로 누빈 답사 현장과 새롭게 발굴한 문헌 자료들을 바탕으로, 강남이라는 공간의 실체를 치밀하게 복원해내었다. 철거민부터 수십억 원대 자산가에 이르기까지, 강남을 살아가는 다양한 사람들의 이아기를 통해 '강남 사람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답하고 난개발의 흔적 속에서 어떻게 경제적 성공을 거두었는지 강남적 삶의 양식이 현대 한국인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담고 있다.
그리고 이 책은 '살고 싶은 강남'과 '사고 싶은 강남' 사이의 간극을 짚고 앞으로 강남이 한국 사회에 어떠한 변화를 가져올지를 예리하게 탐색하고 있다. 인문적, 경제적 관점을 넘나드는 다양한 접근을 통해 강남이라는 공간이 지닌 실체와 상징을 보다 깊숙이 이해하게 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강남은 굉장히 역동적인 공간이다. 사람들은 바로 이 역동성에 매료되었고, 또 그렇게 매료된 사람들이 지금의 강남을 만들어왔다. 정부와 서울시가 강남 개발의 신호탄을 쏘긴 했지만, 그들이 주도권을 쥐고 있을 때보다 오히려 관심이 식은 이후, 더 많은 사람들이 강남으로 몰려들었다. 어떤 사람들은 그 틈에서 밀려났고, 또 어떤 사람들은 살아남아 자리를 잡았다. 지금도 똑같은 일이 반복되고 있다.
이 책은 바로 이 거대한 흐름을 인문학자의 시선으로 추적하고 있다. 강남은 단순히 많은 사람이 모여 사는 곳이 아니라, 한국 사회의 욕망과 갈등, 기회와 불균형이 가장 밀도 높게 응축된 장소다. 인구는 150만 명 남짓으로 전체의 3%에 불과하지만, GRDP, 문화 자산, 교육 인프라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상징적 존재감을 발휘한다. 그러나 저자는 이런 강남의 현재를 ‘성공한 계획’이 아닌, ‘실패한 계획의 산물’로 본다. 대통령도, 서울시장도 예상하지 못했던 파급 효과가 오늘날의 강남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예컨대, 오늘날 상징이 된 한강변 고급 아파트 단지들은 본래 안보 목적의 ‘방벽’으로 계획된 곳이었다. 하지만 정부의 시선이 남하한 순간, 민간의 열망이 그 자리를 파고들었고, 그 열기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정부의 영향력이 약해질수록 민간의 열정은 강해졌다는 역설이 강남을 설명하는 핵심이다.
책은 강남 60년의 개발 연대기를 따라가며, 화려한 스카이라인 뒤에 숨은 수많은 맥락을 날카롭게 파헤친다. 철거민부터 자산가, 도시계획부터 문화 현상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층위를 아우르며, 강남이라는 공간이 걸어온 길과 앞으로 나아갈 길을 조망한다. 부동산, 교육, 삶의 질 등 어떤 이유로든 강남을 이해하고 싶은 이들에게 이 책은 단순한 해설을 넘어선 통찰의 안내서가 될 것이다.
이 책이 가진 가장 큰 가치는 부동산이나 투자, 교육이라는 일반적인 관심을 넘어서 ‘기록되지 않았던 사람들의 삶’에 초점을 맞춘다는 데 있다. 말죽거리 신화나 고급 아파트의 성공담 뒤에는 평생 가난하게 살다 한강 나룻배 전복 사고로 목숨을 잃은 김복근 씨와 같은 이들의 삶이 있었음을 나는 이 책을 통해 알았다. 그들의 얼굴은 당시 신문에 실렸지만, 사회는 그 기록을 외면했고, 역사는 그들을 기억하지 않았다. 저자는 이런 잊힌 삶들을 복원하기 위해 20년 넘게 20세기 중기의 신문을 뒤적이며, 벼락부자가 아닌 평범한 강남 사람들의 이야기를 찾아왔고 그 이야기들을 이 책에 담았다. 그렇기에 저자는 그들의 삶은 ‘기록되지 않은’ 것이 아니라, ‘관심을 받지 못한’ 것일 뿐이라고 말한다. 이 책을 통해 저자는 인문학자로서 그 기록을 다시 꺼내어 강남의 진짜 역사를 되짚고 소개하고 있다. 바로 이러한 시선이 이 책이 가진 깊이이며, 강남이라는 공간을 단순한 상징이 아닌 실체로 이해하게 만드는 핵심이라 하겠다.
책의 1부는 이 같은 시선을 바탕으로, ‘강남 이전의 강남’을 다룬다. 1963년, 서울로 편입되기 전의 강남은 수많은 농민들이 채소와 화훼를 가꾸고 돼지를 키우던 저습지였다. 그 땅은 지금과는 달리 물난리를 피하기 위해 언덕에 마을이 들어섰고, 초기 단독주택도 그러한 입지를 따랐다. 하지만 대규모 아파트와 도로, 지하철이 평지에 들어서며 강남은 자연재해에 취약한 도시로 바뀌었다. 실제로 2022년에는 강남구 일대가 침수되며 큰 인명 피해가 발생했고, 최근에는 강남 4구 지반 아래 빈 공간이 가장 많은 곳으로 지목되기도 했다.
저자는 이러한 농촌 강남의 과거를 흘러간 것으로만 여겨선 안 된다고 강조한다. 우리가 그 시절의 흔적을 어떻게 기억하고 해석하느냐에 따라 오늘날 강남에서의 삶 역시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바로 그런 맥락에서 화려한 외양 뒤에 감춰진 도시의 층위를 발굴하고 해석하고 있다. 강남을 단지 ‘부동산 성공 신화’가 아닌, 수많은 사람들의 고단한 삶과 잊힌 흔적이 중첩된 공간으로 그려내었기에 이 책이 말하는 강남의 의미는 더욱 깊이가 있다고 본다.
그리고 이 책은 강남 개발의 기원을 단순한 도시 확장이나 부동산 정책이 아닌, 안보라는 근본적 요인에서 찾는다. 서울 시민들이 강북을 떠나 강남으로 이동한 배경에는 또다시 전쟁이 일어났을 때 생존 가능성이 높은 곳을 찾고자 했던 집단적 불안이 자리하고 있었다. 저자는 이를 이해하지 못하면 강남의 과거는 물론 현재와 미래를 올바로 해석할 수 없다고 강조한다.
〈2장 첫 삽을 뜨다〉에서는 1968년 시작된 영동지구(서초·강남) 개발을 조명한다. 이는 단순한 신도시 건설이 아니라, 6·25 전쟁 재발에 대비한 인구 분산과 군사적 대응 계획의 일환이었다. 실제로 당시 한강변 아파트 단지에는 벙커와 총안이 설치되었고, 그린벨트는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지도에 선을 그으며 지정한 것이었다. 그러나 1970년대 들어 미국의 베트남전 철수와 함께 정부 계획은 흐지부지되었고, 그 틈을 민간이 메우며 재벌, 농민, 철거민 등 다양한 주체들이 각자의 열망을 안고 개발에 뛰어들었다. 이 과정에서 정부의 개입이 오히려 집값 상승을 부추겼고, 이는 곧 강남 불패 신화의 시작이 되었다.
〈2부 강남의 탄생〉은 잠실지구(송파구) 개발을 통해 또 다른 강남의 얼굴을 보여준다. 원래 강북의 섬이었던 잠실도는 서울과 경기도를 잇는 지리적 중심지로 재편되었고, 1980년대 올림픽·아시안게임 개최로 세계인의 이목을 끌며 국제적 도시로 탈바꿈했다. 오늘날 송파구가 수도권과 충청권을 연결하는 반도체·물류 벨트의 허브가 된 배경이다. 또한 최근에는 박원순 시장 시절 도입되었던 35층 층고 제한이 해제되며, 여의도·강남 일대의 재건축 아파트들이 고층화되고 있다. 이에 따라 국방부가 대공 진지 설치를 요구하는 일이 벌어졌는데, 이는 여전히 강남이 군사 전략적 공간으로 간주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저자는 이를 통해 “말죽거리 신화 뒤에 안보 불안이 깔려 있었다”는 점을 재차 환기시키며, 강남의 본질을 오해할 경우 현재를 왜곡하고 미래도 그르칠 수 있다고 경고한다.
이처럼 강남의 과거는 현재와 단절된 기억이 아니라, 지금도 끊임없이 말을 걸어오는 살아 있는 역사다. 이 책은 강남 곳곳에 남은 삶의 흔적을 따라가며, 그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유기적으로 연결한다. 책의 후반부인 3부와 4부에서는 ‘아파트’, ‘산업’, ‘교통’을 중심으로 현대 강남의 구조와 흐름을 분석하고, 그 속에서 강남의 미래를 조망한다. 재건축에 대한 현실적 제약, 수해에 취약한 지형, 교통 중심의 도시 개발 등 다양한 이슈를 다루되, 단순한 기술적 논의에 머무르지 않는다. 강남이 보여주는 도시는 곧 한국 사회가 나아가는 방향을 보여주는 창이기 때문이다.
특히 저자가 주목하는 ‘강남적 삶의 양식’과 ‘확장 강남’이라는 개념은, 강남이라는 공간이 더 이상 지리적 경계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아파트+쇼핑몰+수변 공간’으로 요약되는 삶의 양식은 이미 전국 곳곳으로 확산되고 있으며, 반도체 벨트를 따라 강남의 영향력은 수도권을 넘어 국가적 차원으로 확대되고 있다. 이는 곧 ‘대서울권 시대’, 즉 강남을 중심으로 연결되는 하나의 거대한 도시권이 열리고 있다는 의미다.
결국 우리는 ‘강남의 한국화, 한국의 강남화’ 속에 살아가고 있다. 모두가 강남에 살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누구나 강남의 영향을 받고 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강남을 이해하는 일은 단지 한 도시를 아는 것을 넘어, 한국 사회 전체를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가 된다. 이 책은 그 여정을 함께할 수 있는 가장 믿을 만한 안내서라 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