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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기류
여실지 지음 / 텍스티(TXTY) / 2025년 5월
평점 :
'난기류'라는 제목에 끌려서 읽게 된 책이다. 비행기의 갑작스런 흔들림을 의미하는 '난기류'는 단순히 하늘 위의 현상을 이야기할 뿐만 아니라, 우리가 매일 겪는 사회와 일터의 불안정한 공기, 보이지 않는 압박과 긴장감을 상징하는 듯하다. 특히 직장 내 괴롭힘이라는 현실적인 문제를 항공사 승무원이라는 폐쇄된 공간, 위계 질서가 강한 조직 속에서 과연 어떻게 담아내었을 지에 대한 궁금증이 커졌다. 누구나 살면서 한번쯤은 경험했을 법한 고립감과 압박, 그리고 그 안에서 흔들리는 개인의 감정이 '난기류'라는 제목과 절묘하게 맞물린다는 생각이 들어 더욱 이 책의 이야기에 빠져들게 되었다.
이 책의 이야기는 한 여자의 죽음으로 시작된다. 공허한 인사와 무심한 시선 속에서, 누구에게도 제대로 주목받지 못한 채 옥상 끝에 선 여자의 마지막 순간이 담담하게 그려진다. 그녀가 세상을 떠나는 그 짧은 찰나, 하얀 블라우스 아래로 번지는 검붉은 핏자국, 그리고 일상적으로 펼쳐지는 현장의 정적은 시작부터 큰 충격을 안긴다. 시신을 둘러싼 노란 테이프와 이를 둘러싼 무심한 도시의 풍경, 아무렇지 않게 지나치는 행인들과 사무적으로 움직이는 공무원들의 모습은 이 사회에서 한 개인의 절망과 고통이 얼마나 쉽게 묻히고 잊혀지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이처럼 이 책은 시작부터 한 개인의 비극적인 선택을 통해 우리 사회의 냉담함과 무관심, 그리고 직장 내에서의 고립과 괴로움이 가져오는 파국을 극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하늘에 길게 흩어진 꼬리구름이 마치 지울 수 없는 상처처럼 남아 있는 것처럼, 이 소설이 던지는 질문과 여운 역시 쉽게 사라지지 않으며 이야기 속에 빠져들게 만든다.
본격적인 이야기는 이 책의 주인공 중 한 명인 이수연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한때는 승무원의 꿈을 이뤘지만, 코로나19는 그녀의 삶을 순식간에 뒤흔들었다. 오랜 준비 끝에 간신히 승무원이 된 지 2년 만에, 가온항공에서 대규모 정리 해고가 단행되었고, 이수연 역시 일터를 잃었다. 불황에 빠진 항공업계는 무기한 무급 휴직과 해고를 번갈아 내놓았고, 그 결과 그녀는 생계를 위해 카페 아르바이트를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일하는 카페에도 예전의 활기는 사라졌고, 드문드문 들르는 손님들 속에 알파에어 승무원이 찾아왔다. “회사 그만두고 카페 아르바이트나 할까?”라는 승무원의 무심한 한마디가 이수연의 마음을 복잡하게 뒤흔든다. 본인은 선택이라 말하지만, 이수연에게는 이미 선택의 여지가 없는 현실이었다. 게다가 거리에서 들려오는 알파에어 시위대의 목소리조차도, 더 이상 일할 곳조차 없는 이수연에게는 배부른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는다. 같은 하늘길을 걷던 동료였지만, 이제는 각자의 생존 앞에서 서로 다른 입장에 서게 된 현실이 씁쓸하게 다가온다.
이어서 또 한 명의 주인공, 박은하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일찍 출근한 박은하는 알파연대 사무실에서 남상진을 만나, 회사를 그만두겠다는 자신의 속마음을 조심스럽게 털어놓는다. 남상진은 그런 은하에게 사람들이 하는 말에 흔들리지 말라며, 누구보다 애써왔으니 그만두지 말라고 간절히 붙잡는다. 그러나 은하를 향한 주변의 시선은 이미 차갑게 굳어져 있었다. 그리고 남성진이 나가고 들어온 정영주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한 채, 박은하가 들고 있던 테이크아웃 컵을 후려친다. 커피와 얼음이 바닥에 쏟아지고, 유니폼에 커피가 튀면서 복도는 일순간 싸늘한 긴장감으로 가득 찬다. 정영주가 거칠게 자리를 떠나고, 동료들 역시 은하를 차갑게 외면한다. 순식간에 증오의 시선에 둘러싸인 박은하는 마치 땅 속으로 꺼지는 듯한 무거움을 느낀다. 유니폼에 번져가는 커피 얼룩처럼, 그녀의 마음에도 깊은 상처가 스며든다. 과연 정영주는 왜 박은하에게 그렇게 화가 났던 걸까? 이 장면은 독자로 하여금 박은하와 정영주, 그리고 그들을 둘러싼 관계와 갈등에 대해 더욱 깊이 파고들고 싶게 만들며 이야기 속에 빠져들게 한다.
이 책은 1부와 2부로 나뉘어, 각기 다른 주인공의 시점으로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1부는 박은하, 2부는 이수연의 이야기가 주를 이루며, 저자는 주요 등장인물별로 교차 서술을 활용해 사건을 다양한 시각에서 보여준다. 이처럼 다중 시점 스토리텔링을 통해 한 가지 사건을 각 인물의 입장에서 보다 깊고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다는 점이 이 소설의 가장 큰 특징이다. 그 결과 우리는 한 사건을 단순히 피해자와 가해자의 구도로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처한 입장과 감정의 결을 입체적으로 경험하게 되며 이야기에 더욱 몰입하게 된다.
이 책은 국내 1위 항공사 알파에어를 배경으로, 서로 다른 두 여성 승무원의 이야기를 1부와 2부로 나누어 전개하는데, 1부는 이수연이 입사하기 전 해당 자리의 선임이었던 박은하의 이야기다. 은하는 온화한 성격과 뛰어난 사회성, 그리고 회사 홍보 모델을 맡을 만큼의 외모를 지닌 인물로, 노조 대의원으로도 활동하고 있었다. 그러나 상부의 지시로 총무팀 업무를 지원하게 되면서 점차 동료들로부터 고립되기 시작한다. 의도치 않게 동료 승무원의 징계를 정당화하는 일에 연루되면서 은하를 향한 싸늘한 시선과 소외가 시작된다. 결국 징계 대상이었던 노조 선배가 회사 옥상에서 뛰어내리는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하고, 그 이후로 과중한 업무와 동료와의 불화, 일터에서의 괴롭힘이 점차 심해진다. 은하는 심한 죄책감과 스트레스에 시달리다 끝내 비행 중인 A380 항공기 내에서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된다.
특히 박은하의 이야기 중에서 인상적인 장면 중 하나는 실제로 기내에서 박은하가 난기류를 만나는 순간이다. 갑작스럽게 기체가 흔들리자 박은하의 손끝에서 종이컵이 미끄러지고, 바닥에 떨어진 컵에서 액체가 튀어오른다. 그 작은 실수에도 못마땅하다는 듯 한 남성의 굵은 한숨이 흘러나오고, 은하는 연신 “죄송합니다”를 반복하며 극도의 긴장감과 위축을 느낀다. 이어서 동료 오지영은 카트에 물품을 신경질적으로 내던지며, “놀러 왔어? 컵을 왜 떨어뜨려? 옷은 또 왜 그 모양이야?”라는 차가운 말로 은하를 몰아붙인다. 이 장면은 실제 ‘난기류’라는 물리적 현상과 은하가 겪는 심리적 ‘난기류’가 교차하며, 직장 내에서의 미묘한 괴롭힘과 고립의 공기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리고 한편, 꿈에 그리던 알파에어에 입사하게 된 이수연은 이미 비극적인 사건을 겪은 박은하가 속했던 팀에 합류하게 된다. 은하의 죽음 이후 보이지 않는 긴장감이 맴돌고, 팀원들 간의 관계 역시 불안정하게 변한다. 설명할 수 없는 묘한 유사성 때문에 팀원들은 수연에게도 부당한 대우를 하며 점차 그녀를 소외시킨다. 꿋꿋하게 버텨 보려 했던 수연은 점점 벼량 끝에 몰리는 심정을 느끼고 도움을 얻기 위해 노조에 가입하지만 곧이어 노조마져 불안정한 사태에 처하게 된다. 더이상 누구에게도 기댈 수 없나는 절망감 속에서 빠지게 된 수연. 과연 수연은 괜찮은 걸까? 뒷 이야기가 궁금하신 분들은 책을 통해 확인해 보길 추천해본다.
이 책은 단순한 오피스 스릴러를 넘어 현대 사회의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밖에 없는 구조적 압박과 고립, 그리고 그 속에서 나타나는 인간 내면의 복잡함을 집요하고도 생생하게 담아낸 작품이다. 항공기라는 밀폐된 공간, 엄격한 위계질서와 함께 펼쳐지는 직장 내 괴롭힘의 서사는 현실과 장르의 경계를 절묘하게 오가며 우리 모두가 너무나 쉽게 외면했던 문제들을 생생하게 드러낸다.
특히 이 책의 매력은 괴로움의 원인을 상하관계의 단순한 대립에만 두지 않고 같은 동료들 안에서 살아남기 위해 서로를 소외시키고 견제하는 동료 내부의 위계와 그로 인해 탄생하는 괴물성을 예리하게 짚어내고 있따는 점이다. 시스템 바깥에서 보기엔 단순해 보일지 모르나, 실제로 그 안에 포함된 개인들은 끊임없이 서로를 견제하고 경계하며 살아가는 민낯을 적나라하게 보여줌으로써, 이 소설을 더욱 현실감있게 만들며 이야기에 완전히 빠져들게 만든다. 그리고 책의 뒤에 실린 평론과 에세이, 그리고 대담과 칼럼은 소설이 미쳐 다 보여주지 못한 사회 구조적 맥락과 심층적 시선을 더해 한권의 소설이 어떻게 사회적 대화의 장이 될 수 있는 지를 아주 상세히 풀어내고 보여주고 있다. 이는 책을 또다른 시각으로 이해하게 만들 뿐 아니라 더 오래 깊은 여운을 남기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