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기류
여실지 지음 / 텍스티(TXTY)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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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기류'라는 제목에 끌려서 읽게 된 책이다. 비행기의 갑작스런 흔들림을 의미하는 '난기류'는 단순히 하늘 위의 현상을 이야기할 뿐만 아니라, 우리가 매일 겪는 사회와 일터의 불안정한 공기, 보이지 않는 압박과 긴장감을 상징하는 듯하다. 특히 직장 내 괴롭힘이라는 현실적인 문제를 항공사 승무원이라는 폐쇄된 공간, 위계 질서가 강한 조직 속에서 과연 어떻게 담아내었을 지에 대한 궁금증이 커졌다. 누구나 살면서 한번쯤은 경험했을 법한 고립감과 압박, 그리고 그 안에서 흔들리는 개인의 감정이 '난기류'라는 제목과 절묘하게 맞물린다는 생각이 들어 더욱 이 책의 이야기에 빠져들게 되었다.


이 책의 이야기는 한 여자의 죽음으로 시작된다. 공허한 인사와 무심한 시선 속에서, 누구에게도 제대로 주목받지 못한 채 옥상 끝에 선 여자의 마지막 순간이 담담하게 그려진다. 그녀가 세상을 떠나는 그 짧은 찰나, 하얀 블라우스 아래로 번지는 검붉은 핏자국, 그리고 일상적으로 펼쳐지는 현장의 정적은 시작부터 큰 충격을 안긴다. 시신을 둘러싼 노란 테이프와 이를 둘러싼 무심한 도시의 풍경, 아무렇지 않게 지나치는 행인들과 사무적으로 움직이는 공무원들의 모습은 이 사회에서 한 개인의 절망과 고통이 얼마나 쉽게 묻히고 잊혀지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이처럼 이 책은 시작부터 한 개인의 비극적인 선택을 통해 우리 사회의 냉담함과 무관심, 그리고 직장 내에서의 고립과 괴로움이 가져오는 파국을 극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하늘에 길게 흩어진 꼬리구름이 마치 지울 수 없는 상처처럼 남아 있는 것처럼, 이 소설이 던지는 질문과 여운 역시 쉽게 사라지지 않으며 이야기 속에 빠져들게 만든다.


본격적인 이야기는 이 책의 주인공 중 한 명인 이수연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한때는 승무원의 꿈을 이뤘지만, 코로나19는 그녀의 삶을 순식간에 뒤흔들었다. 오랜 준비 끝에 간신히 승무원이 된 지 2년 만에, 가온항공에서 대규모 정리 해고가 단행되었고, 이수연 역시 일터를 잃었다. 불황에 빠진 항공업계는 무기한 무급 휴직과 해고를 번갈아 내놓았고, 그 결과 그녀는 생계를 위해 카페 아르바이트를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일하는 카페에도 예전의 활기는 사라졌고, 드문드문 들르는 손님들 속에 알파에어 승무원이 찾아왔다. “회사 그만두고 카페 아르바이트나 할까?”라는 승무원의 무심한 한마디가 이수연의 마음을 복잡하게 뒤흔든다. 본인은 선택이라 말하지만, 이수연에게는 이미 선택의 여지가 없는 현실이었다. 게다가 거리에서 들려오는 알파에어 시위대의 목소리조차도, 더 이상 일할 곳조차 없는 이수연에게는 배부른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는다. 같은 하늘길을 걷던 동료였지만, 이제는 각자의 생존 앞에서 서로 다른 입장에 서게 된 현실이 씁쓸하게 다가온다.


이어서 또 한 명의 주인공, 박은하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일찍 출근한 박은하는 알파연대 사무실에서 남상진을 만나, 회사를 그만두겠다는 자신의 속마음을 조심스럽게 털어놓는다. 남상진은 그런 은하에게 사람들이 하는 말에 흔들리지 말라며, 누구보다 애써왔으니 그만두지 말라고 간절히 붙잡는다. 그러나 은하를 향한 주변의 시선은 이미 차갑게 굳어져 있었다. 그리고 남성진이 나가고 들어온 정영주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한 채, 박은하가 들고 있던 테이크아웃 컵을 후려친다. 커피와 얼음이 바닥에 쏟아지고, 유니폼에 커피가 튀면서 복도는 일순간 싸늘한 긴장감으로 가득 찬다. 정영주가 거칠게 자리를 떠나고, 동료들 역시 은하를 차갑게 외면한다. 순식간에 증오의 시선에 둘러싸인 박은하는 마치 땅 속으로 꺼지는 듯한 무거움을 느낀다. 유니폼에 번져가는 커피 얼룩처럼, 그녀의 마음에도 깊은 상처가 스며든다. 과연 정영주는 왜 박은하에게 그렇게 화가 났던 걸까? 이 장면은 독자로 하여금 박은하와 정영주, 그리고 그들을 둘러싼 관계와 갈등에 대해 더욱 깊이 파고들고 싶게 만들며 이야기 속에 빠져들게 한다.


이 책은 1부와 2부로 나뉘어, 각기 다른 주인공의 시점으로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1부는 박은하, 2부는 이수연의 이야기가 주를 이루며, 저자는 주요 등장인물별로 교차 서술을 활용해 사건을 다양한 시각에서 보여준다. 이처럼 다중 시점 스토리텔링을 통해 한 가지 사건을 각 인물의 입장에서 보다 깊고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다는 점이 이 소설의 가장 큰 특징이다. 그 결과 우리는 한 사건을 단순히 피해자와 가해자의 구도로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처한 입장과 감정의 결을 입체적으로 경험하게 되며 이야기에 더욱 몰입하게 된다.


이 책은 국내 1위 항공사 알파에어를 배경으로, 서로 다른 두 여성 승무원의 이야기를 1부와 2부로 나누어 전개하는데, 1부는 이수연이 입사하기 전 해당 자리의 선임이었던 박은하의 이야기다. 은하는 온화한 성격과 뛰어난 사회성, 그리고 회사 홍보 모델을 맡을 만큼의 외모를 지닌 인물로, 노조 대의원으로도 활동하고 있었다. 그러나 상부의 지시로 총무팀 업무를 지원하게 되면서 점차 동료들로부터 고립되기 시작한다. 의도치 않게 동료 승무원의 징계를 정당화하는 일에 연루되면서 은하를 향한 싸늘한 시선과 소외가 시작된다. 결국 징계 대상이었던 노조 선배가 회사 옥상에서 뛰어내리는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하고, 그 이후로 과중한 업무와 동료와의 불화, 일터에서의 괴롭힘이 점차 심해진다. 은하는 심한 죄책감과 스트레스에 시달리다 끝내 비행 중인 A380 항공기 내에서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된다.


특히 박은하의 이야기 중에서 인상적인 장면 중 하나는 실제로 기내에서 박은하가 난기류를 만나는 순간이다. 갑작스럽게 기체가 흔들리자 박은하의 손끝에서 종이컵이 미끄러지고, 바닥에 떨어진 컵에서 액체가 튀어오른다. 그 작은 실수에도 못마땅하다는 듯 한 남성의 굵은 한숨이 흘러나오고, 은하는 연신 “죄송합니다”를 반복하며 극도의 긴장감과 위축을 느낀다. 이어서 동료 오지영은 카트에 물품을 신경질적으로 내던지며, “놀러 왔어? 컵을 왜 떨어뜨려? 옷은 또 왜 그 모양이야?”라는 차가운 말로 은하를 몰아붙인다. 이 장면은 실제 ‘난기류’라는 물리적 현상과 은하가 겪는 심리적 ‘난기류’가 교차하며, 직장 내에서의 미묘한 괴롭힘과 고립의 공기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리고 한편, 꿈에 그리던 알파에어에 입사하게 된 이수연은 이미 비극적인 사건을 겪은 박은하가 속했던 팀에 합류하게 된다. 은하의 죽음 이후 보이지 않는 긴장감이 맴돌고, 팀원들 간의 관계 역시 불안정하게 변한다. 설명할 수 없는 묘한 유사성 때문에 팀원들은 수연에게도 부당한 대우를 하며 점차 그녀를 소외시킨다. 꿋꿋하게 버텨 보려 했던 수연은 점점 벼량 끝에 몰리는 심정을 느끼고 도움을 얻기 위해 노조에 가입하지만 곧이어 노조마져 불안정한 사태에 처하게 된다. 더이상 누구에게도 기댈 수 없나는 절망감 속에서 빠지게 된 수연. 과연 수연은 괜찮은 걸까? 뒷 이야기가 궁금하신 분들은 책을 통해 확인해 보길 추천해본다.


이 책은 단순한 오피스 스릴러를 넘어 현대 사회의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밖에 없는 구조적 압박과 고립, 그리고 그 속에서 나타나는 인간 내면의 복잡함을 집요하고도 생생하게 담아낸 작품이다. 항공기라는 밀폐된 공간, 엄격한 위계질서와 함께 펼쳐지는 직장 내 괴롭힘의 서사는 현실과 장르의 경계를 절묘하게 오가며 우리 모두가 너무나 쉽게 외면했던 문제들을 생생하게 드러낸다.


특히 이 책의 매력은 괴로움의 원인을 상하관계의 단순한 대립에만 두지 않고 같은 동료들 안에서 살아남기 위해 서로를 소외시키고 견제하는 동료 내부의 위계와 그로 인해 탄생하는 괴물성을 예리하게 짚어내고 있따는 점이다. 시스템 바깥에서 보기엔 단순해 보일지 모르나, 실제로 그 안에 포함된 개인들은 끊임없이 서로를 견제하고 경계하며 살아가는 민낯을 적나라하게 보여줌으로써, 이 소설을 더욱 현실감있게 만들며 이야기에 완전히 빠져들게 만든다. 그리고 책의 뒤에 실린 평론과 에세이, 그리고 대담과 칼럼은 소설이 미쳐 다 보여주지 못한 사회 구조적 맥락과 심층적 시선을 더해 한권의 소설이 어떻게 사회적 대화의 장이 될 수 있는 지를 아주 상세히 풀어내고 보여주고 있다. 이는 책을 또다른 시각으로 이해하게 만들 뿐 아니라 더 오래 깊은 여운을 남기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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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대학교 현대문학 핀 시리즈 장르 7
김동식 지음 / 현대문학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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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대학교'라는 제목에 이끌려 읽게 된 책이다. 평범한 대학이 아니라, 인간의 욕망과 파멸을 연구하는 대학이라니. 제목만으로 궁금증이 일지 않을 수 없었다. 책 띠지에 적힌 "그런 예감이 드네요. 저의 작가 인생 내내 '악마'란 존재를 주구장창 써먹을 것 같은 예감이요. 그러면 그게 악마와 계약한 게 아니겠습니까"라는 김동식 작가의 유쾌한 멘트는 이 책에 대한 기대감을 한층 더 높였다. 이미 <회색인간> 등 여러 작품에서 신박한 설정과 인간 내면을 꿰뚫는 통찰력, 그리고 매번 예상을 뒤엎는 반전으로 감탄을 자아내게 만든 김동식 작가였기에, 이 책에 대한 기대는 자연스레 커질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번 책에서는 악마보다 더 악마 같은 인간의 본성과 그 이면을 또 어떤 방식으로 그려낼지 책을 읽기 전부터 설레임을 느꼈다.


이야기는 두꺼운 전공 서적을 품에 안은 한 악마가 다급히 ‘악마대학교’ 강의실로 들어서며 시작된다. 늦게 들어온 악마 ‘벨’은 학구열에 불타는(실제로 불꽃이 이는) 동료 악마들 사이에 조심스럽게 앉지만, 교수 악마는 그를 힐끔 보며 눈살을 찌푸린다. 곧이어 매해 6월에 열리는 ‘창의융합 경진대회’의 사전 발표가 시작되고, 벨은 ‘영생’을 주제로 시간 역재생기가 있다는 소문을 인간들에게 퍼뜨려 그 욕망을 자극하겠다는 아이디어를 내놓는다. 그러나 교수는 “도대체 그게 뭔가? 그건 그냥 장난에 불과하잖아? 자네는 혹시 요정인가 악마인가?”라며 벨의 생각을 조목조목 지적하고, “자네 같은 조무래기”가 다룰 주제가 아니라고 혹평한다. 벨은 창피함과 낙담을 안고 ‘인간 욕망 동아리’ 방으로 향한다.


이 소설의 무대인 ‘창의융합 경진대회’는 “어떻게 인간을 불행하게 만들 것인가”를 겨루는 지옥의 명실상부한 최대 행사다. 이 대회에서 주목을 받느냐 못 받느냐에 따라 지옥 대기업 스카우트 여부가 갈릴 만큼 악마들에겐 절체절명의 기회다. 동아리방에서 벨을 맞는 친구 아블로와 비델은 각자 준비한 ‘사랑’과 ‘도박’을 소재로 인간이 파멸하는 시뮬레이션을 보여주며 그를 위로한다. 두 친구의 아이디어는 악마다운 치밀함과 냉혹함이 묻어나, 벨의 아이디어는 더욱 형편없어 보이기만 한다. 발표일은 점점 다가오고, 벨은 불안과 압박 속에서 자신의 방식으로 경쟁에 뛰어들 방법을 고민하게 된다.


이렇듯 이 소설은 “지옥에도 악마대학교가 있다면?”이라는 단순한 상상에서 출발하지만, 악마들도 학점을 따지고 취업을 걱정하며, 서로의 ‘악마적인 수법’을 경쟁하는 모습이 우리 사회의 치열한 현실과 맞닿아 있음을 절묘하게 드러내며 이야기 속에 더욱 빠져들게 만든다.

 

벨은 친구들에게 마력을 빌려 자신의 ‘영생’ 시뮬레이션을 실연해보지만, 친구들의 반응은 냉담하다. “벨, 너는 ‘계약의 기본 1’ 수업을 듣지 않았나? 인간과 계약한 내용은 철저히 지켜야 한다는 걸 배웠을 텐데,”라며 계약의 원칙을 어긴 점을 꼼꼼히 짚고, “네 수법은 너무 한정적이고, 그 인간이 특수했기에 가능했던 것 아니냐”는 현실적인 평가도 이어진다. 벨은 친구들의 지적에 쉽게 반박하지 못하고, 자신의 아이디어에 부족한 점이 많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이 장면에서 악마들에게도 반드시 지켜야 할 ‘계약의 기본’ 같은 수칙이 있다는 설정이 무척 신박하게 다가왔다. 인간을 다루는 데 있어 규칙과 원칙을 강조하는 악마들의 모습이 유쾌하면서도 인상적으로 느껴졌고, 김동식 작가 특유의 상상력과 디테일이 엿보이는 부분이기도 하여 더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그렇다면 과연 벨은 자신만의 색다른 악마적 수법으로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을까? 그의 좌충우돌 도전과 그 뒷이야기가 궁금하다면, 책을 직접 확인해보길 추천해본다.


이 소설에는 김동식 작가 특유의 쉽고 담백한 문장, 그러나 그 안에 감춰진 날카로운 질문들은 강렬하게 살아 있다. 무엇이 인간을 불행하게 만드는가, 진짜 파멸은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저자는 이야기 속 악마의 시선으로 오히려 인간의 본성과 욕망에 대해 집요하게 묻는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악마대학교의 신입생에게 발행되는 ‘악마가 지켜야 할 규칙’ 세 가지다. ‘악마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악마는 시간 약속을 엄수한다’, 그리고 ‘6월 창의융합 경진대회 발표를 앞두고 선배 악마들이 예민해질 수 있으니 되도록 자극하지 않는다’는 이 유쾌하면서도 신선한 설정이, 오히려 인간 사회와 닮아 있어 한 번 더 웃음을 짓게 한다. 악마라는 존재조차 결코 규칙을 어기지 않으며, 오히려 인간의 선택과 의지를 전적으로 존중한다는 점이 더욱 인상 깊다.


그리고 "악마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욕망에 욕망으로 답할 뿐”이라는 구절은, 인간을 파멸로 이끄는 것은 결국 인간 자신임을 깨닫게 만든다. 악마조차 한발짝 물러서서 인간의 가능성과 어리석음, 그리고 때로는 예상치 못한 선함까지 지켜보는 그 시선이 오히려 더 낯설고 신선하게 다가온다. 또한 ‘영생’이라는 주제를 다루는 과정에서 인간이 스스로 반복의 덫에 갇히는 모습은 현대 사회의 끝없는 욕망과도 맞닿아 있다. 저자는 결코 정답을 내리지 않으면서도, 우리에게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과연 무엇을 선택하며, 어떤 길로 나아가고 있는가?’ 라는 질문은 책을 덮은 뒤에도 오래도록 마음속에 남는다.


중편소설이라는 새로운 틀 안에서도 김동식 작가는 자신만의 색을 잃지 않았다. 일상에서 포착한 작은 아이디어와 세태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풀어냄으로써, 김동식 작가만의 이야기꾼으로서의 재능은 여전히 빛나고 있다. 그렇기에 다음 작품에는 또 어떤 매력적인 세계와 캐릭터, 그리고 어떤 질문을 들고 나타날지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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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스트 사피엔스
해도연 지음 / 네오픽션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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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에 이끌려 읽게 된 책이다. 제목 그대로 인류가 모두 사라진 먼 미래, 오직 한 사람만이 깨어난다는 설정은 책을 읽자마자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27543년이라는 아득히 먼 미래, 그리고 인간의 흔적조차 찾을 수 없는 폐허의 행성에서 홀로 존재하게 된 '마지막 사피엔스'인 주인공 에리카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익숙하게 여겨온 인류와 문명, 그리고 존재의 의미에 대해 깊이 있게 생각해보게 된다.


이야기는 주인공 에리카가 깊은 잠에서 깨어나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낯선 캡슐 안에서 눈을 뜬 에리카는 창밖에 펼쳐진 풍경이 자신이 기억하는 지구와은 전혀 다름을 깨닫게 당황한다. 어디인지, 언제인지 조차 알 수 없으며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에리카는 우연히 한 장의 오래된 사진을 발견하게 된다. 사진 속에는 자신과 정체를 알 수 없는 한 여자가 함께 웃고 있다. 그리고 사진 뒷면에는 '26세기, 밝은 미래에서 다시 만나'라는 수수께끼 같은 메시지가 적혀 있다. 혼란스러운 마음으로 주변을 살피던 에리카는 곧 캡슐의 시간을 표시하는 장치를 발견하게 되고, 그제야 자신이 27543년에 깨어났음을 깨닫게 된다. 사진 속 약속했던 미래에서 무려 25000년이나 흐른 시점, 인류의 흔적이 모두 사라진 지구에서 에리카는 홀로 방주를 찾는 여정을 시작하게 된다.


에리카는 또 하나의 캡슐 속에서 생명이 없는 인간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함께 미래를 기약했을 동료일 수도 있었던 사람이 싸늘한 주검으로 남아 있다는 사실은 에리카에게 절망적인 현실을 각인시킨다. 그 순간 터져나오는 에리카의 절규는 인류의 문명이 끝나버린 세상에서 홀로 남은 자가 느끼는 고독과 공포를 고스란히 느끼게 만든다.


이 후 소설은 인류 문명이 멸망한 27543년의 지구에서 홀로 깨어난 마지막 인간, 에리카의 고독한 생존과 진실 탐색의 여정을 그린다. 더 이상 살기 힘들어진 지구를 떠나기 위해 26세기 인류는 냉동 수면에 들어갔고, 일정 시점이 되면 방주가 열려 인류가 다시 깨어날 예정이었다. 그러나 어떤 이유로 방주는 열리지 않았고, 에리카는 약 2만 5천 년이 지난 후에야 홀로 깨어난 것이다. 그녀는 폐허가 된 도시 속에서 다른 생존자를 찾으려 노력하며, ‘구원’이라는 단서를 비롯한 과거의 흔적들을 통해 진실을 추적한다.


시간이 흐르며 지구의 숲속에서 살아가는 데 익숙해진 에리카는 조랑말과 코끼리를 닮은 새로운 생명체 ‘켄티펀트’를 마주한다. 이들 모두는 귀에 귀걸이를 하고 있었지만, 유일하게 귀걸이가 없는 어린 개체와 유대감을 느낀 에리카는 그를 ‘켄티’라 부르며 친구가 된다. 에리카와 켄티는 함께 방주를 향해 여정을 이어가던 중, 그들이 마주한 존재는 과연 무엇일까? 이야기가 흘러 갈수록 더 흥미진진해지는 에리카의 여정과 신박하다 못해 기괴한 존재들은 과연 에리카가 마주한 진실이 무엇일지 더욱 궁금하게 만든다. 에리카의 이후의 이야기가 궁금하신 분들은 책을 통해 확인해 보길 추천해본다.


이 책은 인류의 종말 이후에도 인간 존재의 의미와 가치를 묻는 깊은 질문을 남긴다. 에리카의 여정은 단순한 생존의 기록을 넘어, 극한의 고독과 절망 속에서도 꺼지지 않는 의지와 남겨진 자로서의 책임감을 조명한다. 우리는 에리카가 마주한 끝없는 시간과 황폐한 세계를 함께 거닐며, 인간다움이란 무엇인지, 우리가 살아가는 시간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스스로에게 질문하게 된다.


특히 이 작품은 지구에 살아남은 존재가 반드시 인류이어야만 한다는 관념에 의문을 던진다. 에리카가 켄티펀트와의 유대, 그리고 새로운 지성체와의 만남을 통해 보여주는 여정은 ‘인간’이라는 범주의 한계를 넘어, 존재와 공존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이는 지구라는 무대 위에서 우리만이 주인공이 아니라는 깨달음을 주며, 오히려 인간의 외로움과 책임이 더 깊은 울림으로 다가온다.


멸망한 지구에 홀로 남은 에리카의 존재는, 끝없이 흐르는 시간 속에서 한 인간의 삶이 어떻게 의미를 만들어 가는지, 그리고 그 의미를 붙들고 살아가는 일이 얼마나 숭고한 것인지를 보여준다. 이 책은 에리카의 외로운 발걸음을 따라가며, “우리가 살아간다는 것, 존재한다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근원적 질문을 끝까지 되새기게 한다. 마지막까지 이 소설을 읽는 독자라면, 에리카의 여정이 남긴 깊은 울림과 함께, 지구에서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와 그 다양성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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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호당 산냥이 - 제29회 창비 ‘좋은 어린이책’ 원고 공모 대상 수상작(저학년) 첫 읽기책 18
박보영 지음, 김민우 그림 / 창비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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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 그림 속 사랑스러운 산냥이에게 완전히 매료되어 읽게 된 책이다. 동그란 눈망울의 산냥이와 호호당에 앉아 웃고 있는 할머니의 모습은 이 책이 과연 어떤 내용일지 궁금하게 만들었다. 이 책은 실수투성이지만 순수한 마음으로 세상을 향해 한 발짝씩 나아간느 산냥이와 그런 산냥이를 따뜻하게 감싸 안는 호호 할머니와의 이야기를 따스하게 담아내고 있다. 제29회 창비 '좋은 어린이책' 원고 공모 동화 부문 대상을 수상한 이 책은 유쾌하고 따뜻한 소동극이다. 천방지축에 에너지가 넘치는 고양이 산냥이는 미숙하지만 정많고, 좋아하는 이들을 위해 온 힘을 다하는 모습으로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이 책은 신비로운 약초가 자라는 호약산과 호약산 꼭대기에 자리잡은 작고 허름한 약초방인 호호방, 그리고 그곳을 지키는 산군 호호 할멈과 별난 조수 산냥이에 대한 소개로 시작된다.


그리고 본격적인 이야기로 들어가 푸릇한 기운이 가득한 초여름의 호약산의 생동감 넘치는 풍경이 펼쳐진다. 평소엔 새소리만 들리던 호약산 입구가 갑자기 사람들로 북적이기 시작한다. 그 이유는 바로 <백세 건강>이라는 영상 때문이다. 어떤 약초꾼이 호약산을 자랑하는 영상이었는데 과연 이 약초꾼은 누구이길래 이러한 영상을 제작한 것일까? 영상은 순식간에 조회수가 치솟고 삽시간에 온 세상으로 퍼져 나갔다. 영상 속 신비의 약초가 자라는 호약산이라는 말에 혹한 사람들은 너도나도 산으로 찾아오고, 사람들은 모두 호약산 꼭대기에 있다는 전설의 약초방 호호당으로 향한다. 하지만 그들이 보게 되는 건 자욱한 안개뿐일 것이다. 왜냐하면 호약산의 산군이자 호호다으이 주인인 호호 할멈이 자리를 잡은 이후, 산꼭대기까지 오른 사람은 단 한 명도 없기 때문이다. 이 신비로운 설정은 초반부터 호기심을 자극하며, 과연 호호당과 산냥이가 어떤 사건을 겪게 될 것인지 궁금하게 만든다.


그리고 호호당으로 장면이 전환되어, 허름한 미닫이문이 '휙'하고 거칠게 열리며, 네 발에 흰 양말을 신은 듯한 귀여운 고양이 산냥이가 "호호 할멈!"이라고 외치며 등장한다. 몸집은 작지만 힘만큼은 장사인 산냥이는 문을 너무 세게 열었다가 호호 할멈에게 꾸지람을 듣는다. 그런데 오늘 따라 산냥이는 유독 기분이 좋지 않다. 왜나면 호약산에 사람들이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이 산에 왜 이렇게 사람들이 많이 몰려드는 지 수상하다며 투덜대는 산냥이. 그러자 호호 할멈은은 불같이 화를 내며 산냥이에게 사람들 앞에선 절대 말조심 하라며 호통친다. 고양이가 말을 한다는 사실이 들통나면 큰일나기 때문이다. 앞으로 사람들 앞에선 꼭 고양이 울음소리만 내던지, 아예 입을 닫든지 둘 중 하나만 하라고 단호하게 말하는 호호 할멈. 이 장면만 봐도 왠지 산냥이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 것만 같다.


이렇듯 호호 할멈을 도와 약초방을 꾸려 나가는 매일 두 앞발이 초록 풀물이 들 정도로 열심히 약초를 캐러 다닌다. 하지만 성격이 급하고 덤벙대는 탓에 매번 실수를 저지르고, 그때마다 호호 할멈에게 꾸지람을 듣기 일쑤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좋아하는 이를 위해 자신의 몫을 다하려는 산냥이의 모습은 서툴지만 진심 어린 용기를 보여주는 듯 하다. 그리 호약산에 몰려드는 사람들의 틈을 타 약초를 노리는 음흉한 너구리 '너굴 아재'까지 나타나며 사건은 점점 심상치 않은 방향으로 흘러가게 된다. 산냥이는 위기의 호호당을 지켜낼 수 있을까? 산냥이와 호호 할멈의 뒷 이야기가 궁금하신 분들은 책을 통해 확인해보길 추천해본다.


<호호당 산냥이>는 장난기 많고 엉뚱한 고양이 산냥이가 신비한 약초가 가득한 호약산을 지키기 위해 펼치는 유쾌한 소동을 담은 작품이다. 말썽꾸러기지만 마음만은 진심인 산냥이의 성장 과정이 따뜻하게 그려지고, 호호 할멈과의 깊은 유대는 뭉클한 감동을 전한다. 하늘다람쥐 오람이, 너굴 아재 등 개성 있는 동물 캐릭터들이 이야기에 활기를 더하며, 마을로 향한 산냥이의 첫 심부름과 새로운 친구 ‘송이’와의 만남은 어린이에게 환대의 의미를 되새기게 한다.


산냥이는 실수투성이지만, 그 안에서 배우고 성장해 나가는 모습이 독자들의 마음을 자연스럽게 움직이게 만든다. 특히 호호 할멈의 꾸짖음 없는 사랑과 기다림은 아이들이 세상과 마주할 때 필요한 어른의 존재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를 깨닫게 만든다. 결국 산냥이를 위한 ‘보물 1호’가 과거 산냥이가 정성껏 따다 준 깻잎이었다는 사실은, 사랑이란 거창하지 않아도 된다는 메시지를 전하며 이야기를 따뜻하게 마무리한다. 이 책은 사랑 속에서 마음껏 실수하며 성장할 수 있는 용기를 전하는 작품이다. 이 책을 통해 아이들이 자기 안의 산냥이를 발견하고, 실수를 두려워하지 않으며, 세상에 한 걸음 더 다가갈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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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결국 부모를 떠나보낸다 - 부모의 마지막을 함께하며 깨달은 삶의 철학
기시미 이치로 지음, 박진희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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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만 읽어도 마음이 서늘해진다. 하지만 삶의 과정 속에서 부모든 가족이든 떠나보내는 일은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일인 만큼, 그 이별에 대한 준비는 오히려 절실하게 느껴진다. 이 책은 그런 현실 앞에 선 우리에게 담담하지만 깊이 있는 질문을 던진다.


<미움받을 용기>로 잘 알려진 아들러 심리학자의 권위자 기시미 이치로는 오랜 시간 부모를 간병하며 겪은 돌봄와 상실의 경험을 통해 이 책을 썼다. 단순한 감상이나 추억의 회상이 아니라, 실제로 부모의 마지막을 함께한 이로서 마주한 감정의 파도, 일상의 무게, 죽음이라는 거대한 테마를 철학적 통찰과 함께 풀어낸다. 부모도, 나도, 나이 들어가는 초고령사회로 접어든 오늘날, 이 책은 우리가 어떻게 이 여정을 준비하고 함께 좋은 삶을 살아갈 수 있을 지를 깨닫게 만든다.


우리는 종종 ‘아직은 괜찮겠지’라는 생각에 머물며 부모님의 노화를 실감하지 못한 채 하루하루를 보내곤 한다. 그러나 어영부영하는 사이 부모님은 조금씩 늙어가고, 기억은 희미해지며, 어느 날 갑자기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순간이 올 수도 있다. 저자는 그 순간을 준비하지 못하면 부모님의 현실을 외면하게 되고, 결국은 후회로 남을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이 책은 바로 그 준비에 대한 이야기다. 부모님이 아직 젊고 건강할 때, ‘부모님이 더이상 나를 사랑하지 않을 때 아니 나를 알아보지 못할 때,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미리 품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것은 단지 간병의 기술이나 제도적인 문제를 넘어서, 부모와의 관계를 돌아보고 남은 시간을 어떻게 살아갈지에 대한 본질적인 물음이다. 특히 부모에게 사랑을 받으며 자라온 이들이라면, 이별의 순간까지 그 사랑을 어떻게 이어갈 수 있을지를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저자는 이 책에서 본인이 직접 겪은 간병의 시간과 수많은 감정의 파동을 숨김없이 털어놓으며, 자식으로서 무력함이나 슬픔을 받아들이는 용기에 대해 말한다. 때론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인정하는 것도 사랑의 한 방식이며, 그 인정에서부터 진짜 돌봄이 시작된다고 말이다.


무엇보다 이 책이 전하는 가장 큰 메시지는 ‘할 수 없는 일은 할 수 없다고 인정하는 용기’이다. 저자는 부모를 돌보는 과정에서 누구나 겪을 수 있는 감정의 소용돌이를 섬세하게 짚어내며, 무력감과 죄책감 속에서도 따뜻한 사랑으로 그 시간을 받아들이는 법을 이야기한다. 간병 과정에서 겪은 갈등과 후회, 그리고 회복의 이야기를 솔직하게 털어놓는 저자의 고백은 독자로 하여금 자신의 부모와의 관계를 돌아보게 만든다. 임종을 지키지 못한 어머니에 대한 죄책감을 오랜 시간 마음에 품고 살아오다 꿈속에서 아버지에게 고백하는 장면은, 상실을 치유하는 인간적인 과정 그 자체다. 그리고 꽃이 피지 않더라도 물을 주는 마음으로 아버지를 돌봤다는 일화는, 부모의 질병이나 노쇠함 앞에서 우리가 가져야 할 태도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더불어 저자는 부모와의 관계 회복에 있어서도 중요한 통찰을 전한다. 과거에 갈등이 있었던 아버지와의 관계를 간병을 통해 다시 쌓아가는 모습은, 돌봄이 단지 ‘의무’가 아닌 ‘관계의 재형성’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 과정에서 그는 아들러 심리학의 핵심 개념인 ‘존경’의 의미를 되새긴다. 부모를 이상화하거나 평가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라는 점을 강조하며, 부모님이 무엇을 할 수 있느냐보다 존재 자체가 얼마나 귀중한지를 일깨운다. 그렇게 이 책은 우리가 부모와 함께하는 지금 이 순간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조용하지만 깊은 울림으로 전해준다. 간병과 이별을 준비하고 있는 모든 이들에게 이 책은 위로이자 용기, 그리고 실천적인 지혜가 되어줄 것이다.


이 책은 실용적인 조언과 함께 따뜻한 위로도 함께 건넨다. 부모님이 우리 가족에게 특별한 일을 하지 않아도 ‘존재 그 자체만으로도’ 기여하고 있다는 점을 알아주고, 자주 “고맙습니다”라고 말해주어야 한다는 부분은 그저 읽는 것만으로도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부모님이 자신이 가족의 일원으로 의미 있는 존재임을 느낄 수 있도록 하는 것, 그것이 진정한 존경이자 사랑이라는 메시지는 깊은 울림을 준다.


저자는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도 기쁨은 반드시 존재하며, 지금 이 순간이야말로 소중한 삶의 일부라고 말한다. 부모님을 더 잘 돌보고 싶은 마음이 크겠지만, 완벽한 돌봄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할 수 있는 것’을 다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점을 상기시켜 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남기는 한 문장, “부모님 곁에 있는 것, 그 자체로 의미 있습니다. 우리는 결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 아닙니다.”는, 그 어떤 말보다도 진한 위로로 다가온다.


결국 부모를 떠나보내는 여정은 우리의 내면을 돌아보는 시간이기도 하다. 저자가 이야기한 것처럼, 이 과정을 통해 우리는 스스로를 치유하고, 인생의 깊은 의미를 발견하게 된다. 《우리는 결국 부모를 떠나보낸다》는 그 여정에 따뜻한 등불이 되어주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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