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적 기억과 사진, 그리고 가능한 기억의 방법론과 주체들
시인 김수영은 “나에게서 시인이 없어졌을 때 나는 시를 쓰기 시작했다”1)고 썼다. 이 문장을 ‘기억’이라는 어휘를 넣어 다시 쓰면, “우리가 과거의 생생한 기억을 잃어버렸을 때 우리는 기억에 대해서 말하기 시작했다”라는 역사가 피에르 노라의 잘 알려진 테제가 된다.2) 이 두 문장에서 우리는, 한국의 시인에게서나 프랑스의 역사가에게서나 상실 또는 죽음으로서의 시간 감각이 예술적 학문적 실천의 동인이 되는 근대의 보편적 특성과 만나게 된다.
과거의 죽음, 근대적 기억의 탄생
독일의 역사학자 라인하르트 코젤렉은, 서구의 근대는 16~19세기까지 400여 년의 형성기를 거치는데, 이 기간 동안 이전 인류사의 장구한 기간과는 ‘전혀 다른 시간’이 흘렀다고 말한다.3) 그 전혀 다름이란 “시간적 차이” 개념의 발생을 가리킨다. 적어도 인쇄술이 대중화되기 전까지는 오늘날 우리가 당연시하는 과거-현재-미래라는 시간적 차이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으며, 과거는 전통 의례와 구술 전승을 통해 생생한 기억으로서 현재화되는 시대였다는 점에 현대 역사이론가들은 대체로 동의한다. 과거와 미래가 언제나 현재 속에서 재생되는 영겁회귀의 무시간성이 지배하던 그 시대에는 ‘현재로서 재생되는 기억’은 존재했으되, 근대처럼 ‘과거에 대해 표상되는 기억’ 개념은 없었다는 것이다. ‘근대Neuzeit’라는 용어는 ‘새로운 시대neue Zeit’의 합성어다. ‘새롭다’는 표현은 차이의 비교를 통해서만 의미를 갖는다. 어떤 시대가 스스로를 새로운 것으로 내세우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그 이전의 시대를 낡은 것으로 분류하고 폄하하게 된다. 이런 맥락 안에서 과거는 일회적으로 일어났다가 사라진 사건들의 다발로서 현재에는 존재하지 않는 ‘죽은 시간’이 된다.
‘새로운 시대의 주체’인 근대인에게 현재라는 시간은 낡은 과거의 끝남과 상실 위에서만, 미래라는 시간은 현재의 끝남과 상실 위에서만 성립 가능하다. 근대인의 삶은, 과거의 죽음을 디디고, 현재를 과거의 죽음 쪽으로 추방하면서, 도달될 수 없는 새로운 시간인 미래를 향해 가속해 가는 삶이다. 이 삶에서는 미래만이 영원히 죽지 않을 시간으로서, 과거와 현재보다 더 큰 비중을 차지한다. 근대인의 삶은 체험의 현재성을 과소평가하고 과거의 보관과 미래의 진보를 동시에 겨냥하는 기술 개발에 몰두한다. 이러한 근대인의 삶 속에서야 비로소 역사와 기억과 사진이 의미를 갖는다.
피에르 노라는 기억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 “진짜 기억”과 기억이 역사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변해버린 “변형된 기억”을 구별하고 양자의 차이를 의식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4) 근대의 역사는 생생한 과거 자체로서의 ‘진짜 기억들’이기를 거부하고, 끝나버린 과거에 대해 비판적 거리를 두고 구성된 유일한 객관적 진리이고자 한다. 그러므로 역사는 “경험의 재에서 부활한 피닉스 같은 학문이 되기 전에 우선 당사자들의 머리와 마음과 몸 속에서 죽어야 한다.” 5) 역사가 경험적 실체가 삭제된 간접 기억, 즉 기록된 기억에 우월성을 부여하면서 스스로 객관적 진실이고자 하기 때문에, 사건에 체험적으로 결부된 개인들의 주관적인 직접 기억은 하위 자료로 폄하하거나 배제할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근대는 ‘역사가 기억을 억압한 시대’였다. 근대적 기억은 그 기억이 표상하는 과거의 실체가 사라진 뒤 기록 매체에 의존해서 사후적으로 구성된다는 점에서 ‘변형된 기억’이며, 생생한 체험적 직접성이 삭제되었다는 점에서 ‘텅 빈 기억’이자 특정 의도에 따라 ‘조작 가능한 기억’이다.
근대적 기억과 사진, 그리고 권력
체험에 의한 직접 기억이 역사에 의해 배제되고 마련된 기억의 빈자 리에 각종 기념물과 기록화, 리얼리즘 소설, 사진·영화 같은 기록 매체들에 의해 매개된(변형된) 간접 기억이 속속 들어선다. 기록 매체들은 죽은 과거를 보존하려는 도달될 수 없지만 포기할 수도 없는 근대인의 욕망을 매개한다. 달리 말하면, 과거와 단절된 근대적 기억이 과거의 대리보충물로서 기록물들을 요청했다고도 할 수 있다. 기록물들에 의한 기억들은 “아주 정확한 흔적, 아주 물질적인 유물, 아주 구체적인 기록, 아주 가시적인 이미지”에6) 전적으로 근거하게 된다.
특히 사진은, 도시화에 의해 농경 사회의 문화와 환경이 급속히 사라지던 서구의 근대 성숙기에 거의 강박적으로 요청될 수밖에 없었던 기록 매체이자 ‘죽은 과거의 대리보충물’이었다. 사진에 대한 근대 대중의 집단적 열광은, 근원(과거)의 부재 또는 상실에 대한 무의식적 불안으로부터 표출되는 일종의 증상이었다고도 볼 수 있다. 죽은 과거를 대리보충하기 위해 요청되는 가시적 정확성에 사진의 강력한 재현력이 응답했고, 그리하여 사진은 근대인이 세계를 지각하는 강력한 형식이 되었다. 부단히 사라지는 과거를 기억하고 부단히 사라질 현재를 저장하기 위해서, 근대인은 부단히 사진기 셔터를 눌러댔다. 그 결과 자신과 밀착되어 있던 유산 속에 켜켜이 쌓여 있던 진짜 기억이 모두 실체 없는 사진 이미지로 대체되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19세기 중반 이후 근대의 거의 모든 기억은 사진에 의해 매개되어 있다. 역사적인 공식 기억뿐 아니라 근대인의 소소한 일상과 예술 및 학문을 포괄하는 문화적 기억 전체가 사진의 매개를 거치며 표상되었다.
그런데 사진은 거울처럼 투명해 보이지만 사진을 생산하는 주체의 의도에 따라 동일한 대상도 완전히 다른 의미 맥락으로 표상될 수 있다. 게다가 “한번 표상된 사진은 그것이 표상한 대상을 대리 대표하면서 그 대상의 유일한 이미지로서 스테레오타입화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사진의 대표성은 역사적 사건을 특정한 이미지로 고정시키고 그 사건의 유일한 이미지이자 실상으로서 기억하게 한다.”7) 나아가 사진은 “매일 저녁 당신이 전쟁에 대한 사진들을 보기 시작하자마자 전쟁은 전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게 됩니다”8)라는 푸코의 말처럼, 사진을 보는 자에게 이미지를 일종의 불가피한 현실로서 수용하게 하는 강력한 설득력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특성 때문에 사진을 통해 매개된 집단적 문화적 기억은 권력자의 의도적인 기억과 망각의 정치를 통해 거의 언제나 조작되어 왔다. 그래서 사진으로 표상된 공식 기억과 역사적 사건들을 재검토하고 권력자들의 시선에 의해 오염된 역사적 의미들을 해체하는 작업이 필요해진다. 국내에서는 사진아카이브에 대한 미시사적 접근을 통해 일제 강점기와 이후 근현대사에서 사진이 권력자의 집단 기억 조작에 어떻게 활용되었는지를 규명하는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한국에서 근대는 충분한 형성기를 거치지 못하고 일제에 의해 갑작스레 강요되었기 때문에, 우리가 ‘우리 과거의 죽음’에 대한 스스로의 기억을 표상할 수 있는 주체의 자리에 설 수 없었다. 해방 후 이승만 정권과 전쟁, 박정희·전두환 정권으로 이어지는 근현대사에서도 국가와 민족의 발전이라는 이름 아래 동원된 근대화와 시민 학살, 올림픽 개최 등이 국가 권력에 의해 수행되면서 집단 기억은 권력자들의 의도에 의해 지속적으로 조작되어 왔다. 바로 이 권력자들의 기억 조작의 중심에 사진이 있다.
기실 예술의 영역도 근대적 기억의 사진적 표상 효과와 권력의 원환 고리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근대 역사의 순수성이란 것이 권력자의 시선에 의해 오염되어 있는 기억의 정치학의 결과물임을 확인하는 현 시점에서, 예술을 포함한 문화적 기억을 권력의 문제와 분리시키고 굳이 비정치적이고 순수한 차원에서 접근하려는 것은 근대적 역사성의 한계에 또다시 갇히는 시대착오적 넌센스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한국 근현대미술사를 탈연대기적이고 탈미술적 맥락에서 재고하려는 기획전 <코리언 랩소디-역사와 기억의 몽타주>의 시도는 의미 있어 보인다.
가능한 기억의 방법론과 주체들
기억은 느슨하고 임의적이며 반복해서 전수되는 고답적 의식의 형태라는 점에서, 근대가 추구했던 가치들인 객관성, 독창성, 혁신성, 역사성과 근본적으로 대립되는 것으로 오랫동안 폄하되어 왔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 이성으로써는 설명할 수 없는 파국적 경험들을 겪은 뒤 역사의 위상에 대한 지식인들의 해체 작업이 가속되었다. 그리고 역사의 대안으로서 그간 역사학자들에 의해 개인적이고 신뢰할 수 없는 것으로 치부되던 기억이 부상하게 되었다.9)
부상하는 기억의 해방을 위해서, <코리언 랩소디>가 보여준 것처럼 역사적 연대기의 매끄러운 일관성을 파열시키고 역사의 공백 지대를 자유로운 기억의 공간으로 전유하려는 몽타주적 방법론이 1차적으로 필요할 것이다. 그와 함께, 5.18기념재단이 주최한 전시 <오월의 사진첩>10)과 홍상수의 영화 <하하하>11)에서 제시하는 것과 같은 기억의 중첩과 교차, 수렴의 방법론도 필요하다. <오월의 사진첩>과 <하하하>에서 발견할 수 있듯이, 동일한 사건을 직간접 경험한 서로 다른 개인들의 비슷하게 엇갈리는 기억들이 만나고 헤어지기를 반복하며 퍼져나가는 구조는, 이름 없는 무수한 개인들의 살아 있는 기억들의 네트워크를 가능하게 한다. 이 네트워크에서 ‘가능한 기억’의 주체는 힘 있는 단수가 아닌 다양한 탈권력적 복수 주체일 것이다. 기억을 중시하는 미시사적 방법론의 활발한 적용과 예술가들의 기억에 대한 적극적 언급에 의해 역사학과 예술의 경계가 흐려지고 있는 현 상황도 새로운 주체들의 탄생을 예고하고 있다. 예술이 새로운 기억 형식을 창안하는 것이고, 기억의 역사가 주제에 대한 존재론적 몰입과 주관적 상상력에 의해 창조되는 “존재의 역사이자 사랑의 역사”12)라고 할 때, ‘예술-역사가’ 또는 ‘역사-예술가’라는 하이브리드적 주체들이 가능한 기억의 또 다른 지평을 열어갈 것이다.
만약, 기억의 충돌과 중첩이라는 대조적 방식이 나란히 주어진다면, 고정된 중심으로서의 역사의 의미론적 위계와 객관적 진실성의 축이 더욱 효과적으로 해체될 뿐만 아니라, 온라인 네트워크의 그물망처럼 중심이 텅 빈, 그러나 미묘한 차이의 반복 재생을 통해 겹치고 확산되는 ‘가능한 기억들’을 우리 자신의 기억으로 향유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기억들의 네트워크’ 개념은 디지털 시뮬레이션에 의해 양적 정보로 기능화할 디지털적 메모리 개념에 대해 ‘미리 주어질 수 있는’ 기억의 윤리학적 미학적 가능태일 수 있다. 그것은 김수영의 말처럼 “자유의 과잉”일 수도 “혼돈”일 수도 있으나 “모기소리보다 더 작은 목소리”들로 아무도 말하지 못하던 기억들을 말하기 시작하는 실천들로부터 생성될지 모른다.
"나도 여러분도 시작하는 것이다. 자유의 과잉을, 혼돈을 시작하는 것이다. 모기소리보다도 더 작은 목소리로 시작하는 것이다. 모기소리보다도 더 작은 목소리로 아무도 하지 못한 말을 시작하는 것이다. 아무도 하지 못한 말을. 그것을－."13)
-------
1) 김수영, <시인의 정신은 미지>, <<김수영전집>>(민음사, 1995), 188쪽.
2) 피에르 노라 외/김인중 외 옮김, <<기억의 장소>>(나남, 2010), 31-32쪽.
3)라인하르트 코젤렉/한철 옮김, <<지나간 미래>>(문학동네, 2007), 21-22쪽.
4)피에르 노라 외, 44쪽.
5)알라이다 아스만/변학수 외 옮김, <<기억의 공간>>(경북대출판부, 2003), 16쪽.
6)피에르 노라 외, 44쪽.
7)이경민, <사진과 기억, 그리고 재현의 정치학>, <<코리안 랩소디-역사와 기억의 몽타주>>(리움, 2011), 89쪽.
8)미셸 푸코/윤택림 편역, <영화와 대중기억>, <<구술사, 기억으로 쓰는 역사>>(아르케, 2010), 176쪽.
9)전진성, <<역사가 기억을 말하다>>(휴머니스트, 2009), 15-103쪽.
10)5.18기념재단, <<오월의 사진첩>>(아카이브북스, 2008)
11)홍상수, <하하하>(2009)
12)백승종/사진아카이브연구소 엮음, <농촌마을의 역사 그리고 아카이브>, <<지역아카이브, 민중 스스로의 기억과 삶을 말한다>>(아카이브북스, 2010), 145쪽.
13)김수영, <시여 침을 뱉어라>, 위의 책, 254쪽.
(박영선/사진아카이브연구소 연구원. <월간미술> 2011. 4월호 게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