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에겐 보내지 않은 편지가 있다 - 정신분석학, 남녀의 관계와 고독을 이야기하다
대리언 리더 지음, 김종엽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3월
평점 :
절판


  

   나는 기본적으로 모든 현대인이 신경증 환자라는 라캉의 테제에 동의하는 사람이다. 우리가  어린이예찬과 신록 및 청춘 예찬, 그리고 데미안의 알에서 깨어남 이후에서부터  노년의 사망에 이르도록 끝나지 않는 질풍노도에 시달리며 뽄때없이 죽어가는 이유는 우리 모두가 고장난 기계이기 때문이라는 입장에 동의한다. 그래서 우리의 이 뽄때없는 삶에 대한 정신분석학적 이해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물론 고장난 기계를 수리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은 아니다. 기계에 비유하자면 고장난 기계라 표현할 수 있지만, 인간은 수리될 수 있거나 수리되어야 할 '기계'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한때 유행했고 요즘은 뉴미디어아트 쪽에서 구현되고 있는 인간-기계 비유법(동일시)은, 극히 남성적인 섹슈얼리티와 충동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라고  이 책의 저자 역시 주장하고 있다. 

아마도 올해 들어 시집, 소설, 만화말고 책 한권을 손에 들고 하룻밤 새 독파한 경우는 이 책이 유일한 것 같다. 논문 등 기타 현실적 이유로 행하는 독서 노동이 아니라, 휴일을 기대하며 쟁여두었던 책을 펴들 기회가 찾아와서 읽게 되었다. 저자 대리언 리더는 자신의 책이 '콜라주'라고 말한다.  연애의 비밀에 관한 정신분석학적 콜라주... 즉 독자들이 독서노동하듯이 이 책을 읽기를 바라지 않는다는 뜻이다. 저자의 배려는 효과적이다. 논리적 전개나 개념의 난해성 같은 장애물이 책읽기를 가로막지는 않는다.원문을 대조하지 않아 모르겠지만, 가끔 이해불가능한 문장이 튀어나오기는 하는데, "콜라주"임을 상기하며 조금은 가벼운 마음으로 다음으로 넘어갈 수 있다.  

나는 이 책이 제시하는 핵심을 이렇게 이해했다--"여성은 무다."   노자 도덕경의 "무명 천지지시"라는 경구에서 무명으로서의 무가 떠오르기도 했지만... 하여간 여기서 무라 함은 여성성은 남성성과는 달리 독자적 실체를 지니지 않은 관계 개념이라는 뜻이다. 여성성은 오직 남성성과의 관계 속에서만 포착되는 개념이다. 그래서 여자들은(저자는 이 책의 대중성과 논의의 편의상 여성성과 여자를 거의 중첩되는 개념으로 사용한다. 그러나 엄밀히 암수라는 해부학적 차이와 남성성-여성성은 별개의 개념이라는 점도 밝히고는 있다)  남자에게 '나 정말 사랑해?'라고 수시로 묻는다는 것이다.. 백벌의 고급 드레스를 사놓고도 입을 옷이 없다고 투덜댄다거나,  주변 물건을 잘 정리한다거나 하는 것이 모두, 여자들이 관계 속에 던져진 존재- 즉 무-이기 때문이라고 해석한다.  

조금 더 들어가면, 연애의 근친상간적 비밀이 기다리고 있다. 남자가 어떤 여자에게 끌리는 이유는 자신의 어머니나 누이에 대한 성적 충동과 관련이 있고,  여자가  남자에게 끌리는 근저에는 자신의 아버지에 대한 성적 충동이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근친상간적 섹슈얼리티에 대해 미리 알고 긍정하는 것이 훨씬 현명한 길이라고 충고한다. 특히 여자가 정말로 사랑하는 것은  언제나 실제로 존재하는 남자 너머의 것이라는 지적이 적확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자들의 성교에 대한 집착과 여자들에게 흔한 불감증이 이 맥락에서 설명된다. 

그 밖에도 이 책은 연애와 결혼에 관한 매우 다양한 사례들을 들면서 누구나 경험해 본 연애/결혼의 오리무중의 고통의 이유를 설명해 낸다. 책을 읽으면서 20대에 이런 책을 읽을 수 있었다면 그 혹독한 고통과 방황이 좀 감해졌을 텐데, 라는 회한을 느꼈다. 어쨌거나 지금이라도 읽게 된 게 매우 다행인 그런 책이다. 라캉의 난해함을 많이 걸러내고, 일상에 대한 정신분석학적 이해를 돕는다는 점에서, 게다가 아주 재미있다는 점에서 매우 폭넓게 권장할 만한 책 같다. 이런 책들이 많이 나와주고 많이 읽힐 때 고급 지식인과 대중 사이, 사색하는 시민민중의 층이 두터워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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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고세운닥나무 2010-08-06 16: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회학자 김종엽 교수가 번역을 했군요? '87년 체제론'을 말하는 김종엽과는 조금 어울리지 않는 듯 한데 말이죠.
김종엽의 글을 좋아하는데, 도전해 볼만한 책이지 싶습니다. 리뷰를 보니 프로이트와 라깡의 색깔도 다분한 것도 같구요.
리뷰 잘 보았습니다.

미지 2010-08-06 16: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읽기로는 일반인과 정신분석에 관심 있는 비전문가 모두에게 매우 권할만한 책입니다. 밤새며 읽었네요^^
저도 역자 소개를 유심히 보고 역자 해설을 읽었는데요, 이분이 '남성성연구'라는 강좌를 한신대에서 몇년간 진행하셨다네요. 학생들의 반응이 뜨거웠고, 그 과정의 결과물이 이 역서인 모양입니다.
우선 책이 번역되어 나온 과정, '공유'에 대한 의식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김종엽 선생 글을 아직 읽어보지는 못했는데 찾아읽을까 합니다.
한국 사회를 이해하는 데 사회학적 접근은 특히 유효한 것 같다는 생각이 요새 듭니다.

파고세운닥나무 2010-08-06 17:10   좋아요 0 | URL
두 달 정도 심리학과에서 심리 검사를 받았는데요. 받고 나니 저도 한 번 공부했으면 하는 마음이 생겼어요. 권해 주시니 꼭 봐야겠네요.
김종엽 교수가 관심 분야가 넓은 줄은 알았는데, '남성성 연구'까지 하는 줄은 몰랐네요. 창비에서 맹활약하는 강견의 사회학자로만 알았거든요.

미지 2010-08-06 22: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종엽 선생이 맹장이었군요^^.. 이건 그냥 역자에 대한 단편적 인상이지만, 열린 맹장 같습니다.
제가 이해하기로 심리학과 정신분석학은 좀 다른 것 같습니다.
프로이트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입장인데요, 영미 쪽에서는 당연히 실용주의적 경향에 따라 심리, 특히 자아심리를 중시하고 고장난 기계로서의 인간을 수리하는 데 목적을 두는 것 같습니다. 라캉적 정신분석학 쪽에서는 수리불가능성을 전제로 하는 게 아닌가 합니다. 오히려 고장 날 수밖에 없는 이유, 이른 바 구조의 문제를 탐구하는 것이죠... 따라서 정신분석학으로 들어가면 결국, 모든 영역의 학문 및 예술의 명제들과 만나게 되는 것 같습니다.
라캉이 모든 인문학자에게 1차 텍스트가 되는 이유가 여기 있는 게 아닌가 합니다. 저도 낑낑대는 중입니다^^

파고세운닥나무 2010-08-07 15:41   좋아요 0 | URL
심리 검사는 학교에서 받았어요. 후배가 심리학과 대학원에 있는데 보고서 쓴다고 도와달래서요. 라깡은 문학이론 공부할 때 잠시 접했는데 말씀해 주시니 호기심이 동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