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이에 관한 생각 - 영장류학자의 눈으로 본 젠더
프란스 드 발 지음, 이충호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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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으로 유명한 영장류학자 프란스 드 발은 수십 년간 사람과 동물의 행동을 연구한 결과를 바탕으로 생물학은 기존의 젠더 불평등에 정당한 근거를 제공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젠더와 생물학적 성이 관련 있음에도 불구하고, 생물학은 인간 사회에서 전통적인 남성과 여성의 역할을 자동적으로 지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저자는 그렇다고 해서 남녀가 다르다는 사실을 부정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남녀 간의 선천적인 차이점들은 무엇이며, 그것들이 문화가 아닌 생물학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책 <차이에 관한 생각>은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영장류 연구에서 찾는다. 성차에 대해서는 다양한 접근법이 존재해왔지만, 이 책은 기존의 연구나 다른 책들과는 다르게 영장류를 통해 성차의 비밀을 밝혀내고자 한다. 저자는 인간의 행동을 우리의 가장 가까운 진화적 사촌인 침팬지와 보노보와 비교한다. 이를 통해 널리 받아들여지는 여성성과 남성성에 관한 믿음들과 권위와 지도력, 협력, 경쟁, 부모와 자식 사이의 유대, 성 행동에 관한 보편적인 가정들에 이의를 제기한다.

"젠더 차이라는 주제는 어느 쪽으로건 감정을 자극한다. 이 분야에서는 누구나 강한 의견을 피력하는데, 동물을 연구하는 우리에게는 아주 낯선 상황이다. 영장류학자는 판단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항상 성공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절대로 행동을 옳고 그른 것으로 분류하지 않는다. 연구에는 불가피하게 해석이 포함되지만, 우리는 수컷의 행동을 '역겹다'고 표현하거나 어떤 종의 암컷을 '상스럽다'라고 부르는 일이 절대로 없다. 우리는 행동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이런 태도는 박물학자들 사이에 오랫동안 내려온 전통이다. 비록 수컷 사마귀는 교미를 하다가 문자 그대로 머리를 잃지만, 그렇다고 해서 암컷을 비난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리고 같은 이유로 우리는 자신의 짝이 몇 주일 동안 밀폐된 둥지 않에서 지낼 수 있도록 진흙 덩어리를 물어오는 수컷 코뿔새의 행동을 판단하지 않느다. 우리는 그저 자연이 왜 그런 식으로 작용하는지 경이롭게 여길 뿐이다."

"영장류학자는 성을 경시해야 할 이유가 없다. 나는 영장류학회 회의에서 약 1000번의 강연을 들었지만, "있잖아요, 저는 숲에서 암컷과 수컷 오랑우탄을 추척하다가 그들의 행동이 서로 놀랍도록 비슷하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라는 말을 들은 적이 아직까지 한 번도 없다. 대다수 영장류에서 암수의 행동 차이가 얼마나 극명한지를 감안하면, 그런 말을 한 강연자는 웃음거리가 되고 말 것이다. 게다가 영장류학자들은 이러한 차이를 사랑한다. 우리에게 그것은 일용할 양식이다. 그것은 영장류의 사회 생활을 아주 흥미롭게 만든다. 수컷이 중시하는 의제가 따로 있고, 암컷이 중시하는 의제가 따로 있다. 우리의 과제는 양자 사이의 상호 작용을 추론해 내는 것이다. 수컷과 암컷은 가끔 이해가 상충하지만, 상대방이 없으면 진화의 경쟁에서 어느 쪽도 승리할 수 없기 때문에, 양쪽의 의제는 어느 지점에서 교차한다."



이 책에서 저자가 젠더란 무엇인가에 대한 개념에 대해 설명하는 글이 눈길을 끈다. 저자는 일상생활에서 사회가 젠더 역할을 어떻게 만들고, 모든 사람에게 그것을 따르도록 어떻게 압력을 가하는지 쉽게 볼 수 있는 것에 대한 젠더 개념은 논란이 되지 않지만, 더 급진적인 젠더 개념은 우리 종의 생물학과 충돌한다고 말한다.

"젠더는 각 성이 걸치고 다니는 문화적 외투와 같다. 그것은 남성과 여성에 대한 우리의 기대와 관련이 있는데, 그러한 기대는 사회마다 다르고 시대에 따라 변한다. 하지만 일부 정의는 이보다 더 급진적인데, 젠더의 본질을 변화시키려고 시도하기 때문이다. 이런 정의들에는 생물학적 성과는 완전히 별개인 임의적 구성물로 본다. 말하자면, 외투가 혼자서 스스로 돌아다니는데, 그것을 어떻게 꾸미느냐는 우리에게 달려 있다."

저자는 사람들은 단지 젠더 정체성을 그냥 받아들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것을 문화적인 것으로 간주하건 않건 상관없이 적극적으로 수용한다. 따라서 저자는 아이를 젠더 구분 없이 키우는 것이 아이에게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이야기한다.

"우리는 문화와 생물학 중에서 어느 한쪽을 선택할 필요가 전혀 없다. 유일하게 타당해 보이는 입장은 '상호 작용주의자'가 되는 것이다. 상호 작용주의는 유전자와 환경 사이에 역동적인 상호 작용이 일어난다고 상정한다. 유전자 자체는 포장도로에 떨어진 씨앗과 같다. 그 자체만으로는 아무것도 만들어낼 수 없다. 이와 비슷하게 환경도 자체만으로는 아무 의미가 없는데, 거기에서 작용해야 할 생명체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양자 사이의 상호 작용은 너무나도 복잡해서 대개의 경우 우리는 각자의 기여가 어느 정도인지 밝혀낼 수 없다."

저자는 트랜스젠더는 본질적이고 체질적인 것으로, 여기서 '체질적'인 것이란 단어는 '사회적 구성물'과 반대되는 뜻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우리가 어떤 사람인가 하는 본질과 관련이 있는 특성이다. 우리는 트랜스젠더의 원인이 유전자나 호르몬, 자궁 속의 경험, 출생 이후의 조기 경험 중 어떤 것인지 모른다. 우리가 아는 것은 그것이 대개 삶의 이른 시기에 나타나며, 되돌릴 수 없다는 사실이다. 저자는 젠더 사회화는 언제나 생식기 해부학을 그 출발적으로 삼지만 트랜스젠더 아이는 자신에게 부과된 기대를 원망한다고 이야기한다. 이들의 사회화는 부모와 자식 간의 협력 과정 대신에 반란과 강압 사이의 성난 전쟁으로 변할 때가 많다. 저자는 자기 사회화는 본성과 양육 중에서 어느 한쪽을 선택하는 대신에 양자를 결합한다고 말한다. 자기 사회화는 내부에서 유래하지만, 외부 세계를 길잡이로 받아들인다. 그것은 아이에게 자신이 원하는 사람으로 발달해가게 한다.

"트랜드젠더 아이데게 자신이 느끼는 정체성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고 권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적어도 처음에는 그렇다. 반대로 부모와 형제, 교사, 또래는 아이가 다른 젠더의 모습과 버릇을 내비칠 때마다 불쾌해한다. 그들은 그런 아이를 처벌하고 조롱하고 훈계하고 괴롭히고 추방한다. 이렇게 강한 적대감에도 불구하고, 트랜드젠더 아이는 자신이 느낀 정체성에 따라 완강하게 발달해가는데, 이것은 그들의 젠더를 만드는 것이 환경이 아님을 보여준다. 젠더를 만드는 것은 아이 자신이다."

저자는 강간이 적응이라는 견해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항상 오리나 오랑우탄처럼 강압적 교미를 하는 소수의 동물을 불러내지만 진화의 논리를 바탕으로 생각한다면, 강압적 교미를 하는 사례가 왜 이 동물들뿐일까 하는 의문이 든다고 말한다. 강간이 그토록 훌륭한 수정 기술이라면, 왜 그토록 희귀하며, 강압적 교미가 자연에 만연해야 마땅할 텐테, 실제로 그렇지 않다. 저자는 가장 가까운 우리 영장류에게서는 강간 적응의 징후를 전혀 찾아볼 수 없으며, 우리 조상이 진화한 조건에서 강간은 절대로 현명한 행동이 될 수 없었다고 이야기한다. 오늘날의 거대한 사회에서 익명성은 가해자의 위험을 어즈 정도 줄여주지만, 여전히 강간이 일어난다고 해서 강간이 자연스러운 것은 아니다. 뿐만 아니라 저자는 강간이라는 행동을 용납하지 않는 문화를 만들기 위해서 여성이 할 수 있는 일에 초점을 맞추는 대신에, 우리가 소년들에게 무엇을 가르쳐야 할지, 그리고 어떤 종류의 모델을 제시해야 할지 고민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다.

"자연 선택이 강간을 선호하려면, 두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첫째, 이러한 행동을 하는 남성은 그를 성적 포식자로 변화시키는 특별한 유전적 조성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둘째, 강간범은 자신의 유전자를 널리 퍼뜨려야 한다. 하지만 두 가지 조건 모두 충족된다는 증거가 전혀 없다. 게다가 생식이 목적이라면, 남성은 생식 연령 범위에서 벗어나는 소녀나 여성을 강간해서는 안 된다. 또한 동의하에 성관계를 가질 수 있는 연인과 아내를 강간해서도 안 되고, 소년과 남성을 강간해서도 안 된다. 그런데도 그들은 이런 사람들마저 강간한다."

"내가 묻고 싶은 질문은 이것이다. 왜 대다수 남성은 강간을 하지 않을까? 긍정적인 것에 초점을 맞추고, 어떻게 하면 이 다수를 늘릴 수 있을지 생각하자. 교육이 중요한데, 특히 성차를 인정하는 교육이 중요하다.(...)

영장류와 사람의 행동에 관한 위의 설명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게 있다면, 그것은 아들은 폭력적 성향이 강한 쪽으로 자라기 쉽다는 사실이다. 아들은 또한 딸보다 훨씬 큰 신체적 힘을 갖게 된다. 모든 사회는 문제를 일으킬 소지가 있는 이 이중적 잠재력을 이해하고, 젊은 남성을 교화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소년들은 더 이상 전사가 되는 경우가 거의 없기 때문에, 사회는 그들의 공격적 충동을 건설적으로 배출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할 필요가 어느 때보다 커졌다. 이 충동은 대단한 성취를 낳을 수도 있고 나쁜 행동을 낳을 수도 있다. 소년들을 남용의 원천이 아니라 힘의 원천이 되도록 만들려면, 그들이 자신의 젠더에 맞는 감정적 기술과 태도를 습득하도록 해야 한다. 소년들은 힘에는 책임이 따른다는 사실을 배워야 한다. 우리는 소년들이 자제력과 명예심, 여성에 대한 존중심을 키우길 바란다.

그리고 그것을 작은 일로 취급할 게 아니라, 남성다움의 핵심으로 취급해야 한다."

저자는 다른 영장류에서는 양성이 모두 기민하게 권력을 행사하며, 암컷의 지도력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고 말한다. 또한, 수컷이 암컷들 사이의 위계에 관여하는 것처럼 암컷도 수컷들 사이의 위계에 관여한다. 게다가 성별에 관계없이 우두머리에 해당하는 많은 알파는 서열 이외의 다른 것에도 많이 신경 쓴다. 그들은 약자를 보호하고, 분쟁을 해결하고, 고통받는 당사자를 위로하고, 화해를 돕고, 안정을 추구한다.

저자는 동성애 행동이 어떻게 진화할 수 있었는지 궁금해하는 것은 잘못된 접근법이라고 말한다. 그런 접근법은 우리가 사람의 실제 행동뿐만 아니라 유전학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으로 뒷받침되지 않는 의심스러운 이분법을 옳다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저자는 더 나은 질문은 사람과 다른 동물이 생식으로 이어지지 않는 성적 활동을 자주 한다는 사실에 놀랄 필요가 있는가 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진화론은 그런 성적 가능성을 당연히 허용한다. 저자는 신체와 감각이 다목적용으로 쓰이는 경우가 많다면, 행동 역시 그럴 것이라고 말한다. 그 원래 기능은 그것이 일상생활에서 어떻게 쓰일지 늘 알려주는 것은 아닌데, 행동은 '동기의 자율성'을 즐기기 때문이다. 저자는 사람과 다른 동물의 동성 섹스는 많은 유사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장 큰 차이점은 성적 행동과 지향성을 나누고 라벨을 사용해 낙인을 찍는 우리의 경향이라고 이야기한다. 동성애에 대한 불관용은 이러한 낙인찍기에서 비롯된다. 다른 영장류들이 구성원을 다수에 순응하는지 살피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태도가 마음에 든다는 저자의 글에 공감한다.

"동기의 자율성은 성 충동을 생식 능력이 없는 젠더 조합에도 적용할 수 있게 해준다. 그것은 사회생활의 다른 실체와 자유롭게 짝을 맺을 수도 있는데, 그 짝은 바로 동성 간 유대이다. 모든 영장류에서 젊은 수컷은 놀이 상대로 수컷을 찾고, 젊은 암컷은 암컷을 찾는다. 이렇게 성적으로 분리된 사회적 영역들이 생겨나 어른이 될 때까지 지속된다. 이 영역들은 큰 만족과 즐거움을 주며, 가끔은 섹슈얼리티로 흘러가기도 한다. 인간 사회에서 선명하게 구별되는 사회적 영역과 성적 영역의 경계는 인위적인 것이다. 그것은 문화적 발명품이며, 도덕적, 종교적 경고에도 불구하고 쉽게 허물어진다.

이런 식으로 바라보면, 동성애 행동은 전혀 특이한 것이 아니다."

저자는 마음은 신성하지만, 몸은 그렇지 않다는 이원론은 본질적으로 남성적이며, 주요 관심은 사람의 마음보다는 남성의 마음에 있다고 말한다. 자신의 지성이 생물학보다 높은 수준에 있다고 굳게 믿으려 한 사람들은 항상 남성이었다. 저자는 이러한 견해는 신체가 호르몬 주기를 겪지 않는다면 주장하기 더 쉽다고 이야기한다. 여성의 몸은 피를 흘리는데, 남성은 전통적으로 이를 혐오스럽고 '불순한' 것으로 묘사해왔다. 대대로 남성은 육체(약함)와 감정(비합리적), 여성(유치함), 동물(멍청함)과 거리를 두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저자는 남성이 여성과 동물만큼 자신의 몸과 긴밀하게 연결돼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러한 대비는 완전한 착각이라고 강조한다. 마음과 뇌와 몸은 하나다. 비물질적인 마음은 존재하지 않는다.

"서양 종교와 철학은 전통적으로 우리를 자연과 연결시키는 대신에 자연과 대척점에 서 있는 존재로 정의했다. 우리는 자신의 위치를 짐승보다 높고 천사보다 가까운 곳에 놓길 좋아하기 때문에, 자신의 신체를 매우 억울하게 여긴다. 신체는 우리의 비천한 기원을 너무 많이 상기시키고, 제어할 수 없는 성욕과 필요, 질병, 감정으로 날마다 우리를 귀찮게 한다."

저자는 다양한 배경을 가진 여성과 남성, 아이들의 이러한 혼합은 적어도 삶을 흥미롭게 만든다고 말한다. 하지만 저자는 또한 우리가 여기서 큰 즐거움을 얻는다고 믿는다고 이야기한다. 저자가 항상 생물학적 성이 별로 중요하지 않은 젠더 중립적 사회를 요구하는 목소리에 놀라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이 주장의 기본 개념은 다른 성이 없거나 적어도 그것에 관심을 덜 기울이면 더 나은 세상이 되리란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이 목표는 비현실적일 뿐만 아니라 잘못된 이해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고 말한다. 문제는 성이나 젠저의 존재가 아니라, 그와 관련된 편견과 불평등, 그리고 우리 사이에서 일부 사람들을 배제하는 전통적 이분법의 한계에 있다는 저자의 글이 인상적이다.

"사회는 모든 젠더 표현을 인정하지 않고, 모든 성적 지향성을 받아들이지 않으며, 모든 젠더를 동등하게 대우하지 않는다. 나는 이러한 문제들은 매우 심각하고 부인할 수 없는 것이며, 우리가 해결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데 동의한다. 하지만 오래된 성 구분 자체를 비난하기보다는 더 깊은 문제인 사회적 편견과 불공정을 해결하는 데 더 힘을 기울여야 한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는 유전자와 환경 사이의 상호 작용이 반영돼 있다. 생물학은 방정식의 절반에 불과하기 때문에, 언제든지 변화가 일어날 수 있다. 사람의 행동 중에서 엄밀하게 사전 프로그래밍된 것은 거의 없다.

나는 생물학자이지만 인간 문화의 힘을 굳게 믿는다. 나는 젠더 관계가 나라마다 얼마나 다른지 직접 경험했다. 일정한 한계 내에서 젠더 관계는 교육과 사회적 압력, 관습, 본보기에 영향을 받는다. 심지어 변하지 않을 것처럼 보이는 젠더의 몇몇 측면조차도, 한 젠더에게서 다른 젠더와 동일한 권리와 기회를 박탈할 핑계가 되지 않는다. 나는 젠저 사이에 정신적 우월성이나 선천적 지배성이 있다는 개념을 참을 수가 없으며, 그런 개념을 버리길 희망한다.

이 모든 것은 결국 상호 사랑과 존중, 사람은 평등하기 위해 똑같을 필요가 없다는 사실의 이해해 달려 있다."




이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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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근길엔 니체, 퇴근길엔 장자 - 회사 앞 카페에서 철학자들을 만난다면?
필로소피 미디엄 지음, 박주은 옮김 / 한국경제신문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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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인의 다양한 심리에 관한 고민들을 동서양 철학자들의 깊은 사유로 풀어내어 인상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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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근길엔 니체, 퇴근길엔 장자 - 회사 앞 카페에서 철학자들을 만난다면?
필로소피 미디엄 지음, 박주은 옮김 / 한국경제신문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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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에서 독자들의 대중적 사랑을 받은 철학서인 <출근길엔 니체, 퇴근길엔 장자>는 직장인이 흔히 겪는 심리 상태인 걱정, 불안, 혐오, 부조리, 낙담, 소진, 짜증 등에 대해 샤르트르, 니체, 장자, 손자, 마르크스, 카뮈, 한비자, 하이데거, 공자 등 동서양 철학자들이 해석을 해주는 철학 교양서이자 심리 처방서다. 하나의 감정에 대해 한 명의 철학자가 자신의 사상을 중심으로 그 의미와 대안을 제시하는데, 위대한 철학자들의 관점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가 미처 생각지 못한 깊은 사유와 용기를 얻을 수 있다.



저자는 철학자 하이데거는 걱정에는 인간이 자아를 추구하고 뛰어넘을 수 있는 동력이 내재되어 있다고 생각했다고 말한다. 하이데거는 우리가 인간이기에, 즉 존재에 대한 질문을 던질 수 있기에 걱정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인간의 주된 실존 형식은 걱정을 통해 세계를 찾고, 세계와 나 사이의 관계를 찾는 것이다. 저자는 하이데거의 철학은 쉽게 포착할 수 없을 만큼 생동하는, 주어진 한계를 넘어 뛰어넘어 솟구치는, 이해 가능할지 모르나 이해 너머에 존재하는 생명이었다고 이야기한다.

"죽음은 인간에게 최대의 한계지만, 하이데거의 눈에는 빤한 일상을 깨우는 찰나의 경종이었다. 죽음은 영원히 내밀하고 독특하며 중복될 수 없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삶과 죽음의 무상함을 의식하고 나면 무리로부터 빠져나와 다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나만의 삶으로 되돌아올 수 있다.

이 말은 죽음 앞에서 자기 존재에 대해 물을 수만 있다면 빤한 일상으로부터 평생 벗어나 살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 죽음을 대면하는 일은 우리가 기대어 있던 일상으로부터 우리를 잠시 떼어내줄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일순간의 분리가 누군가에게 사색을 지속하는 역량을 주고, 잠시나마 자아초월의 가능성을 엿보게 할 뿐이다. 찰나의 도약으로나마 초월의 가능성을 엿본 사람은 다시금 현실의 타성에 젖는다해도, 천천히 방향을 틀어 결국에는 마음이 향하는 곳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된다."

저자는 카뮈는 우리가 부조리의 본질을 이해할 때 세상 만물에 특별한 존재 이유가 없다는 것을 의식하게 된다는 것을 전한다. 그 어떤 가치나 의의에 대해 절대성을 긍정할 수 없게 되면, 이 세계에 가치를 부여하고자 하는 시도 또한 그 중요성을 잃고 만다. 그리고 저자는 출근이 지긋지긋한 모든 직장인은 정장을 입은 현대의 시시포스인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무의미한 일이라는 돌을 매일매일 밀어 올리는 고달픈 과정에서 오는 무력감은 그저 참고 견뎌내야 하는 것이다. 그러자 저자는 병이 났다는 것을 쉬어야 할 때라는 신호이듯, 부조리감은 삶을 돌아봐야 하 때라는 것을 일깨워준다고 이야기한다.

"무력하기 그지없는 우리에게 이 세계가 돌려주는 대답은 침묵뿐이다. 이미 일어난 일에는 아무런 이유가 없다. 그 일은 그냥 그렇게 발생했을 뿐이고, 우리는 무력하게 하늘을 향해 "왜?"라고 외칠 뿐이다.

카뮈는 인간이 이렇게 세상의 침묵과 대면할 때, 모든 일은 순전히 우연에 지나지 않음을 의식할 때 모종의 향수를 느끼게 된다고 말한다. 이성적 존재인 인간은 이성으로 파악 가능한 세계에서 살아가는 데 익숙하다. 하지만 자신의 삶에서 이성적 원칙이나 질서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났을 때, 세상은 본래 혼돈으로 가득 차 있고 이성적 예측에 따라 돌아가지 않음을 발견하고 상실감과 부조리를 느끼게 된다.

카뮈는 부조리가 인간 혹은 세계 내에 존재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인간은 이 세계를 이성으로 길들일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지만, 세계는 결코 인간의 이성적 요구를 만족시켜주지 않는다. 이렇게 인간과 세계 사이의 '밀당'에서 생겨나는 불협화음은 둘 사이의 관계를 잇는 유일한 끈이 된다. 즉 부조리 자체가 곧 인간과 세계 사이의 관계다."

"부조리를 이해한 인간은 이러한 사회적 지침을 투사해서 상상한 미래를 위해 살아가지 않는다. 그 미래가 아무리 그럴듯해 보여도 죽음, 그리고 지금 이 순간의 진실을 뛰어넘을 순 없기 때문이다. 이로써 그는 미래에 대한 환상으로부터 해방된다. 누구도 죽음이라는 마지막 운명으로부터 벗어날 수는 없다는 사실을 의식할 때, 모든 규범은 더 이상 절대적 구속력을 갖지 못한다. 이렇듯 외적으로 부여된 가치에 대해 무심한 태도를 취함으로써 우리는 행동의 자유를 얻고, 자기 삶의 경험을 새롭게 정의할 수 있다."

"모든 외재적 가치는 이성의 산물이다. 거기엔 아무런 절대적, 고정적 이유가 없다. 부조리는 똑바로 서서 정면으로 마주해야 한다. 인간의 공통된 운명은 죽음뿐이라는 것을 깨달을 때, 비로소 자신의 삶을 깊이 들여다보게 되고, 사회적 기대라는 속박을 떨쳐낼 수 있게 된다. 시시포스와 마찬가지로 반항 자체가 우리를 삶의 부조리에서 벗어나게 하진 못하지만, 우리로 하여금 내면의 자유를 의식하고 삶에 우리가 소망하는 가치를 부여할 수 있도록 한다. 바로 이것이 삶에 대한 열정, 뜨거운 애정의 표현이다."

저자는 순자는 우리가 사물을 인식할 수 있는 것은 마음이 외부 세계의 정보를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 것을 전한다. 외부 세계의 정보를 받아들이는 능력과 행동을 '담아둔다'고 한다. 사람은 태어나면서도 지각 능력이 있기에 외부 세계의 정보를 받아들이고, 받아들인 다음에는 기억하고 담아둔다. 그 정보는 마음속에 내화되어,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느냐에 영향을 미친다. 저자는 우리가 '먼저 접한 것'들로 인해 새롱누 정보를 받아들이기를 배척하거나, 먼저 접한 정보와 다르면 대뜸 들린 것으로 간주하고 이해하려 들지 않는다면, 폐쇄된 자아회로 안에 갇혀 지적 오만이 생기고 인식의 편향만 굳어진다고 이야기한다. 순자는 다음과 같이 편견을 경계해야 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며, 마음속의 아집과 폐해를 벗겨냄으로써 정서적 혼란과 편견으로부터 벗어나도록 돕는것이 중요하며 허, 즉 망ㅁ을 비우는 태도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사람의 마음은 욕망으로 가려지고, 악으로 가려지고, 시작으로 가려지고, 끝으로 가려지고, 멀어서 가려지고, 가까워서 가려지고, 넓어서 가려지고, 얕아서 가려지고, 오랜 것으로 가려지고, 지금이어서 가려진다. 만물의 다름은 이렇듯 상대를 가려 어둡게 한다. 이는 마음 다스리는 공부의 공통된 근심이다.

<출근길엔 니체, 퇴근길엔 장자>는 직장생활을 하면서 번아웃 상태에 빠졌거나, 일의 의미를 찾지 못해 방황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인간의 심리적 문제들을 철학적 관점을 통해 접근할 수 있도록 하여 현실적인 문제들에 대한 사고의 전환을 일으킬 수 있는 책으로 흥미롭다.



이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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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집 오르는 마음 - 근심을 털어내고 걸음을 늦춰 나를 찾아가는 시간
최예선 지음 / 앤의서재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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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집을 오르며 만나는 삶에 대한 이야기가 인상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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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집 오르는 마음 - 근심을 털어내고 걸음을 늦춰 나를 찾아가는 시간
최예선 지음 / 앤의서재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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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집 오르는 마음>은 오랫동안 근대 시공간과 미술의 다양한 장면들을 탐구해 온 예술 칼럼니스트 최예선 작가가 시간과 사연을 품고 곱게 늙어가는 절집 열일곱 곳을 넑고 싶게 순례하며 발견한 사려 깊은 이야기를 담은 인문 도서이다. 저자는 청량한 숲과 바람소리, 물소리에 감응하고, 오랜 시간 자리를 지키며 유장한 세월을 담아낸 불전과 불화의 장엄함에 감탄하며 숱한 절집을 오르면서 절집이 이토록 아름다운 건 비단 불세계의 깊은 미의식과 철학 때문만이 아니라 수백, 수천 년의 시간 동안 오른 사람들의 간절한 기도와 선한 마음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과거부터 이어져 온 적층의 시간들, 소소한 듯 보이지만 곱씹을수록 가슴 깊이 스미는 예술 칼럼니스트 최예선의 절집 이야기를 읽어 내려가다 보면, 어느새 걸음을 늦추고 귀를 기울이며 나의 내면을 응시하는 나를 보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근심을 털어내고 결국은 내 마음을 살피고 헤아리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절집 오르는 마음>은 열일곱 곳의 사찰과 몇몇 암자들, 고대의 폐사지들을 다녀온 기록을 포행, 친견, 합장이라는 장으로 묶었다. 이 여정은 그동안 내가 절집을 들여다본 과정과도 일치한다. 절집에 재미를 들이고 조금씩 다가가는 과정이 '포행 - 뜻을 구하는 마음'에 담겼고, 안동, 경주, 남도의 사찰들과 통도사 일대 등 절집을 넓고 싶게 순례하면서 발견한 사려 깊은 이야기들을 '친견 - 깊이 바라보는 마음'에서 풀어냈다. '합장 - 하나로 이어지는 마음'에서는 지금 이 순간 삶과 이웃을 고민하는 우리들과 나누고 싶은 절집의 이야기를 묶었다. 무엇보다 걷기의 소중함, 오래된 것들의 미덕, 고요하고 사려 깊은 아름다움을 나누고 싶었다. 절집의 구석구석을 미세하게 들여다보는 돋보기이자, 궁극의 세계를 상상하는 만화경으로 이 책 <절집 오르는 마음>이 존재했으면 좋겠다."



저자는 해인사의 계단을 오르는 동안 몸은 중력을 거스르는 과정을 겪고 시각적으로도 점점 열리며 새로운 공간들이 감지된다고 말한다. 한 세계를 닫고 다른 세계를 여는 그 열고 닫음의 과정을 신체적으로 감각하게 되는 것이야말로 해인사의 특별함이라는 저자의 글이 눈길을 끈다.

"나는 산사 하면 해인사가 가장 먼저 생각나는데, 그 이유도 역시 건축이다. 경사지에 단차를 두고 네 개의 공간이 배치된 가람 구조를 온몸으로 경험하면서 걷다 보면, 몸이 상승하면서 감정도 함께 고양하는 것을 느낄 수가 있다.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장경판전의 압도적인 규모와 단순함에는 설명할 수 없는 힘과 아름다움이 존재한다.

사찰에서는 불전만큼이나 문과 계단도 살펴야 할 요소다. 문과 계단은 공간의 위계를 정립하는 건축언이다. 높은 경사지에서 자리한 해인사는 계단과 문이 이 감각을 더욱 극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경사를 올라 문을 통과하면서 다음 단계의 불전으로 향하는 것이다."

저자는 미왕사에서 푸른 하늘에 노란색이 번지고 붉은 선으로 경계가 생겼다가 연분홍으로 바뀌는 낙조를 바라보며 모든 색깔이 하나씩 드러난 뒤에야 모든 빛이 경계를 잃고 흐릿해진다고 말한다. 저자는 절집에서 어떤 과정도 수월하게 빨리 지나가지 않고 너무는 태양도 제 속도에 맞춰 차근차근 움직였다고 이야기한다.

"극락정토에서 왕생하기 위한 수행법 중에 '일몰관'이라는 게 있다. 지평선 너머로 사라지는 태양을 침묵하며 관조하는 일이다. 해가 떨어지고 어둠이 찾아오면 환한 빛 아래에서 경험한 현상들, 그 차별적인 세계는 사라지고 만다. 어둠 속에서 마음은 높고 낮음, 그 어떤 차별심도 없는 적멸의 세계로 들어간다. 감각을 통해 감각을 사라지게 하는 방식이다.

불교에서는 아미타불의 극락세계가 그런 곳이라고 말한다. 감각에 의존하지 않은 채로 정신이 깨어나는 세계. 그러므로 서방정토는 어둠의 세계가 아니라 맑고 투명한 세계라고 말이다."

저자는 불교에서는 부처님을 대면할 때 친견이라는 말을 쓰며, 부처님뿐 아니라 진신사리를 친견하기도 하고, 이름 높은 스님을 친견하기도 하고, 좋은 의미를 담은 사물들을 친견하기도 한다고 말한다. 친견은 보는 것을 넘어 교류의 표현이며, 면 대 면으로 만나는 것, 신체의 감각을 활용하되, 자신의 의지와 마음을 다해 보는 것이다. 저자는 보고 난 후에 분명 변화가 생기며, 삶과 행동에 변화가 없다면 친견은 의미가 없다고 이야기한다. 뿐만 아니라 저자는 제비원 석불을 바라보며 설명할 수 없는 기이함과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었다고 전한다.

"석불은 가까워질수록 분위기가 달라진다. 팔다리는 점점 힘차고 두꺼워졌으며 단단한 어깨가 믿음직스럽다. 해탈을 향한 자의 모습이라기보다는 이 지역을 수호하는 호법신처럼 든든한 존재로 다가왔다. 석불은 이 마을의 수호신으로 자리하며 누구에게나 똑같은 복과 안녕을 전해주는 그런 존재였을지도 모른다."

"절집을 오르다 보니 많은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 비슷비슷하던 절집들도 제각각 다른 특징들이 있었고, 사찰마다 모신 부처님이 의미하는 바도 조금씩 달랐다. 저 먼 시대에 만들어진 건축물과 지금 이곳을 오르는 사람들이 시간을 초월해서 만나는 풍경이 참으로 좋았다. 절집은 오고 가는 사람들이, 그들의 바람과 염원이 만들어가는 것이구나 싶었다. 오가는 사람이 많은 절은 절답지 못하다고 일갈하는 목소리도 있더라만, 나는 그 많은 발걸음이 만들어내는 반질반질 윤기 나는 절집 세상도 흥미롭게 보였다."



법주사 청동불상 제작에 참여하면서 조각가의 길을 시작했고, 일본 무사시노 미술대학에서 조각을 공부하고 예술가로서 본격적인 활동을 펼쳤던 불교와 가까운 예술가 권진규에 대해 저자가 이야기하는 글이 인상적이다. 저자는 권진규를 마음에 담고 수도암을 찾았고, 수행과 생활이 분리되지 않는 삶은 예술가의 삶과 비슷하다고 말한다. 매일 추구하는 것과 매일 살아내야 하는 생활이 서로 아르지 않는 삶, 그런 삶을 추구하면서 우리는 매일 조금 다른 인간이 된다는 저자의 글에 공감한다.

저자는 일체의 장례의식이 없었고 시주 없이 스스로를 책임지며 수행하는 삶을 살아온 그 모습 그대로, 왔던 곳으로 돌아가게 하라는 유언을 남겼던 법정스님의 다비식을 이야기한다. 뿐만 아니라 저나느 절집 오르는 길 끝엔 우리 자신이 있으며, 두렵고 막막했던 삶의 질문들도 우리 곁에 그대로 존재한다고 말한다. 저자는 질문을 품고 나서야 비로소 날마다 죽고 다시 태어나라고, 사력을 다해 부딪혀 보라는 목소리가 들린다고 이야기한다.

"우리는 죽음 앞에서 눈물을 흘린다. 그 눈물을 떠난 사람이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한 눈물일지도 모른다. 타인의 죽음에서 우리 자신의 죽음을 보는 것이다. 내가 세상과의 연이 끊어지는 것이 두렵고 혼자 떠나야 하는 그 길이 고독하고 서러워서 우리는 울고 있다. 그는 떠나게 되어 그토록 홀가분할 터인데, 남아있는 우리는 어찌하나, 남아있는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나, 이 지독한 생을! 나는 누구이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우리는 그토록 찾아 헤매던 삶의 본질을 그제서야 벌거벗은 채로 돌아보게 된다."

"천 년 전 탑을 향해 사람들이 모여들던 풍경이 오늘 길상사에서 그대로 이어진다. 세상은 달라졌지만 마음과 바람은 그때와 다를 바가 없다. 모두의 합장한 손, 그리고 둥글게 걷는 걸음, 나는 간절히 모은 두 손의 따뜻한 기운을 느꼈다. 합장은 마음의 경건함과 한결같음을 뜻하는 손짓이다.

나는 모은 손을 가만히 내려다보며 이것이야말로 손의 가장 적합한 역할이 아닌가 생각했다. 두 손을 모아 따뜻함을 느끼고 서로 손을 맞잡고 누군가를 품에 안으라고, 손은 생겨난 것이다. 내 손도 그렇게 쓰고 싶다. 두 손을 모으며 내 마음이 궁극적으로 향하는 곳은 사랑과 신과 자연이라고 생각했다. 앞으로 더더욱 추구해야 할 것도 그것이라고.

그것 말고 달리 무엇이 있겠는가."



이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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